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劉邦)이 이끌던 전한(서한)의 군사 32만 명은 훈나(한자로는 ‘흉노’) 제국의 군사에게 크게 패했는데, 그 까닭은 훈나 제국은 “10만 명의 기병”을 동원한 반면, 전한(서한)은 군사 32만 명 가운데 기병이 “3000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전자는 10만 대가 넘는 전차(탱크)로 이루어진 부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후자는 대부분 총 든 보병이고 전차는 3000대 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 패배 때문에 전한(서한)은 일흔 해 동안 훈나 제국의 신하 나라로 살아야 했고, “한나라 공주(가짜였지만 - 옮긴이 개마두리)”를 훈나의 황제인 ‘선우’에게 시집보내야 했으며, 해마다 “비단/술/음식 등”을 바쳐야 했다.
이런 관계는 유철(시호 ‘한 무제’)이 한나라의 황제가 된 뒤에야, 그것도 유철이 훈나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야 뒤집히게 된다.
- 참고자료 :『 만화로 읽는 중국사 1 』(글/그림 ‘류징[劉京/유경]’, ‘이선주’ 옮김, RSG 펴냄)
- 음력 4월 15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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