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크리틱]이방인의 정체

개마두리 2013. 1. 26. 16:42

- 문강형준(문화평론가)의 글

 

- 등록 : 2013.01.25

 

-『한겨레』기사

 

<코미디에 빠지다>에 ‘두 이방인’이라는 코너가 있다. 아마도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등장하는 한국 최초의 코미디가 아닐까 싶다. 모범생처럼 옷을 입은 두 주인공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등장해서는 얼마 전 발표한 논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화 중에 반드시 영어단어가 들어가고, 화학기호나 철학개념도 튀어나온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들이 벽돌 나르기나 포스터 떼기 등 ‘막일’을 하러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숙련 기술이 필요 없는 노동을 하는데도, 이들은 물리학이나 화학 등을 이용하려고 하다가 결국 담당자에게 욕을 먹는다. ‘필요 없으니까 가라’고 하는 담당자에게 매달리며 이들은 외친다. “지금은 해야 합니다.”

 

이 코너의 웃음은 ‘부조화’에서 유발된다. ‘고급 지식’을 가진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막일에도 그 지식을 접목하려 하는 노력이 이들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 주인공들은 어떤 문제를 언제나 ‘근본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반대로 담당자는 이들이 이미 존재하는 방식에 따라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배운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은 결국 해고되어 다음주에 다른 막일판으로 나온다.

 

‘두 이방인’에서 조롱당하는 것은 ‘실업 상태의 박사과정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유’ 자체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씽킹, 씽킹, 씽킹”), 그리고 익숙한 상식을 거부하고 실험적이며 고지식한 방식으로 사유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이들은 웃음거리가 된다. 이들은 행동해야 할 때 생각을 하고, 복종해야 할 때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계발’을 게을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정언명령인 자기계발은 더욱 효율적이고 고부가가치를 가진 노동자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면서 틀을 깨라고 말한다. 이 멋진 말은 실제로는 ‘어떻게 하면 자본이 원하는 나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두 이방인이 막일판에서 계속 노동하기 위해서는 이들 역시 막일판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빚어내야 한다. 학회의 논문이 아니라 막일판에 최적화된 쉴 새 없는 자기계발이 요구되는 것이다.

 

막일판의 담당자가 ‘배운 분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말하는 것 같다. ‘왜 대학의 지식은 현장에서 이토록 쓸모가 없는가! 일하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인가!’ 그는 지식이란 무릇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의 믿음은 정확히 우리 시대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바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한국의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미 안정화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는 지식을 엔터테인먼트와 결합시키며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기 쉽고, 실용적인’ 지식을 가공해내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고전 해설서나 풀어 쓴 개론서, 핵심만 뽑아놓은 서평서들을 발간하며 ‘지식의 실용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 현실적인 지식이 넘쳐날수록 현실과 갈등하는 근본적 사유는 사라진다.

 

이렇게 볼 때, 두 이방인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그들은 ‘지식’의 역할이 바뀐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다. 근본적 사고보다 실용적 판단을, 고통스런 공부보다 즐거운 강의 콘서트를, 급진적 사유보다 익숙한 상식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 고지식한 지식인들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쫓겨난다. 막일판 담당자가 그렇듯, 권력은 통제되지 않는 박사과정생보다 말 잘 듣고 성실한 동남아 출신 노동자를 더 선호한다.

 

‘두 이방인’은 문제 해결이나 이익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격적 태도를 보여준다. 길들여지지 않는 이 두 이방인이 막일판을 전전하는 ‘지금’은 어쩌면 이미 도달해 있는 미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