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은우시’님이 2009년 양력 3월 20일에 올린 ‘곽상학(郭翔鶴)’ 님의 글
- 출처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611
역사적인 원인으로 수십년이래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의 역사학계에서는 하나의 현상이 존재했다. 폄명양청(貶明揚淸. 명나라를 깎아내리고 청나라를 치켜세우다). 명나라는 군주가 멍청하고 신하가 탐욕스러우며, 사회는 어두웠고, 문화와 과학기술은 타락한 시대로 그려졌다. 청나라는 강건성세(康乾盛世,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는 태평성대)를 계속 언급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청나라가 통치 말기까지도 명나라의 사회/문화, 경제 성취를 따라가지 못했던 사실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무지한 학생과 민중들에게 왜곡된 역사내용을 주입시켜왔다.
역사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필자(곽상학 님 – 옮긴이)가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명나라가 이들 역사학자들이 묘사한(그려낸 – 옮긴이) 것처럼 암흑시대가 아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권력분립체제를 갖추고, 군권이 강력하게 제약을 받고, 선비들이 국가의 운명을 장악했던 국가(나라 – 옮긴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대한 시민계층을 보유하고, 해외무역에서는 전세계(온 누리 – 옮긴이)를 선도하였으며, 과학/기술/문화도 급속히 발전하였고, 도시 주민의 수량도 신속히 확장되고 생활이 행복했던 사회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동서양을 오가던 외국인(정확히는, 서양인 – 옮긴이)은 이미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명나라 사회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중국 사회를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1585년 멘도사의『 중화대제국사 』가 출판된다. 그리고 16세기말을 전후하여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도이칠란트어 – 옮긴이), 포르투갈어 및 네덜란드어 등 7종류의 문자(‘언어’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나? - 옮긴이)로 번역되어(옮겨져서 – 옮긴이) 모두 46판이 발행된다. 이 책은 16세기 중국의 자연환경, 역사, 문화풍속, 예의, 종교/신앙 및 정치, 경제 등 가장 전면적이고 가장 상세한 저술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그들(의 특징은 – 옮긴이) 첫째로 아주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집안 뿐 아니라,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거리에 서너곳의 공공 휴게소를 마련해두는데, 배치가 아주 잘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무에 바쁜 사람들은 거리에서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고, 그곳에서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유사한 방식이 전국의 모든 도로에서 통한다. 어떤 도시의 거리는 배가 다닐 수 있는데,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같다.”
“그들은 중국(명나라 – 옮긴이)의 다른 성에서는 특이하고 뛰어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아마도 선장 ‘아트리에다’가 본 그런 것일 것이다. 그는 국왕 ‘필리페’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필리페 왕 – 옮긴이)에게 이 국가의 비밀을 보고했다. 그 안에는 중국인들은 우리와 같이 각종 무기를 사용하고, 그들의 포는 아주 좋다고 하였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는 배 위에 설치된 각종 포를 보았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잘 만들었고 더욱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를 위하여 크고 견실한 배를 만드는데, 높은 선루(船樓)가 있다. 각각 뱃머리와 뱃꼬리에 둔다. 마치 레판트에서 온 배, 포르투갈인들이 동인도로 몰고 온 배와 닮았다. 그들의 배는 아주 많다. 한 장교는 4일만에 600여명의 군대를 모집할 수 있다. … 그들은 다른 종류의 배가 더 많고, 어떤 것은 그림을 그리고 금칠을 한 복도와 창문이 있다.”
1613년 예수회 선교사 ‘증덕소(曾德昭[명나라에서 쓰려고 만든 한식(漢式) 이름이지, 본명은 아니다. 이는 '마테오 리치'의 한식 이름이 '이마두'인 것과 같다 – 옮긴이])’는 중국 남경에 도착했고, 1636년에 유럽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 옮긴이) 귀국하는 도중에『 대중국지 』라는 책을 완성한다. 그는 중국에서 22년여를 머물렀는데, 마침 파란만장한 명나라 말기였다. 그가 기록한 명나라 말기의 사회와 이후 청나라 조정의 어용(御用. 권력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 옮긴이) 문인들이 묘사한 “황제는 멍청하고 무능하며, 정치는 어둡고 부패하고, 인민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완전히 – 옮긴이) 다르다. 이때는 경제가 번성하고 문화가 창성하며, (명나라는 – 옮긴이) 거대한 활력이 넘치는 나라였다 :
“그들의 주택은 설계가 잘 되어 있어서 살기 편하다. 깨끗하면서 편안하다.”
“남방 9개 성(城)의 마지막 성은 남경(南京)이다. … 중국에서 가장 좋은 성 가운데 하나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 서부지역은 가장 부유하고, 면사(綿絲. 솜에서 자아낸 실/무명 실 – 옮긴이)가 많이 난다. ‘상주성(Chincheo)’ 및 부근의 광대한 지역에만 20만 대의 직포기(베틀 / 베 짜는 기계 – 옮긴이)가 있다. 직포기는 작아서 한 방 안에 여러 대를 둘 수 있다. 거의 모든 부녀들이 이 일을 한다.”
“중국인은 천성적으로 장사를 좋아한다.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가서 (물건을 – 옮긴이) 매매해서 큰 돈을 벌 뿐 아니라, 같은 도시 안에서도 장사를 한다. 상점 안의 물건은 거리에서도 거의 팔고 있다. … 부유한 상인은 신용이 양호하고 (약속 – 옮긴이) 시간을 잘 지킨다.”
명나라 때 (‘한족[漢族]’들이 – 옮긴이) 건립한(만들어 세운 – 옮긴이) 선진적인 권력 견제 체제도 유럽인들의 찬탄을 불러왔다. 아래에 인용한 글들은『 마테오 리치 중국 여행기 』에서 명나라 정치체제에 대해 기술한 것들이다. 이 책의 제1권 제6장「 중국의 정부기구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스스로 황상(皇上.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 – 옮긴이)도 이번에 공개 조사한 조사관이 한 결정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친히(몸소/직접 – 옮긴이) 보았다.”
“내가 본 것은 판결을 받은 자의 명단을 단행본으로 만들어 전국에 발행한 것이었다.”
“비록 우리는 이미 중국의 정부 형식이 군주제라고 말했지만, 앞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해졌겠지만, 아래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일정한 정도에서는 귀족정체이다. 만일 대신과 협의하고 그들의 의견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면, 황제 본인은 국가 대사에 대하여 최종 결정을 할 수가 없다. 모든 문건은 반드시 대신이 살펴본 후에(뒤에 – 옮긴이) 황제에게 올린다.”
“나는 이미 철저한 조사/연구를 했다. 아래의 상황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만약 – 옮긴이) 어떤 대신이 요청하지 않으면, 황제는 어떤 사람을 관직이 임명하거나, (그 사람의 – 옮긴이) 권한을 확대시킬 수 없다. 당연히 황제는 그의 가족(식구 – 옮긴이)과 관련된 사람에게 하사품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다만 이 하사품은 국가 공금으로 (하사 – 옮긴이)해서는 안 되고, 황제가 내리는 하사품은 공금에서 꺼낼 수 없다.”
“그들(명나라 때 도찰원에 소속된 십삼도감찰어사)은 어떤 측면에서 우리가 말하는 공중 양심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최고의 관리이거나, 황제 본인이나 황족에 관련되더라도, 그들은 직언(바른말 – 옮긴이)을 한다. 그들이 이처럼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외국인들이 보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황상이건 대신이건 모두 그들의 용감함과 직언을 피해갈 수가 없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들이 황제를 화나게 하여 황상이 그들에게 진노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들은 계속하여 진언하고 비판한다. 그들이 맹렬하게 비판하는 악행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는 ….”
“사실상, 아주 억울한 경우에는 그들의 공소는 아주 날카롭다. 비록 황상과 조정에 관련되더라도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다. 황제에게 올라오는 모든 문건과 그들에게 내리는 답신은 여러 부가 복사된다. 이렇게 하여 조정에서 발생한 사실이 신속히 전국의 곳곳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런 문건은 책으로 만들어지고, 만일 그 내용이 후세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본조의 편년사에 기록된다.”
“몇 년 전, 현재 황상이 그의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 어린 아들은 그와 황후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법(나랏법 – 옮긴이)에 어긋났다. 황상은 그를 질책하는 많은 상소문을 받았다. 결국 황상은 거대한 여론의 압력하에, 대신들이 집단 사직하겠다는 위협적인 조건 하에서, 할 수 없이 태자를 정하는 일에서 양보하고 만다.”
갑신국난(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제하 침략/정복/점령 – 옮긴이)은 화하문명(이른바 ‘중화 문명’의 다른 이름 - 옮긴이)이 세계문명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이다. 서양인의 붓(사실은 펜 – 옮긴이) 아래 열정적이고 개방적이며,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교양에 넘치던 명나라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호연지기를 가슴에 품고, 기세당당하던 화하(華夏. ‘한족’이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일컫는 말 – 옮긴이), 일찍이 사방의 오랑캐에게서 ‘예의의 나라’로 칭송받고, 신의의 나라로 칭송받던 화하(한국인인 나는 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상고 시대 이래 ‘한족’은 몽골초원의 유목민족들과, 서쪽의 뵈[서양식 이름은 ‘티베트’]족 계통 민족들과, 그리고 ‘남만’으로 불린 말레이 – 몽골 계통 민족들과, 고구리[高句麗]를 비롯한 ‘동이족’들과 여러 번 치고 박았기 때문이다 – 옮긴이), 일찍이 휘황하게 세계 민족을 이천여년이나 선도하던 화하(이 말도 과장된 것이다. ‘한족’이 문명을 만들고 그것을 오랫동안 이끌어 온 건 사실이지만, 그 영향력은 근세 이전에는 동아시아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나 인도나 중세 이후의 아라비아나 고대의 로마가 세계에 끼친 영향력도 제하[諸夏] ‘한족’의 그것에 못지않았고, 어떤 것은 더 크고 폭넓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옮긴이)는 이제 그저 고대 그리스(헬라스 – 옮긴이)/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의 강물 속에 흘러가버렸다.
오늘날(21세기 – 옮긴이)의 화하 후예(오늘날의 제하[諸夏] ‘한족’들 – 옮긴이)는 심각하게 오랑캐화한 사회에서, 이미 고대문명의 선진적인 것과 문아함(文雅함. 풍치와 아담함 – 옮긴이)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제하 ‘한족’들 – 옮긴이)는 지리적 위치의 불행(전쟁을 잘 하는 겨레가 사는 곳, 그러니까 ‘만주’나 몽골초원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 – 옮긴이)으로, 선진문명(‘한족’ 왕조들 – 옮긴이)은 자주 낙후민족(‘만주’에 사는 겨레들이나 몽골족처럼 몽골초원에 사는 유목민족들 – 옮긴이)에 의하여 멸망하는 역사를 면하지 못했다.
17세기 중엽인 1636년, 중국에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증덕소가 기록한 “상당히 부유/번영하고 각 방면에서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던” 명나라는 이미 1644년에 멸망한다. 이를 대체한 것은 소위(이른바 – 옮긴이) 초기 ‘성세’의 강희, 옹건, 건륭황제 시절이다. 이 기간 동안에 외국인들(서양인들 – 옮긴이)이 기록한 것을 보면, 이런 허구의 “성세”를 잘 반박해준다. ‘강건성세’의 정치, 문치무공을 거쳐 결국 중국은 얼마나 빈곤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던가! 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 사신단의 ‘스탄튼’이 한 한마디를 보면 (이 모든 것이 – 옮긴이) 분명해진다. “(청나라의 – 옮긴이) 모든 지방이 놀랄 정도로 빈곤하다. … 사람들의 의복은 남루하고(옷이 낡아 해지고 차림새가 너저분하며 – 옮긴이) 심지어 … 우리가 버린 쓰레기도 그들은 서로 빼앗아 먹었다.”
(청나라 때 살았던 ‘한족’ - 옮긴이) 시인인 ‘당견’이 산서성에서 지현을 지낸 바 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청나라 통치하(지배하 – 옮긴이)의 고통스런 생활을 목격했다. 그는『 잠서(潛書) 』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 “청나라가 흥한 오십년 이래로, (사람들은 – 옮긴이) 사해(온 천하 – 옮긴이)의 안(청나라에게 점령/정복당한 제하[諸夏] – 옮긴이)에서 날로 곤궁(困窮. 가난하고 구차함 – 옮긴이)해져 갔다. 농사(여름지이 – 옮긴이)는 비고, 공업도 비고, 시장도 비고, 관료사회도 비었다.” 그가 친히(몸소/직접 – 옮긴이) 본 산서성의 부녀(婦女. 혼인한 여성과 어른이 된 여성 – 옮긴이)들은 입을 바지가 없었다. 그런데, “오중의 백성들은 자녀를 북방에 팔아넘겼다.” 이로써 볼 때, ‘강건성세’라는 것이 사실은 억지로 (위로 – 옮긴이) 들어 올린 난쟁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금(청나라 – 옮긴이)의 통치(지배 – 옮긴이)하에서, (‘한족[漢族]’ - 옮긴이) 백성들의 실제 생활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영국의 매카트니 사절단의 스탄튼이 한 말은 당견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 에딘버르 평론 』에 실린 글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비록 건륭 칸(건륭제 – 옮긴이)이 일찍이 명을 내려 사신이 도착할 때 반드시 대오를 정렬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라고 하였지만, 매카트니는 청나라의 무장부대가 마치 거지떼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매카트니는 (청나라 – 옮긴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빈곤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건륭 칸이 자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목적과는 전혀(완전히 – 옮긴이) 상반되는 현상이었다.
도중에 그는 너무나 많은 거지를 보았고, 너무나 많은 낡아빠진 건축물들을 보았다. 그리도 대다수의 청나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극히 낮았다. 매카트니는 청나라를 ‘반(半)야만적’인 제국으로 묘사했다. 청나라인의 생활은 ‘가장 비열한 폭정하에서, 곤장을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중에서(가운데 – 옮긴이) 생활한다.’ 그래서 (청나라 – 옮긴이) 사람들은 ‘겁이 많고, 더럽고 또한 잔혹하다.’
▣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침략/점령/정복은 고상하고 수준 높았던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 뒤에는 수준이 낮고 천박한 사회가 옛 사회의 폐허 위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이 글을 소개했다. 폄명양청에 반박하는 일은 왜국(倭國) 우익 학자들이나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내가 이 글을 소개하는 까닭들 가운데 하나임은 밝혀도 되리라.
- 음력 4월 9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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