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7)

개마두리 2023. 11. 3. 18:24

▶ 대를 이을 능력이 없는 다이쇼 왕, 아버지를 닮지 않은 네 명의 왕자

 

메이지 왕이 바꿔치기 된 것이라는 얘기는 거의 확실한 사실인 듯한데, 그에게는 또 하나의 소문이 따라다닌다. 즉 매독 감염설이다. 매독은 에도시대 개항과 함께(그렇다면, 서기 1868년 이후? - 옮긴이) 유럽 상인에게서 일본에 들어왔다.

 

메이지 왕(그러니까, 오무라 도라키치 – 옮긴이)이 매독에 걸렸다고 하는 이유(까닭 – 옮긴이), 그에게 5명의 친왕(왕자)10명의 공주가 있었지만, 거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첫째아들과 첫째딸은 둘 다 사산(死産. 죽은[死] 뒤에 어머니의 배 밖으로 나옴[産] - 옮긴이)이었고, 둘째아들과 둘째딸 또한 요절했다. (오무라의 왕비가 아니라 – 옮긴이) 궁녀 야나기하라 아이코(柳原 愛子[유원 애자])’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요시히토는 이런 난관을 뚫고 가까스로 태어나서 유일하게 살아난 기적의 아이였다. 그 다음의 왕자와 공주들도 모조리 요절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요시히토 – 옮긴이) 또한 어려서부터 너무 병약했는데, 선천성 매독이 그 원인이었다. 선천성 매독은 (오늘날 아기들가운데 일부가 태어나자마자 걸리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이즈’]이 그 부모들[또는 부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에이즈에 걸렸기 때문에 생기는 병인 것과 마찬가지로 – 옮긴이)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매독에 걸려 자식에게도 이어진 것인데, 그 시대(서기 19세기 말 – 옮긴이)(엄격한 성도덕을 강요당했던 – 옮긴이) 궁녀가 매독에 걸려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니, 메이지 왕이 병에 걸려 옮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다른 시대도 아니고, 근대에 왕비가 아닌 궁녀에게서 자식을 얻은 일도 그렇고,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매독에 걸린 것도 그렇고, 정말이지 오무라는 역겨운 인간이다. 하긴, 그자의 신하이자 동무였던 이토 히로부미도 자타가 공인하는 호색한이었으니, 정말이지 “끼리끼리 논다.”는 속담은 진리네! 친일국가의 시민/국민들은, 그리고 친일파들이나 이른바 ‘게이샤 학자’들[왜국을 철저하게 감싸고 칭찬하며, 왜국의 피해자들은 비난하는 제 3국 출신 학자들. 이들이 왜국 기생인 ‘게이샤’가 손님의 비위를 맞추듯이, 철저하게 왜국의 비위를 맞춘다고 해서 이렇게 비꼬아 부른다]은 이런 사실은 제대로 알고 나서 왜국을 추켜세우는 거야? – 옮긴이).

 

다이쇼 왕(본명 ‘요시히토’ - 옮긴이)21세가 되던 190015세의 구조 사다코(九條 節子[구조 절자. 서기 1884~ 1951])’와 결혼하는데, 선천성 매독으로 병약했던 그가 후사를 볼 수 없음(그러니까, 자식을 만들 수 없음 – 옮긴이) 또한 당연하다.

 

그러면 (왜왕 히로히토를 비롯한 – 옮긴이) 그의 아이들은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미리 말하자면, 쇼와 왕 히로히토(裕仁[유인. 서기 1901~ 1989])는 구조 사다코, 데이메이 왕비(貞明[정명] 황후[皇后]. “데이메이”는 존칭이고, “구조 사다코”가 이름이다. - 옮긴이)와 요시히토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이온지 하치로(西園寺 八郞[서원사 팔랑. 서기 1881~ 1946])’가 아버지(그러니까, 친아버지 – 옮긴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 사정을 일본의 가장 추악한 날 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사이온지 하치로는 조슈의 마지막 번주(藩主. 제후. 서양으로 치면 영주 – 옮긴이)모리 모토노리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조정의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입양된 인물이다(그러니까, 그의 원래 성은 ‘모리’인 것이다 – 옮긴이).

 

그런데 그 중개를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하고 있다. 하치로는 독일(도이칠란트 – 옮긴이)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는 가쓰라 타로(桂 太郞[계 태랑])’ 총리의 비서관으로 일하다가 궁내성으로 자리를 옮겨 줄곧 궁내성에서 쇼와 왕 히로히토의 측근으로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 왕과 이토 히로부미도 다이쇼 왕 요시히토가 (체질상 – 옮긴이) 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사이온지 하치로를 데이메이 왕비의 침소에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정말 역겹다. 그렇다면 신하가 주군의 아내를 범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주군의 아버지와 대신이 인정한 범죄라는 뜻 아닌가? 왕비의 인권과 존엄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국 왕실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분노하고 경멸해야 마땅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 옮긴이).

 

그렇다면 지금의 일본 왕실은 사실상 사이온지 왕조이고(히로히토부터는 다시 계보가 제대로 이어져서, 오늘날에는 그의 손자인 나루히토가 왜국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 옮긴이), 사이온지가 모리 가문(출신 – 옮긴이)의 양자인 만큼, 다시 조슈 번 모리 가문의 왕조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참으로 끈질기고 끈질긴 조슈 번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굳이 모리 가문 출신을 왕비 침실에 넣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혼맥(婚脈.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유대 관계 – 옮긴이)까지 좌지우지하면서 일본 왕실을 장악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왕실(좀 더 정확히는, 대한제국 황실 – 옮긴이) 혼맥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 서기 1897~ 1970)의 결혼도 그가 결정했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은 10살 때인 1907(이때 순종황제[사실은 근대 왜국 정부]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고,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대한제국군이 총을 들고 일어나 근대 왜군[倭軍]과 싸움으로써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 옮긴이)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영친왕에게는 성균관대사성과 비서원승(祕書院丞. 근세조선/대한제국의 벼슬 이름. 정 3품에 속했다 – 옮긴이)을 지낸 민영돈(閔泳敦)’의 딸 민갑완이라는 정혼자(혼인하기로 정한 사람. 약혼자 – 옮긴이)가 있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이본궁 방자])’, 즉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방자 여사의 어머니가 마지막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딸인 나베시마 이즈코(鍋島 伊都子[과도 이도자])’. 임진왜란(6년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 옮긴이)때 시작된 조선과 사가 번 나베시마 가문과의 악연은 이렇게 또 한 차례, 조선의 마지막까지 얽혀졌다.

 

( 8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