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부크라 왕 이야기

개마두리 2013. 4. 6. 21:02

 

* 부크라 : 다마스쿠스의 구어(口語)로 ‘내일’이라는 뜻 - 이상훈 씨의 주석

 

* 다마스쿠스 : 수리야(시리아)의 수도

 

“옛날에 한 왕이 있었단다. 그 왕은 큰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지. 이 나라는 비가 많이 와서 경작지마다 밀이나 채소, 과일, 옥수수가 넘쳐났어. 목초지도 충분해서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양들이 튼튼한 어린 양들을 쑥쑥 뽑아냈지.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단다. 왕이 수확물의 절반과 새로 태어난 가축들을 몰수해 갔기 때문이지. 왕의 성(城)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많이 필요했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농부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들었어. 그런데 수도는 반으로 나뉘어 있었어. 가난한 사람이 사는 오두막집들과 부자들이 사는 대궐 같은 집들 사이에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었거든. 가난한 사람들은 해가 뜨면 큰 성문을 지나 부자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 일을 했지. 하지만 해가 지면 부자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어. 저녁때 그 멋진 곳에서 거지처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병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감옥에 처넣었으니까.

 

어느 날 왕은 조상들을 기념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건축가와 학자, 설계사 들이 왕의 조상에게 바치는 공원을 계획했지. 가난한 사람들은 일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그 거대한 공원에서 일을 했지. 대리석을 갈아서 기사, 시인, 철학자들을 만들었어. 시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왕의 조상과 그 조상의 조상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떤 전투에서 승리를 했는지 정확하게 지시를 내리는 건 학자들의 몫이었어. 고대의 강이며, 새 그리고 동물들도 영구한 대리석으로 그 모습을 속속 드러냈고, 학자들은 옛날 책들에 나와 있는 시인이나 사상가, 전투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지시했단다. 심지어는 용사들의 땀과 핏방울 하나까지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니까.

 

사람들은 수년간 이 기적과도 같은 과업에 매달렸고, 그곳은 점점 넓어져 대리석 바다처럼 변했어. 개회식에서 왕은 뿌듯해 어쩔 줄 몰랐지. 그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 사이를 바삐 오가며 그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증조부모 대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었단다.

 

조상들의 공원은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어.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휴일이면 그곳으로 산책을 갔지. 그곳엔 벽이 없었으니까.

 

물론 건축하는 데 든 돈은 엄청났어. 그래서 빚을 지게 된 왕은 농민들을 더욱 착취했어. 농촌에 있다간 딱 굶어죽게 생겼으니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피신했지. 하지만 도시라고 해도 그들 모두에게 일자리를 줄 수는 없었어.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지.

 

어느 날 한 고귀한 기사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나타나 외쳤어.

 

‘저 빌어먹을 장벽을 없애버립시다.’

 

정원에 있는 탐스러운 과일을 먹고 싶어 하던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어.

 

‘늙은 사기꾼을 타도합시다. 그러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을 것이오. 나, 희망의 기사 부크라가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이오!’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폭풍처럼 밀려왔고, 병정들은 왕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려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동안 착취당해온 사람들의 분노가 병사들의 무기보다 더 강했지. 며칠 후 왕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났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크라를 왕으로 추대했어.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가난한 지역 주민들은 깜짝 놀랐어. 도시의 장벽이 마술이라도 부린 듯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병사들이 웃음을 띠고 거리를 행진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냈어. 그런데 그보다 더 수도의 주민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전날만 해도 없었던 궁전이 생겨난 거였어. 웅장한 궁궐의 가장 높은 탑에는 찬란한 글자로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지. ‘미래의 왕 부크라여, 영원하라.’

 

그 궁전은 거대한 안개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성문에는 보초도 없었어. 호기심에 찬 몇 사람이 용기를 내서 그 궁에 가까이 가려고 했을 때, 그들은 더 큰 놀라움에 사로잡혔어. 가까이 가면 갈수록 궁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 아니겠어! 그 궁은 마치 안개 속을 가볍게 떠돌아다니는 깃털 같았어. 제아무리 빠른 말이라 해도 그 궁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 하지만 멀든지 가깝든지, 또 낮이든지 밤이든지, 수도에 살든지 아니면 먼 마을에 살든지 주민들은 모두 그 찬란한 글자를 읽을 수 있었어.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너희는 너희들의 폐하에게 합당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글과 함께 사람들은 울긋불긋한 현수막(懸垂幕. 오늘날에는 펼침막이라는 말을 씀 - 옮긴이)에 그려진 미래의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단다. 그 그림은 손님들이 예쁜 여인들의 접대를 받으면서 정원에서 먹고 노는 모습처럼 보였어. 플래카드에 곡괭이나 낫을 든 사람은 없었던 거지. 이 화려한 그림을 보며 사람들은 동경에 가득 찬 신음 소리를 냈지.

 

한두 주 후에 몇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열심히 일한 덕택에 선택을 받아 한두 시간 궁 안에 머무를 수 있었는데, 플래카드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했어.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 하지만 모두들 속으로는 단 며칠만으라도 낙원 같은 그곳에서 지낼 수 있기를 희망했단다.

 

그 왕은 현명한 사람이었어. 그가 사람들에게 금지한 것은 하나 뿐이었지. 토마토에 관해서 말하지 말 것. 그 외에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었어. 심지어 왕의 욕을 해도 됐지. 그렇지만 토마토에 관해서만은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됐어.

 

그런데 사람들은 토마토를 좋아했어. 토마토로 샐러드를 만들 뿐만 아니라, 무슨 음식을 해도 토마토가 안 들어가면 맛이 나질 않았거든. 왕이 토마토에 관한 말을 금지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들먹이며 말했지.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난 토마토에 관한 말은 하지 않잖아.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뭐.’

 

좋아하는 토마토가 비싸졌을 때도 그것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인정을 베푸는 왕이었지만, 토마토가 비싸졌다거나 맛이 없어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병사들이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거든. 그들은 죄인을 잡아 평생 감옥에 가둬버렸어.

 

통치 세 달 후, 부크라 왕은 연설을 하면서 자기 왕국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어. 역사 공원은 몰락한 왕의 조상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평민들도 그 업적에 따라 대리석에 새겨질 것이라고, 성곽과 농부, 빵 만드는 사람, 어부 들도 보게 될 거라고 했지.

 

연설이 끝날 즈음에 왕은 감자에 대한 말을 금지했어. 백성들이 위대한 미래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말이야.

 

‘바보들만이 그런 지저분한 덩굴식물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때였어.

 

‘사기꾼 같으니.’

 

귀한 가문 출신의 한 기사가 말했어. 그의 이름은 칼레드였지.

 

‘난 당신의 말을 한마디도 믿을 수 없소. 당신이 그렇게 부르짖는 그 미래가 어디 있단 말이오? 좋소. 우리가 토마토와 감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점점 비싸지고 있는 밀에 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 미래란 건 어디 있소? 나는 내 부하들과 세 번이나 당신의 궁전을 한번 만져보기라도 하려고 시도했지만, 궁전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소.’

 

왕의 하객들은 눈썹을 치켜세웠어. 모두들 금방 그가 극형에 처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왕이 큰 소리로 웃지 않겠어.

 

‘칼레드 기사여, 그대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아직 미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인이 그대에게 확실히 보여주겠노라. 그대는 2주 동안 과인의 미래 왕국의 손님이 될 것이다.’

 

보초병들이 기사를 포위하자, 그는 소리치기 시작했단다.

 

‘저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는 나를 죽일 것이오. 나를 구해 주시오. 나는 당신들을 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했을 뿐이오.’

 

한 용감한 철물공이 기사를 구하기 위해 보초병들을 덮쳤지만, 그만 그들의 창에 찔리고 말았지.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칼레드 기사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왕의 말에 대한 신하들의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지. 다음 날 온 시내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렸는데, 왕과 칼레드 기사의 모습이 거기 있지 않겠어. 진수성찬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즐거워 보였지. 둘째 날에도 다시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렸는데, 기사는 살이 좀 찐 것처럼 보였어. 그때도 그는 대신 한 명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어. 셋째 날에는 칼레드가 공처럼 둥글게 보였어. 울긋불긋한 궁정 광대 옷을 입은 그는 왕과 하객들이 남긴 음식을 탐욕스럽게 먹고 있었지. 2주 후 기사 칼레드가 다시 거리로 내던져졌을 때, 그는 탱탱한 공처럼 굴러갔어. 왕은 사기꾼이라고 그가 길길이 날뛰며 외쳐도, 사람들은 그를 이리저리 밀치며 비웃기만 했어.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미래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어. 그들은 위대한 미래가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 대리석 정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영광스러운 민족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거야. 그 후 왕이 밀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을 때,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금방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어린 딸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어. 비싼 채소 가게 앞을 지나가는 소녀의 눈에 토마토가 가득 담긴 궤짝이 들어왔어. 그 아이는 살이 통통한 토마토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아이의 소매를 잡아끌었어. 토마토를 살 돈이 없었던 거지.

 

‘나중에! 나중에 돈이 생기면 맛있는 토마토 10개 사줄게.’

 

‘엄마는 언제나 나중이라고만 해. 나는 지금 토마토가 먹고 싶단 말이야.’

 

소녀는 투정을 부리며 엄마에게 떼를 썼어.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주위를 살폈어. 벌써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던 거야. 그들은 겁먹은 어머니를 포위하고 아이를 끌어가려고 했지만 소녀는 재빨리 그들의 손을 피해 골목길로 뛰어가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어.

 

‘나는 지금 토마토가 먹고 싶단 말이야!’

 

놀고 있던 아이들이 소녀를 보았어. 아이들은 구슬과 공을 옆에 치워놓고,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지나 병사들에게로 달려들었어. 역시 이렇게 외치면서.

 

‘우리는 지금 토마토를 먹고 싶어요!’

 

그 외침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가면서 더욱 커졌고, 병사들은 누구를 먼저 쫓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어. 결국 누가 누구를 쫓는 건지 모를 지경이 되었지. 병사가 아이들을 쫓는 건지, 아니면 아이들이 병사를 쫓는 건지. 마침내 몇몇 어른들도 아이들과 합세해 크게 외치기 시작했어.

 

‘우리는 지금 토마토를 먹고 싶다! 지금! 지금! 지금!’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위협적으로 변하자, 왕은 어쩔 수 없이 성이고 뭐고 다 내버려두고 쏜살같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지.

 

그 이후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시는 부크라라는 말에 속지 않았단다.”

 

- ‘살림’ 노인이 서기 1962년(추정) ‘라픽 샤미(본명 수하일 파델)’에게 들려준 이야기

 

* 출처 :『파리 젖 짜는 사람』(라픽 샤미 지음, 이상훈 옮김, ‘소담출판사’, 서기 2009년) -> 이 책은 서기 1986년 독일에서 나왔고, 한국에는 서기 2009년에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