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단편]부부의 결심 - 해조와 무타의 뒷이야기

개마두리 2016. 12. 4. 20:06

-『불의 검』팬 소설(영어로는 ‘팬 픽션 Fan Fiction’)


(글쓴이 : 잉걸)


그 날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적어도 무타한테는 그랬다는 말이다. 그는 곳간 안에서 가죽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끔 가다 그는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곳간 안을 채운, 곡식이 들어있는 자루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자루들을 하나하나 센 뒤, 그 일이 끝나자 다시 두루마리의 오른쪽을 붙들고 눈을 두루마리에 꽂았다. 그는 입술을 떼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삼백 예순 자루면 우리 고을 사람들이 한 달은 먹을 수 있겠군. 좋아, 충분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한 달만 지나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올 것이고, 혼동강을 덮은 얼음도 다 녹을 거야. 그 때 강가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면 돼.’


그는 속으로 흡족해 하면서, 두루마리를 다시 말고 가죽 끈으로 동여맨 뒤 통나무로 쌓은 곳간의 벽에 걸린, 풀로 짠 바구니에 찔러 넣었다.


‘이제는 소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볼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 달린 또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 끈을 풀고 펼친 순간, 문 밖에서 들린 큰 목소리가 조용함과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앗아가 버렸다.


“족장님, 족장님 - !!”


무타는 짜증이 나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는 두루마리를 다시 돌돌 만 다음 끈으로 묶고, 허리춤에 찔러 넣은 뒤 덜컥 문을 열었다. 그는 조금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의 앞에는 시종인 ‘순베’가 서 있었다. 순베는 창을 오른손에 쥐고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왼손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윗몸을 조금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무타는 그 모습을 보자 호기심이 생겨서, 표정을 풀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순베야, 왜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느냐?”


순베는 숨을 몰아쉬는 것을 멈추고, 왼 주먹을 쥔 뒤 왼팔을 가슴에서 떼어내 명치 앞에 갖다 댄 뒤 허리를 숙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무타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사냥꾼이나 떠돌이나 나그네가 길을 잃고 우리 고을에 왔나 보구나. 아직 장사꾼들이 올 때는 아니니까 … 적당한 집을 골라서 쉴 곳이랑, 먹을 것이랑, 마실 것을 내주어라. 그 집 식구들한테는 나중에 손님이 떠나고 나면 내가 그 사람이 먹은 만큼 좁쌀과 말린 물고기를 갖다 주겠노라고 전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무타는 그 날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순베가 무타를 올려다보며 말을 더듬을 때까지는 말이다.


“저 … 족장님, 그것이 ….”


무타는 부드럽지만 의아함이 담긴 눈길 - 그의 작고 가늘고 길며 쌍꺼풀이 없는 눈매는 분노가 담기지 않았을 때에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 로 순베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소년은 마른 침을 삼킨 뒤, 고개를 숙이고,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손님이 … 보통 손님이 아닙니다.”


족장은 다시 한 번 소년에게 물었다.


“보통 손님이 아니라니?”


“소가 끄는 수레 석 대에 시종 네 명과 시비(侍婢. 곁에서 시중드는 여자 종) 세 명을 태우고, 보병 여덟 명이랑 기병 네 명과 함께 오셨습죠.”


“오로촌 족의 족장이냐?”


“아뇨, 옷차림이 아무르 식이었어요.”


“의형(義兄 : 산마로/가라한 아사)이 오셨어?”


“… 아닙니다.”


“그럼 마리한(천궁)이 사자를 보내셨느냐?”


“아뇨.”


“그럼 도대체 누가 오셨단 말이냐?”


순베는 입을 다물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아벌한이요.”


무타는 그 말을 듣자,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휘청거렸다. 그는 곳간 안에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네. 아벌한이 몸소 오셨습죠.”


“그 인간이 여긴 왜 와? 당장 돌아가라고 해! 하루가 아니라 딱 한 시진(1시진 = 2시간)도 안 돼! 조밥 한 그릇이 아니라 좁쌀 한 톨이라도 그 인간한테는 줄 수 없어. 그 인간한테 가서 그렇게 전해!”


순베는 윗몸을 숙인 채 무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들고 무타를 올려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족장님, 아벌한은 제게 족장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덧붙이셨어요.”


무타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화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서신(書信 : 편지)에 써서 보내면 될 거 아니냐?”


무타는 홱 돌아서서 두루마리를 왼쪽 허리춤에서 뽑은 뒤 끈을 풀고 펼쳤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순베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기 때문에 그는 글을 읽는 일을 멈추어야 했다.


“족장님. 아벌한은 ‘엥흐멍’ 마님과 함께 오셨어요. 우리 에벤키 족 여인을 데리고 오셨단 말입니다. 마님이 아프셔서, 고향을 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아벌한이 마님을 수레에 태우고 이 고을로 오신 거라고요.


아벌한을 미워해서 안 들이시는 거야 그렇다 쳐도, 마님까지 못 들어오게 하실 거예요? 마님한테 고향 땅의 공기와 물도 맛보지 못하게 하실 거예요? 마님이 고향 땅의 어버이와 형제자매와 조카들도 만나지 못하고 수레를 돌려서 부루 목장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마님한테 ‘마님이 병에 걸리셨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냥 목장으로 돌아가세요. 이곳에 머무르면서 병을 고치시면 안 됩니다.’하고 말씀드릴까요?”


무타는 한숨을 쉰 뒤, 두루마리를 말아 끈으로 묶고 다시 왼쪽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는 순베 쪽으로 몸을 돌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마님은 네가 고을 안으로 모셔라. 하지만 아벌한은 안 돼. 내가 그 인간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마. 분명히 말하지만, 그 인간을 만나는 건 이번 한 번 뿐이야!”


그는 말을 마친 뒤 곳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순베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오른손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무타가 고을 한가운데에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열 걸음만큼 떨어진 곳에서 한 여인이 달려왔다. 그녀는 오른손에 붓을, 왼손에는 가죽을 마름모꼴로 자른 뒤 바늘과 실로 이어붙인 절본(折本. ‘[여러 번] 꺾은[접은] 책’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을 들고 있었는데, 두 소매는 여러 번 접어 팔꿈치 위로 말아 올린 뒤에 끈으로 단단히 묶었고, 붓에서는 먹물이 꾸준히 떨어지고 있었다. 


“무타!”


그녀가 무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과 염려가 담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목소리였다. 눈동자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뜬 눈과, 이는 보이지 않고 입 안의 일부분만 보일 만큼 작게 벌린 입과, 위로 치켜 올라온 눈썹 사이에 있는 눈썹의 끝부분이 그녀가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해조? 당신이 어쩐 일이야? 우리 집에서 부족 아이들한테 아무르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지 않았어?”


무타는 해조를 보며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이맛살은 찌푸리지 않은 채 물었다.


해조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두 손을 앞치마 위, 그러니까 무릎 위에 올린 뒤,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섯 번 정도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 해조는 윗몸을 일으키고 다시 한 번 무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랬어. 하지만 방금 전 내 시비(侍婢. 곁에서 시중드는 여자 종) ‘수브다’가 나한테 달려와서 우리 오라버니(아벌한 ‘물려’)가 당신을 만나러 오셨다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지.”


무타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문 채 해조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에게 아벌한을 만나러 가는 건 사실이지만, 싸우지 않을 테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에게 “당신도 핏줄을 만나고 싶을 테니, 나랑 함께 가자.”고 말할 수도 있었다. 어떤 말을 하건, 침묵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는 해조 앞에 멈춰 서서, 겨울의 마지막 달을 마음껏 맛보듯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어떤 말을 할지를 궁리하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렸다. 하지만 그가 ‘셈’을 끝내기 전에, 해조는 오른손을 내밀고 입을 열어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무타. 활이랑, 화살이랑, 칼이랑, 도끼를 나한테 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맨 몸으로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 당신 무기들은 내가 우리 집으로 가져갈게.”


“하, 하지만 ….”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대신 오라버니한테 수브다를 보내서 당신을 만날 때 검을 차지 말고, 호위병들은 오라버니에게서 서른 걸음 떨어진 곳에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게.”


“ …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


무타는 눈을 내리깔고 우울한 표정을 지은 뒤, 처음엔 활을, 그 다음에는 삼엽 화살이 들어있는 화살 통을, 그 다음에는 긴 칼을, 마지막에는 끈 달린 도끼를 해조에게 넘겨주었다.


해조는 그것들을 모두 땅바닥에 내려놓은 뒤, 무타를 꼭 끌어안고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믿어.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믿어줘.”


무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두 팔을 움직여서 해조의 몸을 끌어안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을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팔을 풀었고, 해조도 두 팔을 푼 뒤, 무타의 무기들을 챙기고 그녀와 무타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타는 고을 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아내에게 물었고, 해조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당신 오라버니인데, 뵙고 싶지 않아? 나랑 같이 갈래?”


“뵙고 싶지 않아. 당신과 혼인하기 전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나. 그리고 오라버니는 나를 보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시니까, 내가 갈 필요는 없어.”            


무타는 입을 다문 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해조는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타는 고을 입구에 다다른 지 반(半) 시진동안 팔짱을 낀 채, 통나무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밧줄로 묶은 울짱(목책/나무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고, 입은 수십 근(斤)짜리 쇳덩이처럼 무겁게 다물었으며,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기 때문에 가는 눈매가 한결 더 무서워 보였다. 그는 아예 말을 안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만약 누군가가 그런 그를 보았다면, 그가 불붙기 전의 기름단지처럼 불안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벌한 물려도 마찬가지였다.


수브다의 전언에 따라 칼을 풀고 호위병들을 떼어놓은 뒤 혼자서 온 물려는 무타에게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 그러니까 고을 입구 앞에서 - 머뭇거리면서 서 있었는데, 그는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댄 뒤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굵은 두 눈썹을 - 미간을 좁힘으로써 - 하나로 모았다.


그의 옆에는 그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시종이 무언가가 가득 든 가죽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시종은 물려와 무타를 번갈아가며 본 뒤 제자리에서 발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흰 콧김과 입김을 내뿜었다. 어색한 침묵은 물려가 입을 열면서 깨졌다.


“네 활과 화살과 도끼는 어디에 있느냐?”


무타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제 아내한테 주었어요.”


물려는 다시 말을 걸었다. 그는 일단 한 번 잡은 기회 - 그러니까 그의 매부에게 말을 걸 기회 -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서 입을 여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으니, 너는 매정한 놈이야.’하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렇게 퉁명스럽게 굴지 말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다오. 넌 내 친척이잖니?’하고 말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이 뻔뻔한 놈아, 손님을 이 따위로 대접하기냐?’하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건 그는 입을 열었고, 입을 연 이상 한마디는 해야 했다. 그는 매끈하게 다듬지 않은 말을 마치 가래침처럼 밖으로 내뱉었다. 분명히 그 말은 듣기 거북했다.  


“그래? 내 말은 듣기 싫다면서 내 누이가 하는 말은 안 그런 모양이구나! 네가 그렇게 구는 걸 하늘님과 땅님에게 감사해야겠다. 안 그랬으면 내 몸에 네 화살이 박히거나 네 몸에 내 호위병들이 던진 창이 꽂혔을 테니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게 싫어서 아내 말을 따랐을 뿐이에요. 아벌한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 으르렁거리지 마라. 너도 보면 알겠지만, 나도 칼을 풀고 호위병 없이 맨몸으로 왔어. 널 해치려야 해칠 수가 없다.”


무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물려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는 팔짱을 풀지 않았고, 물려 쪽으로 걸어가지도 않았다.


그는 침묵을 지키고 싶었으나, 상황은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물려가 계속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일단 물꼬가 터지면 계속 물이 흘러가듯이, 말문이 트인 물려는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솔직하게 말하마. 네가 마을 입구까지 걸어와서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 인사도 안 하고 울짱으로 물러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렇게까지 푸대접을 받는 손님인가 해서 기분이 안 좋았어.”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는 아벌한이 더 잘 아실 거예요.”


“정말 이러기냐? 가라한하고는 화해하고, 마리한한테는 예의바르게 굴면서 왜 나한테만 거칠게 굴어?”


“아벌한은 저를 방해하셨잖아요? 저한테 사과도 안 하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물려는 이맛살을 더 힘껏 찌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우울함과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었고, 어찌 보면 그것들이 짜증보다 더 비중이 높았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숨을 다시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고, 체념이 들어간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래, 그랬지. 넌 내가 내 누이(해조)를 가라한과 약혼시킬 때부터 날 미워했다. 지금 네가 하는 걸 보니 그 일 때문에 아직도 나를 미워하는구나.”


무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고 나지막하지만 분노는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아벌한은 저를 좋아하셨어요?”


그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기억대로라면 아벌한은 제가 열여섯 살이 된 뒤부터 저를 싫어하셨어요. 그 전에는 저를 ‘용감한 녀석’이나 ‘똑똑한 녀석’이라고 칭찬하셨죠.


아벌한은 우리 부족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우리 아버지나 장로(長老)들에게 ‘아무르 피난민들을 받아주어서 정말 고맙소. 여러분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우린 다 죽었을 거요.’하고 말씀하셨고요. 그 땐 정말로 그 말씀을 믿었어요. 그래서 아벌한을 따른 겁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니까, 아벌한은 제게 해조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 말도 걸지 마라,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라고 하셨죠. 처음엔 해조에게 정중하게 대하고, 못된 짓을 하거나 막 대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해조와 너무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오해를 샀구나. 내가 진심을 털어놓으면 오해를 푸실 거야!’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잖아요! 아벌한은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물러나라고만 하셨어요. 아벌한은 제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는 아예 해조를 만나지도 못하게 하시고,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는 아벌한이 저를 불러서 ‘해조는 가라한과 혼인하게 되었으니 그리 알아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죠.


제가 말도 안 된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셨어요? 전 아직도 그 말씀이 생각나요. ‘네가 진심으로 해조를 위한다면 물러서야 하는 거야!’하는 말이요. 아마 그 말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해조가 가라한과 이혼하고 저와 함께 혼동강가로 떠난 뒤에도, 제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도, 전 가끔 가다 아벌한이 하신 말씀과 저를 대한 태도가 떠올라서 속이 뒤집어져요.


아벌한은 제가 아무르 사람이 아니라서 싫어하시고, ‘천한’ 에벤키 족이라서 싫어하시고, 가진 것이 적은 족장이라서 싫어하시고, 서자라서 싫어하시고, 누이와 헤어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기어코 누이와 혼인한 놈이라서 싫어하시는데, 제가 달리 뭘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아벌한이 저를 싫어하시는데, 제가 아벌한을 좋아해야 해요?”


물려는 무타의 말을 듣고 화가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최선을 다 했다. 내 누이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단 말이야! 네가 족장의 맏아들이나 족장 쿠이친에게 인정받는 아들이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난 밝이 부(푸른 용 부)의 부(副)수장 삭검한테 ‘우리 부(部)의 수장이 혼인하려고 하시는데, 좋은 신부감이 있으면 소개해 주소서.’하는 부탁을 받고, 가라한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본 뒤 결정했다.

                                                  
밝이 부의 수장이자, 아무르 사람이고, 용감하고 힘이 세고 가진 것도 많은 남자니까, 내 누이와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했어. 그 때로 돌아가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하고 똑같은 결정을 내릴 거다!”


물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에서 하얀 입김을 뿜었다. 그는 차라리 무타의 반대쪽으로 돌아서서 수레에 탄 뒤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매부에게 중요한 물건들을 전해야 했고, 그러려면 말을 마저 다 해야 했다.


물려는 그 사실을 자신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킨 뒤, 고개를 들어 무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고는 여기지 않아. … 하지만 내가 한 일은 후회한다. 밝이 부의 부수장이 수장의 신부감을 구한다고 말할 때, 왜 당신의 수장이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가라한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 - 그러니까 당신이 과부를 좋아한다는 소문 - 이 사실이냐고,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물었어야 했는데, 난 그것을 헛소문으로만 알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 중요한 걸 물어보지 않고 억지로 혼인을 밀고 나갔으니, 이 혼인이 파탄에 이른 건 당연한 거야. 그건 내가 후회해야 하는 일이다. 달리 할 말은 없어.”


무타는 여전히 물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칠었던 숨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지듯이 한마디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아벌한,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엥흐멍 … 마님을 마을 안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 말고, 다른 할 말이 있다고 하셨죠? 그게 뭔데요? 전 할 일이 많고, 바쁘니까, 그것 하나만 말씀하시고 성(城)으로 돌아가 주세요.”


물려는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콧김을 내뿜으며 침묵했다. 하지만 아직은 겨울이었고, 이런 추운 날씨에 밖에 서 있겠다고 고집하면 찬바람을 맞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거나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는 시종이 자기와 가까운 곳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두 사람을 둘러싼 험악한 공기를 견디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결국 그는 자존심과 반발을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려는 윗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시종을 불렀다.


“얘, ‘고도쇠’야! 그것들 좀 앞으로 가져와라!”


고도쇠는 물었다.


“제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가죽 자루요?”


“그래, 그걸 가져와!”


고도쇠는 “아이고, 이제 살았네! 쇤네는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요!”하고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그는 자루를 짊어진 채 눈을 밟으며 아벌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고, 눈에 자신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겼다. 그가 아벌한 바로 앞까지 오자, 물려는 두 눈썹을 모은 채 씩 웃으며 시종에게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자루를 에벤키 족 족장한테 주거라.”


고도쇠는 물려 쪽으로 허리를 숙인 뒤, “알겠습니다!”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무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눈 덮인 땅은 그가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고도쇠는 무타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뒤, 자루를 자신의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두 손을 허리에 짚은 뒤 고개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아그그그 ….”


그의 신음소리가 고을 앞에 울려퍼졌다.


무타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눈썹이 위 아래로 비스듬하게 엇갈리도록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은 조금 튀어나온 모양으로 뜨면서 고도쇠와 물려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잠시 뒤, 그는 자루를 오른손 검지로 가리키며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물어보았다.


“이건 …?”


고도쇠는 물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무타가 물려를 바라보자, 물려는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물려는 무타에게 되물었다.


“넌 나를 싫어한다고 했지?”


“그럼요, 잘 아시네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건 안 듣겠구나.”


“네, 듣기 싫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물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눈을 뜬 채였다.


“네가 내 말을 듣기 싫다면 - 그리고 내가 입으로 하는 말을 못 믿겠다면 - 그 자루에 들어있는 것들이 하는 ‘말’이라도 들어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타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속으로 ‘이 인간이 장난하나?’하고 생각했다.


물려는 무타의 기분에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그 자루에 들어있는 것들은 서신이다. 가죽 두루마리도 있고, 절본도 있고, 목간과 죽간도 있지.


내 누이가 가라한과 헤어지고 너랑 함께 혼동강변으로 떠났을 때, 많은 아무르 사람들이 화를 내며 너를 헐뜯었어. 장군이건 장로건 촌장이건 가릴 것 없이 내게 서신을 보냈다.


나는 그 서신들을 다 읽었고, 하나하나 답신을 써서 보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내가 답신을 쓸 때는 그것을 다른 두루마리나 절본이나 목간이나 죽간에 베껴 적었다. 보내는 답신 말고도 또 다른 사본을 만든 거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자루에, 내가 받은 모든 서신이랑 내가 보낸 모든 답신의 사본이 들어있다. 그 자루를 받아라. 그리고 자루 속의 서신들을 다 읽어다오.


그렇게 한 다음에 나를 싫어할지 말지를 결정해! 난 그 말을 하려고 널 만났다. 달리 할 말은 없어. 그뿐이야.”


물려는 숨을 돌린 뒤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정말로 지쳐 보였다. 사실 그는 더 이상은 무타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고도쇠를 찬바람이 부는 겨울 하늘에 드러낸 채 말을 잇기로 했다. 그는 진지했다.


“내가 준 서신들을 어떻게 다뤄도 좋아.


두루마리랑 절본을 물에 빨아서 그 위에 다른 글을 써도 좋고, 옷감으로 써도 좋고, 걸레로 써도 좋다. 목간과 죽간들을 땔감으로 써도 원망하지 않으마.


대신, 서신들을 하나하나 다 읽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해 다오. 부탁한다.”


무타는 물려의 말을 다 들은 뒤 눈길을 그의 얼굴에서 가죽 자루로 돌렸고, 곧 입을 열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네, 그러죠. 이제 볼일 다 보셨죠? 그럼 마님은 우리 부족한테 맡기고 당장 부루 목장으로 돌아가세요. 마님이 다 나으시면 성이나 부루 목장으로 서신을 보내드릴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요.”


물려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말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무타의 반대쪽으로 물러나면서, 마른 수건을 쥐어짜서 물방울을 모으는 심정으로 말했다.


“난 가마. 내 첩실(妾室. ‘첩’을 점잖게 이르는 말)을 잘 부탁한다. 그리고 내 누이한테도 안부 전해다오.”


무타는 다시 울짱(목책/나무울타리를 일컫는 순우리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고,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물려에게도, 고도쇠에게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 귀찮은 족속들이 당장 그의 앞에서 사라지기를 빌 뿐이었다.


물려는 무타의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고도쇠야! 거기서 말뚝처럼 서 있지 말고 날 따라와라. 시비(侍婢)들이야 이 마을에 남아서 마님을 보살펴야 하지만, 넌 내 시종이니 나와 함께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

  
고도쇠는 고개를 돌려 물려를 바라보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곧 아벌한을 따라가겠습니다요. 조금만 기다려 주소서, 곧 가겠나이다.”


물려는 “빨리 와라!”하고 말하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무타는 딱딱한 목소리로 고도쇠한테 말을 걸었다.


“네 웃어른도 가시는데, 너는 왜 서 있느냐? 난 네 웃어른이 싫듯이 너도 싫다. 빨리 가거라!”


고로쇠는 고개를 무타 쪽으로 돌린 뒤,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그 때 고도쇠 쪽으로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족장 …, 아니 족장님. 우리 주인님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십시오. 주인님의 말씀을 듣기 싫으시다면 제 말이라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족장님 앞에 놓인 서신들은 아벌한의 서신 사본과 뭇 사람의 서신입니다.


아벌한은 답신을 쓸 때마다 내용이 똑같은 사본을 한 통씩 만드셨고, 그 일을 마친 다음에야 진지를 드시거나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분은 사본을 쓰시느라 목이 뻐근하거나, 허리가 아프거나, 눈이 침침해도, 절대 도중에 멈추지 않고 사본을 다 쓰셨어요.


그리고 그분은 서신들을 꼭 혼동강가의 에벤키족 고을로 가져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여쭈니까, ‘매부’에게 욕을 먹고 에벤키 족에게 원망을 사도 견딜 수 있지만, 내 누이에게까지 ‘친척과 그의 동족을 푸대접하는 냉혈한’이라는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하셨어요.


그러니 그 분을 미워하시더라도, 그 분에게 쏟아진 화살 같은 말들과 그 분의 속마음이 담긴 서신들을 몸소 눈으로 읽어본 뒤 미워하소서.


족장님의 마음이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강물 같아서,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옵니다.”


무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비록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하더라도, 말을 들은 이상 말을 해야 했다. 그는 힘이 빠진 - 따라서 독기도 어리지 않은 - 목소리로 고도쇠에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가 봐. 아벌한이 주신 서신들은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 나서 불 속에 넣으마. 아벌한에게 우리 부족에게는 땔감이 남아도는데, 그걸 생각하지 않고 ‘땔감’이 될 것들을 잔뜩 안겨 주셔서 ‘정말 감사한다.’고 전해드려.”


고도쇠는 무타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무타의 반대쪽으로 돌리고 물려를 좇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멀어져 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무타는 자루로 눈을 돌렸다. 자루는 크고 묵직해 보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서신들 때문에 성난 아이의 부풀어 오른 두 볼처럼 보였다. 어림잡아도 서신이 몇 십 통은 들어있을 것이 뻔했다. 그는 괜한 약속을 했다고 생각하며 무겁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아벌한) 뿐 아니라 그 아저씨의 시종(고도쇠)까지 이 서신들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면, 이것들은 중요한 내용일 거야. 내용을 확인하려면 서신에 나오는 욕이나 헐뜯음을 읽는 건 각오해야 해. 그래, 일단 서신들을 우리 집에 가져가서 다 읽자. 그 다음 그것들을 버릴지 말지 결정해야겠어.’


그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윗몸을 굽혀 두 손으로 자루의 목을 잡고, 그것을 오른편 어깨로 둘러맸다. 자루와 서신들은 무거운 돌처럼 무타의 등을 짓눌렀고, 무타는 ‘이 서신들이 왜 이렇게 무거워? 온통 욕이나 악담으로 가득차서 그런가? 아니면 서신의 수가 많고 서신 하나하나가 길어서 그런 건가?’ 하고 생각하며 입으로는 “귀찮은 짐을 떠맡았네.”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은 그의 흰 콧김/입김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고, 그는 등을 짓누르는 아직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온갖 거친 글들과 서신 그 자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글 뭉치의 무게를 느끼며 고을 안으로, 아니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고을을 감싸는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가웠고, 그 바람은 화살이나 칼날이 아니라 바위처럼 고을을 짓눌렀다.


해조는 자신과 무타의 집 안에 있는 방에서 글이 적힌 나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나무판들이 쌓여 있었고, 나무판 더미 바로 오른편에는 붓들이 잔뜩 꽂힌 붓통이 놓여 있었다.


그녀 앞에는 에벤키족 아이들이 부채꼴로 둘러앉아 그녀와 나무판 더미를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오른 허리에 손칼(나무판이나 목간이나 죽간의 글씨를 긁어서 지우는 작은 칼. 요즘으로 치면 지우개)을 찼다.


그들의 얼굴과 해조의 얼굴은 나무 등잔대가 받치는 작은 진흙 등잔(이 안에는 물고기 기름이 가득 차 있었다)이 억새나 갈대로 엮은 심지를 태우면서 빛을 냈기 때문에 은은하게 빛났다.


해조는 밖이 더 어두워졌다는 걸 느끼면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으므로 목판에 적힌 글을 끝까지 다 읽은 뒤,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암바’, 너 거기 있니?”


앉아있던 아이들 가운데 한 소년이 대답했다.


“네, 부인(夫人.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 신분이 높은 기혼 여성에 대한 존칭). 저 여기 있어요.”


해조는 나무판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 검지로 그 나무판에 적힌 글을 가리키며 비암바한테 말했다.


“네가 낸 나무판의 글을 보니까 ‘물고기 냠 홀랑’이라는 글귀가 있던데, 그게 뭐니?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비암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 사람이 밥 먹을 때 ‘냠냠 먹는다.’고 하잖아요? 물고기를 통째로 입에 던진 다음 씹어 먹으니까 ‘홀랑’이라는 말을 덧붙였고요. 굳이 길게 쓸 필요가 있나요? 전 귀찮아요. 그러긴 싫어요.”


“‘나는 물고기를 불에 구워 다 먹어치웠네.’하고 적어야지, ‘냠/홀랑’이라는 글만 쓰면 누가 알아보니? 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뜻을 알 수 있게 써야지!”


해조는 덧붙였다.


“넌 시인이 되어서 온 누리(‘전 세계 全 世界’를 일컫는 순우리말)를 돌아다니고, 모든 족속에게 네가 지은 시를 들려주는 게 꿈이라고 했잖니? 그런 꿈이 있는 애가 이렇게 글을 대충대충 쓰면 어떡할래? 좋은 시를 쓰려면 글부터 제대로 써라. 잘못된 부분을 손칼로 긁어서 돌려줄 테니, 그 부분들을 다시 써.”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손칼을 들어 나무판을 긁기 시작했다. 비암바는 억울하다고 생각했으나, 에벤키족의 땅 안에서 글 솜씨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해조였고, 따라서 그녀의 지적은 옳았기 때문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해조가 건네는 나무판을 받았다. 그의 곁에 있던 그의 동무들은 - 소년이건 소녀건 가릴 것 없이 -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거나 고개를 저음으로써 그를 비웃었다(몇몇은 낮은 목소리로 “붓을 빨리 놀릴 때부터 알아봤어. 제가 뭘 썼는지 읽어봤어야지!”하고 수군거렸다).


해조는 비암바에게서 눈을 뗀 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나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나무판에 쓰인 글을 읽더니, 아까 비암바를 나무라던 때와는 달리 입꼬리가 올라가며 부드러운 눈매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어 누군가를 불렀다.


“‘엥흐빌레그’, 이 글 네가 쓴 글이지?”


한 소녀가 대답했다.


“네, 부인. 부르셨어요?”


해조는 엥흐빌레그를 바라보며 나무판에 적힌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 … 서기(書記)가 판관(判官)에게 아뢰기를, ‘판관님, 저는 죄 지은 사람에게만 벌을 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이 지켜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비록 판관님 앞에 있는 아무개가 남의 베(: 실로 짠 천)를 훔쳤습니다만, 그 자의 아우는 도둑질을 돕지 않았고, 그 자의 어머니는 그 자를 꾸짖으며 훔친 베를 다시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아무개의 핏줄이라고 해서 아무개와 똑같은 벌을 받아야 할 까닭은 없사옵니다. 부디 굽어 살피소서! 도둑인 아무개는 옥에 가두거나 그의 재산을 빼앗아서 훔친 물건 값을 갚게 하시되, 그의 식구들은 벌하지 마소서! 만약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면, 그들을 옥에 보내는 대신 아무개가 훔친 베 값을 내고 아무개와 함께 옷감 주인한테 죄를 빌게 하소서.’라고 했다. ….”


해조는 읽는 것을 멈추고 엥흐빌레그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직 겨울인데도 방 안에는 봄바람이 불 듯이 포근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거 네가 쓴 거지? 장하구나. 정말 잘 썼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서기가 겪은 일을 쓴 거라고 해도 믿을 거야.”


엥흐빌레그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을 감고 방긋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 숙인 뒤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 칭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걸요.”


해조는 두 눈을 가볍게 감은 뒤,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넌 서기가 되겠다고 했잖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서신이나 고소장을 대신 써 주고, 눈이 멀어서 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읽어주고,


에벤키족 땅에서 열린 재판정에 가서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죄인이 아닌 사람과 죄인을 가려내고,


만약 에벤키 족이나 나나이스 족이 아무르 관청에 불려 가면 그 사람들을 위해 - 그리고 그 사람들 대신 - 법관이나 판관(判官. 재판관) 앞에서 말하겠다고 했잖아?


지금 네가 쓴 글을 읽으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이대로 하렴.


넌 훌륭한 서기가 될 수 있단다. 아니, 어쩌면 에벤키 땅에서 가장 뛰어난 판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엥흐빌레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읽고 쓰는 걸 열심히 배울게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두 팔을 뻗어 해조가 내민 자신의 나무판을 받았다. 엥흐빌레그는 나무판을 들여다보며 “엥흐빌레그가 부러워. 쟤는 늘 부인한테 칭찬받잖아?” 라든가, “우리들 가운데 엥흐빌레그가 가장 똑똑한 것 같아.”라는 동무들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기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무판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두 눈을 감은 채 빙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빛이 아니더라도 밝게 빛났을 것이다.


해조는 다시 나무판들을 읽어보다가, 문득 한 나무판에 눈을 멈추고는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든 뒤 좌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트곤, 오트곤!”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대답했다.


“네, 부인!”


해조는 ‘오트곤’을 보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 네가 쓴 글을 봤어. 맞춤법이 어긋나는 낱말이 하나도 없더구나.”


오트곤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해조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해조가 이렇게 덧붙이기 전까지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침(鍼)을 놓습니다.’라는 말을 ‘나는 치믈 노씀니다.’라고 쓰고, ‘이건 약(藥)이 되잖아요?’라는 말은 ‘이건 야기 되자나요?’라고 썼잖니?”


오트곤은 해조의 말을 듣자마자, 입 꼬리를 밑으로 축 늘어뜨렸고, 아랫입술은 앞으로 내밀었고, 두 눈썹 사이를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들어갈 정도로 좁혔다.


“부인!”


해조는 오트곤의 표정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하고 담담했다.


“내 말은, 네가 나아져서 기쁘다는 거야.


넌 의원이 되어서 에벤키 족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아무르 사람 가운데 가난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고 약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도 돌봐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의서(醫書. 의학을 다룬 책)를 써서 집집마다 나눠주겠다고, 그래서 글을 배운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글을 잘못 쓰면 안 되지.


이를테면 민들레 달인 물을 환자한테 줘야 하는데, ‘민들레 달인 물을 마시세요.’하는 처방전을 써 줘야 하는데 ‘민<둘에> <다린> 물을 마시세요.’하는 글을 써서 주면 어떻게 되겠니? 환자랑 환자의 식솔(食率. 식구)들은 처방전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테고, ‘민들레를 물에 넣고 달이라.’는 말을 ‘옷감 가운데 무늬가 없는([민]무늬) 것 두 필을 다리미로 다린 다음 그걸 물에 담그고, 그 물을 마셔야 한다는 뜻인가 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잖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맞춤법을 지키고 글을 똑바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야. 이제는 그 원칙을 잘 지키니까 잘 됐다고. 넌 다른 건 문제가 없고, 그 부분만 문제가 되니까, 앞으로도 맞춤법을 잘 지키도록 해.”


해조의 말을 듣던 오트곤은 어느새 표정을 풀고 가벼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네, 부인.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하고 대답하며 두 팔을 앞으로 내민 뒤, 해조가 건네준 자신의 나무판을 받아갔다.


해조가 다시 나무판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고 읽으려고 할 때, 집의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덜컹 - !’


바깥의 찬바람이 집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뒤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공기를 뚫고 해조의 귀로 들어왔다.


“해조? 늦어서 미안해. 이야기가 길어졌고, 받은 짐이 무거워서 늦었어.”


해조는 무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앉아 있던 에벤키 족 아이들도 자신들의 족장이 왔다는 것을 알고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족장님, 오셨어요?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는 게 사실이에요?”


“엥흐멍 언니 … 아니 마님이 친정 식구들을 만나신다면서요? 그 분이 나으실 때까지 이 고을에 머무르시면 안 돼요?”


“아벌한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한테 가르쳐 주세요.”


집 안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차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해조는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무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무타는 반쯤 감긴 눈으로 - 그리고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채 - 해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흰 입김이 조금씩 나왔고, 코에서도 흰 콧김이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으며, 후우, 후우 하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타는 자기 앞에 자루를 내려놓은 뒤, 에벤키족 아이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해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조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곧 자신이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는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들론 뒤 딱 잘라서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오늘 학업은 여기까지만 하자. 집으로 돌아가렴. 족장님은 지금 피곤하셔서, 너희들한테 대답해 주실 수가 없단다. 내일이나 모레에, 족장님이 푹 쉬고 나서 너희들한테 모든 걸 말씀하실 테니까, 그때까진 기다리렴, 알았지?”


아이들은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해조와 무타를 흘끔흘끔 훔쳐보았고, “족장님이 왜 저렇게 피곤해 하시는지 알겠어? 난 모르겠는데 ….”나 “족장님이 짊어지고 오신 게 뭐 같아? 아벌한의 선물? 곡식이라면 우리 고을에도 차고 넘칠 만큼 있는데 …… 혹시 돌소금(석염) 아냐?”하고 말했다. 그들은 해조와 무타의 집을 흐르는 개울물처럼 아주 빠르게 빠져나갔고, 곧 집 안은 텅 비었다.


무타는 그제야 한숨을 쉰 뒤, 눈을 살짝 감고 입을 다문 채 씩 웃었다. 그는 입을 열어 투박하지만 따뜻함이 담긴 목소리로 해조에게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한 숨 돌렸어.”


해조는 호기심과 염려가 담긴 눈길로 무타를 바라보다가, 자루로 눈을 돌린 뒤 입을 열었다.


“무타, 정말로 알고 싶은 게 있어. 이 자루에 뭐가 들어있어? 그리고 오라버니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얼굴빛이 안 좋아? 혹시 싸우기라도 했어?”


무타는 반쯤 감긴 눈으로 해조의 말을 듣다가,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말했다.


“얘기하자면 길어. 그래도 괜찮다면 다 말할게.”


해조는 흑요석처럼 티 없이 까맣고 빛나는 눈으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무타는 등잔을 등지고 오른손을 뒤집은 뒤,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무타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조금 긴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무타는 물고기 기름을 종지에 넣고 새 심지를 넣은 다음 다시 심지 앞에서 부싯돌을 부딪치는 일을 두 번 되풀이해야 했다.


해조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무타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중에 등잔불이 꺼져서 어둠이 두 번 찾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해조는 숨을 가볍게 코로 내쉰 뒤 무타와 자루를 번갈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겠어. 당신이나 오라버니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자루에 있는 서신들 …… 읽어보고 싶어? 당신 마음이 상할 지도 모르는데.”


무타는 자루를 흘끗 본 뒤, 고개를 돌려 해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볼래. 나랑 당신이 맺어지는 걸 기를 쓰고 반대한 작자들의 글을 읽는 건 싫지만, 난 고도쇠랑 아벌한한테 서신들을 다 읽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만약 약속을 안 지킨다면, 사람들은 내가 비겁해서 나를 헐뜯는 작자들의 글을 안 읽고 달아났다고 생각할 거야.


물론 속이 쓰릴 테고, 피가 거꾸로 솟을지도 모르고, 가슴이 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아프겠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 다른 일에 몰두하면 잊을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어떡할래? 읽고 싶어?”


해조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단호했고,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도 읽겠어. 한 사람이 혼자서 읽고 속이 상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함께 읽고 그 글을 쓴 사람에게 함께 화를 내는 편이 나아.


무거운 짐도 함께 나눠서 지면 훨씬 가볍고, 힘든 일도 함께 하면 덜 힘들잖아?


나도 거친 말이 적힌 글을 읽는 건 싫지만, 당신 혼자서 괴로운 일을 하게 놔둘 순 없어. 함께 읽자. 난 견딜 수 있어.”


“ …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무타는 코를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방 안에 해조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무타의 두 눈에 좁쌀만큼 작고 구슬처럼 둥근 눈물이 맺힌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상대방과 자루를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마른 침을 삼킨 뒤, 자루를 풀어 안에 든 서신들 가운데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는데, 겉에 ‘아무르 장군 “여용사(余勇士)”가 아벌한에게 올리는 서신’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은 나무 막대기에는 새끼줄로 만든 끈이 묶여 있었는데, 그 끈 끝에는 목간이 묶여 있었다. 목간의 겉에는 ‘아벌한이 여용사 장군에게 보낸 답신’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해조와 무타는 잠시 그 서신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았고, 다시 서신들로 눈을 돌린 뒤 마른 침을 삼켰다. 해조는 여용사 장군의 서신을 묶은 끈을 풀었고, 무타는 아벌한의 답신을 묶은 끈을 풀었다.


여용사의 서신을 펼친 해조는 그 안에 적힌 글을 읽었다.

 
“아벌한, 소장(小將)은 에벤키족 족장의 아들놈이 해조 부인(夫人)을 데리고 혼동강가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놈이 어떤 놈입니까? 제 발로 우리의 원수에게 찾아간 놈입니다.


그러니까 소장과 아무르 군사들이 원수들의 목을 베고, 가슴을 찌르고, 배를 가르고, 손을 자르고, 덫을 놓아 원수들의 발목을 자르고, 몸에 화살을 박아 넣고, 그 놈들의 피를 뒤집어쓸 때, 그 놈과 그 놈을 따르는 에벤키 놈들은 칼과 도끼와 창과 활과 화살을 들고 우리의 일을 방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뿐입니까? 그 놈은 원수들이 우리 군사와 백성들의 목을 베고, 가슴을 찌르고, 배를 꿰뚫고, 말발굽으로 짓밟고, 몸에 화살을 박아 넣을 때 그 일을 도왔습니다.


우리 군사들 가운데는 몸에 화살을 맞고 죽을 뻔 했던 군사나, 눈 한 알을 잃은 군사나, 귀 한 개를 잃은 군사나, 손가락 두세 개를 잃은 군사나, 발 한 개를 잃은 군사가 많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이가 득득 갈리는데, 그놈이 부인을 데리고 달아난 걸 내버려 둬야 합니까? 원수를 편든 건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당장 군사를 내어 에벤키 땅을 짓밟는 걸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놈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그놈의 부하들도 모두 죽이고, 그놈의 목을 아무르로 가져오겠습니다.” 


해조는 글을 읽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위로 들어 무겁게 한숨 쉬었다.


“후우 - !”


목을 잃고, 배가 꿰뚫리고, 어깨나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팔이 잘리고, 발목이 잘리고, 눈이나 귀나 손가락을 잃은 모든 아무르 전사들이 그녀와 무타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무쇠가 자신을 짓누르는 걸 느끼며 힘겹게 무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타는 여용사에게 보낸 물려의 답신을 읽고 있었다.


“여용사 장군, 장군이 보낸 서신을 읽었소. 장군이 분노하는 건 이해하오. 나도 원수들과 싸운 사람인데 어떻게 장군과 장군의 군사들이 겪은 일을 모르겠소? 그 놈 - 그러니까 에벤키 족장의 아들놈 - 이 죄를 지은 건 확실하오.
 

하지만 내가 가라한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놈은 카르마키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었던 때에 잠시 정세를 잘못 짚고 원수의 편을 든 것이라 하오.


어리석은 야만족(에벤키)이 잠시 잘못을 저지른 것을 원수들이 오랫동안 패악(침략/점령/지배/학살/착취/약탈)을 떤 것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홧김에 뺨을 때린 일과 칼로 배를 여러 번 찌른 일을 똑같은 형벌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오. 전자에게 ‘네 목을 내놓아라!’하고 명령할 수는 없지 않겠소?


게다가 - 이것도 가라한이 말해준 것이지만 - 카르마키 군의 장군 웅고르바트는 에벤키 족장의 아들과 그 놈의 전사들을 모두 도륙하려고 했고, 그 놈은 웅고르바트와 카르마키 군사들을 죽이고 우리 아무르에 귀순했소.


그 뒤 그 놈과 그 놈의 전사들은 화족(華族. 중원)의 군사들을 쳐서 그자들이 카르마키군을 돕지 못하게 막았고, 그 놈은 웅고르바트에게서 빼돌린 왕규의 밀서를 가라한에게 주어 남쪽나라(중원)의 더러운 속셈을 온 누리에 드러냈으며, 나아가 가라한이 남쪽나라가 (아무르 땅에 세운) 군현들을 칠 때 지도를 주어 가라한과 밝이(푸른 용) 부의 전사들이 남쪽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돕는 공을 세웠소.

       
그가 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도중에 생각을 바꿔 우리 편을 들었고, 그 뒤 공을 세워 죄를 씻었소. 이런 놈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이민족도 아무르에 귀순하거나, 아무르를 돕지 않을 것이오. 그것을 이해해 주구려.


그가 정말로 악인이라면, 그리고 아무르에 큰 재앙을 불러온다면 그가 적군의 편을 들 때 가라한을 만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소? 내가 가라한한테서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가라한에게 싸움을 걸기는 했으나, 가라한을 죽이지 않았고 가라한도 그를 죽이지 않았소. 그가 진짜로 위험한 적이라면 끝까지 가라한을 죽이려고 덤볐겠지. 아니면 가라한이 그를 잡거나 죽였을 것이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소. 가라한이 은혜를 베풀어 그를 놓아준 뒤, 그는 카르마키의 편을 들지 않고 다시 아무르의 편으로 돌아섰지 않소? 이 사실도 그가 원래는 위험한 적이 아니었다는 증거요.


그리고 에벤키는 우리가 카르마키에게 망했을 때 우리 피난민들을 받아줄 정도로 사이가 좋았고, 우리가 망한 뒤에도 카르마키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소. 에벤키 족도 흉악한 카르마키한테 여러 번 짓밟혔고.


그런 족속을 한 놈(무타)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적으로 돌려야겠소? 또 에벤키 전사들은 족장의 아들이 시킨 대로 한 죄밖에 없는데, 그들까지 처벌하겠다는 건 지나치게 엄격한 처사요.


그 놈이 원수들을 편들 때, 몇몇 에벤키 전사는 그 일을 우려해서 몰래 나를 찾아와 그 놈이 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그런 사람들까지 죽어야겠소? 그들이 에벤키족이기 때문에 장군과 장군의 군사들에게 죽어야 하오? 나는 그런 잔인한 일은 허락할 수 없소.


장군, 에벤키 족에게 기회를 주구려. 그들이 우리를 도울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적극 나서서 ‘죄’를 씻으려고 할 것이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아리라 믿소. 이만 줄이리다. 부디 슬기롭게 생각하고, 슬기롭게 말하고, 슬기롭게 구시오.”


무타는 답신을 다 읽은 뒤, 윗니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한 아벌한한테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아벌한이 여용사 장군한테 에벤키 족을 짓밟지 말라고 말한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해조를 올려다보았는데(무타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답신을 읽고 있었고, 해조는 서서 허리를 앞쪽으로 조금 숙인 채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눈썹과 눈썹 사이가 아주 좁았으며, 숨소리도 거칠어서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돌돌 만 서신을 오른손으로 꽉 쥐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는데, 두루마리는 얇은 옷감처럼 구겨졌고 주름이 졌다).


무타는 해조에게 “왜 그래? 괜찮아? 당신 얼굴이 욕을 먹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여.”하고 말했고, 해조는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감은 채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걱정 안 해도 돼.”


“내 보기엔 조금도 괜찮지 않아. 당신이 왜 그러는지 말해줘. 끝까지 들을게.”


무타는 눈을 반쯤 감고, 등잔불이 내는 빛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조는 그 말을 들으며 그가 자신의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손에 들어간 힘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무타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읽은 서신의 내용과 자신이 그 서신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을 말해주었고, 무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내가 이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아벌한이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여용사와 싸워야 했을 거야. 내가 여용사와 아무르 군사들을 죽였다면, 아무르는 그걸 구실삼아 더 많은 군사들을 보냈을 테고, 우리 부족은 지금쯤 아무르와 서로 죽이거나 아니면 아무르 군한테 짓밟혀 잿더미만 남았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눈을 뜬 뒤 - 이번에는 슬픔과 사랑이 담긴 눈매로 - 해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힘들지 않아? 내가 서신들을 읽을까? 대신 당신은 아벌한의 답신들을 읽어. 그러면 힘들거나 괴롭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난 아무르 사람들이 날 헐뜯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니까, 욕을 더 먹어도 괜찮아.”


해조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안 그래도 돼. 그냥 이대로 계속 읽자. 당신은 우리 오라버니가 우리 사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한테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알아야 하잖아? 오라버니의 답신을 읽지 않으면, 당신은 그걸 영원히 알지 못해. 그리고 나와 당신을 욕하는 글은 … 나중에 내가 그 글을 쓴 사람들한테 하나하나 반박하는 답신을 보내면 그만이야. 아니면 당신이 오라버니의 답신을 소리 내어 읽어줘. 그러고 나서 잊으면 되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알았어, 그렇게 할게.”


무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자신이 읽은 아벌한의 답신을 소리내어 다시 읽었다. 해조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펴졌고 숨소리도 고르고 부드러운 숨소리로 되돌아왔다. 마침내 무타가 답신을 다 읽자, 해조는 고개를 뒤로 젖힌 뒤, 두 눈을 감고 씩 웃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후 ….”하고 한숨쉬었고, 고개를 다시 무타 쪽으로 돌린 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이제 나머지 서신과 답신들을 마저 읽자. 이런 일은 미루지 말고 헤치우는 게 좋아. 내가 서신을 읽고 그 내용을 알려줄게, 당신은 답신을 읽고 나한테 그 내용을 알려줘.”


“알았어.”


무타는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씩 웃은 뒤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삼엽화살보다 더 무서운, 서신의 글자들과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어서 기뻐. 당신이 글자들이 입힌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는 건 걱정되지만. 그 ‘독화살’들이 당신 마음에 박히면, 나한테 말해줘. 내가 뽑아줄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서신을 읽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설사 서신의 글자들이 독화살이 되어 날아와 그녀의 머리와 가슴에 박히더라도, 무타한테 그 사실을 털어놓고 독화살들을 뽑아달라고 부탁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곱씹으며 무타한테 말했다.


“알았어. 그 대신 당신은 답신을 읽고 화가 났을 때 나한테 말해줘. 내가 답신이 쏜 ‘화살’을 뽑아줄게. 당신이 내 마음에 박힌 독화살을 뽑고 다친 곳에 약을 발라준다면, 나도 당신 마음에 박힌 화살을 뽑고 약을 발라 줄 거야. 그러니까 혼자서 다친 마음을 이끌고 가려 하지 마.”


이번엔 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손을 내밀어 해조가 내미는 서신을 받았다. 그는 서신과 답신을 끈으로 대충 만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루 안에 있는 다른 서신과, 그 서신과 끈으로 이어진 답신을 꺼냈다.


이번에는 짐승 가죽을 마름모꼴로 자른 것들을 실로 하나하나 이어붙인 절본(折本)과, 양피지 두루마리가 나왔는데, 절본의 겉에는 ‘아무르 한동비 성(城)의 성주 “허롱쇠”가 아벌한에게 드리는 서신’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두루마리의 겉에는 ‘아벌한이 허롱쇠 성주한테 보낸 답신’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해조는 차곡차곡 접혀서 가는 새끼줄로 대충 묶인 절본을 집었고, 무타는 두루마리를 집었다. 둘은 서신과 답신을 이어주는 가죽 끈이 팽팽하게 늘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해조가 읽은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벌한, 소신(小臣)은 해조 부인이 가라한과 헤어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부가 사이가 안 좋으면 갈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죠. 하지만 부인, 아니 공녀(公女. [작은 나라의 군주인] 공[公]의 딸[女]. 여기서는 아벌한 물려의 아버지인 선대 아벌한의 딸 해조를 일컫는 말이다)가 가라한과 헤어지자마자 에벤키족 사내를 따라가신 건 큰 문제입니다!


재혼하시려면 절우부(물려가 다스리는, 아무르 왕국의 부[部])를 뺀 나머지 8 부에서 왕족이나 공자(公子)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재혼하셨어야죠! 세상에, 아무르 안에는 사내가 없어서 에벤키 따위를 고르셨답니까? 이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요!


그 야만족(에벤키족 족장 무타)이 우리 아무르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다른 소수민족들이 절우부와 온 아무르를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게다가 공녀가 푸른 용 부(밝이 부)의 가라한 같은 훌륭한 지아비를 버리고, 아벌한의 뜻을 거스르며 에벤키를 새 지아비로 고르시면, 절우부의 위신은 뭐가 됩니까? 아벌한이 절우부의 백성들한테 권위를 세우실 수 있겠어요? 아벌한이 마리한(아무르의 왕)과 다른 부의 한(汗 = 公)들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드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일인 겁니다!


아벌한,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 야만족(에벤키)은 아벌한의 얼굴에 똥칠을 했습니다. 그놈은 아무르의 위신을 짓밟았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 공녀와 그 야만족 놈의 혼인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에벤키 땅에 군사를 보내소서. 군사들을 보내기 전에, 그들한테 공녀를 그 더러운 땅(에벤키족의 땅)에서 아무르로 도로 모셔오고, 야만족 놈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아무르에 있는 옥사(감옥)로 끌고 가라고 명령하소서.


만약 그러지 않고 이걸 내버려 두시면, 이게 나쁜 선례가 돼 소수민족들이나 야만족들 가운데 ‘수컷’들이 감히 아무르의 양갓집 아가씨들에게 수작을 걸 테고, 아무르의 위신은 날이 갈수록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겁니다! 아벌한, 부디 굽어 살피소서.

설령 제 말이 거칠어도, 어디까지나 아벌한과 아무르를 위해 하는 충언(충고)이오니,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해조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청동으로 만든 - 그리고 쇠사슬과 쇠공이 달린 - 족쇄를 채우고 무쇠로 만든 큰 우리에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은 매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자신의 부리를 자르고, 날개를 꺾고, 발톱을 자르고, 눈을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무타에게 죄가 있다면 어릴 적부터 서로 마음의 상처를 보여주며 가깝게 지냈고, 나중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가라한(이름은 산마로/아사)과 혼인하고 첫날밤을 지낸 다음 날, 자신이 활을 쏘아 구해주었지만 결국 땅으로 떨어져 죽은 매, ‘푸른 솔’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그 매처럼 화살을 맞고 비틀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주의 서신에서 튀어나온 글자들이 독화살이 되어 날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었다. 족쇄를 부수고, 우리에서 빠져나오고, 사람들과 독화살들을 피해 날아올라야 했다. 적어도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해야 했다.


한편, 무타는 두루마리를 들고 물려(아벌한)의 답신을 읽었다. 답신은 생각보다는 짧았다.


“성주, 그대가 보낸 서신을 읽었소.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소. 하지만 나는 그대의 제안을 따를 수 없소. 내 누이는 가라한과 헤어진 뒤, 내게 서찰을 보냈소. 내가 그 서찰을 읽어보니, 그 애는 가라한이 마음에 둔 여인은 자기가 아니며, 자기는 한평생 ‘둘째 부인’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더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겠소? 그냥 참으라고? 안 되지, 안 돼. 나도 내 누이의 남편이 내 누이를 사랑하지 않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소. 내 누이가 정실(正室)이 아니라 ‘첩’으로 대접받는 일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지. 그래서 그 애가 가라한과 헤어지는 걸 반대하지 않은 거요.


게다가 에벤키 족장의 아들놈은 - 그러니까 무타는 - 우리 피난민들이 에벤키족 마을로 달아났을 때부터 내 누이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오. 내 누이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새 남편으로 골랐고. 만약 가라한과의 혼인이 유지되고 있을 때, 내 누이가 가라한을 속이고 무타를 몰래 만났다면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내 누이가 가라한과 정식으로 헤어진 뒤 무타를 골랐으니, 그걸 우리 절우부의 위신을 짓밟은 일이라고 할 순 없잖소?


그리고 무타가 내 누이를 잡아간 것도 아니고, 내 누이(해조)가 무타의 청혼을 받아들여 스스로 무타를 따라갔으니, 나는 그 때문에라도 무타와 에벤키족을 처벌할 수 없소. (내가 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까닭은, 내 누이가 보낸 서찰을 읽었기 때문이고, 내가 내 누이와 무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알기 때문이며, 내 누이의 시비들이 무타가 카르마키 장군을 죽인 뒤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놈과 내 누이가 만나는 것을 보고 들은 다음 절우부의 부루 목장으로 돌아와 내게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이며, 가라한이 나를 만났을 때 자신과 내 누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었기 때문이오) 이 일은 더 이상 따지지 맙시다. 내 누이와 내 매부를 내버려 두시오. 그게 옳은 일이오.”


무타는 답신을 읽고 쓴 입맛을 다신 뒤,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이 에벤키 전사들을 모아 카르마키 군사를 도울 때, 해조를 붙잡아서 혼동강가로 끌고 가겠다고 생각한 사실을 떠올렸다. 답신을 읽고 나니, 자신의 첫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아직 카르마키의 편을 들 때, 목숨 걸고 가라한 아사(산마로)의 성에 들어가 매듭 편지가 들어있고 청홍띠가 감긴 화살(에벤키 족이 청혼할 때 쏘는 화살)을 쏜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해조를 끌고 가는 대신, 목숨을 걸고 진심을 털어놓은 뒤 선택과 결정은 해조에게 맡긴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해조와 혼인하지 못했을 테고, 물려의 답신도 읽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 그는 자신과 해조의 관계를 인정한 물려한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만 이제까지 자신을 매정하게 대한 자신의 처남(물려)이 그의 앞에 있다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아직 그와 물려 사이에는 뛰어넘기 어려운 벽이 남아 있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면서 한숨 쉬었다. 그는 그러고 난 뒤, 기분을 바꾸려고 해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서신의 내용을 물어보았다. 해조는 선 채로 서신을 읽었고, 무타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녀가 서신을 다 읽자, 그는 그녀에게 답신을 읽어주었다.


그가 답신을 다 읽은 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고, 등잔 심지가 지직 소리를 내며 타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서신과 답신을 읽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곧 절본을 접고 두루마리를 만 뒤, 그것들을 첫 번째 서신과 첫 번째 답신 옆에 내려놓았다.


해조는 다시 자루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서신과 답신을 꺼냈는데, 서신은 목간이었고 겉에 ‘<뫼두른> 마을 촌장 “보름이”가 아벌한에게 드리는 서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서신도 답신과 가는 새끼줄로 이어져 있었는데, 답신은 절본이었고 겉에 ‘아벌한이 보름이 촌장에게 보낸 답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조와 무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각각 서신과 답신을 읽기 시작했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는데, 해조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목간에 쓰인 글을 손칼로 모조리 긁거나, 아니면 목간을 모닥불에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벌한, 소인(小人)이 듣기로는 절우부의 해조 공녀님이 가라한과 헤어진 뒤 에벤키랑 혼인하셨다고 합니다.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무릇 사람은 제 주제와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고, 특히 야만족은 더 그래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야만족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귀하고 아름다우신 공녀님한테, 가난하고, 못 배우고, 천한 야만족 사내가 어울리기는 하나요? 야만족 사내가 아무르 백성인 여인을 사귀려고 하는 것도 제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짓이고 법도에 어긋나는 짓이라 관아에서 곤장을 맞아야 하는데, 하물며 야만족 ‘수캐’가 공녀님 같은 높으신 분에게 다가와서 ‘꼬리’를 치는 건 얼마나 큰 벌을 받을 일이겠습니까? 이건 ‘물’을 흐리는 일이고 아랫것이 윗분을 범하는 일이라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아벌한,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아벌한이 가라한이 보내신 이혼서를 말없이 접어 넣으신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소인이 전쟁터에서 그 야만족 ‘수캐’(무타)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놈은 눈매가 매섭고 눈을 뜨면 노려보는 것 같아 어짊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습니다. 게다가 턱이 뾰족하고 코가 날카로워 그 인상이 사람을 베는 칼과 같고, 사람을 찌르는 송곳 같습니다. 삐쩍 마른 몸이 그 얼굴과 어우러지면 그놈의 잔인함과 덕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그놈은 생긴 것부터가 사악하게 생겼고, 이는 모든 야만족 ‘수캐’(사내)가 지닌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겁니다. 그런 놈이 공녀님과 함께 살도록 내버려두실 겁니까? 그건 공녀님이 실패한 삶을 살게 허락하시는 것이고, 공녀님이 불행해지도록 부추기시는 겁니다!


아벌한, 제발 이 일을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벌한의 전사들에게 그 야만족 수캐(무타)를 포타 하슬라(아무르의 도읍)로 끌고 와서 아무르 백성들과 야만족들이 보는 앞에서 돌팔매로 피떡이 될 때까지 마구 치라고 명령하소서. 그럼으로써 그 수캐가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행여 그 수캐와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다른 야만족 수캐들이 겁을 집어먹고 마음을 바꾸게 하소서. 이렇게 빕니다!


(만약 그 에벤키가 제 주제와 분수를 알고, 감히 아무르의 여인을 노리는 대신 에벤키 땅 안이나 다른 야만족의 땅에서 제 짝을 찾았다면, 저도 그 에벤키를 ‘수캐’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혼인을 축하하고 그 에벤키에게 “알맞은 데서 제 짝을 찾다니, 기특하도다.”하고 칭찬했을 겁니다.


저는 분수에 맞게 행동하고 아무르의 법도를 지키는 ‘착한 야만족’은 건드리지 않으니까요. 에벤키 수캐를 응징하는 일이요? 그건 아벌한과 절우부와 아무르를 위해서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착한 에벤키 수컷’들이나 다른 착한 야만족 수컷들을 위

해서도 해야 하는 일입죠.


주제와 분수를 모르고 법도와 ‘인륜’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그놈들이 딴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고, 그래야 우리[아무르] 관청과 전사들이 그놈들을 처벌하지 않고 지켜줄 테고, 그러면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갈 테니, 이것이 놈들을 위한 일이 아니면 뭐가 놈들을 위한 일이겠습니까?


아무르 사람은 아무르 사람끼리, 야만족은 야만족끼리 따로 모여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에벤키 수캐라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이런 원칙이 들어있는 세상이라는 호수의 물을 흐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이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소서!)”


해조는 서신을 다 읽고, 서신에서 눈을 뗀 뒤 목간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두 손을 떨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목간이 아니라 보름이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고 싶었다.


아무르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직접 비난과 불평을 접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후자는 비난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해조가 이런 일을 겪는 동안, 무타는 절본을 펼치고 거기에 쓰인 물려의 답신을 읽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여보게, 촌장. 자네가 보낸 서신은 다 읽었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네. 하지만 진정하게. 자네가 말한 에벤키 족 청년은 ‘천한 놈’이 아닐세. 이젠 족장이야.


만약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평범한 놈이 내 누이한테 청혼했다면 내가 앞장서서 재혼에 반대했을 걸세. 하지만 아니잖나? 그 자는 족장이고, 글을 읽고 쓸 수 있고, 똑똑하기까지 하네. 솔직히 말하라면 내 누이가 가난한 아무르 백성이랑 혼인하느니, 소수민족이라도 족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혼인하는 게 낫지. 그것이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짓’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내 누이는 제 발로 에벤키족 족장을 찾아갔네. 다른 사람이나 내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런 누이와 족장을 헐뜯어야 하겠나? 그들을 처벌해야 하겠나?


안 그래도 첫 혼인에서 지아비가 첫날밤도 안 치르고 적진으로 떠나서, 예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데려왔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고 가라한과 갈라선 내 누이가, 비록 가라한보다는 가진 것이 적고 힘도 약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일족의 우두머리를 골랐다고 해서 그 일을 문제 삼아야 하겠나?


첫 혼인은 어버이나 오라비의 말을 따라야 할 지도 모르지만, 그 혼인이 실패했다면 재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일세. 게다가 이 혼인은 내가 가라한을 둘러싼 소문 - 예컨대 가라한이 과부를 좋아한다는 소문 -을 가볍게 여기고 그저 그 사람이 누이와 어울릴 거라고 믿고 밀고 나간 일이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누이의 첫 혼인을 망쳤으니, 나는 누이가 뭐라고 말하건, 무슨 일을 하건 불평할 자격이 없네. 그러니 더 이상 토 달지 말게. 나는 에벤키 족장을 처벌하지 않을 걸세.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답신의 길이와 너비와 크기를 생각해야 하니, 세 마디만 더 하겠네.


자네는 ‘아무르 사람은 아무르 사람끼리, 야만족은 야만족끼리 따로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나나이스 족과 아민 족이 우리 아무르가 카르마키와 싸울 때 군사와 무기와 말을 내어준 것을 잊었는가? 만약 소수민족들이 우리와 카르마키의 전쟁을 보고도 ‘내 일이 아니야. 담 쌓자.’고 마음먹고 우리한테 등을 돌렸다면,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에벤키는 삼엽 화살과 튼튼한 활을 주고 화족(중원인)의 군현으로 가는 안전한 길이 그려진 지도까지 주었는데, 그런 공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단 말일세. 그들에게 ‘빚’을 지고도 막상 평화로워지니까 빚을 갚을 생각은 안 하고 그들을 내쫓거나 벽을 쌓아버린다면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게다가 나는 에벤키 족 출신인 여인과 오로촌 족 출신인 여인을 첩실로 두고 있는데, 그럼 나도 ‘물을 흐리는 나쁜 놈’인가? 그렇다면 그렇다, 아니라면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대답하게. 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분명하고 또렷한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자네가 에벤키족 족장, 아니 내 매부를 직접 보았다니, 그가 나나, 자네처럼 눈/코/입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군. 내가 여러 해 동안 본 바에 따르면, 그 자는 매처럼 눈이 날카로워 못 보는 것이 없고, 놓치는 것도 없네. 용맹한 전사에게 어울리는 눈이 아닌가? 그리고 인상이 날카로운 건 똑 소리 나게 생겼다, 똑똑하게 생겼다는 뜻이고, 그건 바보 멍청이나 흐리멍덩한 것보다는 훨씬 낫네.


칼과 송곳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지만, 베를 자를 때 칼을 쓸 수도 있고, 가죽에 송곳으로 구멍을 낼 수도 있지 않나? 다시 말해 그 자는 그 자의 부족에게도, 우리 아무르에도 ‘쓸 만한 사람’이라는 걸세. 그런 사람을 내다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나.


덧붙이자면 그 자가 삐쩍 마른 건 사실이지만, 나는 삐쩍 마른 몸이 어떻게 ‘잔인함’이나 ‘덕 없음’을 입증하는지 알 수가 없네. 마른 몸은 마른 몸일 뿐이야. 잔인함은 잔인함일 뿐이지. 그 둘은 하나가 아니고 어울릴 수도 없네. 그러니 에벤키 족장, 아니 내 매부를 헐뜯는 일은 그만두게. 더 이상 다른 말은 안 하겠네.”


무타는 답신을 읽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원망한 사람, 돌로 쌓은 높은 성벽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사람, 자신의 삶을 망칠 뻔 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족장”이라고 부르고 “매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잘못된 혼인을 밀고 나갔기 때문에 자신의 누이가 한때나마 불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자신의 누이가 고른 두 번째 남편을 ‘처벌’하거나 헐뜯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그의 매부가 용맹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매부의 생김새가 뒷받침한다고 말해, 사람들이 관상이나 인상을 구실삼아 ‘매부’를 공격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무타는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물려의 모습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답신을 쓴 사람과 자신이 해조와 혼인하지 못하게 막았던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느냐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머릿속을 뒤흔드는 땅울림(지진)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해조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해조에게 서신의 내용을 물어보았다.


무타는 해조가 읽어주는 서신의 내용을 들으면서 목간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고, 목간에 적힌 모든 글자들을 도끼로 찍고 싶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비난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로 녹슬지 않는 창날이었고, 이가 빠지는 법이 없는 칼날이었으며, 빗나가지 않는 화살이었다. 그것이 한 번 치겠다고 마음먹으면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창’에 꿰뚫리거나, ‘칼’에 베이거나, ‘화살’이 박혀 괴로워했다. 그나마 현실세계에서는 한 번 당하면 죽을 수라도 있지만, 붓과 먹물과 혓바닥으로 만든 비난의 세계에서는 한 번 ‘죽은’뒤 온갖 아픔과 쓰라림을 느끼며 ‘되살아나야’ 하고, 그 뒤 똑같은 공격을 당하고 똑같은 아픔을 느끼며 죽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되새기며 대문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잠시 숨을 거칠게 쉬다가, 마른 침을 삼키고 답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해조에게 답신을 읽어주었다.


그 일이 끝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등잔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가서 그나마 남아있던 빛마저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해조는 서신을 둘둘 만 뒤, 답신과 함께 방바닥에 내려놓았고,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새 심지를 넣은 뒤 옛 심지에 남아있는 불로 새 심지에 불을 붙였다. 무타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얕은 구덩이에 땔감을 넣었고, 불쏘시개로 땔감을 뒤적이고 입김을 불어넣어 불이 다시 피어오르게 했다. 두 사람이 한 일 덕분에, 방은 다시 밝아졌고, 다시 따뜻해졌다.


해조는 등잔과 구덩이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남편 ―. 이제 서찰이 몇 통 남았지? 마저 다 읽자. 지금까지 한 대로 하면 돼. 머뭇거리지 마,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무타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해조를 올려다보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루에 손을 넣어 서신과 답신을 꺼낸 뒤, 서신은 해조에게 주고 답신은 자신이 읽었다. 그리고 글을 다 읽은 다음에 해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서신의 내용을 물었고, 해조가 서신을 다 읽고 나서 답신의 내용을 물으면 답신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들이 처음 서신과 답신 여섯 통을 읽은 뒤, 마저 읽은 서신과 답신은 예순 여섯 통이었는데, 서신은 서른 세 통이었고 답신도 서른 세 통이었다.


서신을 보낸 사람 가운데에는 소수민족의 장로나 절우부의 편장(偏將. 옛날, 대장[大將]의 아래에 딸린 부하 장수(將帥). 그러니까 대장을 돕는 한 방면의 장수다. 대장을 보좌하며 소속 부대를 지휘한다. 비장[裨將]이라고도 한다)이나 북대궁 부(아무르의 왕부王部)의 학사도 있었고, 절우부의 장사꾼도 있었고, 천수부(아무르의 부部)의 야장(대장장이)도 있었고, 상마부(아무르의 부部)의 목장 주인도 있었다.


그들은 미리 짜고 글을 쓰기라도 한 듯 한 목소리로 무타를 헐뜯고 해조의 재혼을 부정했다. 아벌한의 답신도 - 이런 때를 대비한 규정이라도 있는지 - 앞서 세 사람에게 보낸 답신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 답신들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서신들의 내용에 반박하고 그것들이 쏘는 글자로 된 독화살을 방패처럼 가로막았다.


해조와 무타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에 새 기름을 채우고, 새 심지를 집어넣고, 새 심지에 불을 붙였으며, 구덩이에 땔감을 넣어 불쏘시개로 뒤적이고 입김을 불어넣는 일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이윽고 그들이 서신과 답신 일흔 두 통을 다 읽자, 아침 햇살이 문틈과 창문으로 스며들어 그들이 밤을 꼬박 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문 밖에서 문을 뚫고 들어온 새소리는 그 사실을 한층 더 강하게 강조했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눈이 바짝 말랐음을 깨달았고, 머리가 띵해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으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발걸음을 뗄 때 비틀거렸다.


그들은 밤새 서신과 답신에만 신경 썼기 때문에 다른 것을 챙길 여유가 없었지만, 결국 그 글들을 다 읽었고,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 때 무타는 물려가 자신과 해조 사이를 가로막는, 산의 바위절벽만큼 높고 단단한 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조가 아사(산마로)와 헤어지고 자신을 고른 뒤에도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해조는 ‘성벽’과 붙어있는 ‘좁은 문’을 운 좋게 통과해서 자신을 만났고, 만약 그녀가 빗장을 풀고 아사가 문짝을 힘차게 열어젖히지 않았다면 그 좁은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았으리라.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답신들의 안내를 받으며 벽 뒤로 넘어갔고, 벽에 서신이라는 수많은 화살과 창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벽이 막지 않았다면 무타는 화살이 잔뜩 박힌 ‘고슴도치’가 되었거나, 아니면 창에 꿰인 ‘꼬치’가 되었으리라. 한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과 갈라놓았던 벽은 그가 고향(혼동강가)으로 떠난 뒤에는 분노한 아무르 사람들이 쏜 화살과 그들이 던진 창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답신들이 3분의 2쯤 남아있던 자신과 물려 사이에 놓인 벽을 거의 다 허물었음을 느꼈다. 벽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편, 해조는 서신들을 다 읽은 뒤 - 마치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이 굳어졌다. 서신을 쓴 자들은 흙그릇을 뜨거운 불에 집어넣으면 녹고, 무쇠를 망치로 두드리면 부서지고, 물을 칼로 베면 물이 끊어진다고 믿는 바보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쓴, 글자로 만든 독화살이 머리와 가슴에 박혔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쓰러질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굴 수 있었던 까닭은 물려의 답신들이 서신이 쏜 독화살들을 뽑고 ‘약’을 발라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열 번 쓰러질 일을 두세 번만 쓰러지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고, 쓰러진 뒤에 재빨리 일어날 수 있었다.


답신은 물려가 그녀에게 준 갑옷이었고, 투구였고, 방패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녀에게 자신은 독화살과 돌을 막느라 긁히고 파이고 일그러졌음을 알렸다. 그것들이 그렇게 말을 건다면, 이번에는 그녀가 그것들과 그것들의 주인(물려)에게 대답해야 했다.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거나,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해조와 무타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본 뒤, 자신이 품은 생각을 상대방한테 말했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다음 해조가 말했다.


“오라버니의 첩실 엥흐멍이 지금 친정에 있지?”


무타는 대답했다.


“맞아. 아벌한이 내게 엥흐멍 마님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떠나셨어.”


해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당신한테 서신과 답신을 준 다음에 떠나셨고?”


무타는 말했다.


“그래. 내가 당장 떠나 달라고 부탁했거든.”


해조는 재빨리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라버니를 이대로 보내드리면 안 돼. 당장 오라버니 일행에게 전령을 보내자. 그 전령이 오라버니를 이 고을로 모시고 오도록 해야 해.”


무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순베에게 내 말을 빌려주고, 당장 아벌한 일행의 뒤를 쫓으라고 명령할게. 난 아벌한한테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문을 열고 집 앞으로 나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순베야, 순베야! 일어났느냐? 일어났으면 이리 오너라!”


그가 외칠 때, 아침 햇살은 막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물려는 수레에서 나와 기지개를 켠 뒤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한낮이 아니라 이른 아침에 보는 해는 둥글었고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뒤, 뒤를 돌아 일행을 살펴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무타를 만난 것이 과연 바른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무타에게 서신과 답신이 든 자루를 넘긴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난 내 부끄러운 부분을 그놈한테 드러냈는데, 이 일로 비웃음을 사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에벤키 고을로 돌아가서 서신과 답신을 돌려달라고 해야 하나?’


그는 “이러지 말고, 물이라도 마시고 나서 가던 길을 마저 가자.”고 혼잣말을 한 뒤 혼동강으로 흐르는 시내에서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고, 그 다음 호위 무사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제쯤이면 부루 목장(아벌한 물려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만약 시일이 걸린다면, 여기서 미리 물통에 물을 채워라.”


시내가 그리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시종과 시비들을 모두 수레에 태운 뒤 마부에게 말을 몰아 시내를 건너라고 명령하려고 했다. 전사들은 그냥 걸어서 건너가든가 말을 타고 건너가면 될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시내 건너편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사람과 말이 그 불로 몸을 말려야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 부질없었다. 자신은 셋째 누이(해조)와 만나지 못했고, 그녀에게 어떤 말도 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누이의 남편, 에벤키 족장(무타)에게 가로막혔고,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가 하는 말에 큰 소리로 반박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애초에 그는 에벤키 족 고을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이런 감정이 눈사태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 때, 물려는 뒤에서 전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냐? 어떤 놈이야?”


“아벌한, 누군가가 말을 타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활을 쏠까요?”


“빨리 명령을 내려 주시옵소서, 급합니다!”


물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다가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쏘지 마세요, 쏘지 마세요! 접니다, 에벤키 족장님의 시종인 순베예요!”


물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전사들에게 말했다.


“쏘지 마라. 저놈은 내가 아는 놈이니라.”


전사들은 “뭐야? 깜짝 놀랐네!”하고 혼잣말을 하며 창과 칼을 거두고, 화살을 잰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순베를 바라보면서 툴툴거렸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춥고, 졸리고, 힘들었는데, 어디서 에벤키 놈이 툭 튀어나와서 사람 놀라게 만들어?”


“난 도적이라도 온 줄 알고 활을 겨눴다! 가슴이 철렁했어!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


“하긴 여러 명이 함께 다니는데, 그걸 혼자서 덮치는 도적이 어디 있겠어? 덤비려면 떼로 덤볐겠지!”


순베는 말을 멈춘 뒤, 말에서 내려 그를 흘겨보는 전사들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물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내뿜는 하얀 입김이 구름이나 솜뭉치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순베의 뒤로 밀려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물려의 여섯 걸음 앞까지 걸어왔고, 걸음을 멈춘 뒤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다. 그는 그 자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물려는 눈썹과 눈썹 사이를 모으고 뚱한 얼굴로 순베를 바라보다가, 그의 숨소리가 잦아들자 입을 열었다.


“순베야, 왜 우리를 따라왔느냐?”


순베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쥔 채 고개만 위로 들어서 물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 족장님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래? 왜? 내 볼일은 다 끝났는데, 왜 그놈이 너를 나한테 보냈지?”


순베는 윗몸을 일으키고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갖다댄 뒤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그는 자세를 바꾼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벌한, 우리 족장님은 제게 아벌한 일행을 꼭 에벤키 고을로 모셔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분과 해조 부인이 아벌한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덧붙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전령으로 온 겁니다.”


“그 애들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내 성으로 서찰을 보내거나 사자를 보내면 되지 않느냐? 꼭 내가 고을로 가야 하느냐?”


“이 일은 서찰을 보내거나 사자를 보내서 될 일이 아니고, 꼭 아벌한 앞에서 직접 말씀드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려는 순베를 째려보며 가볍게 한숨쉬었다. 그는 일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쯤이면 자신이 준 서신과 답신이 무타 집의 구덩이에서 불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해조라면 모를까, 무타는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예상이 - 못해도 절반은 - 빗나간 것이다.


세상에, 다른 건 몰라도 아벌한 물려라면 이를 득득 가는 “에벤키 햇내기”가 물려를 자기 고을로 모시려고 한다니! 이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가 우뚝 서서 순베를 바라보고, 물려 일행이 두 사람 뒤에 부채꼴로 모여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에, 어느덧 해는 하얗게 빛나는 공으로 바뀌었고 햇살은 그들을 고루 비추었다.


순간, 물려는 어쩌면 무타가 자신과 고도쇠가 전해준 서신들을 읽고 화가 났고, 그래서 그것들을 전해준 자신에게 따지기 위해 순베를 보낸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었다.


자신은 아무르 절우부의 한이고, 성주나 장군이나 편장이나 촌장이나 장사꾼이나 학사 - 이들 모두가 물려에게 해조와 무타의 혼인을 반대하는 서신을 보냈다 -를 다스리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들이 거친 말을 하거나 ‘선’을 넘지 못하게 막을 의무가 있었다.


비록 자신이 그들에게 하나하나 반박하는 답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이 서신을 쓰는 일 자체는 막지 못했고, 무타는 그 서신들을 읽으면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타가 자기 고을을 뛰쳐나와 활과 삼엽 화살을들고 서신을 쓴 사람들을 찾아갈 리는 없을 테고, 그 대신 가장 손쉽고 가장 확실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바로 그 모든 사람들의 윗사람인 자신에게 따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말다툼이나 외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물려는 순베에게 “난 가지 않겠다. 네 주인에게 가서 그렇게 전해라!”하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가 사람들의 서신만 보낸 게 아니라, 자신의 답신도 함께 보냈다는 사실이 기억났던 것이다. 만약 무타가 서신 때문에 화를 낸다면, 물려는 그에게 답신은 읽어보고 나서 화를 내느냐고 물을 수 있었다. 무타는 읽었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읽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만약 무타가 답신을 읽지 않았다면, 물려는 답신의 내용을 알려줌으로써 자신은 서신을 쓴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밝히면 된다. 잘하면 몸에 화살이나 도끼를 맞지 않고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물려는 순베가 전한 말을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잠깐 눈을 감고 “흠.” 하는 소리를 낸 뒤, 눈을 뜨고 고개를 위로 비스듬히 들면서 수하(手下.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얘들아, 에벤키 족 고을로 갈 준비를 해라. 말 머리를 그쪽으로 돌린다!”


물려의 수하들은 툴툴거리면서 다 타서 숯이 된 장작들을 주워 모으고,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수레에 올라 그 위에 있는 천막으로 들어가고, 창과 활을 든 채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말에 올라타고, 수레에 앉아 말 고삐를 쥐었다.


물려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뒤, 일행이 방향을 돌리자, 행렬의 한가운데에 있는 수레에 올라간 뒤, 수레 위의 천막으로 들어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어서 가자꾸나! 순베야, 네가 맨 앞에서 우리를 안내해라!”


순베는 꽉 쥔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으로 갖다 댄 뒤, 물려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벌한!”


순베는 말 위에 올라탄 뒤 고삐를 쥐었고, 말들은 발을 구르기 시작했으며, 수레는 덜컹이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베가 이끄는 물려 일행은 해가 서쪽 하늘로 떨어지지 일보직전에 에벤키 족 고을에 다다랐다. 사람과 말은 모두 반쯤 감긴 눈과,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자신들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 것을 드러냈다.


물려는 천막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수레가 덜컹거리는 것을 느끼다가, 갑자기 수레가 멈추고 말발굽 소리와 발소리가 멈춘 것을 알아챘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귀에 들이닥친 것은 순베의 목소리였다.


“아벌한, 다 왔습니다! 족장님과 부인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물려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어.’하고 되뇌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막의 휘장을 오른손으로 걷었다.


해조와 무타는 물려의 여섯 걸음 앞에 서 있었다. 물려는 왼손으로 왼 허리에 찬 철검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그의 양 옆에는 창병과 궁수(활을 쏘는 군사)가 각각 세 걸음씩 떨어진 곳에서 무타를 노려보면서 서 있었다.


물려는 눈을 좁히고 무타를 훑어보다가, 그의 손에 활과 삼엽화살과 도끼가 없고 그의 왼 허리에 긴 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비록 눈에는 핏발이 섰지만 그의 눈매가 노려보는 눈매가 아니고,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았으며, 눈 밑이 거무죽죽하지 않고, 표정은 아주 담담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물려는 잠시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젖힌 뒤, 절우부 전사들에게 “물러나거라!”하고 명령했다. 창병과 궁수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여섯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물러난 뒤에도 물려와 무타를 번갈아가며 보았고, 그들의 거친 숨소리는 찬 공기 속으로 퍼지면서 무타를 위협했다.


물려는 무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꼭 이 고을로 와서 네 말을 들어야 한다고?”


무타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으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난 바쁜 사람이야. 내 성과 목장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나를 도중에 불러 세우고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 허튼소리를 하려고 부른 거라면 가만 안 둔다!”


물려는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타는 그를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 주신 서신과 답신을 다 읽었어요.”


“할 말이 그거냐?”


“네.”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날 불렀어?”


무타는 말했다.


“아벌한이 저한테 서신과 답신을 줄 때, 다 읽고 나서 그것들을 땔감으로 쓰거나, 빨아서 걸레로 쓰라고 하셨죠?”


물려는 대답했다. 그는 속으로 이런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 있어서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바로 그 때 무타는 얼굴에서 힘을 뺐다. 그는 씩 웃은 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적당히 부드러워 가죽 위에 떨어지는 기름방울 같았다.


“아벌한의 당부(當付. 말로 단단히 부탁함)를 어겨야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아벌한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아벌한의 말씀을 안 들었잖아요? 지금 와서 제 태도를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아벌한이 주신 서신과 답신들은 한 통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 부족 사람들한테 다 읽어줄 거예요.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 고을의 서고(書庫. 책을 보관해 두는 건물이나 방)에 고이 간직하고, 서기(書記)가 관리하게 할 겁니다. 땔감이요? 걸레요? 옷감이요? 어림도 없죠. 전 절대로 그것들을 그렇게 써먹지 않을 거예요.”


물려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분 나쁜 기습이 아니라, 꽉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명약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아니면 칼로 고름을 째는 것과 같거나. 무타는 물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었다.


“이건 아벌한 앞에서 직접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순베를 보낸 겁니다. 서신을 보내드리면 아벌한은 ‘바쁘다.’고 하면서 읽지도 않으실 거잖아요?”


물려는 입을 열어 겨우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족장 … 너는 ….”


그 때 해조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무타)이 한 말은 사실이에요. 그러니 의심하지 마세요. 게다가 ….”


그녀는 가볍게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엥흐멍 마님을 이 고을에 맡기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첩실이라도 아내는 아내예요. 지아비(남편)로서 지어미(아내)를 도와주셔야죠. 마님은 오라버니가 곁에서 도와주시면 더 빨리 나으실 거예요. 물론 마님이 고향과 친정 식구들과 동무들을 그리워하셨겠지만, 그렇다고 지아비가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 두 사람을 챙겨주실 정도로 속 깊은 오라버니가 정작 자기 첩실은 챙겨주지 못하신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집에 난 불을 끄면서, 자기 집에 난 불은 끄지 못하는 사람과 같아요.


그러니 엥흐멍 마님의 병이 나을 때까지는 이 고을에 머물러 주세요. 성과 부루 목장지의 일은 절우부의 부(副)수장한테 맡기시면 돼요.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식구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저와 만나지 못하셨으니, 이 고을에 머무르는 동안 저한테 묻고 싶었던 걸 다 물어보시고, 저한테 하고 싶었던 말씀을 다 하시고, 제가 오라버니한테 말씀드리는 걸 들어주세요.


저는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순베를 오라버니한테 보내드린 거예요.”


물려는 해조를 바라보며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해조야. 너 … 너는 ….”


무타는 물려가 더듬거릴 때, 말을 끊으려는 사람처럼 끼어들었다.


“일행 분들에게 어서 오두막으로 가라고 하세요. 손님들이 묵는 곳은 저쪽이에요. 물이랑 곡식은 가지고 오셨을 테니 따로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가져오신 물과 곡식이 다 떨어지면 그 땐 우리 부족의 곳간에 있는 좁쌀이랑 사슴고기랑 말린 연어를 드릴게요.


아벌한은 엥흐멍 마님의 친정에서 묵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손님들이 묵는 오두막을 내어 드릴게요. 부루 목장지의 절우부 부수장한테는 제가 서신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테니까 - 그리고 시종과 시비와 전사들의 식구들한테도 따로 서신을 보낼 테니까 -, 혹시라도 절우부가 제대로 안 굴러가면 어떡하나, 하고 염려하지 마시고 그냥 이 고을에서 푹 쉬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 윗몸을 뒤로 돌리고 오른팔을 쭉 뻗어 오른손의 검지로 고을 안을 가리켰다. 물려는 무타를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앞으로 떨궜다. 그의 뺨을 스치는 바람은 그다지 차갑지 않았고, 그 바람은 모든 것을 할퀴는 짐승의 발톱이 아니라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람의 손 같았다. 그의 옆에 있는, 가지가 앙상한 나무에서는 가지에 달라붙은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보이며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오냐, 알았다! 하지만 이 고을 살림이 축나는 건 각오해야 할 것이야! 우리 일행은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이건, 연어구이건, 버섯이건 가릴 것 없이 먹어치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너랑 해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을 못 자도 내 탓은 하지 마라!”


무타는 눈을 감은 뒤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해조는 부드러운 눈매로 물려를 바라보면서 오른주먹을 왼손으로 감싸 쥔 뒤 허리를 살짝 숙였다.


물려는 그 두 사람을 보다가, 뒤로 돌아서며 그의 일행에게 말했다.


“얘들아, 어서 짐을 풀어라! 우린 당분간 이 고을에서 묵는다! 에벤키 족장이 너희의 식구들한테 서신을 보내 너희가 잘 있다는 것을 알려줄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어라!”


일행은 얼굴에서 힘을 빼고 기쁜 마음으로 한숨을 쉬면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해조와 무타는 물려와 그의 일행을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서 고을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물려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물려는 걸으면서 무타에게 말했다.


“내가 에벤키 족의 땅을 떠날 때에는 마을이 세 곳 뿐이었는데, 어제 이곳에 와서 보니까 고을이 한 곳이고 마을은 다섯 곳이더구나. 게다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에벤키 족만 있는 게 아니라 아무르와 카르마키의 혼혈인도 있고, 순혈 아무르 인도 있고, 카르마키인 포로도 있는데, 그들이 다 자기 땅을 받고 자기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서 온 고을과 모든 마을이 활기가 넘쳐.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너 … 아니 자네는 아주 훌륭한 족장일세. 자네가 내 매부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무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그는 입을 열어 물려에게 말했다.


“저 혼자 이런 고을을 만든 게 아닙니다. 제가 다스리는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고, 우리 부족의 장로들이 백성들을 돌보면서 저를 도와주었기 때문이고, 제 아내가 저와 백성들과 장로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마을을 고을로 키울 수 있었어요. 그러니 칭찬은 저한테 하지 말고 그들에게 하세요.”


“자네, 정말 달라졌군. 더 이상은 내가 알던 ‘햇내기(신출[新出]내기를 일컫는 순우리말)’가 아니야.”


“백성과 공족(公族. 공[公]의 겨레붙이. ‘왕족’이나 ‘왕공[王公]의 동족’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을 이끌고 에벤키 땅으로 달아나셨던 아무르 절우부의 공자(公子)님이 더 이상은 공자님이 아니듯, 에벤키족 족장의 열 살짜리 서자는 더 이상은 어린 서자가 아니니까요.”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엥흐멍의 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을 깨끗하게 쓸어낸 고을 안의 길을 걸으면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얽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때, 무타와 함께 걷던 해조가 왼손을 내밀어 무타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무타는 망설이지 않고 해조의 왼손을 힘주어 쥐었고, 둘은 그 자세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물려는 해조와 무타의 뒤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는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졌다.’


그는 뒤이어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서신과 답신으로 에벤키 족 족장 … 아니, 매부를 설득했다고 여겼는데, 기실은(실제로는) 내가 내 누이와 매부한테 설득당한 것이야. 내 첩실을 간병하고 곁에 있어주라고 말할 때 한 번, 그리고 내 누이가 매부를 사랑하고, 매부도 내 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손으로 말할 때 한 번 설득 당했다고. 이제 더 이상은 이 사실에 토를 달수가 없구나.’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멈춰 선 뒤, 고개를 들고 왼쪽으로 돌려 이제 막 하늘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늘님이시여, 달님이시여, 별님이시여. 이것이 여러분의 뜻입니까? 이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입니까?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운명이라는 철광석은 여러분이 주셨지만, 그것을 캐고, 모으고, 녹여서 쇠로 만든 건 저와 제 누이와 매부니까요.’


달과 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물려와 해조와 무타와 고을 안에 있는 집들의 지붕에 은은한 빛을 비출 뿐이었다.


그러나 물려의 ‘묵상’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무타가 그의 앞에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처남, 뭐 하세요? 엥흐멍 마님의 친정으로 가려면 계속 걸으셔야 해요! 저랑 아내가 그곳으로 이끌어드릴 테니까, 빨리 따라오세요!”


물려는 무타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고 발걸음을 떼면서 대답했다.


“알았네, 내가 따라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물려는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멀어져 갔고, 그의 뒤에는 키가 대여섯 살짜리 아이만한 작은 나무가 남았는데, 그 나무의 가지에 달라붙어 있던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되어 막 땅으로 떨어지려 했고, 눈이 녹은 가지에서는 물을 머금은 겨울눈이 드러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