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고조선 연구의 필요성 (5) : 끝

개마두리 2023. 10. 8. 22:51

(근세조선의 사대부들과 근대 왜국[倭國]의 식민사학자들과 현대 한국 강단사학자들이 만든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종래의 체계대로라면, 한민족(배달민족 옮긴이)은 단군조선 말기(실제로는, []부여 시대 옮긴이)衛滿(위만 옮긴이)에게 정권을 빼앗겨 중국(제하[諸夏]. 정확히는 전한[前漢] - 옮긴이) 망명객의 통치를 받아야 했고, 衛滿朝鮮(위만조선 옮긴이) 멸망 후에는 漢四郡(한사군 옮긴이)이 설치되어 한반도(코리아[Corea]반도 옮긴이)가 완전히 중국의 영토에 편입되어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 된다. 衛滿西漢(서한. 전한[前漢]의 다른 이름. 나라의 도읍이 서쪽 도시인 장안[長安]에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옮긴이)으로부터 망명을 온 해가 서기전 195년이고, 衛滿朝鮮이 멸망하고 漢四郡이 설치된 것이 서기전 108년이며, 漢四郡 가운데 가장 늦게 樂浪郡(낙랑군 옮긴이)이 축출된 것이 서기 313년 경이므로, 한민족은 무려 500여년 동안 중국인들(‘한족[漢族]’옮긴이)의 통치(사실은, 지배 옮긴이)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는 사실대로 복원되어야 하므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衛滿朝鮮의 건국과 멸망, 漢四郡의 설치 등은 고조선(원 부여 옮긴이)의 서부 변경이었던 지금의 遼西(요서 옮긴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고조선의 서부 영토가 일부 줄어들기는 했지만, 고조선이 그 중심부를 잃었거나 붕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열국시대에는 고구리[高句麗]가 한[]나라를 여러 번 치고, []나라 군사를 낙랑에서 물러나게 함으로써, 이 일에 확실하게 반격을 했다 옮긴이).

 

고조선(이른바 단군조선인 아사달/[]조선 옮긴이)衛滿朝鮮에 의하여 계승되었던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제하[諸夏]로 치면 제후국[諸侯國]’. 이는 서양에서는 영주로 불리는 사람들이 일본에서는 번주[藩主]’인 것과 같다 옮긴이)들이었던 扶餘(부여 옮긴이)/高句麗/挹婁(읍루 옮긴이)/沃沮(옥저 옮긴이)/崔氏樂浪國(최씨낙랑국. 올바른 이름은 낙랑국이나 낙랑 왕국’. 군현이 아니라 독립국가였다. 서기 1세기 전반에는 고구리의 지배를 받았고, 서기 4세기에는 유민들이 옛 사로국 땅인 경상북도로 망명했다 옮긴이)/東濊(동예 옮긴이)/(. 흔히 삼한[ 三韓 ]’으로 불리나, 후한서 와 정사[正史] 삼국지 에는 [ ]’이라는 항목으로 소개되었으며, 서진[ 西晉 ]과 동진[ 東晉 ]의 갈마를 다룬 역사책인 진서[晉書] 에는 마한진한만 나온다 옮긴이)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던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전조선은 서기전 1285년에 후기 신라나 후한 왕조처럼 - 안에서부터 저절로 해체되었고, 그로부터 온 예순네 해[‘164’] 뒤인 서기전 1121년에 세워진 후[]조선이 전조선을 이어받았으며, 그로부터 696년 뒤인 서기전 425년에 후조선의 뒤를 원[]부여가 이어받았고, 서기전 57년부터는 서나벌을 비롯한 여러 거수국이 원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와 원 부여의 뒤를 이었다 옮긴이)

 

이들이 각각 독립하여 여러나라 시대(한자로는, ‘열국시대[列國時代]’. 서기전 57년 서나벌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되어, 서기 297년 사로국의 멸망과 삼한백제의 코리아반도 통일로 끝난다 옮긴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윤내현, 고조선 연구 , 16

 

이상 고조선 연구 ( ‘윤내현지음, ‘일지사[ 一志社 ]’ 펴냄, 서기 1994)에서 퍼옴

 

단기 4356년 음력 824일에, 원래는 개천절에 올렸어야 할 글을 닷새 뒤인 오늘에야 올려, 부끄럽고 죄스러운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