갈마(역사)

▩이 책들을 보라,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개마두리 2013. 5. 14. 22:57

- 등록 : 2013.05.14

 

[창간기획] 전쟁과 평화

 

(상) 전쟁 10년 후, 이라크를 가다

 

- 미군이 폭격한 국립도서관

 

- 고대문명 희귀본 3000권 등이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 전쟁 뒤 복원작업은 계속되지만 예산도 전력도 턱없이 부족

 

- 10년 흘렀어도 끝이 안 보인다

 

창간25주년 기획

 

이라크 국립도서관이 있는 바그다드의 무타나비 거리는 이라크의 지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 모인 출판사와 서점들은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여기서 생산된 책들은 아랍은 물론 멀리 유럽과 아시아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사아드 이스칸다르 박사가 돌아왔을 때 거리에는 찢겨진 책장과 인쇄용지 더미가 나뒹굴고 있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상처였다.

 

그를 더욱 황당하게 만든 것은 미군들의 태도였다. 미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도서관 앞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해 경비에 나섰지만, 약탈꾼들이 도서관에 난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1954년 ‘전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헤이그 협약’에 따르면, 무력충돌이 벌어졌을 때 당사자들은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미국은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아서인지 약탈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이스칸다르 박사는 사서들과 함께 피해 상황을 파악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000여권의 희귀본이 소실되거나 약탈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역사 관련 서적의 60%, 기타 자료의 25%가 훼손됐다.

 

남아 있는 책들도 상태가 엉망이었다. 특히 폭격으로 수도관이 파괴되는 바람에 서가에 보관된 많은 책들이 물에 젖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궁리 끝에 이스칸다르 박사는 냉장고를 찾아 나섰다. 물에 젖은 책들에 곰팡이가 피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복원 작업은 전쟁이 끝난 뒤에나 생각해 볼 일이었다. 다행히 사담 후세인 측근들의 전용 연회장에서 버려진 대형 냉장고를 찾아냈다. 공습으로 전기가 끊겨 냉장고를 24시간 내내 가동하기 위한 발전기도 마련했다.

 

사아드 이스칸다르 이라크 국립도서관장이 7일(현지시각) 훼손된 책을 복원하는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이스칸다르 박사는 “아이티(IT) 강국인 한국이 도서관 복원을 지원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스칸다르 박사는 뜻밖의 난관에 부닥쳤다. 테러 단체들이 “도서관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영리해지는 걸 두려워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선동에 잘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죠.” 테러 단체들은 주변 건물의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해 도서관을 향해 총질을 해대는가 하면, 사서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 납치된 사서들을 구하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이기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사서들의 시신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모두 7명의 직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직원들은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죠.” 이스칸다르 박사는 “도서관을 지키지 못하면 이라크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스칸다르 박사는 취재진을 한 밀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물에 젖어 심하게 훼손된 책이 보관돼 있었다. 수천년의 인류 역사를 대대로 전하며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희귀본들이 새까만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이스칸다르 박사는 “이곳에 올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절실히 느낀다”고 말했다.

 

이라크 국립도서관의 복원 작업은 세계 역사학계의 각별한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다. 도서관 파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과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 체코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국은 훼손된 기록물을 복구하는 기술을, 일본은 첨단 제지술로 만든 종이를, 영국은 과거 이라크에서 약탈한 자료를 이용한 고증과 음성기록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 정부는 전자도서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기술은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스칸다르 박사는 정보기술(IT) 분야의 강국인 한국이 전자도서관 관련 기술을 지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복원 작업도 순탄치만은 않다. 무엇보다 예산이 부족하다. 또한 이라크의 열악한 전력 사정도 발목을 잡고 있다. 하루에도 10차례 이상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복원 작업이 자주 중단된다. 특히 훼손된 책을 원상태로 복원하는 작업은 정밀한 기술과 함께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데, 시도 때도 없는 단전으로 작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취재진이 도서관에 머문 동안에도 수차례 전기가 나갔다.

 

이스칸다르 박사는 이라크 국립도서관의 복원에 전세계가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책은 소외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지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전쟁은 무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중한 문화유산도 파괴하기 때문에 인류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덧붙였다.

 

- 바그다드/글·사진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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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상처, 국립도서관·국립박물관·바빌론 유적지

 

- 미군기지 세운다고 유적 훼손

 

- 박물관 유물은 1만5천점 도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는 바빌론 유적지와 이라크 국립박물관도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5일(현지시각) 찾은 바빌론 유적지는 현지인들만 눈에 띌 뿐 외국인 관광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팔라흐 압둘하디 박물관장은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최근 종파분쟁에 따른 테러 소식으로 미국과 유럽인 관광객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미군은 2003년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 떨어진 이곳에 군사기지 ‘알파’를 세웠다. 바벨탑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한 바빌론 유적지가 이라크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압둘하디 박물관장은 “사담 후세인 군대나 테러리스트들이 이라크의 자랑인 바빌론 유적지를 차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의 판단은 적중했다. 이라크 전쟁 기간에 이곳에는 포탄은 물론 단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위대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바빌론 유적지. 미군은 이라크 전쟁 기간 이곳에 군사기지를 세워 고고학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빌론 유적지는 심하게 훼손됐다. 미군이 이곳에 참호를 파고 헬기 이착륙장을 짓느라 유적지를 깎아내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압둘하디 관장은 “미군의 대형 중장비가 지나다닌 곳은 바빌론 제국의 유물이 매장된 곳인데, 땅이 마치 포장을 한 것처럼 평평하고 단단하게 다져지는 바람에 발굴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국국립박물관은 2008년 “미군들이 바빌론 유적지의 상징인 이슈타르 대문의 용이 새겨진 벽돌을 빼내려는 바람에 벽의 일부가 훼손됐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현재 바빌론박물관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남긴 흔적을 지우느라 분주하다. 후세인은 1979년 집권하자마자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대대적인 유적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추진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철저한 고증은 생략한 채 콘크리트만 잔뜩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는 바빌론 유적지를 내려다보는 명당에 지어진 후세인 궁전은 박물관으로 개조해 보존하기로 했다. 오욕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다. 나우팔 아부라기프 문화부 대변인은 “후세인 별장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많지만,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 때 역사학계가 가장 크게 걱정했던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아직도 일반인들의 관람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전쟁통에 많은 유물들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유물들에 대한 기록도 대부분 사라져 분류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복원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30개 전시관 가운데 고작 5개만 개관 준비가 끝났다고 박물관 쪽은 밝혔다.

 

이라크 정부는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전체 유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1만5000점이 약탈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왕들의 명판에서부터 도자기, 테라코타에 이르기까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유물들이다. 미군은 국립박물관에 약탈꾼들이 들이닥칠 때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압둘하디 박물관장은 “미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낸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고대 문화유적을 소홀히 다룬 것은 역사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 바빌/글·사진 이춘재 기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587405.html

 

-『한겨레』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