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9) : 끝

개마두리 2023. 11. 3. 18:02

▶ 일본 천황이 된 조선인 소년에 대한 추억

 

마스다 카스미(益田 勝實[익전 승실. 서기 1923~ 2010])’는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출신 국문학자로 호세이 대학(法政大學[법정대학])’ 문학부 교수를 지냈다.

 

그는 조슈 번 가로​(家老. 왜국에서는 ‘다이묘의 중신’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다이묘 집안의 무사를 통솔하며 다이묘의 집안일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중세 때인 가마쿠라 막부 때에 나타난 직책이다 – 옮긴이)였던 마스다가문의 후손이었기에, 메이지 유신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다.

 

한 예로, 그의 집안에는 고메이 왕이 사용하던 도자기 그릇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서기 1930년대 초? - 옮긴이) 한번 그가 이를 깨끗이 닦아버려 부모님에게서 호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고메이 왕이 사용한 것이었기에 ​(그의 집안사람들은 – 옮긴이)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했던 것이다.

 

그는 잡지 종말에서(終末から) (서기 1974년 8월호, 치쿠마쇼보[筑摩 書房(축마 서방)] 펴냄 – 지은이의 주석)에 실린 그의 논문 천황사의 일면(天皇史一面) 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메이지) 천황을 만든 것은 우리들이라고, 메이지 이전에 태어난 조슈 번의 노인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다. 근대 천황제(근대 이후의 왜국 군주제 – 옮긴이) 이전에 교토에 천황가는 있었지만, <천황의 국가>는 없었다.’

 

존황파(尊皇派. 황제[皇]를 높이는[尊] 무리[派]. 여기서는 메이지 유신을 계획하며 왜왕을 “새로운 전제군주”로 내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가 구상하고 있던 <천황의 국가>는 오로지 생각으로 획득된 것으로,

 

현실의 교토에 있는 천황(남북조 시대가 끝난 뒤, 수 세기 동안 여러 막부/실권자들의 감시 겸 보호를 받으며 아무런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꼭두각시 같은 왜국 임금들 – 옮긴이)과 실제 사람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의 천황과 현실의 천황이 융화되지 않고 모순이 격화되자(한 예로, 메이지 유신 직전에 현실 세계의 왜왕이었던 고메이는 막부 타도에 반대하고, 오히려 왕실이 막부와 손을 잡고 함께 서양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을 꾀했던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 옮긴이) 천황을 바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고메이 천황이 사용했던 접시는 (태평양 전쟁) 공습 때까지 있었다. 그 접시는 아마도 조슈와 천황의 사이가 원만하던 밀월시대(그러니까, 에도 막부 말기 – 옮긴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병대 거병(擧兵. <군사[兵]를 움직임[擧]> → 군사를 일으킴 : 옮긴이) 이듬해 1866(게이오 2) 말에 고메이 천황은 모살(謀殺. 미리 꾀하여[謀] 사람을 죽임[殺] - 옮긴이)되고 말았다. 물론 계획한 것은 에도 바쿠후가 아니라 (유신) 지사(志士) 측이다. 천황이 바쿠후를 타도함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서기 1930년대 초 – 옮긴이) 낮 목욕탕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으로 대신 히로부미가 된 때(서기 1880년대 중반 – 옮긴이)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아마 이 노인들은 반세기 전의 일, 그러니까 자신들이 젊었을 때 활동했던 동향 사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으리라 – 옮긴이).’

 

하나의 대()에서 벼락출세한 메이지 천황(오무라 도라키치 – 옮긴이)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그의 – 옮긴이) 아들인 다이쇼 천황(요시히토 – 옮긴이)의 정신 이상 일화(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한국의 『 역사 』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못해도 대일[對日] 항전기를 다룬 부분이나, 아니면 세계사를 다룬 부분에는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인 시모노세키의 노인들이 말한 사실이니, 이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 “반일 한국인의 날조”라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혹시 친일파나 왜국 정부가 검열이라도 한 건가? - 옮긴이)를 다양하게 공언(公言. 여러 사람 앞에서 뚜렷하게 드러내며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 옮긴이)하는 노인들의 모임은 몇 년 후(서기 1930년대 후반 – 옮긴이)에 목욕탕에서도 사라졌다.

 

안세(安政[안정]), 만엔(万延[만연]), 분큐(文久[문구]) 출생자들(안세와 만엔과 분큐는 모두 에도시대에 왜국이 썼던 연호다. 참고로 안세는 서기 1855년부터 서기 1860년까지 쓰였던 연호고, 만엔은 서기 1860년부터 서기 1861년까지 쓰였던 연호이며, 분큐는 서기 1861년부터 서기 1864년까지 쓰였던 연호다 – 옮긴이)이 빠르게 없어졌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오무라나 이토와 나이가 엇비슷한 – 또는 그보다 몇 살 적은 – 노인들이자, 왜국의 왕통이 바뀐 사실을 알던 왜국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서기 1930년대 후반은 근대 왜국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더 강해졌던 때이기도 하니, 노인들의 아들/딸들은 – 비록 자신들의 어버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어 진상을 알고 있었어도 – 왜국 왕실과 우익과 군부와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그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 옮긴이).’

 

따뜻한 탕 안에 몸을 푹 담그면, 노인들은 가볍게 입을 열어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 왜국 정부와 왕실이 숨기던 – 옮긴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이웃에 살고 있던 곰보 소년 한 명(오무라 도라키치 – 옮긴이)이 어느 날(서기 1868년 – 옮긴이) 갑자기 왕(메이지 왜왕 – 옮긴이)이 되어버린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天]이 놀라고[驚] 땅[地]이 움직이다[動]’ →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 : 옮긴이)의 사건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보태고, 탕에서 올라오는 안개처럼 아스라한 추억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이제 그러한 이야기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바다 건너 한국의 입장(처지 – 옮긴이)은 전혀(완전히 – 옮긴이) 다르다. (그것은 – 옮긴이) 이제부터 더욱더 듣고 또 듣고 새겨야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조용준,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546 ~ 581

 

-> 이상 모두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조용준 지음, '()도서출판 도도' 펴냄, 서기 2018)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