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기사
- 입력 : 2015.09.19.
- [한겨레] 서경식 교수가 바라본 일본 안보법제 개정
- 사회를 집어삼긴 ‘안락 전체주의’
- ‘심혈을 기울인 타자 인식’의 실종
- 일본 근대사는 이렇게 귀환하는가
이 글은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가 <겐다이 시소(현대사상)> 10월 임시증간호에 실은 글을 한승동 <한겨레> 문화부 선임기자가 번역한 것이다. <현대사상>에 사전에 양해를 구해 게재한다. 일본 아베 정권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뼈대로 한 안보법제 제·개정안을 통과시키 전에 쓴 것이지만 통과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_편집자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오후, 나는 근무지 연구실에 있었다. 그때 돌연 확성기 방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원, 신속하게 연구실이나 교실을 나와 안마당 쪽에 집결해 주세요.”
무슨 일인가 하고 창 바깥을 보니 교직원과 학생들이 속속 건물에서 나와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하던 일을 마저 하려 했다. 공중에서 항공기 폭음이 들려왔다. 교내방송이 기계적인 소리를 반복했다.
“모두 신속히 모여 주세요. 지금 하치오지(八王子, 도쿄도 서쪽 근교 다마지구 중심도시) 방면에서 ○○부대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부대라니?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몇 년 전에 졸업한 학생이 서 있었다.
“오, G군 아닌가. 어쩐 일로?”
G군은 표정 없이 선 채로 “선생님, 저와 동행해 주시죠”라고만 했다.
보아하니 그는 갈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G군은 키가 컸으나 심약해 뵐 정도로 여린 성격이었다. 서양미술을 좋아해서 내가 미술관에 가자고 하면 기꺼이 따라왔다. 그랬던 그에겐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동행이라니, 어디로?”
하고 묻자,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명령에 따라, 거기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G군에 팔을 이끌려 문밖으로 나오자 쇠녹빛 금속으로 뒤덮인 호송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나는 깨달았다. 1930년대 독일 유대인의 운명을 지금 나 자신이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수업시간에 얘기한 그 역사를 G군도 진지하게 공부했는데.
- 이것은 지난 16년 정도 전부터, 즉 ‘기미가요 · 히노마루 법제화’ 이후 이따금 내 뇌리에 떠올랐던 망상이다.
▶ “힘내라, 닛뽄!”…동일본 대지진 이후 찾아온 파시즘 공포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충격파가 덮쳤을 때 나는 재직학교 교수회에 참석 중이었다. 긴급방송 지시에 따라 건물을 나와 안마당으로 대피했다. 그때 건물에서 줄지어 나오는 학생과 동료 교수들 모습을 지켜보면서 심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저 낯익은 망상의 한 장면이었다.
‘3·11’ 직후부터 밤낮없이 집요하게 흘러나오는 “힘내라, 닛뽄(일본)!”이라는 구호를 들으면서 나는 파시즘 도래의 위기를 느꼈다.
지진과 쓰나미는 천재다. 그러나 원전사고는 명백한 인재였다. 게다가 피해자는 일본국민만이 아니다. 외국인도, 미래의 사람들도, 지구환경 그 자체도 수습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즉 원전사고는 ‘피해 이야기’로만 운위될 수는 없는, 명백한 ‘가해’인 것이다.
그런 인식이 일본국 관민들에게 있을까? 그게 있다면 어떻게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내향적인 이야기로 시종일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들의 위로, 자신들의 ‘부흥’만을 강조할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전후 일본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3·11’ 뒤, ‘포스트 3·11’이라는 말이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이런 정도의 재난을 경험한 이상 이윤추구나 대량소비를 지상가치로 삼는 문명관이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야 할 것이며,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가치관도 개인의 삶의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원자력 마피아’로 대표되는 정·관·재·학(政·官·財·學)에 미디어까지 포함한 유착과 상호의존, 무책임 구조와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가 제기됐다. ‘재생’이 아니라 ‘갱생’이 요구됐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가해 책임은 오늘날까지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아베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일본의 원전기술”을 선전하며 원전 수출에 매진했고, 전 세계를 향해 ‘언더 컨트롤(제어 가능 상태)’이라는 허언을 농하며 도쿄 올림픽을 유치했다. 국민 다수가 이것이 허언이라는 걸 알면서 갈채를 보낸 것이다. 일찍이 “군부에게 속았다”고 했던 일본국민들은 지금은 자진해서 속는 쪽을 택하고 있다.
때마침 며칠 전 가고시마 현의 센다이(川内) 원전이, 사고가 일어날 경우 주민 대피계획도 불완전하고 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재가동에 들어갔다. 역사는 조용히 되풀이되고 있다.
▶ 후지타 쇼조, 이럴 때 그라면 어떻게 얘기할까
이럴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얘기할까. 일찍이 지기를 얻은 존경하는 몇 분의 선인(先人)들을 나는 떠올렸다. 철학자 고자이 요시시게(古在由重), 이와나미 서점 사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그리고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가 그들이다.
후지타 쇼조 선생(이하 경칭 생략)이 쓴 ‘소나무에게 물어보라’라는 글이 있다. 1982년에 사회문화연구회라는 작은 연구 서클에서 발표한 것으로, 이이다 다이조(飯田泰三)씨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미공간(未公刊) 텍스트다.(<후지타 쇼조 저작집 7-전후정신의 경험 1> 미스즈 서방 발간, 수록)
1963년에 노리쿠라(乗鞍) 관광도로가 개발된 것을 계기로 이 짧은 글이 쓰였다. 후지타는 이렇게 얘기한다.
-‘산’의 역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외계와 타자에 대한 수용기(受容器)가 근본적인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희생당한 생물 중에 ‘눈잣나무’가 있다. 고산의 눈바람을 견디며 딱딱하고 척박한 땅에 ‘기어가듯’ 살아 온 식물이다. 성장이 몹시 더디고, 한 번 벌채되면 재생하기 어렵다. 그 눈잣나무가 관광개발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다. 이 개발은 ‘고도성장’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편의’를 추구하며 그 이상한 팽창과정에 ‘참가’한” 것이다.-
이 일반인의 ‘참가’를 후지타는 ‘안락에의 전체주의’라고 불렀다.
후지타는 이 짧은 글을 다음과 같은 몇 줄로 맺고 있다. 나 자신, 후쿠시마 사고 직후부터 거듭 상기하면서 소개해 온 것이다.
“이 막다른 곳에 이른 위기의 시대에는, 희생자를 위한 진혼가는 자신의 귀에 기분 좋게 들리는 노래가 아니라 심혈을 기울인 타자 인식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인식으로서의 레퀴엠만이 가까스로 소생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45년까지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과 그 방사선 피해로 일단 종지부를 찍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후의 고도성장과 ‘안락 전체주의’로 형태를 바꿔 살아남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이 ‘안락 전체주의’가 파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3·11’로부터 4년 남짓 지난 지금까지 ‘희생자를 위한 진혼가’는 ‘자신이 듣기 좋은 노래’로만 불려지고, ‘심혈을 기울인 타자 인식’은 이뤄지지 못했다. 패전이 피해 민족들에 대한 사죄를 수반하지 않았듯이, ‘후쿠시마’도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 수반하지 않은 자기본위의 이야기로 시종했다. 일본사회는 또다시 패전에 필적하는 갱생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소나무에게 물어보라’에서 후지타가 얘기하는 ‘타자’는 ‘눈잣나무’로 대표되는 ‘자연’이다. 그것은 ‘자연’에서 수탈해 오는 것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적 이윤획득 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항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타자’는 ‘눈잣나무’이지만, 후지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외국인, 이성(異性), 소수자 등의 다양한 ‘타자’일 것이다. 특히 일본 근대의 사상을 문제 삼을 때 ‘타자’(아시아의 민족들) 인식의 결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視點)인데, 후지타는 그것을 지적해 온 소수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 강행 체결에 이어 고도성장 시대의 도래를 구가하며 황태자(지금의 아키히토 천황)의 결혼과 ‘미치 붐’(평민 출신으로 황태자비가 된 쇼다 미치코 현 황후에 대한 결혼 당시 일본사회의 경축 열기-역주), 도쿄 올림픽 등으로 일본사회가 끓어올랐을 때 베트남에서는 무자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 일 양국은 그때까지 14년간에 걸쳐 국교정상화 교섭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일본 쪽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 최대의 장애가 돼 교섭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런데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에 한·일 두 나라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것(일본에는 돈과 기지, 한국에는 병력을 제공하도록 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고 있던 미국이 한 · 일 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 결과, 1965년에 한 · 일 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계엄령을 발포하고 국민의 반대운동을 탄압했다. 일본은 20세기 전반기까지 식민지배했던 타자인 조선민족(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외)과 패전 20년 뒤 그렇게 재회했던 것이다.
이 타자와의 만남에서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제기한 일본 지식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다수는 한·일협정의 결과 바라지 않는 전쟁에 일본인들이 말려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차원의 인식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언제나 ‘타자’ 인식이 결락(缺落)되고, 따라서 자국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다.
▶ 식민지배와 원전사고를 대면하는 일본사회의 공통점
후쿠다 간이치(福田歓一)·이시다 다케시(石田雄)·히다카 로쿠로(日高六郎), 그리고 후지타 쇼조 네 사람이 ‘전후 민주주의의 위기와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좌담회를 했다.(<세카이(世界)> 1966년 1월호 게재, <후지타 쇼조 대화집성 1> 미스즈 서방 수록)
그 좌담회에서 히다카는 “이번의 한·일조약(협정) 체결은 정부 자민당 내부에 식민지주의적 발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국민들 가운데서도 그것이 청산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후쿠다는 “이 문제(내셔널리즘)에 대해 자신들 속에 있는 콜로니얼리즘(식민지주의)을 어디까지 파헤쳐서 처리할 수 있을지, 실로 거기에 내셔널리즘론의 중요한 시금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후지타는 “일본국 헌법의 정신은 자신의 침략전쟁에 대한 자기비판을 긍지로 삼고, 이 긍지 위에 국민적 통일을 건설하려는 세계 최초의 과제를 설정했습니다. (중략) 그 새로운 국민의식의 건설이라는 국민적 의도가 지금 여기서 일본의 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라고 했다.
나아가 후지타는 이 논의 과정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자기목표화’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라는) 주어진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 결과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목표 없는 사회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중략) 목표 없는 사회를 견뎌낼 수 없게 되자 일본의 목표를 일본 그 자체에서 찾는, 자기의 사실(自己の事実)을 목표로 삼는 도착(倒錯)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략) 그것이 지금 분출하고 있는, 국민적 자기비판 위에 선 내셔널리즘과는 정반대의 내셔널리즘이 아닐까요.”
바로 반세기 전의 이런 지적은, 지금의 상황에 비춰볼 때 점점 더 옳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면이 있다. ‘타자’(조선민족)와의 재회를 계기로 이런 ‘자기목표화’된 내셔널리즘이 분출하고, 그 뒤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자기중심주의가 고질화해 일본사회에 정착했다. 후지타, 후쿠다, 히다카, 이시다와 같은 인식은 분명 소수이긴 했지만 과거 일본사회에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안락 전체주의’에 의해 고립됐고, ‘심혈을 기울인 타자 인식’은 이뤄지지 못했다. 근대일본에서 ‘타자’는 일본 자신의 자기인식을 갱신하기 위한 비판적 참조축(參照軸)으로서가 아니라 대항적인 자기긍정이나 자기찬미를 위한 소재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해 왔다. 그 가장 추악한 도달점이 지금의 반중·혐한(反中・嫌韓)론의 횡행이다.
▶ 반중 · 혐한 … 날뛰는 ‘안락 전체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인간이 단편화됐다는 느낌이 짙어지고 있다. 그것이 ‘안락 전체주의’가 날뛰는 걸 가속시키고 있다. 간단하게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문부과학성(교육부)은 지난 6월, 전국 국립대학에 ‘교원양성계열, 인문사회과학계열 학부의 폐지나 전환’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 이유는 ‘사회적 니즈(수요)’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니즈라니? 도대체 누구의?
그것은 즉 신자유주의체제 지배층의 니즈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들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을 접해볼 기회도 얻지 못해 타자와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타자는커녕 자기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방법조차 모르는 채 성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기계화·야만화’(와타나베 가즈오 渡辺一夫)된 노동자·소비자를 대량생산하는 것이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단편화된 인간의 시야는 좁고, 시간 척도는 짧다. 따라서 ‘타자’가 보이지 않는다. 수백 년 뒤는커녕 수십 년 뒤 인류의 운명조차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事象)을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반성적으로 고찰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합리적 판단력과 역사의식이 결여된 인간은 인종, 민족, 국적, 성별, 계층이라는 속성에 따라 상대를 결정하는 일(차별),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자기 동일시를 해서 타자를 일률적으로 적대시하는 일(전쟁)에 재주를 발휘하는 존재다.
더욱 한심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런 정부와 자본의 기도에 대한 광범한 비판과 저항이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거의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저서 <유대인>에서 반유대주의(넓게는 인종차별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열정이다”라고 썼다. 그렇다. 그것은 실증성이나 논리적 정합성과는 관계없는 하나의 비합리적인 열정인 것이다. 이른바 ‘안보법제’를 둘러싼 작금의 아베 신조 총리 발언이나 국회에서의 정부 답변을 듣고 나는 아베씨와 그 지지층의 집요한 ‘열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옴진리교처럼 반복하는 능력을 지닌 그들은 그 비합리적인 열정 때문에 어떤 논전에서도 패배를 모른다.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제1원전의 가혹한 사고를 겪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일본사회에서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도시의 거리에서 ‘시민’이라 칭하는 사람들의 데모대가 확성기로 당당히 “조선인 여성은 강간해도 된다” “조선인은 목매달고, 분신자살하라!”라고 외치고 있다.
원한다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그런 풍경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더욱 불길한 것은 이런 극우 배외주의세력과 현재의 일본정부 중추부가 서로 친화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해 집권당으로 복귀했는데, 그때의 거리연설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연설하는 아베씨를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시민’들이 에워싸고 반중·혐한·재일외국인 배척 구호를 외쳐댔다. 그 군중을 향해 아베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사회에서 조선인이라는 타자가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을까?
부총리 겸 재무대신이고, 일본회의 최고고문인 아소 다로는 2013년 7월에 한 연설에서 개헌 수순에 대해 “나치의 수법에서 한 수 배우면 어떨까…”라고 얘기했다. 그 발언에 대해 그곳(국가기본문제연구회)에 모여 있던 재계(경제)인이나 정치가들도 낄낄거리며 호응했다. 자민당의 개헌안에는 나치의 비상대권법과 같은 종류의 조항이 들어 있다.
아소씨가 괜히 너스레를 떤 게 아니었다. 평소 그들끼리 서로 얘기하던 속내를 흘린 것이다. 아소씨는 주로 해외 미디어로부터 비판을 받자 그 발언을 철회했으나 일본 국내에서는 별로 문제 삼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그 이후 아베 정권의 전략은 ‘나치 수법’을 확실히 배우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민당의 ‘문화예술간담회’(이 얼마나 썰렁한 작명인가!)에 모이는 면면들을 보면 마치 ‘몹(mob)’을 보는 듯하다. 그런 면면의 인사들이 국가의 ‘문화예술’ 전반을 통제하는 악몽이 현실감을 띠어가고 있다. 불시에 (비밀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나치한테서 배우는 정치권력은 국민 다수 중에 잠재하는 차별의식을 부채질해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는 걸 상투수단으로 삼는다. 아베 정권도 앞으로 만일 자신들이 추진해 온 안보법제 통과가 어려워지는 사태가 벌어지면 중국·한국·북조선에 대한 적개심과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선동함으로써 고비를 넘기려 할지도 모른다. 그때 고조되는 그 배외주의를 물리칠 수 있을지, 일본국민 다수가 그 물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 안보법제 반대운동, 기대와 한계
국회 앞을 중심으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젊은 세대를 비롯한 시위군중의 안보법제 반대운동에는,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움직임으로 큰 기대를 걸게 하는 흐름도 있다.
하지만 더 길게 보면, 안보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 자신이 타인의 전쟁에 말려드는 건 싫다”는, 그 자체로는 더없이 정당하지만 사적으로 단편화된 동기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상력을 타자에게로 더 넓혀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의 확장을 통해 자신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타자에게 가해자로 행세해 온 일본국가의 구성원(주권자)이며 수익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본국가 그 자체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물어보는 차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역사가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움직임이 근대사상 처음으로 일본국민이 자기중심주의를 타파하고 타자와 대화하며, 타자와 연대해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할 만한 재료를 지금 찾아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희망(드문 희망)을 향해 가도록 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싶다.
이 글 쓰기를 끝낼 즈음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 내용이 보도됐기 때문에 간단하게 몇 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아베 담화’는 모두에서 “러일전쟁이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이런 인식은 아베씨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일본 보수파 사이에 널리 공유돼 온 걸 되풀이한 것이지만, 적어도 조선민중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론이다.
러일전쟁은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고, 조선은 그 때문에 병참기지로 일본에 군사적으로 점령당했다. 그때 군사 점령 하에서 외교 자주권을 박탈당하고 ‘보호국’이 된 것이 나중에 ‘병합’(식민지 지배)으로 직접 이어지게 된다. 식민지화에 저항한 ‘항일 의병’을 비롯한 조선 민중이 무참하게 탄압당하고 학살당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즉 러일전쟁은 일본이 저지른 조선 식민지화 전쟁의 일환인 것이다. 아베씨는 그 러일전쟁을 끌어들여 조선민족을 향해 자국을 미화하는 짓을 했다. 정말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확신범적인 ‘학대(괴롭힘)’ 행위인가? 어느 쪽이건, 이것은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장의 그늘에는 명예와 존엄을 심하게 손상당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얘기도 했는데, 이건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인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건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손상당했다”고 수동태로 얘기하면서 누가 상처를 입혔는지 주어(가해 주체)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었다. “일본국가가”라고 주어를 명시해야만 조금이라도 반성의 뜻이 피해자에게 전달될 텐데, 아베씨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아베 담화’는 그 결론 부분에서 “저 전쟁과는 관련이 없는, 우리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그 뒷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의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사죄해야 할 주체는 먼저 국가이며, 전후에 태어난 세대도 사죄하지 않는 국가의 주권자인 이상 응분의 책임을 지게 된다. 젊은 세대를 국가의 공범으로 끌어들여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의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거부하는) 일본정부 자신이 아닌가.
지금은 더 이상 자세히 논할 지면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키워드’만 형식적으로 아무리 늘어놓아 봤자 이런 인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않는 한, ‘아베 담화’가 단지 정략적인 저의를 바탕에 깐 공허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감출 길이 없다.
아베씨 개인의 역사 수정주의자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피해를 당한 아시아의 민족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건 피할 수 없었다. 근대사를 통해 타자와 만나지 못하고, 대화도 할 수 없었던 일본국은 여기서 또다시 타자와 제대로 만날 수 없게 됐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서경식 (재일 작가 · 도쿄경제대 교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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