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본문스크랩] 정의론 속의 윤리, 일본 극우와 일간베스트까지

개마두리 2013. 6. 26. 20:21

- 2차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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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터지는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 44)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겸 오사카 시장의 발언내용은 세계인에게 실시간 논픽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한일 과거사 논쟁과 영토 분쟁에 대해서는 이이제이의 외교 전략으로서 미국은 무개입, 무언급으로 일관해왔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극우적 망언은 언급을 자제했던 미국까지 격분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때 한일 과거사 논쟁에 있어서 세계인들의 일반적 시각은 일본의 과거사 자성에 대한 미성숙과 함께 한국의 반일을 극우와 인종차별의 시각으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하시모토는 그러한 보편적인 인식을 단번에 해소시켜줬으니 어쩌면 망언을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쯤에서 하시모토 망언에 한 가지 궁금증을 제기해보는 것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과연 그는 자신을 ‘정의롭다’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정의론 달리 하시모토와 극우주의자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한국인과 많은 세계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본의 ‘정의(Justice)’란 무엇일까?

 

일본인의 전통적 선악관

 

이쯤에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1948)가 정의한 일본의 선악관을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와 일본인의 심미관을 연구하면서 “일본인은 심미관에 의해 악의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에도시대의 대표적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모노노아와레(주: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하여 감동이나 감흥을 느끼는 것, 물상을 의미)를 이해 여부가 선악의 기준이다”라고 주장한 것과 루스 베네딕트의 이해는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유교적 사상에 의해 종교적으로 선악은 엄격히 구분되어 왔다. 서양의 가톨릭(천주교 - 옮긴이) 문화도 마찬가지로서 종교에 의한 선악 구분은 엄격하게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일본인의 종교적 사상을 지배하는 신도에는 선악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신도 사상에는 영혼의 선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온화한’과 ‘거친’의 구분만 존재할 뿐이다. 즉, 일본의 문화적 기반에 있어서 종교적 선악은 매우 희박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문화에 있어서 신은 도덕적 선악에 구애받지도 않으며, 사람의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 죄의식도 없다. 금욕을 선행으로 인지해왔던 여타 문화권과 달리 일본 문화의 뿌리에는 육체적 쾌락도 인간의 양면성으로 인정하며,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일본 문화의 선악관의 뿌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이웃국가인 중국, 한국과 달리 중앙집권화가 매우 늦고, 통치철학의 발달이 미비했던 까닭이 컸다. 대부분의 통일 국가들은 통치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불교나 유교적 선악관, 또는 크리스트교의 선악관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왔다. 일본은 비록 봉건체제였으나 천황은 허수아비였으며, 힘의 논리에 따른 막번 체제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당연히 그 과정 사이에는 철저히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있었다. 겉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였으나 일본 막부 지도자들과 민중의 처세술은 철저히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된 법가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개별 다이묘들은 부국강병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과적 정의, 성과로서의 정의

 

법가 사상에서는 결과적 상태로서의 정의, 법에 대한 힘과 권위의 우위에 따른 종속을 중시한다. 게다가 전통 종교로서의 신도의 모호한 선악관과 일본인들의 관용적인 육체적 쾌락은 현대 사회의 많은 전쟁 범죄에 대한 자신들만의 합리성을 부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비합리적 전술로서 연합군을 경악하게 했던 자살 옥쇄의 경우에는 천왕에 충성 맹세를 한 황군으로서 아름다운 마무리로서 미화되었고, 그것이 곧 일본인의 인식론 속에서는 선한 행위가 되어왔다. 포로로서 항복하는 것은 추한 것이며, 곧 죄였다. 반대로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항복 없는 옥쇄는 아름다운 것이며 선한 것이었다.(일본 문화에서 할복의 미학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위안소의 강제성 여부를 떠나 점령군의 폭주를 막기 위해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하시모토의 발언은 결과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의 인식과 맞닿아있다. 점령군으로서의 일본군이 더 이상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필요악이라는 생각. 전통적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진 육체적 쾌락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하시모토나 극우 일본인의 사상에 있어서 일본의 전쟁범죄는 패전의 결과물이자 약육강식의 논리로서 접근되어왔다. 모두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는데, 일본은 패전했기 때문에 책임져왔다는 인식인 것이다. 일본 극우 사상에서 전쟁범죄는 언젠가 일본이 강국이 되면 뒤집을 수 있는 그런 것이고, 반성은 곧 약자로서의 굴욕을 의미한다.

 

독일의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경제적 상황 등이 포함된 역사적 폭주였다면 일본은 사상적 기저에는 ‘힘의 윤리’가 지배해왔다. 전전(戰前)에는 힘을 보장하는 군국주의로서 전후(戰後)에는 힘을 복원하는 극우로 투영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극명히 드러나는 것이 대 중국, 대 미국 외교와 대 한국 외교의 입장차이다. 경제적 군사적 강자와 그에 준하는 헤게모니를 부여받은 중국에 대해서는 지극히 굴욕적이다. 한때 난징대학살도 부정해왔지만 최근에서는 중국을 자극하는 역사적 망언은 극우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 역사적 망언의 수위를 높이는 것은 아직까지 한국만큼은 여전히 상대하고 힘의 논리로 억압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역사적 망언이 종료되는 날은 아마도 한국과 한국인의 힘에 따라 일본인들이 수치심을 느낄 때일 것이다. 이 말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의 망언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간베스트는 왜곡된 극우

 

사실 최근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간베스트의 극우적 성향 또한 일본인이 생각하는 정의(justice)의 기저와 맞닿아 있다. 엄밀히 말해 현대 대한민국의 근대화의 사상적 뿌리는 일본과 유사하다. 불쾌하더라도 말이다. 메이지 유신을 롤 모델로서 근대화를 추구해왔으며, 군국주의 문화를 이어받은 군사독재가 장기간 한반도 남쪽을 지배해왔다. 식민통치를 통해 유교적 전통의 뿌리는 민중에게 예의범절 이상의 의미는 없어졌으며, 유교적 합리주의의 맥은 끊겼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부정부패, 독재에 항거하며 현대적 민주주의 사상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민주화를 이루어내었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잔재는 지극히 일본의 극우 사상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문제는 참여정부를 끝으로 대한민국은 철저히 한국판 극우사상이 부활했다. MB 정부와 뉴라이트는 여러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권위와 힘의 논리를 투영해왔다. 촛불 집회로 민중의 항거가 있어도 (콘테이너의) 방벽을 쌓고, 폭력에 의해 진압하는 방식은 군국주의의 사생아인 군사독재의 유산이었다. 식민 통치 이후 맥이 끊긴 유교적 정의(Confucian justice)와 유교적 합리주의 문화의 공백을 군국주의의 ‘힘의 논리’와 ‘힘에 따른 정의론’이 보충해왔다. 그것의 뿌리는 법가의 결과적 정의처럼 현재의 힘과 지배의 논리에 따라 역사관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현재 권력의 존재에 따라 과거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해왔다. 최근 5.18 민주화운동이 ‘폭동’ 논란이 된 것은 이러한 의식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 있어서 이러한 ‘힘에 의한 정의론’이 표면화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과 독재 유산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세력은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지만 독재의 산물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지 못 했다. 게다가 사회 전반에 뿌리깊이 박힌 군국주의 유산을 청산하지도 못 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독재 세력의 건재함을 알리는 상징적 계기가 되어버렸다. 국가 내란죄를 저지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건재하며, 재산은 추징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군부 인사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기득권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로서의 현상은 사회에 만연한 자본적 착취와 함께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보편적 정의론’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그야말로 수단과 과정이 어찌되었든 사회적 성공과 힘의 축적이 정의 그 자체인 것이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조직 문화에서는 군대 문화는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효율성을 위한 합리주의와 거리가 멀다. 집단의 안녕을 위해 소수를 퇴출시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 되었고, 심지어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도 힘의 논리가 투영된다. 사회 어디서든 그 조직을 지배하는 자의 이데올로기가 최우선 고려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힘에 의한 정의를 체감해왔다. 힘이 있는 자에 편에서 부정하게 성공하는 것에 대한 응징이 거의 전무한 상황과 힘에 편에 서서 소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용납되어 온 세상에서 군사 독재 세력의 화려한 부활은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일간베스트의 하위문화도 이와 유사하다. 그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사적 린치를 감행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윤리성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왔다. 성적 쾌락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많은 상식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일탈에 대해서 교육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일간베스트는 단지 사소한 일탈이 아닌 정의론 변화의 극단적 형태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구성원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과 지역, 여성, 소수자 비하는 매우 의식적 행위이다. 또한 왜곡된 정보를 인지하면서도 극우적 논리에 동조하는 것은 일종의 힘의 과시에 가깝다.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서구의 극우처럼 사회 경제적 약자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는데 있다. 일간베스트의 인증(자신의 학력과 경제적 지위를 인터넷 상에 증명하는 행위) 사례를 보면 적어도 소수자, 약자라기보다 오히려 많이 배우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득권에 이미 진입했거나 미래에 진입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인증을 통해 주장의 논리성보다 학력과 학벌, 직업 서열에 따라 재정립한다.

 

게다가 서구 극우의 주류인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는 일간베스트에서 주류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서구 극우가 인종 우월주의와 경제적 경쟁자로서 자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이라면 한국과 일본의 극우는 그저 일상적 억압과 폭력에 의미를 두는 편이다. 일간베스트를 보면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정치적 갈등 구조에 따라 경제적 약자와 여성, 민주화 운동에 대한 비하, 반공주의, 반노동운동과 같이 기득권 이데올로기를 투영해왔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집단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국내 경제에 있어서 일본인과 한국인은 노동자로서의 경쟁자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극우 세력이 걸핏하면 한국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그저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가장 만만한 대상을 골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은 한때 일본의 식민지였고, 억압의 대상이었지만 최근들어 일본에 위기감을 줄 정도로 성장한 국가였다. 당연히 이런 대상에게 폭력과 억압을 가하면서, 강자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자신들의 폭력과 억압이 용인될 때 일본 우익들은 여전히 일본이 강함을 느끼면서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간베스트 또한 자신들보다 열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집단적 린치와 모욕적 유희를 즐기면서 힘의 정의와 카타르시스를 재확인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일간베스트의 극우적 성향은 오히려 일본 극우의 기원인 힘의 논리와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임형찬 님의 글

 

* 1차 출처 :

 

http://hook.hani.co.kr/archives/49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