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북해도(北海道)의 전설
고로폿쿠루(koropokkuru. コロポックル. 그러나 정확한 발음은 ‘코로폭쿠루’에 가깝다 - 옮긴이) 이야기는 북해도의 대표적인 전설이다. 북해도 원주민인 아이누(그러나 이 이름은 그냥 ‘인간人間’이라는 뜻이고, 이들은 자신을 ‘대지인大地人’이라는 뜻을 지닌 ‘야운쿠르Yaunkur’라고 불렀다 - 옮긴이)족은 그들을 ‘코르 - 폭 - 운 - 쿠르(kor - pok - un - kur)’라고 불렀다. ‘머위 - 잎 - 아래 - 사는 신(神)’이란 뜻이다. 어떤 이는 ‘머위 잎 아래의 소인족(小人族)’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아이누족은 원래 머위 잎을 지붕으로 삼아 수혈주거(竪穴住居)를 하던 민족이었다. 수혈주거란 땅을 파서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후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도록 지은 반(半)지하식 주거 형태를 말한다.
북해도뿐만 아니라 미나미치(한자로는 남천南千) 섬, 사할린(사할린은 러시아식 이름이고, 일본식 이름은 가라후토 - 한자로는 화태樺太 - 다. 후자가 원주민이 쓰던 이름이라고 한다 : 옮긴이)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소인족 전설은 단지 원주민이던 아이누족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던 민간 전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설의 카테고리 속에서 걸어 나와 훗카이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우상이 되었다.
(중략)
전설에 따르면 소인족은 보통 일자(一字) 소매가 달린 윗옷과 일자(一字)바지를 입고 다녔다. 남녀의 옷차림이 각기 달랐고 머리 모양도 제 각각이었다. 남자들은 안경과 비슷한 햇빛가리개를 썼고, 여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평소에는 새나 물고기, 산짐승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고,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을 줄도 알았다. 소인족은 본래 아이누족과 물물교환을 하며 평화롭게 지냈다. (그들은 - 옮긴이) 도카치(한자로는 십승十勝. 오늘날의 북해도 오비히로[한자로는 대광帶廣] 시市) 지방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북쪽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들에 관한 전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데시오(한자로는 천염天鹽) 고로폿쿠루’와 ‘도카치 코로폿쿠루’ 두 가지가 있다.
(중략. 데시오 고로폿쿠루 이야기는 야사[野史]라기보다 그냥 전설에 가까워서 일부러 뺐다 - 옮긴이)
도카치 고로폿쿠루
옛날 옛적 북해도가 아직 야생 동물의 천국이었을 때였다. 어떤 한 무리가 살 곳을 찾아 도카치 천(川)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이누 족은 이 무리를 ‘머위 잎 아래 사는 신’, 즉 ‘고로폿쿠루’라고 불렀다.
도카치 천의 지류인 비쇼(한자로는 미생美生) 천을 돌아 거슬러 올라 온 그들의 눈앞에 협곡이 나타났다. 오른쪽에 있던 마루야마(한자로는 환산丸山) 산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니 양 기슭이 원시림이고, 뒤쪽은 히다카(한자로는 일고日高) 산맥(북해도 중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에리카치[한자로는 수승狩勝] 고개로부터 에리모 곶까지 남북을 관통한다. 최고봉은 포로시리다케로 해발 2052미터다 - 김경아 교수의 주석)과 인접한 밀림이었다. 삼림과 강이 있는데다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도 알맞은 이곳이 그들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구멍을 파고 수혈식 주거지를 지어 정착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면 연어가 떼를 지어 상류로 거슬러 올라왔다. 열매는 허리를 숙여 줍기만 하면 되었고, 야생 동물은 도처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풍족한 식량과 살기에 적당한 기후 덕분에 이들은 오랜 동안 유유자적하며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해였던가, 하류에서 사냥을 하던 고로폿쿠루 한 사람이 황급히 돌아와 하류 쪽에 몸집이 커다란 남자들이 모여 있다고 알려왔다. 그들은 아마도 연어를 잡으려고 상류로 거슬러 온 듯 했다. 몸집이 우람한 남자들은 바로 아이누족이었다.
고로폿쿠루들은 황급히 마루야마 산에 보루(堡壘)를 축조하고 돌무더기를 쌓았다. 그들이 전쟁 준비를 갖추자마자 무장한 아이누족이 벌떼처럼 쳐들어왔다. 아이누족의 무기는 독화살이었다. 고로폿쿠루들이 산 위에서 돌을 계속 던지자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다.
고로폿쿠루들은 적들이 다시 공격을 해 올 것을 예상해 한 치의 방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루야마산의 곳곳에 참호를 팠다. 다른 산봉우리로 도망갈 수 있는 작은 길도 뚫었고, 던질 돌멩이도 충분히 마련해 놓았다. 이밖에도 그들은 식량을 비축하고 전투 방식도 구상하며, (자신들의 땅을 - 옮긴이) 더욱더 굳게 수비했다.
이듬해 봄 예상했던 대로 아이누족이 다시 쳐들어왔다. 하지만 고로폿쿠루의 보루는 절벽 위에 세워져 (그들이 - 옮긴이) 지리적으로 유리했고, 아이누족의 2차 공격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무사히 몇 년이 흘렀다. 하지만 누가 예상했으랴. 아이누족은 전술을 바꾸어 배후에 있는 밀림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코로폿쿠루의 참호와 돌멩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머위 잎 아래 사는 신’들은 독화살에 맞아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쓰러졌다. 칼과 창으로 접전을 벌였지만 고로폿쿠루들은 결국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메이지 시대(한자로는 명치[明治]시대. 서기 1868년부터 서기 1912년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 옮긴이)부터 다이쇼 시대(한자로는 대정[大正]시대. 서기 1912년부터 서기 1926년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 옮긴이) 초기까지 일본 학계에서는 ‘고로폿쿠루 논쟁’이 한바탕 일어났었다. 한 쪽에서는 고로폿쿠루가 아이누족 이전의 선주민이라 주장하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동물학, 인류학, 민속학, 고고학 등의 분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이 논쟁은 결국 고로폿쿠루는 실제로 존재했던 종족이 아니라는 결론을 맺고 종결되었다.
(나는 이 결론에 찬성할 수 없다. 야운쿠르 족이 서기전 7~800년에야 일본열도에 들어왔다는 연구결과대로라면 그 이전에 살고 있던 조몽인이 고로폿쿠루라고 불리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도카치 이야기처럼 신화적인 요소가 없고 사실적인 야사는 선주민과 이주민의 충돌이라는 역사의 보편적인 법칙과도 맞아떨어진다. 끝으로 고로폿쿠루 남자들이 안경과 비슷한 햇빛가리개를 썼다는 이야기는 조몽인의 유적에서 마치 안경과 헬멧을 착용한 것 같은 사람을 묘사한 토우가 나온 사실과 일치한다. 나는 고로폿쿠루 족은 켈트인이 브리튼 섬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이베리아’인이나, 스코트족이 스코틀랜드를 손에 넣기 전에 살았던 ‘픽트’인처럼 동東일본과 북해도/사할린에서 살았던 조몽인이라고 생각한다 - 옮긴이)
하지만 이 논쟁으로 인해 일본에서 이와 관련한 분야들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고로폿쿠루 전설 또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하 생략)
* 출처 :『전설 일본』(모로 미야 지음, 김경아 옮김, 일빛 펴냄, 서기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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