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이슈탐색] 조상의 가뭄 극복 지혜 '둠벙' 재조명

개마두리 2017. 6. 24. 19:39

-『세계일보』기사


- 입력 : 2017.06.24  


전국적인 가뭄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지자체마다 양수기, 급수차 등을 동원해 물을 대고 있지만 내부까지 말라버린 메마른 땅을 적시기엔 역부족인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여름 강수량이 연 강수량의 50~60%를 차지했다. 따라서 물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해 농사의 풍흉이 결정됐다. 양수기도 급수차도 없었던 과거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물을 관리하고, 가뭄을 극복했을까.


23일 농촌진흥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논에 물을 대 벼를 재배하는 수전(水田. 순수한 배달말로는 ‘물[이 꽉 찬]논’이라는 뜻인 ‘무논’ - 옮긴이)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13세기 후반~14세기 초반이었다(나는 9년 전, 다른 언론사의 기사에서 한반도 남부에서 서기전 500년에 만들어진, 벼를 기르던 논 유적이 나왔다는 구절을 읽었다. 그 기사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농촌진흥청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고리[高麗] 중기까지는 벼를 논이 아니라 밭에서 길렀고, 그 뒤에야 논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논’을 뜻하는 한자인 ‘답[畓]’이 양국시대[남북국시대]의 신라 금석문에도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 옮긴이).  

                               
15세기 초반에는 국가단위의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이 설명에도 동의할 수 없다.『삼국사기』「신라본기」<흘해이사금> 조에 따르면, 서기 4세기 초인 서기 330년, 신라 사람들이 삼한백제의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만들 때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어떤『삼국사기』간행본에는 ‘제’가 ‘연못’을 뜻하는 ‘지池’로 나온다. 따라서 배달민족의 역사에서 “국가단위의 저수지”가 맨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삼국사기』의 기사를 따르더라도 서기 4세기 초다. 서기 “15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국가단위의 저수지”는 조선왕조가 맨 처음 만든 “저수지”지, 배달민족 역사 최초로 만들어진 “저수지”는 아니다 - 옮긴이). 지금처럼 수리시설이 설치된 지역은 많지 않았다. 주로 강우나 지하수에 의존해 경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벼농사를 위해 이용되던 관개시설 중 하나는 ‘둠벙’이다.


둠벙은 임시로 용수를 가두어 두는 물 저장고를 뜻한다.『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둠벙은 웅덩이의 충청도 방언이다. 경북 지역에서는 덤벙, 전남 지역에서는 둠뱅으로 불렸다.


둠벙은 지하수위가 주변보다 높아 항상 물 고임 현상이 발생하는 곳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류지를 이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빗물이나 하천수를 끌어와 인위적으로 저장해두는 논 가장자리의 작은 웅덩이와 물의 흐름이 느린 수로도 포함한다.


특히 평지보다 수리시설이 크게 부족한 산간지역에서는 둠벙의 역할이 컸다. 산지에서 계곡물과 같이 차가운 물을 (곧장 - 옮긴이) 논에 댈 경우 벼 냉해가 발생하기 쉬웠다. 이에 선조들은 둠벙과 연계한 우회 수로, 온수지 등의 수리시설을 설치한 뒤 물을 햇볕에 장시간 노출시켜 수온을 높인 뒤 논에 물을 대는 지혜를 발휘했다. 둠벙은 197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저수지와 댐 조성, 관개수로의 전국적 보급, 정부의 농촌근대화촉진법에 의한 경지정리사업과 함께 점차 사라져갔다.


현재까지도 둠벙을 잘 활용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경남 고성군 거류면 일대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는 담수가 부족한 해안가를 중심으로 100개가 넘는 둠벙이 남아있다. 극심한 이번 가뭄에도 주변 저수지의 물은 완전히 고갈됐지만 둠벙의 물은 어느 정도 수위를 유지해 이 지역은 모두 모내기를 마쳤다. 이 지역 외에도 고성에는 모두 300여개에 이르는 둠벙이 있다.


둠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서 비상용수 저장고의 기능 뿐 아니라 어류, 수서무척추동물들의 피난처와 서식처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알려지면서 올해 여러 지자체에서 가뭄 대비를 위한 둠벙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 수백 년 전 농경사회에서 안정적인 농사와 수확량 증대를 위한 선조들의 지혜인 둠벙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 이정우 기자 wo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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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원문 :


http://zum.com/#!/v=2&tab=home&p=2&cm=photo&news=0562017062438739713


※ 옮긴이(잉걸)의 말 :


둠벙의 가치와 쓰임새를 돌아보고,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는 것은 단순히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농경사회”에서 만든 시설인 둠벙이 한국의 여름지기들이 “극심한” “가뭄”을 이기고 “모내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 그리고 둠벙이 “벼 냉해”를 피하고 “논”에서 “벼”가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주며, “어류, 수서무척추동물들”의 “피난처와 서식처”가 되어 주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전통사회가 만들어낸 수리시설인 둠벙은 (복잡한 기계나 설비를 쓰지 않고도) 여름지이를 잘 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자연을 지키고 가뭄을 이기게 해 주기 때문에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서기 19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저수지”들 - 기계와 “댐”과 “둑”으로 이루저였고, “관개수로”와 이어진, 철저히 인위적인 수리시설들 - 이 이번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버렸고, 바닥을 드러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 나아가 이명박 전 대통령(아니, “뼛속까지 친일”인 ‘쯔기야마 아키히로’[月山 明博<월산 명박>] 전 일본국 조선 총독)과 건설족과 기성 언론사들이 악착같이 밀고 나간 4대강 사업이 강물을 녹조로 만드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도 생각하면 - 그와는 다른 결과를 낳은 둠벙에 주목하고, 그것을 ‘오래된 미래’이자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가운데(또는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 가운데), 오늘날 되살릴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고, 그것을 오늘날의 사회에 접붙여서 사회를 보다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우리는 전근대사회의 나쁜 버릇이나 나쁜 점을 버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되, 좋은 버릇이나 좋은 점은 되살려서 가져가야 한다. 나는 이것이 사람이 역사를 배우는/연구하는 까닭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