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의병전쟁 때 활약한 전라북도의 의병

개마두리 2023. 9. 4. 22:44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투쟁한 채복만 선생

 

광복 78주년, 그 빛나는 순간 뒤에는 수많은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채복만 선생은 1909(의병전쟁 때. 의병전쟁은 서기 1907년에 시작되어 서기 1911년에, 그러니까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한 지 한 해 뒤에 끝났다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전북(‘전라북도를 줄인 말 옮긴이)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로, 독립의군부 및 광복단으로 활동한 유장렬 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정식 명칭은 정미의병’. 대한제국 출신 군인들과 포수들과 다른 평민들로 이루어진 저항군[서양식 용어로는 레지스탕스’]이었다 옮긴이)이었습니다.

 

당시 유장렬 의병장은 독립의군부에 가입해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국권 반환요구서 및 일본군 철병요구서를 제출, 광복단을 조직해 국내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던 인물인데요.

 

채복만 선생은 유장렬 의병장 휘하에서 동료 의병 10여 명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전북 부안에 거주하는 2명의 참봉으로부터 각 50(한 량, 그러니까 한은 요즘으로 치면 6만 원 정도니, 50량은 300만 원이다. 그리고 한 참봉당 50량을 모집했고, 두 명의 참봉에게서 돈을 모집했으므로, 채 선생과 동료 의병들이 모집한 돈은 도합 600만 원이다. 참고로, 서른두 해 전에는 과자 한 개의 값이 50원이었고, 얇고 작은 책 한 권의 값이 1300원일 정도로 물가가 쌌으므로, 그보다 훨씬 전에는 물가는 더 쌌을 것이며, 이로써 서기 1909년의 100, 그러니까 600만 원은 서기 2023년으로 치면 6000만 원이나 12000만 원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큰 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옮긴이)씩을 모집하여 독립 활동을 하다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독립운동(‘독립전쟁’/‘독립투쟁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옮긴이)을 지속할 수 있는 군자금을 모으는 데 헌신했던 고인의 공훈을 기려 (서기 옮긴이)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아래 줄임[‘이하 생략’])

 

- 이상 네이버 해피빈의 모금함인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문턱 없는 보금자리를 에서 인용

 

- 원문 :

 

https://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91126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문턱 없는 보금자리를

78주년 광복절, 독립을 위해 삶을 헌신했던 독립유공자의 후손에게 문턱 없는 보금자리를 전해 주세요.

happybean.naver.com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정미의병이 되어 총을 들고 근대 왜군(倭軍)과 목숨 걸고 싸우신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을 모아서 군자금으로 쓰려고 하다가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신 - 채복만 선생님에게 (즈믄/1000/) 번의 감사를!” 대한제국을 지키는 전쟁(그러니까,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배달민족에게는 조국 수호 전쟁’)이었던 의병전쟁에 참전하신 모든 정미의병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정미의병 만세!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정미의병의 항쟁을 본받아야 한다!

 

나는 - < 알자지라 > 방송국의 기자를 비롯한 외신(外信) 기자에게도, 국제연합(UN)의 관리에게도, (인도네시아/타이[Thai]/브라질/수오미/스웨덴을 비롯한) 친일국가의 시민/국민에게도, (성향이 친일인) 4 세계 사람들에게도, - 산케이 신문 의 기자를 비롯한 왜국(倭國) 우익 언론사의 기자들에게도, 넷우익이나 재특회나 일본회의 회원인 왜국 국민에게도, 자기나라 정부와 왕실과 우익을 충실히 따르며 혐한을 하는 대다수(전체의 90% 이상) 왜인(倭人)들에게도, 한국 안의 친일파들(서기 1945년 이후에 태어나서, 왜국 정부와 우익에 무릎을 꿇은 자들 포함)에게도, [친일국가 출신인 사냥개(친일국가에서 태어나 친일 성향을 드러내며 왜국 정부와 우익의 논리대로 한국인을 비롯한 갈마[“역사”]의 피해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자들. 마크 램지어 교수가 좋은 예다)’]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채 선생님을 다룬 글을 이곳에 올리는 까닭은, 몇 해 전부터 누리그물에 퍼지기 시작한 주장 전라도가 친일의 고장이며, 친일파는 다 전라도에서 나왔다.”는 주장 에 반박하기 위해서다. 채 선생님처럼 의병전쟁 때 호남의 가봇[‘절반’]전라북도에서 총을 들고 의병으로 활동하신 분이 계신데, 어떻게 전라도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가?

 

게다가 내가 열두 해 전쯤에 TV에서 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의병전쟁 때 근대 왜군[倭軍]과 목숨 걸고 싸운 정미의병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은 호남이었고, 가장 악착같이 싸운 의병들도 호남 출신이었으며, 근대 왜군은 그들이 보급을 받거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 싸우는 걸 막으려고 증기선인 군함으로 이루어진 해군을 동원해 온 호남 바닷가를 다 틀어막아야 했다.

 

또한 호남 사람들은 의병전쟁 이전에도 두 번이나 왜군과 맞서 싸웠는데, 한 번은 의병전쟁이 일어나기 열세 해 전인 서기 1894, 2차 동학군 봉기였고(이때 근대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10만 명이 넘는 동학군[]이 근세조선 관군과 근대 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른 한 번은 동학군이 들고 일어나기 3세기 전인 서기 1592~1598, 그러니까 (흔히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불리는) 6년 전쟁이었다(호남의 근세조선 수군은 말할 것도 없고, 뭍에서도, 그러니까 땅에서도 근세조선 의병이 악착같이 왜군과 맞서 싸워서 왜군의 호남 점령을 막아냈는데, 이 때문에 호남이 왜군에게 도륙당하고 쑥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전주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역사책들도 무사할 수 있었으며, 훗날 근세조선 사람들이 전쟁 때 호남을 지켜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이 일은 중요했다).

 

그뿐인가? 6년 전쟁이 일어나기 2세기 전, 그러니까 근세조선이 세워지기 열두 해 전에도 호남 사람들은 왜국[倭國]과 맞서 싸웠는데, 좀 더 정확히는 후기 고리(高麗)[왕건이 세운 나라] 말기인 서기 14세기 후기[서기 1380년]에 전라도 진포에서 일어난 진포해전[이 때 최무선 장군과 그가 만들어낸 화포가 맹활약을 했다]과 비슷한 때 전라도 남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수군이나 육군이나 백성이었던 호남 사람들이 창칼을 들고 왜구[倭寇]와 싸워, 전장이 피로 물들 정도로 많은 왜구를 죽이고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뼛속부터 친일인 것들이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 반박하면, 호남 차별을 합리화하고 영남 패권주의를 지지하는 작자들은 하지만 채만식과 서정주는 전라도 출신이었어!”하고 따지겠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안두희를 내놓은 평안도랑, 만주국 관리[!]였던 최규하를 내놓은 강원도랑, 다카키 마사오를 내놓은 경상북도도 똑같이 비난받아야지!”하고 재반박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면, 나는 내 본적[그다지 자랑스럽지는 않다. 서기 1990년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친일파들 가운데 그리고 호남 차별과 영남 패권주의와 군사반란/군부독재를 감싸는 작자들 가운데 - 나와 본적이 같은 인간들이 많아서!]이 경상남도이며[부모님이 모두 경상남도 내륙 출신이시다], 태어나서 자란 곳은 서울임을 밝히겠고,

 

그래도 불만인 사람들에게는

 

대일 항전기 후기~말기에 호남에서 친일파들이 나온 건, 호남 사람들이 나쁜 것들이어서가 아니다. 서기 1930~40년대에는 근대 왜국 정부와 군부와 경찰이 식민지를 강하게 욱죄며 식민지 원주민을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세뇌하거나, 동화를 강요하거나, 고문하거나, 감시하거나, 쥐어짜는 짓을 그 이전 시대보다 더 철저하게 했던 때였고, 서쪽[중화민국]이나 먼 북쪽[몽골 인민 공화국/소련]이나 먼 동쪽[미국]으로 달아나지 않는 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런 일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다섯 해 이상, 그것도 감옥 같은 식민지에서 갇혀 지내면서 당하다 보면, 정신이 무쇠가 아닌 한, ‘차라리 투항하고 싶어. 다 부질없어.’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록 옳은 일은 아니지만] ‘일어날 가능성은 높은 일이다.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호남 출신 친일파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그들을 비판/비난할지언정 - ‘이해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변절이나 투항은 호남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평안도에서도, 경상북도에서도, 강원도에서도, 경기도에서도, 충청도에서도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대일 항전기 때인 서기 1930년대와 40년대에 친일파들이 늘어난 건 호남만의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점령당해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러니 우리 한국인들은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슬퍼하거나, 분노할지언정 그 일을 호남 차별을 해도 되는 증거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고 충고하리라.

 

나의 동족인 한국인 여러분, 부탁이다. 제발 이제는 호남 차별과 영남 패권주의는 내다 버리자. 그 두 가지는 모든 시민이 똑같은 권리를 지니고 대접 받는다.’는 한국 헌법 의 기본 원칙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군사반란이나 군부독재를 감쌀 때 쓰이는 행동/이념이기도 하고, 못해도 서기 14세기 후반 이후에는 나라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가 되어 뭉쳐서 살아온 호남과 다른 지역 사람들[, 여기서 제주특별자치도는 빼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제주특별자치도인 탐라군[]은 중세부터 후기 고리 말기까지는 코리아 반도, 그러니까 에 세워진 나라인 통일신라나 후기신라나 후기 고리에 통합되지 않고 사실상 독립을 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탐라군 사람들의 정체성 보존을 위한 노력은 근세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올려 설명하겠다]의 단결을 깨뜨리는 짓이다.

 

나의 동향 사람들인 경상남도 사람들이여, 본적이 경상남도이면서 다른 곳에서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이여, 경상북도 사람들이여, 서기 21세기에 대한민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남부여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남부여 사람들을 죽인 서기 7세기 중반의 신라 왕족/귀족들이나, 백제를 깎아내리고 남부여와 후백제를 악당국가로 낙인찍은 [김부식을 비롯한] 후기 고리의 지배층처럼 굴어야 하겠는가? 그게 옳은가? 우린 고대나 중세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호남 사람들을 대하는 인식도 바꾸자!

 

[내가 이렇게 부탁하면, “말도 안 돼요. 난 (서기) 6~7세기에 (중기)신라와 백제(남부여)가 치고 박고 싸운 걸 잊을 수 없어요. 견훤 놈이 월성(경주)으로 쳐들어와서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것도 용서 못 하겠고.”하고 말할 영남 출신 한국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물아홉 해 전, 윤내현 전 단국대 교수님이 제안하신 것을 대안으로 그들에게 그리고 호남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분에게 꺼내려고 한다. ‘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이 뭉쳐야 할 근거를 서기 668년에 이루어진 이른바 삼국 통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인 서기전 2333년에 이루어진 아사달, 그러니까 고조선의 건국에서, 그리고 그 아사달이 즈믄해 이상 유지된 나라였으며, “고구리(高句麗)/백제/시라[신라]가 다 이로부터 나왔다.”는 배달민족의 옛 기록에서 찾자는 주장을 소개하겠다는 말이다.

 

만약 이 주장을 바탕으로 한국인이 뭉치자고 제안한다면, 백제나 남부여나 신라가 아니라, 3의 나라이자 그 세 나라의 전신(前身)인 나라에서 정체성과 단결할 근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이 손해를 보거나 뒤처지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고, /호남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평등하고 동등하게 뭉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동서화합에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훗날 찾아올 남북 사이의 화해와 재결합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그 때문에 윤 교수님의 주장을 다듬고 몇 가지를 덧붙여서 여러분 앞에 내놓는 것이며, 부디 그것이 호남 차별 해소와 영남 패권주의 버리기와 남북대립 완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단기 4356년 음력 720일에, 본적이 경상남도인 서울 시민으로서, 호남 차별과 영남 패권주의가 사라지기를 비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