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8)

개마두리 2023. 11. 3. 18:15

쇼와 왕 히로히토 생모도 조선계?

 

데이메이 왕비 역시 명망가의 하나인 구조가문의 딸로 돼 있지만, 사실은 조선계인 사다아키(朱貞明[주정명])’라고 하는 설이 있다.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 바쿠후(도쿠가와 막부, 그러니까 에도 막부 옮긴이)로부터 접수한 왕궁 지요다 성을 고급 유곽으로 삼았다. 유신(이 글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줄인 말 옮긴이)으로 인해 가계(家計. ‘집안[]의 경영상태[]’ 살림살이/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방도나 형편/생계 : 옮긴이)가 기울어진 사무라이 자식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딸들을 뽑아 데려다가 메이지 왕 오무로(항간에는 무쓰히토로 알려졌던 오무라 도라키치옮긴이)와 이로 히로부미 등 친우(親友. 친한 벗/친구 옮긴이)들이 놀았던 놀이터였던 것이다(이러니 메이지 왜왕이었던 오무라가 성병에 걸리지! 뿌린 대로 거두었고, 자업자득이네! 도대체 친일파들과 친일국가의 시민/국민들은 이런 놈이 뭐가 위대하다고 추켜세우는 거야? - 옮긴이).

 

사다아키(한자로는 정명[貞明]’ - 옮긴이)도 조슈 번 무사에게 속아 지요다 유곽에 들어갔고, 이후 사내 구실을 못하는(요즘 말로는 성 불구자인 - 옮긴이) 요시히토에게 시집을 갔다고 하는 스토리다(그러니까 오무라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데리고 놀던 여성[사다아키 씨]을 자기 아들인 요시히토에게 보내 며느리로 삼았다는 이야긴가? , 더 더럽고, 더 역겹네! 도대체 인륜과 도덕은 어디로 갔어? 여성의 인권은 어디에 있고? - 옮긴이).

 

이토 히로부미가 호색광(好色狂. , 그러니까 성[]에 미친 사람/색정[성적 욕망/색욕]을 만족시키려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 옮긴이)이라는 사실은 일본 전체가 다 알 정도로 유명해서, 각종 매체의 만평에도 단골 메뉴로 올랐다.

 

헌정(憲政. 입헌 정치 옮긴이)의 수호신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당선 25, 의원 근속 63년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오자키 유키오(尾崎 行雄[미기 행웅]. 서기 1858~ 1954)’가 평가한 이토는 이러했다.

 

그는 여색(女色. 여성과의 육체관계 옮긴이)을 좋아한다. 늙은 기생, 어린 기생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싫증이 나면 곧 잊어버리고, 자신이 관계한(성관계를 맺은 옮긴이) 여자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탄(忌憚. 어렵게 여기어 꺼림 옮긴이)없이 이야기했다.’

 

이토 자신도 자신의 호색성에 대해 솔직했다.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고, 축재(蓄財. 재물[]을 모아서 쌓음[] - 옮긴이)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國事. 나랏일 옮긴이)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기생을 상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

 

이토는 조선총독부(좀 더 정확히는 통감부[統監府]. 서기 1905년 근대 왜국이 대한제국에게 을사늑약을 강요한 뒤, 대한제국이 완전히 멸망하는 서기 1910년까지, 왜국이 한국 침략을 목적으로 오늘날의 서울에 두었던 기관. 서기 1910년 양력 829일 이후에는 통감부가 해체되고 대신 조선총독부가 들어선다 옮긴이) 통감(통감부의 장관. 조선 총독과 같은 일을 했다 옮긴이)으로 부임하면서 7가지 물건을 챙겨왔는데, 그중 필수적인 것이 정력 강화제, 성병 전용 약과 매독약, 춘화도(春花圖. ‘봄꽃[春花]을 그린 그림[]’ 양성[兩性] 사이의 성관계를 그린 그림 : 옮긴이)였다.

 

그러니 그가 메이지호색일대남(明治好色一大男[명치호색일대남. 그러니까, < 명치(“메이지”)시대에 사는, 여색을 굉장히 좋아하는 남자 >라는 뜻이다 옮긴이])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이런 놈을 존경받아 마땅한 정치인으로 부르는 왜국 우익과 친일파들은 이런 놈과 같은 부류인 모양이다 옮긴이).

 

요시히토의 아들 쇼와 왕, ‘지치부노미야(秩父宮[질부궁])’,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고송궁])’, ‘미카사노미야(三笠宮[삼립궁])’ 네 명은 모두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간의 얼굴도 닮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곡절일까? 아버지(생물학적인 아버지. 그러니까 친아버지 옮긴이)가 모두 다른 것일까(그렇다면, 사다아키 왕비는 사이온지 하치로 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 세 명과도 차례차례로 잠자리를 함께 한 뒤 지치부노미야/다카마쓰노미야/미카사노미야 왕자를 낳은 것인가? 옮긴이)?

 

어쨌든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데이메이 왕비는 첫째 히로히토보다는 둘째 지치부노미야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그렇다면, 사다아키 왕비는 사이온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성과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이온지 이후에 만난 두 번째 남자[지치부노미야의 친아버지]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게 아닌가 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아들을 만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뜻도 되니까 옮긴이).

 

(그래서 옮긴이)왕 자리도 첫째보다 둘째가 오르기를 원했다.

 

또한 그녀는 조슈 번을 매우 싫어해서, 첫째 며느리, 즉 쇼와 왕의 아내로 사쓰마계인 나카코(良子[양자])’를 들였다. 둘째 며느리, 지치부노미야의 아내 역시 조슈와 거의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는 아이즈마쓰다이라가문의 세스코(勢津子[세진자])’로 선택했다. 그녀가 이렇게 하나같이 조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지역의 규수(閨秀. 남의 집 처녀를 점잖게 일컫는 말 옮긴이)며느리로 맞은 것은, 자신을 지요다 유곽에 강제로 끌고 온 조슈 번에 대한 감정 때문으로 본다.

 

(사연을 알고 나니, 비록 남의 나라 사람이고 적국의 왕비였지만, 사다아키 왕비가 참으로 안쓰럽고 불쌍하다.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 조슈 번, 그러니까 야마구치 현에 반감을 품은 것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리고 과감히 추리하자면, 사다아키 왕비가 만난 지치부노미야 왕자의 친아버지는 조슈 번 출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데, 만약 조슈 번 출신이었다면 조슈 번의 무사들에게 짓밟혀 삶이 망가진 사다아키 왕비가 만나서 잠자리를 같이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지치부노미야 왕자에게 애정을 쏟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옮긴이)

 

지난 2001(벌써 스물 두 해 전이다 옮긴이), 한일 월드컵 계최를 앞두고 현재(지금으로부터 다섯 해 전인 서기 2018옮긴이)아키히토(明仁[명인]. 히로히토의 아들이자, 오늘날의 왜왕인 나루히토의 아버지 옮긴이)왕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던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과 초청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왜국으로 옮긴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 악부(樂部)의 악사(樂師) 중에는 당시 이민자의 후손 대대로 악사를 맡아 지금도 그때 아악(雅樂. 전통음악이자 궁중[宮中] 음악 - 옮긴이)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정과 한국 사람들의 친절한 태도에 의해 일본에 소개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에 왜 열도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옮긴이) 일본의 후속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으로는 간무천황(桓武天皇[환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으로 (일본의 고대 역사책인 옮긴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때부터 일본에 오경박사(五経博士)가 대대로 초빙되었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 백제 성왕[聖王] - 옮긴이)은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러한 교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왕가의 선조가 백제에서 온 것임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했던 이 기자회견, 더구나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는 발언은 매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간무천황의 생모보다 아키히토 왕의 할머니인 데이메이 왕비가 조선계임을 말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어쨌든 위에서 죽 봐왔듯, 일본의 상층부는 중세시대 봉건주의에 의한 지역적 원한이나 패권을 놓고 지금도 암투를 계속하는 것이어서, 현재의 자민당과 민주당 등 정당 싸움이나 도쿄의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하케관])’ 관료들의 싸움도 이런 배경을 모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사실은 근대 왜국에서 일어난 육군과 해군 사이의 험악한 대립이나, 왜국 경찰과 군대의 대립/갈등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이어진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립이나 왜국 경찰과 자위대의 대립 도 이런 봉건주의를 바탕으로 삼은 대립이 겉모습만 바뀌어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그 문제를 다룬 움직그림들을 올려서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옮긴이).

 

( 9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