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노컷뉴스]조선왕조보다 더 긴 600년 역사 '가야'…세계유산 등재 '코앞’

개마두리 2023. 9. 14. 22:38

그동안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위주의 고대사 연구에서 소외되고 잊혔던 경남의 뿌리인 '가야'가 남긴 유적들의 세계유산 등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세계유산 등재는 고대 국가인 가야가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어서, 가야가 세계 속의 가야로 재조명될 전망이다.

 

경상남도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리는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될 것이라고 13일 밝혔다.

 

도는 등재 심사가 있는 17일쯤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고, 박완수 경남지사와, 가야 고분군이 있는 김해/함안/창녕/고성 등 시장/군수와, 합천군 부군수 등 대표단을 꾸려 16일 출국할 계획이다.

 

(만약 가야의 옛 무덤들이 세계유산으로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최종 선정되면, 경남도가 (서기 옮긴이) 20136월 문화재청에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안 말이산고분군을 처음으로 세계유산 등재 신청한 지 10년 만에 이뤄낸 성과로 기록된다.

 

201312월 세계유산 잠정 목록 등록 이후 201873개 시도, 7개 시군에 걸친 7개 고분군으로 확대했다. 202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1년 반 동안 유네스코 자문 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의 심사를 받아 왔다.

 

이후 지난 5월 이코모스로부터 세계유산 '등재 권고' 판단을 받았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통상 이코모스의 권고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전례를 보면,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해 보인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야 고분군은 경남의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을 비롯해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 7개다.

 

(그것들은 옮긴이) 우리나라(한국 옮긴이)16번째 세계유산이며, 경남에서는 해인사 장경판전(1995), 통도사(2018), 남계서원(2019)에 이어, 4번째 세계유산이 된다.

 

7개 고분군 모두 각 가야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지배층의 무덤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고분군의 입지/묘제/부장품 등을 통해 각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여러 세력이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비교적 동등한 수평적 지위로 결속했던 가야연맹(전기가야와 후기가야를 모두 포함하는 가야 연방 옮긴이)의 정치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떠오른 생각이지만, 나는 가야 연방을 볼 때, 몇몇 도시국가가 느슨한 동맹을 맺은 형태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다가,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의 켈트인 사이에서 여러 번 시달렸고, 결국은 로마 공화국에게 망하고 흡수되어 버린 에트루리아를 떠올린다.

 

에트루리아가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지 못했듯이, 가야 연방도 완전히 멸망하는 서기 6세기까지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에트루리아가 문명이나 문화를 [로마 공화국 이전에 있었던, 로마 시()만 다스린 작은 나라] 로마 왕국에 가르쳐 주었고 로마 왕국에서 에트루리아인 출신 왕이 나왔듯이, 처음에는 가야 연방, 그러니까 전기 가야가 서나벌이나 해상신라[()씨족의 나라]보다 힘이 셌고, 서나벌 안에서 일어난 분쟁을 전기 가야의 우두머리인 수로왕[뇌실청예 왕]이 해결해 주었으며,

 

에트루리아가 무역으로 먹고 살며 처음에는 로마보다 부유했듯이, 전기가야도 처음에는, 그러니까 서기 1~2세기에는 경상남도의 기름진 벌판을 차지하고 김해처럼 바다를 낀 항구를 차지하여 여름지이[‘농업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와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오환족 망명자들이 경상북도 바깥에서 세운 서나벌이나, 용성국[龍城國] 망명자들이 오늘날의 경주에 세운 해상신라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힘을 뽐냈고,

 

나중에는 로마 사람들이 에트루리아인 왕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 뒤 에트루리아를 여러 번 쳐서 궁지로 몰아넣었듯이, 서기 6세기 전반부터는 중기신라의 힘이 후기가야보다 더 세져서 후기가야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삼니움 국 같은 이탈리아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병합하며 힘을 키운]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북쪽과 동북쪽의 켈트인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힘을 못 쓰고 서서히 약해졌듯이, 서기 4세기 후반 이후의 가야 사람들은 고구리[高句麗]/전기 고리[高麗]와 백제/남부여[南夫餘]와 중기신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쪼그라들기 시작했으며,

 

에트루리아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한 때는 신하로 다스렸던 로마에 무릎을 꿇고 완전히 흡수되어 멸망했듯이, 후기가야도 한때는 자신들보다 약했던 신라에 정복당해 멸망했다.

 

또한 비록 에트루리아는 멸망했으나, 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가져와 로마인들에게 전했던 아치형 건물이나 헬라스 알파벳을 에트루리아식으로 바꾼 알파벳[이것이 로마에 전해졌고, 그래서 원래는 에트루리아 알파벳으로 불러야 할 글자가 로마의 글자라는 뜻인 라틴 알파벳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라틴 알파벳은, 한국의 학생들이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바로 그 ‘ABC’]은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 안에 남았듯이, 후기가야는 서기 6세기 전반에 멸망했으나, 그들의 제철 기술과 가야금을 비롯한 그들의 악기/음악은 중기신라로 넘어가 뿌리를 내렸고, 오늘날에도 가야금은 배달민족의 국악을 연주하는 중요한 악기다.

 

따라서 로마사를 배울 때 에트루리아를 무시하면 안 되듯이, 신라사를 배울 때도 가야사를 무시하면 안 되며, 가야사는 다른 고대국가들의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와 마찬가지로 배달민족의 갈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갈마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옮긴이)

 

동북아시아(나는 동북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가 더 정확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옮긴이) 문화권의 여러 국가(나라 옮긴이)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를 엿볼 수 있는 유산이라는 점을 인정받게 된 것으로(이 설명은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가야 연방은 서기 4세기가 아니라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그러니까 서기 1세기인 서기 42년부터 이미 고대 국가였기 때문이다 옮긴이), 소멸된 가야 문명의 존재를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이자 중국/한국/일본(이 기사를 쓴 기자가 한국인인데, 도대체 한국/중국/일본이라는 말을 안 쓰고, “중국”, 그러니까 제하[諸夏]를 맨 앞에 쓰는 건가? - 옮긴이)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역사발전 단계의 사례로 인류사에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입증됐다.

 

단편적인 기록 말고는 제대로 된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던 고대 왕국 '가야'는 삼국과 견주어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문화를 영위한 고대 국가였다(사실, 내내 독립국가였던 건 아니다. 전기가야는 서기 227년에 백제에게 정복/점령당해서 망했고, 서기 260년대 중반에 쳐들어온 오환족 기병대에게 점령당해 잠시 백제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가, 그 뒤에는 다시 백제에 종속되었고, 서기 396년 광개토왕의 고구리[高句麗] 군사가 경상남도로 쳐들어오자 그제야 백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으며, 서기 407년에야 후기가야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옮긴이).

 

실제 가야의 역사는 약 600년에 이른다(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나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계산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 가 인용한 책인 가락국기 에는 전기가야의 첫 임금인 수로왕, 그러니까 뇌실청예 왕이 즉위한 해가 서기 42년으로 나오고, 역사서에 따르면 후기가야가 중기신라에 완전히 항복한 해는 서기 532년이라, 전기가야와 후기가야가 유지된 기간을 다 합쳐도 490년 정도인데, 왜 가야가 “600동안 유지되었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인가? 가야가 독립왕국이 아니라 마한의 제후국이었다는 숭선전지 를 참고한다 해도, 가야가 맨 처음 기록에 나오는 해는 서기전 68년이 아니라 서기 9년 이후[또는 서기 16년 이후]. 마한이 멸망한 해인 서기 9년을 가야가 홀로 선 해로 친다 해도 가야가 유지된 기간은 523년 정도고, 마한의 유신[遺臣]인 주근의 마한 부흥군이 참패한 서기 16년을 가야가 독립국가가 된 해로 쳐도 가야가 유지된 기간은 516년이다. 어느 쪽을 따라도, 서기전 68년보다는 훨씬 늦다. 나는 이 때문에, 가야의 갈마가 “600동안 이어졌다는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옮긴이).

 

조선왕조(근세조선과 대한제국 옮긴이) 500(실제로는 518옮긴이)보다 더 긴 역사의 시간을 갖고 있다(내가 위에서도 고증 겸 설명을 했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수로왕 대부터 후기가야가 멸망할 때까지를 가야 연방이 유지된 기간으로 치면, 가야 연방이 유지된 기간은 근세조선의 그것보다 스물여덟 해 정도 더 짧고, 설령 수로왕 이전의 가야 왕일 가능성이 높은 아비가가 활약한 기간으로 추정되는 서기 9~ 41년을 가야 연방이 유지된 기간에 덧붙인다 하더라도, 가야가 유지된 기간은 근세조선의 그것보다 겨우 다섯 해만 더 길기 때문이다. 만약 아비가 왕이 자립한 해가 서기 16년이라는 가설을 따른다면 가야가 유지된 기간은 근세조선이 유지된 기간보다 두 해 더 짧아진다 옮긴이). 고려(후기 고리 옮긴이)450(실제로는 474옮긴이)이다(가야 연방은 후기 고리보다 열여섯 해 ~ 마흔아홉 해 정도 더 오래 유지되었다 옮긴이). (이러니 옮긴이) 가야역사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러나 기껏해야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일본서기 등에서 개략적(槪略的. 대충 추려서 줄인 것 옮긴이)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남제서[南齊書] 숭선전지 동국여지승람 에도 가야 관련 기사는 남아있고, 필사본 화랑세기 에도 가야를 다룬 기사는 있다. 그리고 몇몇 지방에는 아직도 가야를 다룬 야사[野史]가 전설로 내려온다 옮긴이).

 

가야 고분군을 통해 가야 각국의 독창적인 문화가 발견되고 있다. 왕묘의 출현과 고분군의 군집/위계화는 가야 시대의 계층적 구조를, 묘제의 도입과 변화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코모스도 가야 고분군은 연맹(사실은 연방이나 동맹’ - 옮긴이)이라는 독특한 정치체계를 유지하면서 주변의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예를 들면, 장수왕대에 고리[高麗]로 이름을 바꾼 고구리[高句麗], 나중에 남부여로 이름을 바꾼 백제나, 서기 6세기의 중기신라 옮긴이)와 공존했던(사실은 전쟁을 치르거나, 대립하거나, 압박을 받거나, 동맹을 맺었던 옮긴이) 가야의 문명을 실증하는 독보적인 증거라고 인정했다. ,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만약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다면, - 옮긴이) 가야 고분군은 특정 국가나 민족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유산으로 우뚝 서게 된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는 정말 기쁜 일이다 옮긴이). 가야 고분군의 국제적 가치가 높아져 더 많은 해외(‘외국이나, ‘다른 나라, ‘국외[國外]’를 써야 한다. 한국은 반도국가지, 섬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옮긴이) 관광객이 경남으로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고, 가야사의 조사/연구/복원 사업도 더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경남도 차석호 문화 관광 체육국장은 "오랜 시간 열정을 가지고 준비한 만큼, 가야 고분군이 반드시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믿는다."라면서 "이번 기회에 가야 고분군의 역사적 가치를 세계인에게 알리고, 세계인들이 방문하는 문화유적지로 보존/활용하겠다."라고 말했다.

 

- 경남 CBS 최호영 기자

 

- [노컷뉴스] 서기 2023년 양력 914일자 기사

 

- 단기 4356년 음력 730일에, 충청도에 있는 백제/남부여의 문화유산들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에 이어 가야의 무덤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