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메밀이 신라 중/후기에 코리아(Corea) 반도에 들어왔다는 설명

개마두리 2023. 9. 30. 14:58

“메밀(내가 [두산백과]에서 찾아본 바에 따르면, 야생종은 ‘중국 북동부와 시베리아 등지’이며, 원산지가 ‘바이칼호/중국 북동부/아무르강 일대’ 또는 ‘중앙아시아’로 추정된다고 한다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은 한나라(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 - 옮긴이) 때 작물로 널리 재배되었다고 하며(그러나 내가 [두산백과]에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제하[諸夏]는 당나라 때에야 메밀을 처음 알았고, 그것이 제하 안에서 널리 길러진 때는 송나라 때라고 한다 – 옮긴이), 신라시대 중/후기에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메밀은 민중들의 일상적인 주식(主食)이라고 하기 어렵다. 구황식물(救荒植物. → [흉년이나 굶주림 같은] 거친[荒] 상황으로부터 구해주는[求] 식물[植物]. 흉년에 곡식 대신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가리킨다. 피/아카시아/쑥/감자/메밀이 여기에 들어간다 : 옮긴이)로서 기근(飢饉. 흉년[饉]으로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림[飢] - 옮긴이)이나 흉년이 길어지면 많이 심는데, (그것은 – 옮긴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들이 기근에 허덕일 때 메밀을 심었던 것이다.

이런 궁핍한 때 민중들이 먹는 음식을 (도깨비에게 – 옮긴이)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도깨비에 대한 신앙(믿음 – 옮긴이)이 민중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메밀이 제물로 정착된(뿌리내린/굳어진 – 옮긴이) 시대(때 – 옮긴이)를 보면, 도깨비 신앙의 출발기는 대략 신라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메밀을 올려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우리나라뿐이다.”

- 김종대, 『 저기 도깨비가 간다 』, 61쪽

- 『 저기 도깨비가 간다 』( ‘김종대’ 지음, ‘도서출판 다른세상’ 펴냄, 서기 2000년 )에서

▣ 김종대 : 서기 2000년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과장. 중앙대학교, 고려대학교, 경기대학교에서 민속학 및 구비문학론 강의를 했다.

▶ 옮긴이의 말 :

그저께, 나흘 전에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낸(그리고 빌려온) 책을 집 안에서 운동하면서(그러니까, 흙이 묻지 않고, 집 밖에서는 한 번도 신은 적이 없는 운동화를 신고 집 안을 빙빙 돌면서) 읽다가, 눈에 띈 부분을 (깜짝 놀라면서) 옮겨 적은 다음 이곳에 올린다.

나는 열세 해 전, 「 로마제국의 영광, '빵심'에서 나왔다! 」라는 ‘장인용’ 선생의 글을 읽고, 그 글에 “메밀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이 여진족(女眞族)이었다고 한다. 여진족은 메밀에 독이 있어, 이것만 상식(常食)하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메밀을 많이 먹고, 몸이 나빠지라.’는 뜻에서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메밀을 길러 국수나 묵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늘 상식하던 무김치를 곁들여 먹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점을 근거로 메밀이 코리아(Corea) 반도에 전해진 때를 후기 고리(高麗)[왕건이 세운 나라] 전기로 추측했는데, 

만약 김종대 과장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장 선생이 인용한 ‘메밀이 코리아 반도에 들어온 사연’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실제로는 후기 고리가 세워지기 220 ~ 415년 전에, 그러니까 사국시대(서기 5~6세기에는 삼국 뿐 아니라, 후기가야도 있었기 때문이다)나 삼국시대나 양국(兩國)시대(이른바 ‘남북국시대’)에도 코리아 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메밀을 먹었다고 봐야 한다(따라서, 장 선생의 글을 바탕으로 했던 예전의 내 추측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단, 김 과장의 설명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설명에 몇 가지를 더 덧붙이고, 반박할 부분은 반박하고자 한다.

만약 중기신라/후기신라 사람들이 메밀을 먹었다면, 그 이웃나라인 후기 가야의 사람들이나 백제/남부여 사람들도 메밀을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이는 참파[Champa] 왕국이나 다이 비엣[한자로는 ‘대월(大越)’. 비엣남(Vietnam)의 옛 이름] 사람들이 벼농사로 쌀밥을 지어 먹을 때, 그 ‘이웃’이었던 라오스 사람들이나 화남[華南]지방 사람들[그러니까, 남중국의 남쪽 끝에 살던 ‘한족(漢族)’들]도 같은 일을 했던 사실과 같다).

그리고 식물학자들이 메밀의 원산지를 시베리아의 일부분인 ‘바이칼호’나, 올바른 이름은 간도(間島)/‘만주’인 ‘중국 북동부(제하[諸夏]의 동북쪽에 있는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나, ‘중앙아시아’로 추정한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식물은 원래 ‘한족(漢族)’들과는 큰 상관이 없었으며, 

만약 한(漢)나라 때나 당(唐)나라 때 ‘한족’들이 이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원(原) 부여(夫餘)나 북부여나 고구리(高句麗)/전기 고리(高麗)[장수왕과 보장왕의 나라]나 중기 고리(高麗)[흔히 ‘발해’로 불리는, 걸걸중상이 세운 나라]에게서 그 식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漢)나라 때 받아들였다는 설명이 옳다면 원 부여나 북부여나 고구리에서 메밀이 제하(諸夏)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며, 당(唐)나라 때 받아들였다는 설명이 옳다면 전기 고리나 중기 고리 때 흘러들어갔으리라.

보다 정확히 언제 흘러들어갔는지는 식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고찰해서 알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메밀의 원산지가 간도/‘만주’라면, 그 두 땅을 차지하고 다스렸던 원 부여나 북부여나 동부여나 예(濊)나 고구리/전기 고리/중기 고리 사람들도 메밀을 길러서 먹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들도 축제나 굿이나 제사를 지낼 때 메밀로 만든 음식을 신이나 조상이나 신령이나 도깨비에게 바쳤을 수 있다.

이런 메밀을 기르고 먹는 풍습이 간도/‘만주’에서 남쪽인 코리아 반도로 내려온 것이고, 그 때문에 중기신라나 후기신라 사람들이 그 풍습을 따라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런 내 가설이 맞다면, 원래는 코리아 반도의 이북에서 살던 예족과, 고구리(高句麗)와 졸본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 사람들이 메밀 씨앗과 메밀을 먹는 풍습과 메밀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남쪽으로 가져온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면 그 이웃나라인 가야나 신라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메밀과 관련된 문화를 꽃피운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신라는 “중기”가 아니라 전기부터, 그러니까 서기 3세기 후반부터 메밀을 먹거나 길렀을 수도 있다.

또한 메밀을 먹는 풍습과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긴 관행과 메밀로 음식을 만들어서 도깨비에게 제사지내는 관습이 신라 “중기” 이전에, 그러니까 서기 6세기 이전인 열국시대(서기전 58년부터 시작됨)나 원(原) 부여 시대(서기전 425년 이후)에도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도 말하고자 한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적으려고 하며, 나는 후학이나 전문가들이 더 정확하고 더 훌륭한 설명을 내놓으면, 기뻐하면서 내 설명을 버리고 물러날 것임을 덧붙인다.

- 단기 4356년 음력 8월 16일에, 도깨비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어(그리고 도깨비를 다룬 책에서 메밀이 코리아 반도로 들어온 시기와, 예상하지 못했던 신라시대의 풍습을 알게 되어)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