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삼국지연의 』에는 없지만, 정사(正史)에는 나오는 제갈량의 참모습

개마두리 2023. 9. 16. 20:27

참으로 오랜만에 제하(諸夏. 수도 북경[北京])의 삼국시대를 다룬 글을 쓴다. 이번에는 내가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갈마(‘역사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에 나오는 제갈량(존칭이 제갈공명인 사람의 본명. ‘이 이름이고, ‘공명은 그의 자[])의 참모습 두 가지를 간단하게 적어서 올리려고 한다.

 

첫째, 나관중(본명 나본’. ‘관중은 그의 자다)의 역사소설이자, 야사(野史)삼국지연의 에 따르면, 제갈량은 적벽대전 때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배송지 주 자치통감 같은 정사(正史)에 따르면, 촉한(蜀漢. 줄여서 []’)을 세운 유비(劉備)가 죽자 위()나라 대신들이 기뻐하면서 “(‘한 황실의 후손을 자처하며 계속 조조와 맞서 싸웠던) 유비가 죽었으니, 이제 우리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는데, 유비의 신하였고 유비가 죽은 다음에는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을 모시게 된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자,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제갈량이라는 놈이 누구냐?”고 서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정사의 설명이 옳다면, 제갈량은 적벽대전이나 유비가 촉(당시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익주[益州]’)을 두고 유장과 싸울 때나 유비와 조조가 한중(漢中. 다른 이름은 []’. 사천[四川] 분지의 동북쪽에 있는 산지고, 화북 지방과 사천 분지를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다)을 놓고 전쟁을 할 때도 사람들에게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유비가 죽고 제갈량 본인이 촉의 군사를 이끌게 된 다음에야, 그리고 북벌에 나선 다음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북벌이 시작된 뒤부터는 제갈량이 위나라와 오나라에서(특히, 위나라에서) ‘경계해야 할 적/경쟁자로 각인된 건 사실이다.

 

둘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에는 안 나오는 사실이지만(이는 내가 우리 동네 도서관에 있는 나관중이 직접 쓴 원본 삼국지 완역본을 직접 찾아서 읽어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다), 정사(正史)에는 유비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위나라 대신들이 촉나라에 당장 (위나라에) 항복하라!” 하고 강요하는 서신(書信 : 편지)을 보냈고, 제갈량은 그 서신들 하나하나에 모조리 항복을 거부하는 답신(答信 :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열 해 전쯤 갈마를 다룬 글(어느 책에 실린 글인지는 잊어버렸다)을 읽다가 알아냈는데, 이 사실을 떠올리면 힘센 나라에 무릎을 꿇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제갈량에게 감탄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나관중은 왜 이런 사실(史實)삼국지연의 에 집어넣지 않은 거지? 자신이 완전무결한 신하로 그린 제갈량의 위신에 금이 갈 거라고 여겨서 그런 건가? 독자들이 제갈량이 위나라에 얕보인 촉의 신하로 여길까 봐 일부러 뺐나? 나라면 정사에 실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집어넣었을 거야.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제갈량을 힘센 위나라에 맞서 싸우고 투항을 거부하는 게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주군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 충성을 다한 용감하고 훌륭한 신하로 여길 수도 있잖아?’ 하는 생각을 하며 착잡한 심정이 된다.

 

결국 갈마의 진실은 작가나 대중의 입맛에 맞춘 문화상품(예를 들면, 역사소설)에서는 찾기 어려우며, 그것을 찾으려는 사람은 (지루하고 힘들더라도’) 역사책을 직접 뒤져봐야 한다는 게 이 글의 작은 결론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이 진실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빈다.

 

- 단기 4356년 음력 82일에, ‘왜국(倭國)/친일파와 맞서 싸워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촉보다 크고 힘센 나라였던 위나라의 협박, 그러니까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라는 협박을 거절하고 끝까지 맞서 싸운 제갈량의 마음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