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인간이 항상 전쟁을 한 것은 아니다

개마두리 2015. 7. 13. 01:35

 

- 날짜 : 2015.07.12.

 

인간의 폭력은 맥락상의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인 것이거나 귀납적 추론의 결과로 발생하는 걸까? 저명한 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던 이 질문에 오늘날의 인류학과 고고학이 진일보한 답변을 내놓고 있다. 전쟁은 대략 1만년 전 생산경제가 도래한 것과 더불어 신석기시대에 사회구조의 대변혁이 생긴 것과 함께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폭력과 관련된 두 가지 개념은 근본적으로 서로 배치된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1651년에 출간한 저서 <리바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태곳적부터 존재했다고 여겼다. 한편 장자크 루소는 1755년에 출간한 저서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토대론>에서 하찮은 열정에도 관심을 보이던 야만적인 인간이 사회의 탄생으로인해전쟁의 수렁 속에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폭력적이고 호전적인선사시대의 이미지는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진보적인 인류학자와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각본의 산물이다. 그 이미지로 말미암아 인간이 단선적인 진화(1)를 했을 것이란 가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이 같은 인식과 함께, 사람들은 1863년에 선사시대인의 몸과 행동을 덩치 큰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등의 그것에 비유했다. 일부 학자들은 3의 인간(유인원)”열등인종과 원숭이 간 공백을 메워주는 고리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1880년대에 등장한 이른바 이동이론은 선사시대가 문화적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 각 영토에 정착한 인구가 이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이론은 정복전쟁이 줄곧 존재했다고 못박았다.

 

초기의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은 몽둥이, 곤봉, 돌도끼, 단도 등의 용도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 없이 이러한 물건들을 전쟁무기라고 칭했다. 만국박람회 및 초기 박물관들도 이들의 용어를 그대로 수용해 활용했다. 이런 이유로 1871년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 들어선 포병박물관은 실제 인물 크기로 제작된 마네킹들에 각 시대의 무기와 군복을 착용시켜 선사시대와 원사시대 그리고 고대에 쓰였던 무기나 민족지학적인 무기 컬렉션을 선보이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 과학자들의 논문 및 예술작가들의 작품들로 선사시대인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된 이미지는 더욱 고착됐다. 예를 들면, 엠마누엘 프레미에와 루이 마스크레의 조각,폴 자맹이나 페르낭 코르몽의 그림과 피에르 부아타르의 저서 <대홍수 이전의 연구>, 1911년 출간된 J.-H. 호스니의 <불의전쟁> 등이 그러했다. 몇몇 드문 예만 제외하면, 19세기 말까지 이 같은 이미지, 즉 인간의 형상을 한 원숭이, 특히 야만적이고 음탕한 고릴라를 주로 선사시대인들에 비유하곤 했다. 선사시대인들은 몽둥이나 돌도끼 등과 같은 원시무기를 다루거나 노예제도를 실시하고 또한 살인을 일삼으며 식인풍습을 지녔다고 소개됐다. 1880년부터 유행한 대부분의 소설에도 이 같은 시각이 등장한다.

 

이 같은 소설들 때문에 대중의 뇌리에는 선사시대의 전형이 정착된다. 맘모스나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호랑이 등과 같은 커다란 야수와 싸우는 남성적인 영웅상이 등장하는 것이다.몽둥이로 무장하고 동물 가죽옷을 입은 영웅은 동굴에 거주하며 돌로 도구를 만든다. 반항적이고 본능에 충실하며 폭력적인 우리의 조상(영웅)은 단지 여성을 얻기 위해 또는 소중한 사람의 복수를 위해 싸운다. 마치 전쟁(특히 서로 다른 부족간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갈등이 사방에 편재해 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부족은 주로 탐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2)

 

20세기 초반, 일부 사회생물학자들을 비롯한 인류학자들과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은 유인원의 행동을 토대로 인간은 킬러원숭이의 후손이란 이론을 지지하게 된다. 예컨대 호모사피엔스가 거대한 이족보행 원숭이들을 제거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탈출해) 유라시아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진 야만적인 동물, 즉 포식자란 주장을 펼쳤다. 1925년에 호주의 선사시대 역사학자 레이먼드 다트가 내놓은 이 같은 가설은 1961년 로버트 아드리의 저서 <카인의 후예들>로 인해 인기를 끌게 된다. 사냥꾼, 즉 포식자인 선사시대인들은 선천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이들의 전쟁은 단지 인간 사냥에 불과했을 것이란 가설이 대중화되는 것이다.

 

동물 살생은 인간의 내재적인 폭력의 표현처럼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지학적인 연구들은 대부분의 동물 살생에서 사냥꾼들이 폭력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반대로, 동물 살생은 인간과 자연 간(4) 생태론적인 교환방식에 필요한 폭력을 사회화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동물 살생은 사냥 노획물의 공유를 통해 사회적 연대감을 구축하는 일에 기여한다. 현재는 인간이 킬러 원숭이의 후손인 포식자란 가설과 1912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원시무리가설은 사라졌다.

 

인간의 타고난 속성에 대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이론의 추종자이자 정신분석의 아버지인 프로이트는 원시시대엔 포악하고 덩치 큰 수컷(두목)이 원시무리를 조직해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두목이 모든 여성을 차지했고, 아들들은 다른 무리의 여성을 납치해서 살아야 했다. 1913년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토템과 터부>에서, 그러던 어느 날 쫓겨난 형제들이 뭉쳐 아버지를 죽여 먹어 치우고, 가부장적인 생활방식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썼다. 그는 또 내적인 원시성야만적인 충동의 개념, 즉 내적인 갈등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외적 투쟁과 다를 게 없다고 했다.

 

19세기의 진보관은 선사시대인들을 야만폭력의 존재로 간주

 

그런데 이 같은 내적 야만성은 사실 인식론자이자 인류학자인 레몽 코르브(5)의 가설처럼 인종주의나 우생학과 같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가상의 정신구조가 아닐까? 다양한 신경과학 연구들은 폭력적인 행동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6) 비록 이러한 행동이 특정 인지구조에 의해 조정되긴 하지만, 폭력이 생겨나는 데에는 가정환경과 사회문화적 맥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7) 게다가 사회학을 비롯한 신경과학과 선사시대 역사와 관련된 많은 연구 논문들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감정이입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바로 이 같은 감정이입과 이타주의가 인간화의 촉매제로 쓰였을 것이다.(8)

 

스페인 아타푸에르카 유적지인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Sima de los Huesos, 해골 동굴)에선30만년42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동 유골(두개골 기형을 갖고 태어난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에 속하는 유골)이 발굴됐다. 이 같은 뇌 결함으로 인해 이 아이는 8살까지밖에 살지 못했다.

 

이들(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 대부분의 외상과 상처가 아물어져 있다는 것은 이들이 장애를 앓기는 했지만 질병을 치료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아타푸에르카 유적지에서 발견됐고 대략 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유골의 골반과 척추를 검사한 결과, 척추 디스크와 뼈에 생긴 혹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몸무게가 적어도 100kg에 키가 175cm인 이 인간은 거동에 특히 불편을 느꼈을 꼽추가 분명하다. 이 인간은 가족의 보살핌으로 대략 45세까지 살았다.

 

비록 오늘날도 여전히 대중들의 환상 속에선 선사시대인들이 마치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던 존재처럼 비칠지라도,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부상을 입힌 무기의 분석과 유골의 보존 상태 그리고 이 유골이 존재하게 된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폭력행위에 대한 특성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폭력의 흔적은 특정한 식인풍습 속에서 관찰된다. 몇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구석기 시대 이 같은 식인풍습이 있었음을 증명하긴 하지만 사람을 죽여 먹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어떤 그룹이 먹고 먹혔는지구분이 불가능하다.

 

한편, 12천년 이상 된 인간의 뼈를 일부 검사한 결과 폭력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9) 더구나 폭력의 흔적과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종종 사냥 중 사고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어 뭐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식인풍습을 제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국 남부의 마바(Maba) 인근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 호모사피엔스의 두개골로서, 대략 15만년에서 20만년 전의 것이다. 이 두개골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돌 둔기로 맞은 흔적이 관찰되었다. 이라크의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는 마바 두개골보다 10만년 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 발견되었는데, 나이가 대략 30세에서 40세 사이인 이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은 이마 오른쪽과 왼쪽 안구 두 곳이 함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발굴자가 지적했듯이, 함몰자국은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동굴 천정의 붕괴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슬로바키아의 살라 인근 바흐강의 자갈층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발굴됐다. 이 유골의 이마에는 둔기 자국이 있었지만 그것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프랑스 샤랑트 마리팀의 생세레르에서 발굴된 젊은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두개골의 전면 오른쪽에도 둔기 자국이 있었다. 날카로운 둔기 자국으로 보아, 당사자는 심혈출혈과 뇌진탕, 심지어는 혼수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샤니다르와 이스라엘 스쿨(Skhul)에서 발굴된 네안데르탈인(45천년에서 6만년 사이)과 현대인의 유골에선 뾰쪽한 나무나 돌 둔기에 가격당해 생긴 상처들이 발견됐다.

 

싸움 중 사고나 폭력으로 생긴 걸까? 고대시대의 유골에 난 상처들은 그 원인을 알아내기가 어렵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머리에 난 상처들은 아물어 있었다. 그 상처로 사람들이 사망한 게 아니다. 이들 상처는 사고나 죽음 직전에 중단한 전투의 후유증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들 간에 벌어진 싸움의 흔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쿨에서 발굴된 남성과 이탈리아 발치로시 아동동굴에서 발굴된 아동 유골에서만 폭행 흔적이 나타난다. 하지만 누구에 의한 폭행일까?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누군가에게 당한 폭행일까? 아니면 외부인에게 당한 폭행일까? 현재 이 질문은 답변이 불가능한 숙제로 남아 있다.

 

한편, 미국 구석기시대 인류학자 에릭 트링카우스(10)가 주도한 연구에 따르면 샤니다르의 네안데르탈인들은 사냥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팔에 집중적으로 난 상처의 분포가 이를 증명한다. 이들 다수에게서 로데오 경기 선수에게서 볼 수 있는 뼈 손상이나 경기 중 땅에 심하게 떨어질 때 생기는 외상 등이 발견된 것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거대한 포유동물 사냥꾼들이었다. 이들은 동물에 접근해야 했고, 심지어 동물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외에도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향해 던진 무기가 과녁을 빗나가며 동료에 맞았을 수도 있다.

 

프랑스 로(Lot) 지방의 쿠냑과 페쉬 메를 동굴 내벽, 이탈리아 팔리아치 암벽에 새겨진 후기 구석기시대의 일부 드문 벽화들은 창에 찔려 죽은 인간들을 묘사하고 있다. 일부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은 무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암벽화들의 인물들을 두고 종종 부상자또는 화살 맞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벽화들도 사냥 사고나 재래의식 때 바친 제물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전쟁을 서술한 장면은 무척 드물고, 특히 구석기시대의 예술엔 그 어떤 전쟁 장면도 담겨 있지 않다.

 

청동기시대에 거의 처음으로 전쟁이 제도화

 

일부 선사시대 역사학자들은 이집트와 수단의 북부 국경선이 맞닿는 나일강 동쪽 강변에 위치한 유적 제117(13140년에서 1434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구석기 시대에 두 공동체 간에 치명적인 충돌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유적지를 발굴한 결과, 모든 연령대의 남녀노소 시신 59구가 발견되었다. 석판으로 덮인 각 구덩이 속엔 시신이 한 구나 두 구 혹은 세 구나 네 구 또는 다섯 구가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제임스 앤더슨(11)에 따르면, 매장된 시신의 대략 절반은 머리나 흉곽을 가격 당하거나, 등이나 복부를 날카로운 창이나 투사된 돌 무기에 찔려 비명횡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직도 이 무기들 중 일부는 시신에 그대로 박혀 있다. 뿐만 아니라, 발사된 돌 무기의 궤적을 살펴볼 때, 이미 땅에 쓰러져 있었을 개연성이 큰 세 명에게는 지속적으로 돌 무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석기시대 말, 북부 수단은 가뭄이 심했다. 내륙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나일강의 비옥한 계곡과 보호막 같은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이 지역을 탐냈을 것이다.(12) 왜냐하면 자기들끼리 경쟁을 치렀다면 모를까, 내륙인들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이용 가능한 자원을 관리감독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수집된 고고학 자료 그 어디에서도 발사체의 기원과 그 배경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발굴된 59구의 시신은 동일한 사건에서 희생된 사람들일까? 아니면 여러 다른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일까? 어쨌든 유적 제117호는 집단 폭력의 첫 번째 사례를 입증하는 자료이다. 공동체 간에 벌어진 폭력 때문일까? 아니면 공동체 내부에 일어난 폭력 때문일까? 논쟁이 분분하다.

 

고고학 유적지를 살펴보면, 구석기시대 동안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전쟁은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는 여러 요인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은 인구가 부족했다. 후기 구석기시대 동안엔, 유럽인구가 몇 천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동체들이 광활한 영토에 분산되어 있어 이들 간에 서로 다투었을 개연성이 적은데다, 주민수가 고작 5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동체들은 번식을 보장하기 위해 최대한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신석기시대 동안엔 식물재배와 가축사육으로 인해 인구정착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슐츠와 독일의 탈하임 등을 비롯한 많은 묘지에서 발굴된 남녀노소의 유골에서 발견된 치명적인 부상이 증명하듯이, 현지 인구의 증가로 인구 통계학적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반면에, 구석기시대엔 충분히 비옥하고 다양한 생활 터전이 있었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 사회는 자급자족 경제만 가능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가설은 고고학적 연구에 기반하지 않은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이와 반대로 선사시대 사회는 자급자족 사회였을 뿐 아니라 풍요로운 사회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원이 풍부한 터전이 있을 때, 서로 다른 공동체 간에는 싸울 일도 없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들이 다양한 유형의 식품을 개발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행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주민과 원주민 간 영토 전쟁의 가설을 뒷받침해 줄만한 그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엔, 경작할 새로운 터전이 필요해 초기의 농부 겸 목동 공동체들 사이에 또는 이들과 사냥꾼 겸 채집가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럽(예를 들어 독일 헤르크스하임)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입된 4,400년에서 5,200년 사이에 그랬을 것이다.당시 인간을 제물로 바친 횟수와 식인풍습 횟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이 시기에는 심각한 위기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반면에,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마찰 위험도 적었다.더군다나 포식(수렵과 채집)경제는 식물재배와 가축사육과 함께 등장한 생산경제와 달리 잉여생산을 하지 않았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축적한 식량과 재산은 탐욕을 자극해 내부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잠재적 노획물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들 간 경쟁이 생겨나고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 전쟁이 제도화된 것은 청동기시대(기원전 2000)에 들어와 철기와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되자, 전사와 무기가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부터였다.

 

뿐만 아니라, 마찰은 종종 권력이나 재산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야기되었다. 전사계급을 부리던 소위 엘리트집단이 종종 마찰을 초래했다. 구석기시대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구석기시대에 관한) 모든 자료들은 이 시대가 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평등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의 사회경제적 변혁기가 도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수장, 전사계급 등이 등장하고, 무덤이나 예술 속에서도 개인은 차등 대우받게 된다. 그리고 활의 사용이 보편화된다. 스페인 레반트 동굴의 벽화가 보여주듯이, 일부 선사시대에는 사냥에 쓰이던 이 무기가 갈등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업과 축산이 발전하면서 처음으로 노동이 사회적으로 분업화되고 자신의 이익과 경쟁을 우선하는 엘리트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그밖에도 시간이 갈수록 드넓은 땅을 개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해지면서 일손확보가 절실해진다. 신석기시대 중기에 전사계급과, 대부분 전쟁포로들로 구성되었을 개연성이 큰 노예계급이 동시에 등장한다.

 

구석기시대가 평화로웠다는 것은 신에게 인간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이 부재했다는 사실로도 설명이 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어머니 여신이나 위대한 여신을 숭배하는 신석기시대의 관행이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며 성적인 성향을 부각시킨 비너스조각상, 즉 원시시대의 여신에 대한 숭배를 계승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간이나 야생동물을 제물로 신에게 받쳤다는 그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들은 신석기시대 중기(4500년에서 5300년 사이에)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식들은 장례나 속죄 또는 건물 상량식(루마니아 하르소바, 프랑스 파르레올리비에) 등과 연관이 있다. 아울러 이 시기의 많은 유럽의 유적지들(프랑스의 물랭쉬르세퐁, 르구르니에, 디당헹)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많은 노예들을 재물로 바쳤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석기시대 말, 어머니 여신은 점진적으로 주로 단도로 무장한 남신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야만성문명개념과 태곳적부터 진행되어 완성된 진보에 대한 담론을 강화하기 위해 19세기 후반에 날조된 신화에 불과한 셈이다. “잔인한 여명(선사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은 오늘날 문화상대주의의 발전과 함께 선사시대는 신화적인 요소를 지닌 황금시대였다는 시각으로 변했다. 우리 조상의 삶의 현실은 분명 이 두 시각 사이 어딘가에 존재 할 것이다. 고고학 자료들이 증명하듯이, 인류가 진화하는 데 있어 핵심 요소는 분명 경쟁과 공격보다는 연민과 상부상조를 비롯한 협동과 연대였다.

 

- : 마리렌 파투 마티스 Maryléne Patou-Mathis

 

- 번역 : 조은섭(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1) Maryléne Patou-Mathis, <야만과 선사시대, 서양인의 거울 (Le Sauvage et le Préhistorique, miroir de l’Homme occidental>’, Odile Jacob, 파리, 2011.

 

(2) Maryléne Patou-Mathis, <폭력과 전쟁의 선사시대 (Préhistoire de la violence et de la guerre)>, Odile Jacob, 2013.

 

(3) Pierre Clastres, <폭력의 고고학, 원시시대의 전쟁 (Archéologie de la violence. La guerre dans les sociétés primitives)>, Editions de l’Aube, <Poche Essai>, La Tour d’Aigues, 2010(1re éd. : 1977).

 

(4) Philippe Descola, 저서 <인류학, 새로운 영토, 새로운 물품 (Anthropologie : nouveaux terrains, nouveaux objets)>본성은 자연 속에 있다 (Les natures sont dans la culture)’, Sciences Humaines, hors-série, n° 23, 파리, 19981219991.

 

(5) Raymond Corbey, 저서<Claude Blanckaert> (sous la dir. de)프로이트와 미개인(Freud et le sauvage)’, Autrement, n° 9, 파리, 19933.

 

(6) Axel Kahn,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인간 본성의 근원에 관한 에세이 (L’homme, ce roseau pensant, essai sur les racines de la nature humaine)>, Nil Editions, 파리, 2007.

 

(7) Pierre Karli, <폭력의 근원. 신경생물학에 대한 성찰(Les Racines de la violence. Réflexions d’un neurobiologiste)>, Odile Jacob, 2002.

 

(8) Penny Spikins, Holly Rutherford et Andy Needham, <From Hominity to Humanity : Compassion from the earliest archaic to modern humans>, Time & Mind, vol. 3, n° 3, Oxford, novembre 201011.

 

(9) 프랑스 남서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 209구중 단지 5구에서만 폭력흔적이 발견되었다. Cf. Mary Ursula Brennan, <Health and Disease in the Middle and Upper Paleolithic of Southwestern France : A Bioarcheological Study>, 뉴욕대학 박사논문, 1991.

 

(10) Erik Trinkaus, <The Shanidar Neandertals>, Academic Press, New York, 1983.

 

(11) J. E. Anderson, 저서 <Fred Wendorf (sous la dir. de), Contributions to the Prehistory of Nubia>‘Late Palelolithic Skeletal Remains from Nubia’, Fort Burgwin Research Center -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Press, Dallas, 1965.

 

(12) Jean Guilaine et Jean Zammit, <전쟁 준비, 선사시대 폭력의 얼굴(Le Sentier de la guerre. Visages de la violence préhistorique)>, Seuil, 파리, 2001.

 

* 출처 :

 

http://blog.naver.com/lsb8666/220417824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