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키루스 원통의 내용

개마두리 2015. 12. 27. 21:46


* 굵은 검은색 글씨 : 옮긴이(잉걸)의 주석


- 짐은 온 누리의 임금이고, 힘 센 임금이고, 바빌론의 임금이고, 누리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키루스다.


* 온누리 : 전세계[全世界]를 일컫는 순우리말

    
* 바빌론 : 오늘날의 이라크 


* 누리 : 세계[世界]/천하[天下]를 일컫는 순우리말


* 키루스 2세가 살아있을 때 세계 인구는 대략 1억 1천만 명이었는데, 키루스 2세는 그 중 절반에 가까운 5천만 명을 다스렸다. - 잉걸


- 짐은 (나라를 - 옮긴이) 절대 전쟁으로 다스리지 않겠다.


→ (실제로는 이 조문이 지켜지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파르스 족과 메데 인과 엘람 인의 군사력으로 세워지고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라도 “전쟁으로 다스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사회와, 아예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전쟁”만 하는 사회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른 사회고, 못해도 전자가 훨씬 나은 사회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 잉걸) 


- 짐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제도와, (그들에게) 사회적인 신분을 안 주는 제도를 없애겠다.


→ (아케메네스 제국은 이전에 서아시아에 세워진 나라인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와는 달리, 종을 부리는 대신 돈을 주고 자유인인 노동자/장인[匠人]을 고용해서 일을 시켰다. - 잉걸)


- 짐은 살아있는 한 짐이 정복한 나라의 전통과 믿음을 존중할 것이다.


- 짐은 빚 때문에 남자나 여자가 종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 종 : 노예/노비를 일컫는 순우리말


- (짐이 다스리는 땅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억누르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


- 이유 없이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 남의 재산을 보상해주지 않으면서 가져가는 것을 금한다.


- 짐은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 급여를 주겠다.


- 짐은 그들의 질서 없는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었던 거룩한 땅으로 … 짐은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


* 티그리스 강 : 오늘날의 이라크를 흐르는 강


- 짐은 평화를 바라기에 모든 신민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밝힌다.


* 신민(臣民) : 신하와 백성. 오늘날로 치면 시민.


- 짐은 (나라를 이루는) 모든 주(州)에 제국에 소속될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를 준다.


→ (이 조문도 지켜지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키루스 2세의 뜻을 그 뒤를 이어받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황제들이 저버린 걸까? 아니면 이 조문 자체가 ‘제국을 유지해야 한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본 방침과 어긋났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이 조문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지방민/점령당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담은,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수준 높은 정치의 원리를 다룬 조문이다. 이 조문은 민주주의와 공화정이라는 원리로 움직이는 오늘날의 나라들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만약 국제사회의 여러 나라가 이 조문을 따르기만 해도, 분쟁과 내전과 투쟁과 국제전과 침략전쟁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며, 누리는 한층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 - 잉걸)


- (군대에 의해) 부서진 모든 신전을 다시 지어라.


- 모든 쫓겨난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 모든 인종/말/믿음은 평등하다.


- 모든 종류의 탄압을 금지한다.


* 키루스 원통 :                           


서기전 539년(지금으로부터 2554년 전)에 쓰인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키루스 2세(이란 이름 ‘코루쉬’.『구약성서』에는 ‘고레스’로 나온다. 흔히 ‘키루스 대제大帝’로 불리는 사람이다. 뒤에 ‘2세’라는 말이 붙는 까닭은 그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도 ‘키루스’라는 사람 - 물론 동명이인이다 - 이 있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나온 사람을 ‘키루스 1세’라 부르고, 그보다 나중에 태어난 키루스 대제는 ‘키루스 2세’라고 불러 둘을 구분한다)의 명령을 받은 서기들이 쓴 글이다.


진흙으로 만든 원통에 쐐기글자(설형문자)로 쓰였고, 원래 바빌로니아어로 되어 있는 글이었다(바빌로니아는 키루스 2세에게 항복한 나라다. 키루스 2세는 셈족인 바빌로니아인이 아니라 아리안족인 ‘파르스’ 족이었다. 파르스 족은 페르시아인의 한 갈래다).


원통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서기 1897년에 발견되었다(이 해는 조선이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해이기도 하다). 키루스 원통에 새겨진 인권선언문은 잉글랜드의 인권선언문인 대헌장(大憲章. 마그나 카르타)보다 1754년 앞서고(사실 내용도 대헌장보다 훌륭하다. 대헌장은 어디까지나 영주와 귀족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으니까), 프랑스의 인권선언문보다 2328년 앞서는 글이다(참고로 프랑스의 인권선언문은 백인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키루스 원통의 인권선언문은 모든 인종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뉴욕의 국제연합(國際聯合. UN) 본부에는 키루스 원통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복사판이 있는데, 이는 키루스 원통이 인권을 지키고 세계 평화와 모든 사람들/종교들/인종들/사상들의 평등한 공존을 추구하는 국제연합의 정신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실물은 이란이 아닌 영국에 있으며(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국박물관 - ‘대영박물관’이라는 이름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 에 있다), 이란 정부는 키루스 원통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 테헤란(이란의 수도) 박물관에 키루스 원통의 복제품이 전시되자, 많은 이란 시민들(대략 200만 명 이상. 대부분 무슬림이다)이 몰려들어 그 물건을 보려고 했다. 이는 키루스 2세에 대한 이란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키루스 2세는 조로아스터 교 신자였으나, 이슬람교를 믿는 오늘날의 이란 무슬림들은 그를 자랑스러운 이란의 황제로 기억하고 존경한다).


서기 2011년 영국박물관의 책임자인 ‘닐 맥그리거(백인 남성)’씨의 말에 따르면, “이란에 살고 있는 수 천 명의 유대인들”은 테헤란 박물관에 전시된 키루스 원통의 복제품을 보려고 테헤란에 찾아온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역사책이기도 한『구약성서』에 따르면,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을 점령한 뒤 바빌로니아 제국의 포로이자 종으로 살던 유대인들을 풀어주고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유대교를 존중하고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웬만해서는 이민족의 임금을 칭찬하지 않는『구약성서』도 키루스 2세만큼은 ‘신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임금’이라고 평가하며 추켜세우고 있으며, 1세기 전에도 유대인들은 그의 초상화를 내걸고 추모행사를 치렀다. 유대인 남성 가운데에는 ‘키루스’의 영어 발음인 ‘사이러스Cyru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다)


맥그리거 씨는 키루스 원통을 “인간의 열망에 대한 위대한 선언 중 하나”라고 평가했으며 “미국 헌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칭찬했다. 그는 키루스 원통이 “확실히 대헌장(마그나 카르타)보다 진정한 자유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맥그리거 씨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란 정부에서 조로아스터교도들과 동방 아시리아 교회[그리스도교의 한 갈래] 신자들은 - 그들이 수가 적고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 이란 국회에서 그들의 자리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에 말에 따르면 “이는 아주,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키루스 원통 복제품의 테헤란 전시는 이란과 해외에서 ‘이란은 여전히 억눌리는 이들의 지킴이인가? 이란은 독재자가 종으로 만들고 쥐어짰던 사람들을 풀어줄 것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