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로 양극화된 만주족 가운데, 중국 전체를 다스린 쪽(그러니까 만주를 떠나서 한족漢族의 땅으로 건너와 지배자가 된 만주족 - 옮긴이)은 그 위세가 지나쳐 피정복자인 한족에게 동화되어 민족 소멸을 겪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넘어 남쪽으로 가지 않고 - 옮긴이) 자기 땅에서 오랜 전통을 고수하던 만주족은 독립된 민족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언어도 거의 상실하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단, 만주에 남아 있는 만주족만 살아남은 건 아니다. 청나라가 위구르족의 땅, 그러니까 오늘날의 동東 투르키스탄을 점령할 때, 청나라 군인으로서 그곳으로 건너가 뿌리를 내린 만주족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늘날에도 만주어를 비롯한 만주족의 문화를 지키며 살고 있다 - 옮긴이).
신앙서사시를 지키고 영웅서사시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민족 주체성을 수호하는 힘든 투쟁이 되었다. 만주어 무가(巫歌. 무속인의 노래 - 옮긴이)를 노래하는 것 자체가 가장 신령스러운 과업이 되었다(18년 전부터, 만주족 사이에서 “만주어를 되살리자.”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옮긴이).
만주족은 다른 민족(예컨대 연해주의 원주민들/뵈족/위구르인/몽골인/묘족[苗族]/한족 - 옮긴이)과의 관계에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중원을 정복하고 다른 민족을 복속시켜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가해자의 위력을 최대한 보이다가 자기 민족을 상실하게 되었다. 제국 건설 전후의 오랜 동안 한족의 위세에 눌려 피해자 노릇을 하다가, 소수민족의 위치를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다른 일면에서는 민족서사시를 보존해서 주체성 인식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노력이 무척 힘겹다. 가해자 노릇을 하면서 자기네 민족문화를 스스로 파괴한(한족漢族 땅에 살면서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결국 자기 말을 비롯한 자신의 문화를 잃고 만 - 옮긴이) 피해가 피해자의 자각과 소생을 더욱 어렵게 한다.
북경(北京)에 가서 청나라 궁전(자금성/고궁 - 옮긴이)을 구경하면서, 나는 역사상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을 한 증거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심양(瀋陽. 중국 요령성에 있는 도시 - 옮긴이)에 도읍한 만주족의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관문.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을 나눈다 - 옮긴이)을 국경으로 고정시키고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았더라면, 자기 민족국가를 보존해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중국 안에 들어가 있어 소수민족으로 취급되는 다른 여러 민족(예컨대 묘족이나 위구르인 - 옮긴이) 또한 민족국가를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청나라가 자기 민족을 소멸시키고 다른 여러 민족도 독립을 잃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죄는 무력이 강성한 데 있었다. 무력이 강성해도 남을 침공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슬기로운 일이다. 강희(康熙)나 건륭(乾隆) 같은 인물(둘 다 청나라의 황제다 - 옮긴이)이 그 경지에 이르러야 영주(英主)라고 할 만한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 조동일,『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192 ~ 193쪽
* 구비서사시 :
비석(碑)에 새긴 것처럼 입(口), 그러니까 말로 오랫동안 내려온 노래나 시(詩). 영웅의 이야기나, 역사적인 일이나, 신화/전설/종교적인 내용,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을 담은 것이 많다. 지은이가 분명하지 않고, 오랫동안 내려오다가 나중에야 사람들이 글로 써서 보존했다.
* 조동일 :
서기 1939년에 태어났다. 서기 1966년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서기 1976년 문학박사 학위를 땄다. 서울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지은 책으로는『한국문학통사』,『동아시아 문학사 비교론』,『세계문학의 허실』,『우리 학문의 길』,『인문 학문의 사명』이 있다.
# 출처 :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조동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서기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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