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2천년 전에 동아프리카로 건너가 무역을 한 아랍 사람들

개마두리 2023. 10. 7. 23:26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인 서기 7세기 전반에, 아랍인 남성 무함마드가 아랍 사람들에게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일이 그 뒤에 펼쳐진 세계사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아랍 무슬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랍권()[아라비아반도와, 서양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부르는 자지라(아랍식 이름)’, 레바논과 요르단과 수리야(‘시리아의 바른 이름)를 한 데 묶어 이르는 말인 레반트(아랍식 이름은 ”)’와 북아프리카 북부와 (흔히 수단으로 불리는) ()수단과 에리트레아와 지부티와 소말리아를 통틀어 일컫는 말. 아랍 말을 쓰는 아랍 사람들과, 아랍인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이곳에 퍼져 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바깥에서 사는, 아랍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 사실에만 주목하여 서기 7세기 이전에는 아랍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했고’, ‘다른 세계에 이렇다 할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른 인식이다. 아라비아반도 동북부에는 아랍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1300여년 전에 북부 아랍인의 고대 왕국인 나바테아를 세워서 다스렸으며, 그로부터 7세기 쯤 뒤에는 아랍 사람들이 동아프리카 바닷가로 건너와 자신들의 별자리 보는 법과 돛단배 만드는 법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 공영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로도 입증된다.

 

아랍 사람들은 서기(AD) 1세기에 배를 타고 잔지바르로 내려왔는데, 그들은 이때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알아내는 방법(돛단배의 한 갈래인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다우> 만드는 법(잔지바르 원주민들에게 옮긴이) 전해 주었다.”

 

- ‘BBC Earth’ 채널의 다큐멘터리인 < 조애나 럼리의, 향신료를 찾아서 >에 나오는 설명

 

이 설명, 그러니까 다큐멘터리의 설명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쓰기 전에, ‘잔지바르가 어느 곳인지 모르실 한국인 여러분을 위해 그곳에 대한 설명부터 간단하게 하자.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인 탄자니아에 있던 왕국의 이름이자, 그 나라의 중심 도시가 지닌 이름이자, 그 도시가 세워진 섬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잔지바르 섬 뿐 아니라 여러 섬을 다스리기도 했다.

 

잔지바르는 페르시아 말로 검은 바닷가’/‘흑인들의 바닷가라는 뜻이고, 아랍 말로는 검은 땅이라는 뜻이다.

 

항만 도시인 잔지바르 시는 고대에 아랍인이 세웠고, “고대 로마와 페르시아의 유적이 발견된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나중에는 로마인과 페르시아인도 찾아오는(또는 건너와서 사는) 도시가 되었으며, 헬라스의 옛 문서에도 이 도시를 다룬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헬라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중세에도 이곳에 드나들었으며, 서기 1107년에 이곳에 모스크가 세워졌고, 고대와 중세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서기 1498년에는 이른바 대항해시대에 활동한 포르투갈인 모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이 도시에 도착해, 이 도시가 유럽에 알려졌다. 서기 1896년에는 잔지바르 왕국의 군대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져 잔지바르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로부터 예순일곱 해 뒤인 서기 1963년에는 영국에서 독립했으며, 그 이듬해에 탄자니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서기 19세기 말인 서기 1896, 그러니까 영국에 점령당하기 직전의 잔지바르 술탄국은 왕궁을 지녔고, “술탄으로 불리는 군주가 있었으며, “1200의 군인을 지녔고, “21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던 나라였다)

 

이 도시는 향료 무역과 노예무역으로 번성했고, 서기 19세기 이후 노예무역은 사라졌지만, 향료/향신료 무역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온 누리에서 나는 정향(丁香.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 열대지방의 나무고, 말루쿠 제도[민다나오섬의 남쪽/동티모르가 있는 티모르섬의 북쪽/파푸아뉴기니가 있는 파푸아섬의 서쪽/술라웨시섬의 동쪽에 있다]가 원산지이며, 약재나 방부제로 쓰인다. 구토/위암/복통/소화불량/잇몸 염증 및 잇몸 통증을 치료할 때 쓰인다)80%를 이곳이 만든다.

 

(덧붙이자면, 이 도시의 건축물들은 잔지바르 석조 해양 도시라는 이름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았다)

 

아랍 사람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랍의 어느 지역에 살던 아랍인들이 이곳으로 왔을까? 2천 년 전의 아랍 사람들이 이곳으로 건너오는 건 가능했을까? 지금부터 그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우선 잔지바르는 정향을 비롯한 향신료가 나오는 곳이었다. 고대의, 그러니까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전 시대(아랍 말로는 무지[無知]의 시대라는 뜻을 지닌 자힐리야로 부른다)에 살았던 아랍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향신료를 사려고 잔지바르로 건너온 것이다. 이는 현대(서기 1970년대 ~ 오늘날) 한국인들이 석유를 사려고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아라비아반도 남부와 동북아프리카(소말리아 포함)/동아프리카의 바다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북적도 해류가 흐르는데, 그 때문에 아라비아 남부에서 배를 띄울 수 있으면 해류를 타고 잔지바르로 가는 건 쉽다.

 

또한 이 세 지역은 양력 7월이 되면 남서 몬순으로 불리는 계절풍이 불어 그 바람이 동아프리카에서 동북아프리카와 남아라비아 근처로, 그러니까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때문에, 만약 돛단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탈 수 있다면, 이 바람을 타고 잔지바르에서 남아라비아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라비아의 바닷가에 살던 아랍 사람들은 해류의 도움을 받아 잔지바르로 갔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계절풍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아랍인도 내륙 사막에 살던 유목민이 있고, 동북부에 살던, 여름지이(‘농사’/‘농경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와 중개무역을 하던 사람들이 있고, 바닷가에 살던, 어부이자 뱃사람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누가 잔지바르로 건너갔는지도 알 수 있을까? 나는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게 짐작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아라비아반도의 남부에 예멘과 오만이 있다. 그리고 그 두 나라는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다. 그 두 나라의 남쪽으로 가다 보면, 잔지바르가 나온다. 그렇다면 고대의 아랍 사람들 가운데, 바다에 배를 띄워 잔지바르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두 나라에 있던 고대 왕국의 사람들이다(예멘은 시바의 여왕으로 알려진 군주가 다스렸던 고대 왕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고대 예멘인과 고대 오만인들이 잔지바르로 건너가 그곳 원주민인 동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만난 뱃사람들/장사꾼들이라는 이야기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의문이 남았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인 서기 1세기에, 아랍인이 배를 띄워 잔지바르로 건너가 그곳 흑인들을 만나고 무역을 할 수 있었을까? 이른바 순혈한국인이고, 국적도 한국이며, 아랍인이 아닌 나는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서너 해 전에 읽은 책에는 아랍인서기전 1000”,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23년 전에도 배를 띄워 무역을 했으며, 그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전에도 당나라 남부 바닷가로 건너와 무역을 했다는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서기전 1000년에 배를 띄워 무역을 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즈믄 해가 더 흐른 뒤인 서기 1세기에는 더 무역을 잘 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서기 1세기에 남아랍 사람들이 배를 타고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로 건너가 향신료 무역을 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갈마(‘역사’).

 

내 짐작을 과감히 덧붙이자면, 남아랍 장사꾼들은 잔지바르로 와서 그곳 원주민인 흑인들에게서 정향을 비롯한 향신료를 샀고, 그 대가로 밤에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알아내는 방법과 다우 만드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준 게 아닌가 한다.

 

뱃사람들은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위치가 바뀌면서 - 그 위치와 모양이 바뀌는 별자리를 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내야 했고, 돛을 단 배는 바람이 배를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 (노를 저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뗏목이나 나룻배보다는 훨씬 더 멀리(그리고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고대에는 나름대로 (근대의 증기선 못지않은) ‘첨단 기술을 지닌 운송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기술은 바다를 끼고 살던 잔지바르 원주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런 내 가설 겸 추측이 옳다면, 이것은 고대 문명 교류사의 일부로서 주목을 받아야 하며, 잔지바르 사람들을 비롯한 동아프리카 사람들과, 남아랍 사람들을 재평가하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남아랍 사람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6세기(600여년) 전부터 배를 타고 잔지바르로 가는 무역(향신료를 찾는 무역)을 했다는 이야기고, 그들은 잔지바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기술과 문물을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 사실을 중세 이전에도 아라비아에는 갈마(“역사”)가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고대에도 다른 지역, 예를 들면 동아프리카 사람들과 교류했다.’는 증거들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고 싶다.

 

나아가 동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이 건너오기 훨씬 전부터 서아시아나 북동 아프리카나 남아시아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했고, 그 교류를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꽃피웠으며, 유럽인들은 맨 나중에야 도착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증거로도 내세우고 싶고.

 

그렇다면 유럽인이 오기 전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어떤 문명도, 발전도, 변화도 없었다.’는 유럽 중심주의/백인 우월주의 사관(부끄럽게도, ‘순혈한국인들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아마존 지역이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이나 오세아니아나 몽골초원/중앙아시아의 갈마를 이해할 때 이 사관을 따른다.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 ‘한족[漢族]’들의 한국인 멸시나, 신국[神國]사상/제국주의 사상/군국주의 사상/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왜국[倭國]식민지 근대화론에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말이다!)은 잘못된 것이며, 잔지바르 사람들을 비롯한 동아프리카 사람들은 고대부터 다른 지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바꾸었던 사람들이라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부디 이 글이 순혈한국인들이 남아랍 사람들과 동아프리카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빌며, 이 글은 갈마 다시 쓰기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참고 자료

 

 

― 『 대약탈박물관 ( 작은 제목 제국주의는 어떻게 식민지 문화를 말살시켰나 . ‘댄 힉스지음, ‘정영은옮김, ‘도서출판 책과함께펴냄, 서기 2022)

 

― 『 세계지명 유래 사전 (‘송호열엮음, ‘성지문화사펴냄, 서기 2006)

 

― 『 중학교 사회과 부도 (류재명 외 4인 지음, ‘()천재교과서펴냄, 서기 2013)

 

― 『 고등학교 지리 부도 (이기석 외 4인 지음, ‘주식회사 보진재펴냄, 서기 1995)

 

아랍과 이슬람교를 다룬 다른 책

 

다큐멘터리

 

< 조애나 럼리의, 향신료를 찾아서 > (‘BBC Earth’ 채널)

 

누리그물

 

[두산백과 두피디아]

 

[세계인문지리사전]

 

단기 4356년 음력 823일에, 아라비아 사()와 동아프리카 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바뀌기를 바라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