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속류 유물론의 시대

개마두리 2015. 12. 6. 22:53


- 날짜 : 2015.12.06.


‘즉물성(卽物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 시대를 가장 잘 표상하는 개념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즉물성’이 아닐까 싶다.


즉물성이 무엇일까? 예컨대 게 요리 집이 있다고 하자. 한 식당의 간판은 게를 뜻하는 한자인 ‘해(蟹)’를 적절히 디자인해서 아담한 간판을 내건다. 다른 한 식당은 엄청나게 큰 게 모형을(기왕이면 다리도 위아래로 움직이고, 눈도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만들어서) 식당 앞에 내건다. 이 두 식당 중 후자가 즉물적 식당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말하면, 전자가 교토 스타일이고, 후자가 오사카 스타일이다(즉물성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오사카의 도톤보리에 가 보면 좋겠다).


건축을 예로 들어도 좋겠다. 예컨대 ‘주름’을 주제로 한 두 동의 건물이 있다. ‘주름’은 들뢰즈가 만년의 저작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다룬 개념이며, 오늘날의 ‘네오바로크’ 문화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한 건물은 ‘접힘과 펼쳐짐’이라는 존재론적 구도를 충분히 성찰한 후, 그것을 건물의 내부 구조나 주변 환경, 방들의 배치, 건물 내에 사는 사람들의 형태와 시간적인 구도를 고려해 지어졌다. 다른 건물은 건물의 전체 형태를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주름진 형태로 지어졌다. 이 때 후자가 전자에 비해서 ‘즉물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즉물성이 판치는 사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디를 둘러봐도,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즉물성인 듯하다. 즉물적인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맥락에 따라, 의도에 따라 즉물적 표현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경우들도 있다. 매우 추상적인 철학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주는 경우가 그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즉물성은 곧 ‘사유 없음’을 뜻한다. 인간이란 사물과의 직접적 인과, 물리적 인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거리’를 ‘주체화의 거리’라 하자. 이 ‘주체화의 거리’만이, 사유와 언어와 문화를 가능케 한다. 이 거리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그저 물리적 인과에 따라 운동하는 물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즉물적’이란 이런 거리두기(즉 사유)가 없이 단순히 사물들의 차원에 ‘즉’해서 행위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에, 사물에 즉해서 살아 왔고, 하나의 생명체인 한 앞으로도 물질적 차원, 자연적 차원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 사유, 언어,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를 둘러보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즉, 이 거리두기를 점점 방기하는 듯하다. 거리두기를 멈춘다는 것은 세계의 인과적 흐름, 기계적 메커니즘의 와류(渦流)에 휩쓸려 스스로 그러한 메커니즘의 부품이 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현대에 들어와(한국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짐승에서 기계, 물질이 돼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과정이 어떤 의미 있는 맥락이라면, 즉 자연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맥락이라든가, 세계와 의식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맥락이라든가, 대상과 주체의 이분법을 넘어 천인합일을 이루는 맥락 등이라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의 의미 있는 철학들은 바로 근대의 주체철학을 비판하면서 ‘주체화의 거리’가 불러온 문제점들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일상에서의 ‘주체화의 거리’ 소멸은 이런 맥락과는 동떨어진 형태를 띠고 있다.


영화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과거의 영화들, 적어도 일정수준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들이었다.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내용 자체로 승부를 하는 영화들이었다.


예컨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어떤 액션 장면도, ‘스피디한’ 전개도, 흥미로운 볼거리도 없건만, 우리에게 깊은 사유와 울림을 전해준 작품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다. 반면 오늘날의 대다수의 영화들은, 내용이 아니라 기술(궁극적으로 투자한 자본)로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 승부한다. 무엇인가를 먹은 후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가 입으로 들어가 내장들을 다 보여준다. 영화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남녀의 정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폭력의 맥락이나 의미가 아니라 폭력의 메커니즘 그 자체를 정밀하게 묘사한다. 참으로 즉물적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한 영화전문지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경희대학교 앞에 내가 즐겨 찾는 카페가 있고, 거기에 그 영화잡지가 있어 가끔씩 보게 되는데, 그 날 내가 받은 충격은 <매드 맥스>라는 영화에 대한 평 때문이었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고, 보고 난 후 크게 후회했었다. “미친놈이 살아  남는다.”는 카피를 봤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내가 돈 쓰고 시간 버리고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면서 나 자신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감각적으로 볼 만한 장면들도 있었지만, 정말 즉물적인 영화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 거의 최상의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 영화에다가 ‘페미니즘’이니, ‘문명 비판’이니 하면서 온갖 사상들을 부여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영화가 이런 거창한 사상들을 동원해 논할 만한 영화인지, 그렇게 찬사를 받을 만한 영화인지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때 ‘막가파’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이제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막가파가 돼 가나?


몇 달 전에 우연히 어떤 카페에 들어갔다가 또 하나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 가사가, 욕설이 그대로 노출돼 나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런 걸로 충격을 받는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인 모양이다. 한 후배의 말에 의하면, 그런 노래가 요새 ‘대세’란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대세인 것과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 노래는 젊은이들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표현한 것이었던 듯하다. 사회에 대한 분노를 음악답게, 예술답게 승화시켜, 우리의 맥락으로 말해 ‘거리두기’를 통해 날카롭게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 자체를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예술적 문제이다. 즉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표현하려는 바를 예술적으로 승화할 능력이 없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그래서 즉물적 표출로밖에는 달리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특히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이 내뱉는 막말들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사유와 언어가 제로 포인트를 향해 추락하는 즉물성의 시대이다.


▶ 인터넷 공간과 즉물성

                               
우리의 시대가 이렇게 즉물성을 향해 치닫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인터넷의 등장이 그 핵심적인 원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회 현상도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중층 결정’되는 것이므로, 즉물성의 시대가 도래한 원인을 인터넷에만 돌리는 것은 사태를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인터넷 공간의 도래와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터넷 공간은 ‘가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가상의 공간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이 공간과 현실공간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전에 영상의 등장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경향을 가져왔고, 가상공간의 등장은 그러한 경향을 결정적으로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다.


가상공간은 가능성이 빨리 실현되는 공간이다. 현실은 물리적 법칙, 사회적 규범, 신체의 한계 등 여러 제한들이 있지만, 가상공간은 이런 한계들을 간단히 뛰어넘어 가능성이 현실(가상적 현실)으로 초고속 실현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가상공간의 성격은 인간을 끝없이 즉물적으로 몰아간다. 끊임없이 던지고 부수고 없애는 컴퓨터게임, 그리고 ‘도박 사이트’는 그 극한적 형태라 하겠다.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인터넷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직업상 필요한 것(인터넷 강의)을 제외하면 딱 두 가지, 메일 주고받는 것과 학술적인 검색(주로 위키피디아)만을 사용한다. 그 외의 것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용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컴퓨터게임은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가상공간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주변에서 뼈아프게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핸드폰을 비롯한 기계들 또한 즉물성을 부추긴다.


즉물성으로 인한 가장 큰 폐단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우선  ‘인내심의 실종’을 꼽고 싶다.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인내심이다. 인내심이 없기에, 쉽게 짜증내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버린다. 인내심이 없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표피적이 된다. 조금만 인내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의 도래와 즉물성의 준동(蠢動)은, “오래 기다리고, 오래 참고, 오래 사유하고 오래 사랑한다”는 가치를 박살내버렸다. 인간은 독서를 하며 사유하는 인내심을 잃어버렸고, 영상과 인터넷, 핸드폰을 통해 순간순간 이동하고 감각적인 자극을 받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의 선철(先哲)들은 항상 ‘물(物)’의 지배를 경계하면서 ‘심(心)’을 보호할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근대성이 도래하면서 이런 말은 낡아빠진 이야기가 돼버렸고, ‘물’의 지배가 점차 강화되는 역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선철들의 이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삼스럽게 음미하게 만든다.


현대는 루카치가 ‘물화(物化, Verdinglichung)’라고 불렀던 현상이 점점 가속화돼 온 시대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물화는 오히려 ‘물’자체조차 증발된, 새로운 형태의 물화, 즉 사물조차 증발되고 오로지 디지털 이미지와 감각만이 존재하는 그런 물화이다. 물상화(物象化)가 아니라 ‘물상화(物像化)’의 시대, ‘상(象)’조차 존재하지 않고 ‘상(像)’만이 존재하는 시대, 존재는 이미지로 환원되고 주체는 감각으로 환원되는 그런 시대인 것이다.


▶ 속류 유물론의 시대

                        
그런데 이런 즉물성의 시대는 단지 사회의 분위기, 문화의 분위기일 뿐일까? 거기에는 어떤 사상도 내재해 있지 않은 그런 분위기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즉물성은 사상이 부재하는 현상이지만, 사상의 부재 그 자체가 어떤 사상을 배경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비(非)사상적으로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 어떤 철학적·과학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철학과 과학은 대중적 차원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차원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회, 대중과 관계를 맺을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왜곡(‘속화’와 ‘희화화’)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나마 사회적·문화적 현상들의 밑에는 항상 그 어떤 사상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사상이라는 것이 아예 부재한 즉물성의 사회·문화 그 자체도 역설적으로 어떤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상의 부재를 핵으로 하는 즉물성이 전제하고 있는 그 사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이다. ‘유물론’은 철학의 역사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사상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속류 유물론은 주로 자연과학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해서 나온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속류 유물론은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가? 어떠한 자연과학적 사실로부터 논리적 비약을 범하면서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때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생명체의 유전자는 DNA를 통해 유전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사실 그저 DNA의 산물일 뿐이다.” 전통적 개념인 ‘본질’이 생물학의 개념인 DNA로 대체된 것만큼 우리 시대의 초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철수는 정말 ~의 DNA를 타고 났어.” “알고 보면 우리는 클론이야.”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에 대표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책들 중 하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또한, 최근에는 “뇌를 검사해 봤더니~하더라, 그러니까 인간이란~”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유행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어떤 자연과학적 결과로부터 엄청난 논리적 비약을 매개해 갑자기 유치한 철학적 결론을 내리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속류 유물론이고, 이런 속류 유물론은 과학이나 철학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대중적 차원으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어떤 일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즉 오늘날의 즉물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이 속류 유물론인 것이다.


어떤 자연과학적 성과로부터 철학적 논의로 나아가려면 세 가지가 매개돼야 한다.


첫째, 해당 주제에 대해 2,500년 이상 진행돼 온 학문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둘째, 그 성과가 다른 많은 학문들(언어학, 지리학, 사회학 등)에 연계돼 보다 넓은 시야에서 조망해야 한다. 셋째, 오늘날 그 주제와 관련돼 논의되고 있는 핵심적인 철학적 논변들(Arguments)을 알아야 한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그 자연과학적 성과의 의미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조건들이 전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적 비약을 범함으로써 1급의 과학적 사실로부터 3류의 철학적 논의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특히 미국에서 나오는 과학 서적들이 이런 문제가 많다. 이 서적들은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 사유 없는 시대에 사유하기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를 되찾는 것이다. 즉물성과 속류 유물론이 ‘대세’가 된 이 시대에, 어떻게 사유와 언어와 문화를 다시 살려낼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우리 시대의 화두라 할 것이다.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든 세 가지 조건을 채워나가는 일일 것이다. 첫째, 어떤 과학적 사실로부터 주관적으로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 우선은 그 문제가 논의돼 온 학문사 전체를 개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사분오열돼 있는 지식세계가 그 분열증을 극복하려면, 우선 학문의 역사 전반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정확히 볼 수 있다. 어떤 특정 전공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빙빙 돌기보다 학문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진행돼 여기까지 왔는가를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둘째, 하나의 문제를 여러 학문들과 연계시켜 바라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예컨대 뇌 과학에서 어떤 성과가 나왔다면, 그 성과가 면역학 등 다른 생명과학, 그리고 나아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인간과학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 신중하게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의미 있는 과학적 성과로부터 엉터리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 있다. 형식적으로 구분돼 있는 특정한 전공에 갇히기보다 문제 중심으로 여러 관점들을 교차해 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셋째, 평소에 철학적 논변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문제가 되는 사항에 관련된 제반 학문의 구체적 성과들을 연계시킬 때, 철학적 종합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탐구능력과 철학적 사유능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과학들을 종합적으로 사유하려면 철학적 사유능력이 필수적이다. 속류 유물론이 판치는 것은 특정 과학으로부터 곧바로 철학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지식들이 산재돼 있는 시대에 철학적 종합 능력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속류 유물론의 준동은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온갖 즉물적 문화가 판을 치게 된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오늘날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호모 사피엔스만큼이나 오래됐지만, 오늘날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바로 ‘사유’다. 


- 글 : 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


[출처] 속류 유물론의 시대|작성자 지식스닷컴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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