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1941 ~ 1945, 태평양전쟁 - (1)

개마두리 2024. 10. 9. 23:44

머리 사냥꾼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오늘날에는 이 섬을 브루나이 왕국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나눠 갖고 있다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보르네오 섬의 산지 밀림에 살던 여러 원주민 부족은 그들(네덜란드 정부와 영국 정부 - 옮긴이)의 통제를 받았다. 그중에는 원주민들이 가진 종교적 관습의 금지도 들어 있다.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면 적을 살해하여 머리를 자르고 그것을 말려서 훈제한 후 장식으로 쓰는 관습이다.

 

(서기 옮긴이) 194112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몇 개월 만에 이들은 그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들 중 개화된(‘서구화한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 원주민 행정관은 강제로 일본군과 원주민의 연락을 담당하며 일본군을 도와야 했다.

 

194411, 비행기를 잃고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공군 조종사 두 명이 이 지역에 낙오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원주민들과 마주쳤는데, 공포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을 향해 원주민들은 놀랍게도 미군이다!”라고 소리쳤다. 원주민들은 (미국인과는 - 옮긴이) 언어가 다른데도 이미 미군이란 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명의 미군이 도착한 후부터 원주민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일본군에 눌려 있던 원주민들이 이를 계기로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원주민들은 두 명의 미 공군을 보호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공군들을 찾으러 나선 일본군 정찰대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더구나 원주민들은 금지된 머리 사냥도 재개했다. 살해한 일본군의 머리를 잘라 말리고 훈제했다.

 

얼마 후, 영국에서 파견된 작전부대가 공수되었다. 이들의 대장은 인류학자인 톰 해리슨 소령이다. 그는 원주민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곧바로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게릴라(한자로는 유격대[遊擊隊]’ - 옮긴이) 부대가 조직되었으며, 치명적인 독화살과 머리 사냥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의 일본군 학살이 이어졌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00여 명의 일본군이 희생되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본군의 점령이 시작된 이후로 일본군은 원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던 미국 선교사를 무참히 학살했다. 나아가 원주민들의 식량과 가축을 징발했으며 특히 부족의 원주민 여성들을 희롱하고 능욕했다. 원주민들은 분노했다. 그러다 낙오한 미 공군을 만난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군에게 - 옮긴이) 보복과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다. 인터넷에서 2차 세계대전의 비화 - 머리 사냥꾼을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명성에 걸맞게 이 다큐멘터리의 논증은 치밀하다. 전문적인 역사학자의 연구와 자료, 당시 원주민 및 낙오한 미 공군의 증언이 들어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요지 중 하나는 점령군으로서 일본군은 점령군으로서 연합군에 비추면 악몽이었다는 것이다. 연합군이나 일본군이나 원주민이 아닌 자신들의 이득에 몰두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점령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좋은 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원주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훨씬 끔찍한 악몽이었다.

 

알다시피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의 일부를 이루는 전쟁 옮긴이)에서 동남아(동남아시아 옮긴이)를 점령한 일본군의 오만하고 잔악한 행태는 전문 학술서는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교과서 수준의 역사책에도 나와 있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자는 한 줌의 일본 우익뿐이다.

 

전쟁 초기, 일본이 순식간에 동남아를 점령했을 때까지만 해도 구미(서양 옮긴이) 백인의 지배를 받던 많은 식민지 원주민들(예를 들면, 비엣남[Vietnam]의 킨[비엣]족이나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이나 미얀마의 버마족 옮긴이)은 기대감으로 환호했다. 일본군이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구미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과 증오로 바뀌었다.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학살과 강제노동, 민족주의적 멸시와 파탄에 이르는 일본군 전시행정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아무도 일본군을 연합군보다 나은 점령군이라 믿지 않게 되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일본군이 대동아공영권의 신질서를 주장하며, 즉 학살과 착취와 멸시의 직접적 대상인 피정복민인 원주민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저질렀다는 옮긴이) 것이다.

 

이는 작정하고 유태인(좀 더 정확히는, 서양의 유대교 신자들이었던 아슈케나지 옮긴이)을 제거하겠다고 나선 히틀러와는 또 다른 측면으로 물리적 만행 이상의 공포를 주는 정신분열증(오늘날 쓰는 말로는 조현병’ - 옮긴이)이다.

 

이와 유사한(비슷한 옮긴이) 게 있다면 악질적인 성폭행범의 논리다. 그들은 성폭행 피해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으며, 심지어 피해자는 가해자인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엽기적인 사이코패스([] 사회적 인격 장애 옮긴이)의 논리를 주장한다. 적어도 히틀러는 유태인을 향해 이런 말을 지껄이지는 않았다.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영혼과 지성을 도려내려 했던 이 행태로 보자면 일본군 머리 사냥은 1000개 아니라 1만 개라도 부족할(모자랄 옮긴이) 판이다.

 

다시 말해 점령군으로서 일본군의 행태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필요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일본의 정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이처럼 위의 사례는 문제의 핵심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일본(왜국[倭國] 옮긴이)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비난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옮긴이) 필요한 것은 혐오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해다. 전쟁(태평양전쟁 옮긴이)을 살펴보는 이유(理由. 순수한 배달말로는 까닭’ - 옮긴이)가 여기에 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