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진짜 인도, 가짜 인도

개마두리 2017. 3. 14. 23:03

인도를 2세기 동안 지배한 영국은 인도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고 여겼다. 그 문명은 어느 날 ‘짜잔!’하고 나타나서 키스를 해줄(입을 맞춰줄 - 옮긴이) 왕자님을 기다리며 고대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는 거라고. 영국은 그 고대의 ‘공주’(인도 사람들 - 옮긴이)를 잠에서 깨워 근대로 인도하는(이끄는 - 옮긴이)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방인이 인도(정식 국호 바라트 연방 공화국. 줄여서 ‘바라트’ - 옮긴이)를 보는 태도는 (영국 - 옮긴이) 제국주의자처럼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다. 한 나라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의 여부를 1인당 국민 소득이니 국민 총생산이니 하는 경제의 잣대로 판단하면서도, ‘인도인은 경제적으로는 잘 살지 못하지만 마음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그렇다.


(그들은 - 옮긴이)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 옮긴이) 안내할 때는 최신 반도체 공장이나 자동차 공장을 보여주면서, 인도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갠지스 강(올바른 이름은 ‘강가’ 강 - 옮긴이)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의 어수룩한 모습이나, 춤추는 코브라와 아름다운 원색의 옷을 차려입은 부족민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인도가 더럽고 가난하며 지저분하다고 오만하게 판단한다.


고대 그리스(헬라스 - 옮긴이)인이 막연히 ‘황금의 나라’라고 적은 인도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지금도 옛 왕궁에 가보면 그 화려함이 우리의 상상력을 초라하게 만든다. 18세기 중반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 옮긴이)의 나디르 샤(‘샤’는 이란의 표준어인 파르시, 그러니까 페르시아어로 ‘왕王’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가 인도(무굴 제국 - 옮긴이)에서 약탈한, 수많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공작의자는 1995년의 가치로 8,000억 원짜리였다. 사연 많고 곡절 많은 다이아몬드, ‘빛의 산’이란 이름의 코이누르도 본래 인도의 소유였다. 


근대 유럽인은 인도의 정신에 놀라고 감탄했다.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던(배우던 - 옮긴이) 인도가 옛날 코카서스 지방에서 헤어졌던 형제, 즉 인도 유럽어를 사용하는 한 핏줄로 아리아인의 후예라는 걸 발견하고 감격했다. ‘형제’를 만난 유럽인은 오늘의 인도가 아니라 정신주의의 보고인 고대의 힌두 경전『베다』와『우파니샤드』를 열심히 연구했다. 그들과 인도는 인도의 과거 속에서 연결되었다.


옛 영화를 잃은 채 ‘잠들어 있는 문명’. 이것이 유럽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나타난 자신들이 깨워야 할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화나 전설, 산스크리트 고전문학 등 과거 속에 들어 있었다. 현재의 살아 있는 인도, 움직이는 인도는 그 고매한 정신을 상실한 ‘타락한’ 인도, ‘가짜 인도’로 의미가 없었다.


인도학의 대부라고 불린 독일의 막스 뮐러는 자신은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제자들이 인도에 가는 것도 막았다. 그는 ‘진짜 인도가 아닌 현재의 인도는 가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헤겔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진짜 역사는 과거와 함께 떠내려갔다고 믿었다. 남은 건 황금시대의 유물과 유적뿐. 인도에서 그의 변증법은 ‘스톱’이었다(멈춰 섰다/멈추었다 - 옮긴이).


오늘도 우리는 그와 같은 유럽의 편견에 신나게 장단을 맞춘다.『베다』를 읽고『우파니샤드』를 칭송하며 ‘요가와 명상의 나라’로 인도를 기린다. 소가 어슬렁거리고 코브라가 춤추는 발전하지 않은 인도가 진짜 인도라고 생각한다. 높은 빌딩과 거대한 자동차 공장, 영어와 청바지는 ‘사이비 인도’의 보증수표와 같다.


(바라트의 - 옮긴이) 남부 지방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이 몸에 비싼 금 장신구를 지니고 있다. 가난한 여인도 금 목걸이 정도는 걸고 있다. 서울의 사나운 인심을 염두에 둔 나는 남부 지방 출신 교수에게 누가 금붙이를 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우리 남부 지방에는 그런 상스러운 일이 전혀 없어. 오랑캐들이 모여 사는 이 북부 지방에서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수도에서 온갖 편의를 누리며 사는 그 교수는 델리(흔히 ‘뉴델리’로 알려진 도시의 이름. 바라트의 수도다. 델리는 무굴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옛 델리 시’인 ‘올드Old 델리’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새로운 델리 시’, 그러니까 ‘뉴New 델리’로 나뉜다 - 옮긴이)에 산 지 30년이 넘었다.


“여기, 델리는 인도가 아니야. 진짜 인도를 보려거든 시골을 가야지.” 벵골 출신의 또 다른 교수는 늘 내게 조언하고 충고했다. 인도를 공부하러 멀리서 온 내가 진짜 인도를 놓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니, 아직 라자스탄에 못 가 봤어? 꼭 가봐. 거길 봐야 진짜 인도를 봤다고 할 수 있지.”


많은 인도인들도 ‘진짜 인도’는 시골과 과거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제철소가 들어서고 비료 공장이 세워진, 발전하고 변화한(바뀐 - 옮긴이) 오늘의 인도는 진짜 인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붉고 노란색의 옷을 입은 수줍은 여인이 물동이를 인 채 지나가고 유순해 보이는 코끼리가 느릿느릿 걸어가는 곳, 그곳이 진짜 인도라고 여긴다.


과연 시골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평화로운 땅인가?『인도로 가는 길』을 쓴 E.M. 포스터가 그렸던 ‘공장도 철도도 없고 …… 어디를 보나 보기 좋게 적당히 부서진 사원과 아름다운 나무들 …….’이 있는 곳이어야 진짜 인도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진짜 인도’인 농촌(또는 어촌이나 산촌 - 옮긴이)에 가보면 온갖 아름다운 상상이 비참하게 깨진다. 이방인이 쓴, 인도에 대한 대부분의 글과 그림은 인도의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석사 과정 때 북부 지방의 어느 농촌에 갔다가, 그 마을이 생긴 이래 내가 그곳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일이 있다. 당연히 온 마을 사람들이 짧은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이상한 사람’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아낙들은 손님인 나에게 차를 대접하느라 찻잎을 빌리고 설탕을 구하고 야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차 한 잔도 사치였다.


원래 인도인의 음식은 단순 소박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시골 사람들이 먹는 건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본 빈민층의 반찬은 오직 배고픔과 날고추뿐이었다. 우리에게는 고추장이 있지만, 그들은 고추를 소금에 찍어 먹는다. 그보다 조금 나은 계층은 오늘도 내일도 감자가 반찬의 주인공이다.


인도 최대의 주(州) 우타르프라데시(내륙지방이고, 바라트 북쪽에 있다 - 옮긴이)에는 식수가 없는 마을이 3만여 개가 넘는다. 우리에겐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여성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새벽부터 물을 찾아 먼 길을 헤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돈이 아까워서 전기를 설치하지 않고 가로등 아래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가는 가구도 적지 않다. 농촌에서는 아직 세숫비누나 치약이 필수품이 아니다.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인도는 추상”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도 인도를 실재하는 구체적 존재(나라 - 옮긴이)가 아니라 추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더러운 강물과 극심한 빈곤을 보면서도 그 너머 어딘가에 무언가 숭고한 정신이 숨어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인도는 타락한 물질세계의 영원한 대안이다.


“아 유 해피(Are you happy → '당신은 행복한가요?‘ : 옮긴이)?”


“예스(Yes → ‘네.’ : 옮긴이).”


이방인은 인도인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소박하게 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모범답안을 적는다. 행복은 물질의 양과 상관없다면서.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부의 추구에 목을 맨다. 가난은 죄악이라며.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과거에 묶어놓고 싶었다. 그래야 현재가 그들의 것이 되니까. 지배자가 내민, 과거에 뿌리를 둔 ‘정신주의’의(“<정신주의>라는” - 옮긴이) 알약에 취한 일부 인도인도 열심히 서방의 물질세계를 비난하고 인도의 정신주의를 자랑했다. 그 여파로, 그들의 관점을 내면화한 우리(한국인 - 옮긴이)도 인도를 ‘영혼의 땅’이라고 여긴다.


인도는 발전한 우리들이 가끔씩 돌아가 쉴 수 있는 과거이며 어머니 같은 고향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무시한 이러한 생각은 다분히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생활(삶 - 옮긴이)을 꿈꾸고 ‘기회의(기회’라는‘ - 옮긴이) 황금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작게는 자전거나 라디오에서 크게는 냉장고와 자동차를 갖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림 같은 인도의 농촌은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사는 아름답고 행복한 땅이 아니라 힘들고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문맹, 유아 결혼, 결혼 지참금, 노예 노동, 남아선호, 비위생적 생활, 인간에 대한 부당한 이용과 착취, 여성에 대한 억압 등, 사회의 각종 아픔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거지(걸인 - 옮긴이)들도 하나의 풍경처럼 눈에 익숙하다.


시골에 가면 점쟁이와 떠돌이 승려(문맥상 불교 승려가 아니라 힌두교 수행자인 ‘사두’로 보인다 - 옮긴이)들이 마을 어귀나 보리수 밑에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일이나 꽃, 음식을 든 순박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앞으로 맞닥뜨릴 인생과 운명을 상담한다.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 무속 관계자가 60만 명이라니 인도에 비하면 조족지혈(새 발의 피 - 옮긴이)일까? 횟가루를 뒤집어쓴 힌두 사원에도 마음이 시린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처럼 소망하는(바라는 - 옮긴이) 바는 똑같다. 다만 부자보다 기회가 적거나 없을 뿐이다. 인도인이 정신주의를 추구하고 종교적인 것은 그만큼 사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어떤 이름으로든지 현재의 고통(괴로움 - 옮긴이)과 시련을 위안 받고 싶은 것이다. 주어진 삶을 체념하거나 달관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모든 사람이 꼭 한 번 보고 싶어하는 단 하나의 나라는 인도”라고 말했다. 나는 ‘인도를 보는 것이 다른 열 개 나라를 보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인도를 구경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인도는 우리를 유혹하는가? 진짜 인도는 어떤 모습일까?


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도의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의 인도만 보는 것이나, 물질주의적 인도를 외면하고 정신주의적 인도만 부르짖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발상이다. 코끼리의 다리나 코만 만지고 코끼리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 큰 코끼리를 이해하는 본질적 한계와 다르지 않다.


대륙 크기의 넓은 인도에는(대륙처럼 크고 넓은 인도에는 - 옮긴이) 부와 빈곤, 고층 건물과 토담집이 나란히 서 있다. 제철소와 밭가는 가래가 함께 존재하고(있고 - 옮긴이), 컴퓨터를 만지는 공학도와 대장간에서 풀무를 돌리는 대장장이가 같이 산다. 고상한 철학과 허무맹랑한 미신이, 전통에 물든 보수와 체제 변화를 기도하는 급진주의가 그 안에 함께 있다. 네루가 말한 ‘평화로운 공존’의 땅이다.


인도는 키스를 기다리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아니다. 천(1000 - 옮긴이)의 얼굴을 하고 늘 살아 숨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고 싶다.  

   
- 이옥순,『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310 ~ 318쪽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이옥순 지음, 책세상 펴냄, 서기 1997년 초판 1쇄 펴냄, 서기 2002년 개정판 1쇄 펴냄, 서기 2007년 개정증보판 1쇄 펴냄)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