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논평]『 발해고(渤海考) 』「 자서(自序) 」

개마두리 2023. 9. 2. 15:04

자서(自序) : 책의 지은이가 직접 쓴 서문. 따라서, 발해고 』 「 자서 발해고 의 서문이자, 그 책을 쓴 유득공(柳得恭) 선생[혜풍또는 혜보’, 영재’]이 직접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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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시작)

 

고리(高麗. 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가 발해사(후기신라와 당나라가 발해라고 불렀던 중기 고리[高麗] - 대중상[걸걸중상]이 세운 나라다 의 갈마 : 옮긴이)를 짓지 않았으니(그러니까, 후기 고리가 중기 고리의 갈마를 다룬 역사책을 쓰지 않았으니 옮긴이), 고려의 국력이 (전기 고리[高麗]나 중기 고리보다 옮긴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 판단은 후기 고리가 망한 지 356년 뒤에 태어난 영재 선생의 착각이다. 왜냐하면 후기 고리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탐라국이나 우산국이나 흑수말갈족에게서 조공을 받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고, 대 제국이었던 요나라와 싸워서 이겼으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기 전까지는 주션[‘여진’]족과 여러 번 싸웠고, 비록 지고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몽골 제국과 오랫동안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국력이 약한 나라는 이럴 수가 없다. 게다가 오늘날 몇몇 한국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후기 고리는 오늘날의 요동반도와 길림성까지는 치고 올라갔으며, 못해도 근세조선보다는 넓은 땅을 차지했고, 비록 몽골제국에게 그 땅들을 빼앗기기는 했으나, 말기에는 다시 자주국가가 되어서 요동을 쳤기 때문에, 그 때문에라도 후기 고리의 힘이 약했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후기 고리가 중기 고리를 다룬 역사책을 쓰지 않은 까닭은 나라의 힘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옮긴이).

 

옛날에 고()[고구리(高句麗)장수왕/보장왕의 나라이자, 고구리의 후신(後身)전기 고리(高麗)왕성(王姓).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횡성 고씨가 이들의 후손이다 : 옮긴이]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리(高句麗)’라 하였고, 부여(扶餘)[백제와 그 후신인 남부여(南扶餘)의 왕성(王姓). 줄여서 ()’씨로도 불렸다.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부여서[]씨가 이들의 후손이다 : 옮긴이]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김씨(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경주박씨/월성석씨/경주김씨가 이들의 후손이다 옮긴이)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그 세 나라를 다룬 역사책으로 옮긴이) 마땅히 삼국사(三國史) 가 있어야 했는데, 고리가 이를 편찬하였으니(후기 고리에는 김부식 이전에 구삼국사[舊三國史] 라는 역사책이 있었고, 김부식은 후기 고리 중엽에 삼국사기 를 정리했다 옮긴이), (이는) 옳은 일이다.

 

부여씨(백제/남부여 옮긴이)가 망하고, 고씨(전기 고리 옮긴이)가 망하자, 김씨(중기신라/후기신라 옮긴이)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의 집안이자, 중기 고리의 왕성이고, 중기 고리[高麗] 그 자체. 오늘날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집안인 영순태씨가 이들의 후손이다 옮긴이)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올바른 이름은 중기 고리 옮긴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南北國. <“남쪽[]에 있는 나라[]”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을 지닌 명칭이다. 전자는 후기신라고, 후자는 중기고리다. 후기신라는 남쪽에 있었고, 중기고리는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을 통틀어서 이렇게 불렀다. 실제로 후기신라도 중기고리를 발해대신 북국[北國]”으로 부르기도 했다 옮긴이)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이 시대, 그러니까 흔히 남북국시대로 불리는 양국[兩國]시대를 다룬 역사서로 옮긴이) 남북국사(南北國史) 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리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후세 사람이자, 현대 한국인인 나도 영재 선생, 그러니까 유득공 선생의 이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옮긴이).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리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리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그리고 후기 고리는 이런 중기 고리의 땅 가운데 요동반도와 길림성만큼은 확실하게 되찾았다. 나아가 후기 고리는 중기 고리의 수많은 유민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백성/관리/신하로 삼기까지 했다. 이런 나라가 전기 고리와 중기 고리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때문에라도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 정부와 학자들이 중기 고리를 중국(제하)의 지방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옮긴이).

 

김씨(후기신라 옮긴이)가 망하고 대씨(중기 고리 옮긴이)가 망한 뒤에, 왕씨(후기 고리의 황성[皇姓]/왕성인 개성 왕씨 옮긴이)가 이를 통합하여 고리(高麗. 좀 더 정확히는 후기 고리’. 왕건이 세운 나라다 옮긴이)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옛 후기신라의 땅 옮긴이)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옛 중기 고리의 땅 옮긴이)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사실은 어느 정도는 소유했다. 비록 흑룡강성이나 남[]몽골 동부나 연해주는 소유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옮긴이),

 

그 나머지가 여진족(올바른 이름은 주션. ‘여진[女眞]’은 키타이인이나 몽골인이 주션족을 부른 이름인 주르첸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옮긴이)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올바른 이름은 키타이’/‘키탄. ‘거란키탄을 한자로 옮긴 말인 글단[契丹]’의 발음이 바꾼 것이다 옮긴이)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리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사(渤海史) 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중기 고리 옮긴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리 땅이다.”하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土門江. 근세조선 후기에는 두만강으로 보거나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의 지류로 보았다 옮긴이)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중기 고리의 갈마를 담은 역사책인 발해사 』 - 옮긴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리(영재 선생은 고구리와 전기 고리 모두를 통틀어서 이렇게 일컬었다 옮긴이)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후기 고리는 옮긴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후기 고리의 사관들과 개성 왕씨가 옮긴이) 발해사 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후기) 고리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옮긴이) 누군가는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당했으니, (후기) 고리가 무슨 수로 그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2당 왕조 옮긴이) 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도읍인 홀한성(忽汗城. 다른 이름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나는 <상경용천부>는 순수한 한자말이지만, <홀한성>이두” - 편의상 이 이름을 썼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 그러니까 한자말이 아니라 옛 배달말인 중기 고리의 입말[구어]을 한자의 발음만 빌려서 적은 이름으로 판단한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서 설명하겠다 옮긴이)(요군[遼軍], 그러니까 요나라 군사에게 옮긴이) 격파되어 (후기) 고리로 달아난 사람들이 세자(실제로는 태자. 태자는 천자국에서 장차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을 임금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고, 세자는 제후국에서 장차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왕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태자가 세자보다는 격이 더 높다. 참고로 이때 후기 고리로 달아난 중기 고리의 태자는 대광현이다 옮긴이) 이하 10여만 명이나 되니,

 

(만약 옮긴이)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옮긴이)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었다 하더라도, (후기 고리의 황실이 옮긴이) 세자(대광현 옮긴이)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 왕(실제로는 중기 고리의 가독부[중기 고리의 말로 임금이라는 뜻]’이자 황상[皇上]이고 대왕이고 천자 옮긴이)의 사적(事績. []의 실적이나 공적이나 업적[] - 옮긴이)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隱繼宗. 후기 고리에 망명한 중기 고리의 지배층 옮긴이)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대광현을 따라온 중기 고리 유민인 옮긴이) 10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 서기 806년에 태어나 서기 866년에 세상을 떠난 제 2 당 왕조 사람. 서기 1956년 그의 묘지명이 북경[北京]에서 발견되어 그의 삶 가운데 많은 부분이 밝혀질 수 있었다. 장건장은 서기 833, 그러니까 스물여덟 살 때 사신이 되어 중기 고리로 갔는데, 서기 834년에 홀한성[다른 이름은 상경용천부’]에 다다랐고, 다음 해인 서기 835년에 제 2 당나라로 돌아갔다. 그 뒤발해기[渤海記] 3권을 지었는데, 이 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학자들은신당서 』「 발해전 발해기 의 많은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여긴다 옮긴이)(중기 고리 사람이 아니라 옮긴이) 당나라(정확히는, 무주[武周]가 망한 뒤에 다시 세워진 2 당 왕조’ - 옮긴이)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 (발해기 - 옮긴이)를 지었는데, (후기) 고리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정확히는, 역사서 옮긴이)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 나는 이런 영재 선생의 지적과 반박[밑줄 친 부분]에 천 번 만 번 동의하고 공감한다. 중기 고리는 그들의 적국이자 이웃이었던 무주[武周] 왕조와 제 2 당 왕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역사책인 구당서 』 「 발해전 에 따르면 - “문자[文字]와 전적[典籍 : /서적]도 상당히 있었던 나라고, - 역시 당나라의 갈마를 다룬 역사책인 신당서 』 「 발해전 에 따르면 그 나라 사람들은 글을 자못 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 고대 일본의 역사서이자, 일본서기 와는 달리 왜곡이나 오류가 적은 책으로 평가받는 책인 - 속일본기 』 에는 중기 고리의 가독부[대왕/성왕/천자]인 무왕[이름은 대무예’]이 일본에 보낸 국서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기 고리 사람들이 직접 남긴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가 중기 고리의 공주인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중기 고리와 제 2 당 왕조가 서로를 인정하고 전쟁을 멈춘 뒤부터는 중기 고리의 유학생들이 제 2 당 왕조로 건너가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책을 안 만들었겠는가? 역사책을 쓰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중기 고리의 지배층은 다른 나라에 국서도 보냈으니 당연히[!] 읽고 쓸 줄 알았을 테고, 그렇다면 그들은 선조의 업적과 자신들이 만들거나 겪은 갈마를 적어서 책으로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중기 고리의 전신인 전기 고리와 고구리가 각각 신집(新集) 유기(留記) 라는 역사책을 썼다는 삼국사기 』 「 고구려본기 의 기사도 내가 중기 고리가 역사책을 썼으리라고 추측하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다. 전 왕조가 역사책을 썼는데, 그 나라를 이어받은 새 왕조가 역사책을 쓸 줄 몰랐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기 고리가 요나라 군사의 침략을 받았을 때, 대광현을 비롯한 지배층은 자신들이 살던 이나 을 가지고 올 수는 없었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종이책, 그러니까 자신들의 역사책이나 족보는 챙겨서 후기 고리로 달아날 수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중기 고리의 유민이자 피난민들이 후기 고리로 자신들의 갈마가 담긴 역사책을 가져왔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게다가 비록 다른 나라의 사례긴 하지만 사마천도 사기[史記] 를 쓸 때, 그냥 방에 앉아서 붓만 놀리지는 않았다. 어떤 일이나 사람이나 나라에 대해서 적을 때에는, 꼭 그 일이나 사람/나라와 관련된 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았고, 그들의 대답을 들은 뒤 그것을 옛 기록에 덧붙여서 책을 썼다.

 

그렇다면 사마천을 알았을 후기 고리의 사관들이 그의 방법을 본받지 말았어야 할 까닭이 뭐란 말인가? 중기 고리 유민이자 망명자인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그것을 받아적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들은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때문에, 이 일, 그러니까 후기 고리 왕조의 사관들과 개성 왕씨들이 중기 고리의 갈마를 소홀히 다룬 일을 비난할 수밖에 없으며, 이 일을 [한국 시민들과 조선 공화국의 공민들이 모두 완벽하고 훌륭한 나라로 여기는] 후기 고리가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 하나로 지적한다 옮긴이)

 

,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영재 선생은 중기 고리가 망한 지 858년이 흐른 뒤에 발해고 를 썼다 옮긴이)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후기 고리와 근세조선이 중기 고리의 갈마를 소홀히 한 나머지], 영재 선생이 얻을 수 있는 기록이 모자랐고, 그가 활동하던 서기 18세기에는 동아시아에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없었으며, 그래서 그의 연구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 대목을 읽어야 한다 옮긴이).

 

(영재 유득공 선생 옮긴이)가 내각(內閣. 여기서는 규장각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옮긴이)의 관료로 있으면서(영재 선생은 서른두 살 때인 서기 1779년부터, 서른일곱 살 때인 서기 1784년까지 규장각에서 검서관으로 일했다 옮긴이)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군(: 임금 옮긴이)/(: 신하 옮긴이)/지리/직관(職官. 직위[]와 관등[] - 옮긴이)/의장(복장 옮긴이)/물산(物産. 산물 옮긴이)/국어(나랏말 옮긴이)/국서(國書.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다른 나라에 보내는 글 옮긴이)/속국의 9(. 여기서는 살펴봄’/‘조사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를 만들었다.

 

이를( 삼국사기 고려사 처럼 옮긴이) 세가(世家. 제후나 그가 세운 나라의 갈마를 적은 책, 또는 제후에 버금가는 업적을 세운 사람의 전기 옮긴이) , (. 평범한 개인의 전기나, 역적처럼 나쁜 짓을 한 사람의 전기나,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갈마를 적은 책 옮긴이) , () 로 삼지 않고 (단지 옮긴이) 라 부른 까닭은, ([영재 선생]발해고 옮긴이)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이 책을, 그러니까 발해고 옮긴이)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갑진년(서기 1784) (음력 옮긴이) 325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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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 4356년 음력 718일에, ‘갈마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