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대일항전기]사촌누나 희롱한 일본인, 그를 향해 달려든 16살

개마두리 2023. 11. 3. 17:46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된 나주역 사건... 살아 숨쉬던 청소년들의 민족혼

 

11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서기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929113일 광주(오늘날의 광주광역시 옮긴이)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데요. 1953'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옮긴이) 정부가 폐지했습니다.

 

학생들이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였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다시 1984년 제11대 국회에서 '학생의 날'이 법정 기념일로 부활하였고, 2006'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3.1운동(3.1 혁명 옮긴이), 19266.10만세 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손꼽힙니다. 당시 10대 청소년들이 세상을 뒤흔든 대사건이었습니다. 19291030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어, 19305월까지 전국과 간도, 미국, 중국 심지어 일본에까지 확산된 저항이자 독립운동입니다.

 

저항은 전국으로 퍼져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항일 거리 시위가 이어졌는데요. 항쟁에 참여한 학교는 194, 학생 수는 54000여 명이었습니다. 퇴학 처분자 582, 무기정학 2330, 피검자 1642명으로 수많은 청소년이 옥고를 치렀는데요. (그것은 옮긴이)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민족 저항과 분출이었습니다.

 

일제의 거듭된 차별, 저항 의식 싹트게 하다

 

대전현충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분이 안장되어 계십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조직한 강석원 지사가 독립유공자 1묘역 263호에, 장석천 지사는 독립유공자 3묘역 38호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항쟁을 이끈 성진회와 독서회 간부였던 김성환 지사는 독립유공자 3묘역 24호에, 송동식 지사는 1묘역 133호에 계십니다. 투쟁의 한 축에는 여학생으로 구성된 소녀회가 있었는데요. 소녀회를 조직한 장매성 지사는 독립유공자 2묘역 83호에 잠들어 계십니다.

 

또한 대전현충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나주역 사건의 주인공이 함께 안장되어 계시는데요. 독립유공자 2묘역 893호 박준채 지사와 독립유공자 4묘역 206호 이광춘 지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920년대 전라남도에는 최고 교육기관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일본인 학생을 위한 광주중학교와 조선인 학생을 위한 광주 고등보통학교였습니다. 두 학교 학생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만나기만 하면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고등보통학교는 12세 이상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남성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4년제로 출발하였다가 중간에 5년제로 바뀌었는데,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와는 학교 명칭과 배우는 과목에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조선인에게는 실업교육을 가르쳐 하급 기술자로 양성하려는 일제의 의도였습니다.

 

19195월 말 통계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자녀의 진학률은 91%였고요. 조선인 자녀의 진학은 37%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인 거주민 1만 명당 113명이 입학했지만, 조선인은 1만 명당 1명이었습니다(현실이 이랬는데, 도대체 어떻게 대일 항전기[서기 1910~1945] 동안 한국인이 발전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헛소리 왜국 정부/학자/우익과 뉴라이트를 비롯한 종일[從日] 세력과 친일국가 출신인 학자/언론인들의 주장 - 가 나올까? 식민지 원주민인 한국인이 침략자/점령군/지배자인 왜인[倭人]보다 학교에 다니는 비율이 훨씬 낮았는데, 그럼 문명의 혜택들가운데 하나인 교육을 한국인이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고, 따라서 근대 왜국[倭國]의 한국 점령/식민 지배는 한국인에게는 불행이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야? - 옮긴이).

 

일제의 거듭된 억압과 차별은 자연스럽게 조선인 학생 사이에 저항 의식을 싹트게 했습니다. 1920년대 학생들이 선택한 대표적인 저항 방식은 바로 동맹휴학이었는데요, 192123건으로 시작한 동맹휴학은 192655, 192772, 1928년에는 83건으로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동맹휴학의 원인으로는 192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 교사가 저지르는 모욕적인 언사와 횡포가 많았습니다. 요구 조건으로는 설비개선, 교육 방법 및 교육과정의 시정,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이 있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동맹휴학의 성격이 변화했습니다.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 교육, 교내 조선어 사용, 언론 집회의 자유 등이 구호로 등장합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1929년이 되어서도 학생들의 저항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일제와 학교 당국은 유시 퇴학이라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탄압합니다. 저항 의식이 높은 학생을 교장의 직권으로 퇴학시켰는데요. 광주에서도 교내 분위기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932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식장에서 '광주고보 교장실 포위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시 퇴학을 당한 김봉길과 여도현이 '퇴학 처분 반대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고요. (그들이 옮긴이) 교장에게 공개적으로 따져 묻자, 교장은 교장실로 숨어버리는데요. 이에 학생들은 교장실 문짝을 부수고 창문을 깨뜨리며 소동을 벌였습니다.

 

경찰까지 출동해 학생들은 연행되었고, 이윽고 징역형까지 선고받았습니다. 같은 해 625일에는 5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습니다. 626일에는 2, 3학년 학생들이 따라 수업을 거부했습니다.

 

626일에는 '운암 역 개고기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광주로 학교에 다니던 학생은 인근 지역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통학 열차 중 한 칸은 일본인 중학생을 위한 전용칸이었습니다.

 

기차가 운암 역에 정차했을 때, 일본인 학생 곤도(近藤[근등 옮긴이])는 창밖을 보며 "저것 봐! 개고기! 조선사람들이 즐겨 처먹는 개고기! 조선사람은 야만인이야!"고 비아냥거렸습니다(한국인인 나는 이 때문에, 얼마 전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지 마라! 개를 비롯한 동물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라! 야만적인 관습을 버려라!”하고 외치며 그와 비슷한 글을 적은 팻말을 들고 한국인들을 상대로 시위를 한 왜인[倭人] 활동가들을 증오/비난할 수밖에 없는 거다.

 

내가 그들을 다룬 짧은 움직그림[유튜브의 쇼츠(shorts)’ 영상]을 보니, 그자들은 취재하는 한국인 유튜브 회원 앞에서 우리가 이런 시위를 하는 건 절대 인종차별을 해서가 아니다[왜인들은 자신들은 백인이고, 한국인이나 중화권한족(漢族)’들은 황인종이라고 여겨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이 개고기를 먹는 걸 그만두면, 다른 개고기를 먹는 나라들에 끼치는 영향이 강하고 시범 케이스가 되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이게 결국은 한국인한테도 좋은 거다.”하고 우기던데,

 

그럼 거의 1세기 전에 운암 역에 멈춘 기차 안에서 한국인을 <“개고기를 먹는 야만인조선 사람”>으로 부른 왜구[倭寇] 곤도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그건 차별이 아니야? ‘모욕이 아니고?

 

서기 1920년대에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다며 야만인이라고 낙인찍은 곤도와, 후손으로서 한국인에게 개고기를 먹지 말라! 야만적인 관습이다!”하고 소리지르는 서기 2020년대의 왜인 활동가들은 한국인을 개고기와 연결해서 생각한다는 점이 똑같고, 그걸 구실삼아 한국인을 야만적인 관습을 지닌 야만인이라고 낙인찍어 비난한다는 점이 똑같으니, 나는 오늘날의 왜인 활동가들은 1세기 전의 선조와 똑같은 고정관념을 지니고 한국인을 차별하고 모욕한다는 결론을 안 내릴 수가 없다!

 

비록 내가 개고기를 안 먹지만, 이런 일에는 도저히 말을 부드럽게 할 수 없다는 건 밝혀야겠다[한 마디만 더, 그렇게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요구하고 싶다면 왜인들은 왜 고래고기를 끊지 않는가? 그리고 왜 한국보다 개고기를 더 자주, 더 많이 먹는 비엣남(Vietnam)이나 홍콩이나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 사람들에게는 왜 비난을 하지 않는 건가?

 

‘<일본인[왜인]>이 고래고기를 먹는 건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문화고, <한국놈>이 개고기를 먹는 건 무조건 없애야 하는 악습이야.’하고 생각해서? 아니면 [한국과의 관계와는 달리] 비엣남과의 관계는 망가뜨리면 안 되는 관계라서? 제하는 신경을 건드리면 보복당할 게 뻔하니까? 나는 이런 의문을 안 품을 수가 없고, 화를 안 낼 수가 없다!

 

우리 한국인들은 주한 왜국 대사관 앞으로 가서, 왜인들의 시위를 되갚아주기 위해 왜국[倭國] 국민들은 고래고기를 먹지 마라!’/‘고래 학살을 멈추자!’/‘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악습을 근절하라!’고 쓴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큰 소리로 왜국의 고래 사냥을 고발한다! 왜국이 고래를 잡아먹음으로써 지구를 파괴하는 것을 고발한다!”고 외쳐야 한다! 우리 동족인 한국인 여러분, ‘맞불을 놓자! 왜구들이 이제 그만 속여먹게 만들자! 이런 일에는 절대 부드럽게 굴지 말자! - 옮긴이).

 

당시 조선사람들(한국인들 옮긴이)은 일본(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에 대부분 식량을 강탈당하고 초근목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못 이긴 일부 사람이 개고기를 먹곤 했습니다.

 

곤도(近藤)의 발언을 들은 조선인 학생 김기수 등은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다른 조선 학생이 함께 곤도(近藤)를 구타하며 응징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조선인 학생의 분노는 폭발할 계기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일본 학생의 조선인 희롱, 일본 경찰의 조선인 진압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30, 드디어 '나주역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은 하굣길에 벌어지는데요. 광주를 출발한 기차가 나주로 향하던 오후 530분 경이었습니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福田[복전 옮긴이])와 다나카(田中[전중 옮긴이])는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 곁에서 시시덕거리며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후쿠다(福田)는 박기옥에게 "'아이 러브 유'를 일본말로 뭣이라고 해석해요?"라며 희롱했고, 이광춘의 댕기를 당기며 "이것은 영어로 뭐라고 해?"라며 놀렸습니다. 여학생들은 분노를 삭이며 다른 칸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중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주역에 내려서까지 여학생들을 따라와 찝쩍거리며 놀렸습니다. 후쿠다(福田)는 박기옥의 댕기를 낚아채듯 잡아챘는데요. 이 광경을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던 박준채가 목격했습니다. 박기옥의 사촌 동생이었던 박준채는 후쿠다(福田)에게 뛰어가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쿠다(福田),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노 쿠세니(조선놈 주제에)!"(여러분, 보셨죠? 들으셨죠? 이래서 왜구[倭寇 : 왜국 우익과 그 지지자들] 앞에서는 절대 부드럽게 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것들이 조센징이라는 말을 하면, - 마치 흑인이 다른 인종들에게서 검둥이라고 불렸을 때, “이유를 막론하고고소하고 고발하고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주먹과 발로 두들겨 패듯이 한국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왜어[倭語]로 욕을 해야 해요! 1초도 참으면 안 됩니다! 한마디만 더하자면, 제가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방송국이 올린 움직그림을 보니, 몇 달 전쯤에 왜국[倭國]안에서 왜구[倭寇]인 남성이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서 일본 안에 사는 한국인 여성에게 조센징운운하며 너흰 원래 이렇게 더러워?”하고 비난을 했는데, 한국인 여성이 자신은 조센징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곱고, 아름답고, 부드럽게, 말로따지자, 더 화를 내며 한국인이 <조센징>이지, 그럼 뭐야?”하고 적반하장도 했다네요. 왜구들은 1세기 동안 바뀐 게 없고, 이제 옛날처럼 한국인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버릇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 옮긴이)

 

어린 박준채는 '센징노 쿠세니'라는 말을 듣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후쿠다(福田)의 멱살을 끌고 개찰구를 빠져 나왔는데요. 당시 주변에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인 김보섭과 최의선도 '센징노 쿠세니' 폭언을 듣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이 흥분해 달려왔습니다.

 

격분한 조선 학생들이 뛰어들었고, 주변 일본인 중학생도 합류해서 나주역 앞은 난투극이 벌어졌는데요. 일본인 중학생 50여 명과 조선인 학생 30여 명 간 백병전과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심정을 훗날 박준채 지사는 이렇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나는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 한 차에 통학하면서 민족 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사촌 누님이었으니, 분노는 더하였다. '조센징'이란 말이 후쿠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주먹은 그자의 면상으로 날아가 작렬하였다(아주 잘 하셨다. 오늘날의 우리도 이런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 나와 우리 동족에게 언어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 나한테 폭력으로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므로 - 폭력의 일종인 물리적인 폭력으로 응징을 당해야 한다! 넷우익도, 재특회도, 혐한 서적을 쓰는 왜국 작가들도, 한국을 모함하고 비난하는 왜국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 옮긴이).“

 

이때 일본인 순사가 난투장에 개입하며 상황이 정리되었는데요. 그런데 일본인 순사 모리다(森田松三郞[삼전 송삼랑 옮긴이])는 박준채의 목덜미를 후려갈기고 뺨을 때리며, 일방적으로 조선인 학생만 진압했습니다.

 

이를 본 조선 학생들은 '왜 한쪽만 때리는 거요?'라며 항의했지만, 노기등등한 순사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일본인 학생들은 유유히 떠났고, 조선 학생들은 서러움과 분함 그리고 억울함에 눈물만 줄줄 흘리고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이완용 같은 작자들[종일파(從日派)]은 칭찬하고, 독립투사들은 게으르게 산 족속으로 평가한 그리고 왜인이 되어 왜국 땅 안에서 살고 싶다고 떠든 - 한국[?] 웹툰 작가 윤 아무개에게 물을게. 이랬던 시대[대일 항전기]한국인이 행복하게 잘 살았던 시절이야? - 옮긴이).

 

이 소식이 순식간에 나주에 퍼지게 되고, 조선인 학생 학부모들이 경찰서에 항의 방문하는데요. 이 자리에서조차 일부 학부모는 뺨을 맞았으며, 폭언과 욕설을 듣고 쫓겨납니다.

 

다음날인 31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하굣길 통학 기차에서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박준채는 후쿠다(福田)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이야기하는데요.

 

"너 어제 우리 누나한테 희롱한 것 사과할 테냐 안 할 테냐?" 그러자 후쿠다(福田)는 이번에도 "건방진 자식!"이라며 박준채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싸움이 커지던 찰나 이번에는 기차 차장이 싸움을 말리러 오는데요. 그 와중에 주변 일본인 승객들이 "조선놈들은 애새끼까지 저 모양이다.", "센징 주제에 건방지다!", "센징 학생들이 잘못했다." 등 폭언을 내뱉었고(여러분, 보셨죠? 이게 왜구[倭寇]의 참 모습입니다. 그리고 1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는 이자들의 후예가 넷우익재특회라는 이름으로 길거리에 나와서 “<조센징>을 죽여라!”/“<조센징>은 기생충!”/“<조센징> 박멸!”을 외치고요. 게다가 이자들의 후예 가운데 어떤 놈은 혐한 서적을 열심히, 부지런히써서 팔아먹고, 어떤 놈은 국제무대나 가상공간에서 한국을 가난하고 더러운 나라”/“범죄가 들끓는 나라”/“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의 나라로 욕합니다. 현실이 이런데, 한국인이 윤석열을 비롯한 종일 세력이 강요하는 친일’/‘종일을 해야 할까요? 왜국과 [평소에 목숨 걸고 우익과 맞서 싸운 일본인이 아닌] 왜구들을 믿어야 할까요? - 옮긴이), 박준채는 서러움과 모멸감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1일에는 일본의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광주중학교 유도선생 이다(伊田[이전 옮긴이])는 나주역 사건 복수를 하겠다며 30여 명 일본 학생들을 이끌고 왔는데요(아무리 국적/민족이 달라도 그렇지, 명색이 교사라는 인간이 학생들한테 복수하겠다며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패싸움을 하러 와? 학생들끼리의 싸움을 말려도 모자랄 판에? - 옮긴이). 일본 학생들은 야구방망이와 죽창, 죽검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역 플랫폼에 매복해 있다가 이다(伊田)의 호각 신호에 일제히 돌격해서 조선 학생을 짓이길 계획이었는데요. 다행히 조선인 학생들이 먼저 낌새를 알아차렸고, 양 학교 선생님이 뛰어나와 충돌을 저지했습니다.

 

112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광주시민 사이에는 '어제 광주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조선인 학생이 많이 다쳤다느니', '중학생이 칼질하여 조선인 학생 수 명이 부상을 입었느니' 등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민족 차별에 억압당하던 조선인 사이에서는 무언가 '한바탕 터졌으면'하는 불안한 기대감도 감돌았습니다.

 

그리고 113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11, 기원절(紀元節 : 왜국이 세워진 날 - 옮긴이), 천장절(天長節 : 왜왕[倭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 여기서는 연호가 다이쇼인 요시히토 왜왕의 생일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과 더불어 일제 4대 국경일이었던 명치절(明治節)이었습니다. 일본 왕 메이지(본명 치카 도라키치’/‘오무라 도라키치’. 내가 이런 주석을 다는 까닭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블로그의 글인 「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1) ~ (9)메이지 일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오무라 도라키치라는 설명을 믿을 수 있는 까닭 을 찾아서 읽어보라 옮긴이)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요(‘특별한 날을 일컫는 말인 , 오무라 도라키치의 연호/시호인 메이지를 일컫는 한자인 명치[明治]’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공교롭게도 그날은 음력으로 103. 우리 민족 명절 개천절이었습니다.

 

조선인 학생은 우리 개천절은 기념하지 못하고, 일제 명치절 기념식에 끌려다녀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축제 같은 분위기였고,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서글픈 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단체로 저항했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야 하는 순서에서 아무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의 저항이었습니다. 학교 당국은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습니다. 원래 단체로 신사 참배를 할 계획이었는데요. 개별 참배로 바꾸고 학생들을 서둘러 귀가시켰습니다.

 

이윽고 광주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조선인 학생과 일본 학생 간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한 무리 학생들은 왜곡 보도를 일삼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고요(아주 잘 했다! 훌륭하다! 우리도 왜국 정부/우익/왕실/대다수 왜구들을 위해 봉사하는 한국 안의 대다수 종일[從日 : 왜국을 따름] 언론사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 옮긴이). 광주 신사 앞 천변에서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 조선인 학생 최쌍현의 얼굴을 단도로 찌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광주역에서 양측 학생 200여 명씩 몰려와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는데요.

 

오전의 충돌로 조선인 학생 10여 명이 부상 당합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광주 고등보통학교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 결집하여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데요. '우리의 투쟁 대상을 광주 중학생(광주시 안에 살거나 통학하는 왜인[倭人] 중학생 옮긴이)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로 돌릴 것,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 정책 반대 시위로 돌릴 것' 등이 논의됩니다.

 

오후 2시경 토론을 마친 학생 300여 명은 8열 종대로 스크럼을 짜서 교문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 농고,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합류하며 대열은 끝없이 불어났습니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각목과 장작을 가져다주며 환호했고요. 호떡 장사 아저씨는 호떡을 가득 가져와 나누어주고, 감 장수는 감을, 떡 장수는 떡을 나누어 주며 시위를 응원했습니다(한국[!]안에서 일장기를 들고 종일[從日] 시위를 하며 한국 독립투사들을 헐뜯는 오늘날의 자칭 한국 반공 용사들과는 달리, 1세기 전 한국 광주시에서 살던 한국인들은 자신의 적이 누군지,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옮긴이).

 

"신천지에 뻗어가는 우리 동포야,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 왔구나

무등산서 길러낸 힘 힘껏 써보세."

 

그날 하루 광주 시내에는 천여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 행진가와 만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뒤흔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에게 희롱당했던 이광춘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전면에 나서 투쟁했는데요. 113일 시위에서 치마에 돌멩이를 싸 들고 와 시위에 가담했고요. 1930113일 시험 시간이 되자 돌연 교단으로 올라가 백지동맹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이런 분을 한국의 여성 독립투사로 부르지 않으면, 어떤 분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분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여성분을 존경할 수 있을까? - 옮긴이).

 

붙잡혀 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했습니다. 이광춘 지사가 선도해서 백지 시험지를 두고 교실을 뛰쳐나오자, 친구들이 동조했고 이윽고 전교생 집단으로 시험을 거부했습니다. 이광춘 지사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박준채 지사는 1914년생입니다. 나라가 이미 강제로 병탄된 이후(그러니까,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옮긴이) 태어난 세대로, 1929년 당시 16세에 불과한 청소년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항쟁을 지도했던 이들 역시 16~24세 청소년 청년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래 단 한 순간도 자주독립 국가에 살아보지 못했음에도, 당시 청소년들의 민족혼은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작자들이 한 짓을 보고도 솔직히 나라도 친일[사실은 종일]했겠다!”고 말하며, 자신이 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것을 구실로 자신의 종일 예를 들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넷우익/재특회가 길거리에서 혐한을 드러내기 시작한 뒤에도 왜국 여행을 가겠다고 고집하는 일 을 합리화하는 오늘날의 한국 10~30대는 이 청소년들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 옮긴이).

 

- ‘김선재기자

 

- < 오마이뉴스 > 서기 2023년 양력 113일 자 기사

 

- 기사 원문 :

 

https://v.daum.net/v/20231103121203861

 

사촌누나 희롱한 일본인, 그를 향해 달려든 16살

[김선재 기자]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데요. 1953년 '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박정희 정부가 폐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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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 4356년 음력 920일에,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제 2, 3의 광주 학생 독립운동, 아니, 광주 학생 봉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