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문화상품이 퍼뜨리는 반(反)지성주의에 속으면 안 되는 까닭

개마두리 2022. 11. 6. 22:05

▶ 문화상품 :

한 사회의 물질적/정신적 산물인 문화를 이용하여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상품. 영화, 방송, 음악 등 지적이거나 창의적이고 정서적인 정보와 의미를 담고 있는 생산물이 상품화된 것을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의 설명).

▷ 반지성주의 :

'지성, 지식인, 지성주의를 적대하는 태도와 불신'을 뜻하는 말로,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에 의해 창안된 개념이다. ‘지성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닌, ‘지성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에 속하는 <시사상식사전>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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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글쓴이인 ‘이지성’ 선생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는 많은 사람이 인문고전의 저자들, 특히 철학자들을 엉뚱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불우했고,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병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역사학 – 줄여서 “사학” - 을 전공한 나는, 실제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에 나타나는 사례들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반박하겠다. 

공자[본명 공구]는 벼슬아치로 임명된 적이 있었고, 그때 많은 녹봉을 받았다. 

도가 철학자인 노자[老子. 본명 “이이”]는 가난한 걸인이 아니라, 동주[東周]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던 사서였다. 

그리고 법가[法家]의 사상가들은 – 상앙[商鞅]이나 한비자가 잘 보여주듯이 – 권력자들의 선택을 받아 높은 벼슬을 받았고, 

병가[兵家. 군사와 전쟁을 다루던 춘추전국시대의 학파. 『 손자병법 』 을 쓴 손무(孫武)와, 『 손빈병법 』 을 쓴 손빈(孫臏)과, 『 오자병법 』 을 쓴 “오기”를 낳았다]의 사상가들은 군사령관으로 임명되거나 군대의 참모가 되어 부귀를 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불우했고,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아테네 군[軍]에 입대해, 자기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이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병약했다.”는 통념도 사실이 아니다. 

또한 근세조선의 실학자들도 주로 양반 사대부 출신이었고, 가난이나 굶주림이나 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덧붙이자면, 중세시대였던 서기 12세기에 코르도바[에스파냐에 있던 도시. 중세시대에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였다]에서 철학자로 살았던 아랍 무슬림 남성인 “아불 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루슈드[줄여서 ‘이븐 루슈드’. 서양식 이름은 <아베로에스>]”는 “저명한 법관 집안 출신”이었고, 칼리프[동아시아의 천자/황제와 비슷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이자 임금. 우리가 흔히 아는 ‘술탄’은 ‘제후’나 ‘왕’에 가깝다]의 총애를 받아 “시의[侍醫. 모시는(侍) 의사(醫). → 궁중에서, 임금과 황족/왕족의 진료를 맡았던 의사]와 법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 사람도 불우함이나 가난이나 굶주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를 다룬 기록에는 그가 “병약했다.”는 말도 없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이지성 선생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는 가난하고 불행하며 병약하다.’는 인식은 사실과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옮긴이) 

또한 (그들은 철학자를 – 옮긴이) ‘현실과 담을 쌓고, 입만 살아 있는 바보 같은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생각도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법가 사상가들은 부국강병하는 방법을 연구해서 임금에게 내놓고 그것을 실천했으며 – 그것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제하[諸夏]를 ‘통일’한 나라가 진[秦] 제국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뿐 아니라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경제를 다룬 글들을 써서 내놓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홍기빈’ 선생이 쓴 책인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책세상’ 펴냄, 서기 2020년)를 사서 읽어보라(아니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책 이름으로 다음이나 네이버나 티스토리나 네이트온에서 – 감상문이건 기사건 가릴 것 없이 – 책을 다룬 글들을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플라톤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다룬 책인 『 국가(국가론) 』 를 썼다. 

근세조선의 실학자들도 ‘나라를 올바른 쪽으로 고치는 방법’을 다룬 글이나 책을 많이 썼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가거나(박지원), 성을 쌓는 일을 관리/감독하거나(정약용), 벼슬을 살면서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써먹은 적이 있다. 

이븐 루슈드 선생도 철학 서적인 『 결정적 논고 』 를 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대부분과 플라톤의 『 국가 』 의 주해서[원전에 주석을 달고 알기 쉽게 풀어 쓴 책]를 집필”한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서 “법관[法官]”, 그러니까 “법원에 소속되어 소송건을 심리하고, 분쟁이나 이해의 대립을 법률로 해결하고 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 요즘 말로는 재판관이나 판사로 일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과 담을 쌓은 바보’란 말인가? – 옮긴이)

한편으로, 사람들의 그런 오해가 영화나 소설 또는 TV 드라마(연속극 – 옮긴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발견했다.

일례로 조선시대(근세조선 시대 – 옮긴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 이런 식의 장면이 나올 때가 많다.

우람한 근육을 가진 마당쇠(예전에, 머슴이나 사내종을 일컫던 말 – 옮긴이)가 방에 들어앉아 글만 읽는 병약한 선비를 보면서 고개를 흔든다. 

“저래 책만 읽어가지고 뭐가 나온다고.”

다음 화면은 마당쇠가 도끼를 들어 장작을 패는 장면이다. 그런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책만 보는 선비보다는, 노동(좀 더 정확하게는, 육체노동 – 옮긴이)하는 마당쇠가 더 낫다.’

하지만 매스컴(언론매체 – 옮긴이)은 이런 장면은 전혀(조금도 – 옮긴이) 보여주지 않는다. ↓

몇 년 뒤, 선비는 장원급제하여 나타나고, 마당쇠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그 절은 평생 계속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사실은 후기 고리[高麗]와 양국[‘남북국’]시대 때도 – 옮긴이) 책을 읽지 않는 마당쇠가 책을 읽는 선비(또는 귀족이나 승려 – 옮긴이)를 지배한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던가.

여기서 말하는 선비는 지배계급, 마당쇠는 피지배계급의 상징이다.

(근현대사나, 오늘날의 상황이나, 미래를 다룬 – 옮긴이) 다른 소설이나 TV 드라마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은 대개(大槪. 대부분 – 옮긴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얼간이’ 쯤으로 나온다.

- 이지성, 「 당신이 인문고전에 대해 오해하는 것들 」, 『 리딩으로 리드하라 』,  222~223쪽  

※ 참고 자료

- 『 리딩으로 리드하라 』 (이지성 지음, ‘차이정원’ 펴냄, 서기 2016년)

- 『 결정적 논고 』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책세상’ 펴냄, 서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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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 덧붙이자면, 나는 “몸으로 일하지 마라. 그건 ‘천한 짓’이다.” 하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이 글을 소개/인용함으로써, ‘바보여도 되고, 무식해도 되며,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하는 반지성주의를 믿지 말고, 그것을 부추기는 오늘날의 문화상품(또는 대중문화)을 믿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우리 시대의 마당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장원급제해서 벼슬을 살게 된 선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삶’, ‘글을 읽는 양반에게 땔나무를 해다 바치다가 마는 삶’이 싫다면, 선비 편만 드는 나라나 관청이 못마땅하다면, 도끼로 장작을 패기만 하지 말고, 선비나 양반이나 주인 집 몰래 글을 익히고 생각하는 법을 익혀라. 정 안 되면 남들이 버린 책이라도 주워서 읽고, 서당 곁을 다니면서 글 읽는 소리라도 – 또는 훈장이 말로 학동들을 가르치는 것이라도 – 목숨 걸고 엿들어라. 

그렇게 해야 선비가 당신을 부당하게 꾸짖을 때 선비의 논리로 선비의 꾸짖음을 맞받아칠 수 있고, 선비가 당신에게 불리한 계약이나 관계를 강요할 때 떳떳하게 따져서 당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글을 알아야 관청이나 나라에 탄원서를 써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고, 그들에게 당신을 잘 대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나아가 글을 읽고 쓰거나 머리로 생각할 줄 알아야 선비가 가지고 있는 노비 문서를 읽을 수 있고, 거기에 적힌 몸값을 알아 그걸 가지고 선비와 ‘흥정’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 돈을 모아 몸값을 다 내고 풀려나 양인[평민]으로 살 수 있다.

덧붙이자면, 당신이 글을 써서 육체노동의 고귀함과 정당성을 관청이나 나라에 알려주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나 현실을 '어리석은 벼슬아치'나 '현실을 모르는 임금'에게 전해줘야, 당신이 하는 육체노동이 진가를 인정받고, 당신이 하는 일이나 당신이 사는 삶이 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배움으로써 고상하거나 적어도 천박하지는 않은 사람이 되어야 여인들에게 사랑받고, 장가들기도 쉬워진다. 양인 여인이나 여종이나 시녀도 교양 있고 똑똑하며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욕 안 하는 사람 – 도령이나 중인[中人]이나 글쟁이나 선비 –을 좋아하지, 양인이나 종 출신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나 욕쟁이나 술꾼인 사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아두라!>

나는 마당쇠와 선비를 예로 들었지만, 그들 대신 양국시대(‘남북국시대’)의 백성과 황족(皇族)/왕족/귀족/불교승려를 예로 들어도, 후기 고리(高麗) 시대의 천민과 황족/귀족/승려들을 예로 들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마당쇠들이여, 당신은 ‘문무를 겸비한 민중’이 되어야지, ‘천박한 대중/군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단기 4355년 음력 10월 13일에, '이제 한국 사회는 (요즘 와서 젊은 세대에게 강하게 스며드는) 미국식 반 지성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