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창
-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의 글
가끔 수업시간에 농담처럼 건넨다.
“아마 무작위 추첨제로 부부를 짝짓는다 해도 잘 살 확률은 비슷할걸요?”
이른바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한결 나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비슷한 집안에 비슷한 형편, 나이와 직업과 외모, 거기다 빼꼼한 가치관 설문조사라도 곁들인다면 매혼(중매결혼 - 옮긴이)은 더더구나 성공적인 방책이 되리라. 그럼에도 100년 전쯤 열풍 속에 점화된 연애 - 결혼이라는 짝은 채 다 식지 않았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계산속이 어지간히 퍼진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은 여전히 연애에 골몰한다.
건너다보기로 연애 풍속은 많이 달라졌다. 100일 기념, 1주년 기념이 등장하더니, 요즘은 사귄 지 한 달(30일 - 옮긴이) 기념까지 예사일 정도로 수선스럽다. 감정에 비해 관계가 과잉이라고 해야 하나. 짝사랑이란 게 관계를 앞질러 버린 감정의 초과라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 그 전에 누릴 것 다 해보자는 식 요즘 풍속은 감정에 앞서 자생하는 이벤트의 승리다. 회혼(回婚. 부부가 혼인한 지 예순 해가 되는 때를 일컫는 말 - 옮긴이)이나 금혼(金婚. 서양 풍속으로, 결혼 50 주년을 일컫는 말 - 옮긴이) 정도 돼야 첫 결연을 축하할 수 있었던 그 옛날에 비하면 시간을 몇십배, 몇백배 빨리 당겨쓰는 셈이다. 가끔 딱하다. 절대 너랑 1년, 10년, 게다가 그 이상 갈리 없지, 미리 불신하고 냉소하는 모습을 보는 듯 싶어서.
연애를 통한 감정과 관계의 학습이 꽤 쏠쏠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연스레 “연애도 많이 해보고”류의 말도 입 밖에 잘 낸다. 감정의 절정과 바닥, 관계의 최선과 최악 등을 연애만큼 다양하게 또 노골적으로 겪게 해주는 경험은 별반 없다. 대체 왜 누구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연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지 공부하는 데도 연애는 좋은 교과서다.
민주주의와 자유연애는 대체로 동시대적이다. 책임의 구조가 흡사하기(비슷하기 - 옮긴이) 때문이리라.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그 구조는 생각할 때마다 경이롭다. 만인(萬人. ‘모든 사람’ - 옮긴이)이 선택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역사상 그렇듯 많은 배신과 절망의 증거가 있었건만 그래도 ‘모든’ 인간에게 기대다니.
만인이 지혜로워지길 기대해선 안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분명 우리 힘으로 민주주의에 도달해 있다. 다수결로 당선된 대통령의 통치에 승복하기 어렵다거나, 대의제 민주정(개인이 직접 국회나 시청에 가서 일하는 대신 자신을 대표하는[대신하는] 정치인을 투표로 뽑아서 정부를 만들고 그 정부에 나랏일을 맡기는 정치 - 옮긴이) 자체를 회의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사랑에 있어서건 정치에 있어서건 냉소주의가 번져가는 것은 슬프다. 짝사랑을 노래한 하이네의 그 많은 시가 시대로부터 소외된 산물이었다고 하나, 짝사랑의 결핍은 더 큰 소외의 증거 같다.
‘모든 게 민주화되지 않았기 때문’, 그런 식의 결핍을 결핍하고 있는 세태가 더 살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긴 하다.
“내 마음의 깊은 상처를
고운 꽃이 알기만 한다면
내 아픔을 달래기 위해
함께 눈물을 흘려주련만.”
허나 그때도 다 알지 않았는가. ‘고운 꽃’은 내가 “그대는 꽃과 같아라.”라고 명명하는 순간 태어난다는 것을.
나의 ‘고운 꽃’은 당신의 ‘고운 꽃’이 아니다. 그때의 ‘고운 꽃’은 지금의 ‘고운 꽃’이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감수하면서도 ‘꽃’을 놓치지 않으려면 아직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한가 보다.
각자 제 삶과 선택으로써 함께 산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가 보다. 감정을, 관계를, 배우면서 연애한다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사랑할 때 사랑하고 분노할 때 분노하기가 이토록 지난한가 보다. 하이네는 “난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한다. 아마도 살아내기 위해.
-『한겨레』서기 2014년 8월 2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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