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평]여자가 죽고 있다

개마두리 2016. 6. 25. 23:55


- 책 한 모금 뉴스 한 스푼


- 글 : 신연선


훌리오 코르타사르 Julio Cortazar의 짧은 단편 ‘점거당한 집’은 저택에 사는 어느 남매의 이야기다. “우리는 그 집을 좋아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느 날 집 안에서 들린 소리(위협) 때문에 남매가 집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 때문에 집을 잃다니? 맞다. 이 남매가 가족의 추억이 곳곳에 남아 있고, 아끼던 물건이 있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단 하나의 공간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단지 정체 모를 어떤 ‘소리’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복도 문을 잠갔어. 뭔가가 집 안쪽을 점거했거든.” (중략) “그렇다면 우리는 이쪽에서만 살아야겠네.” - ‘점거당한 집,『드러누운 밤』, 14~15쪽


“처음 며칠 동안은 몹시 힘들었다.” 무슨 소리 때문에 간단히 집 한쪽을 잃은 남매는 점거당한 곳에 있는 “양탄자와 겨울철에 신던 슬리퍼를 아쉬워” 하고, “두송목 파이프가 없어 유감”을 느끼고, 서글프게 “여기에 없구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 없이도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다시 소리가 들리고, 남매는 집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나온다.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못했다. 밤 11시였다. 남매는 그저 거리로 나갔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공간을 잃은 여자들을 생각했다. 미심쩍음과 거기서 비롯된 공포에 일상의 공간을 내어주는 삶을 생각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공포에 지고 마는 삶을, 애처롭게 생각했다.


내가 만난 여자들은 직접 겪은 성추행, 성폭력 경험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그 여자들은 부모나 조부모에게 남자 형제와 차별받은 경험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집에 있으면서도 공포를 느끼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21세기인데도 그렇다.


한편 여자들은 사회적 성취를 위해 결혼, 출산을 포기하거나 남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아직도 있다)에 진출하면 질타를 받는다. 오랜 시간 지속된 폭력에 대항하다 남자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으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는 질타를 받는다. 늦은 시간에 왜 거기 있었느냐고,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느냐고, 그럴 줄 몰랐느냐고 질타를 받는다.


가정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죽인 아내에게는 “왜 이혼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고, 아내를 때리다가 결국 살해까지 한 남편과 그의 손에 죽은 아내에게는 “신고나 이혼을 하지 않고 가정 폭력을 인내해온 여성의 처신은 곧 헌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298쪽


늘 ‘밤길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던 이유는 여자에게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밤길은 여성의 공간이 아니고, 술집과 공용 화장실은 모두 여성의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 회사도, 집도, 시장도, 대낮의 거리도 여성의 공간은 아니다. 여성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소리 때문에 여자는 집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생각 없이 살”면서?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2015년,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한 여자는 최소 91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자는 최소 95명이었다. 아직도 ‘여자’라서 죽은 사건을 ‘묻지 마’나 ‘조현병’등으로 덧씌우기하는 것은 죽은 여자들과 살아남은 모든 여자들을 위협하는 짓이다. 더 이상 공간에서 여자를 내몰지 마라. 나는 공간을 회복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이는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에 가깝다.


-『빅 이슈 코리아(Big Issue Korea)』지 제 134호(서기 2016년 6월 15일에 펴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