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일(日) 우익단체 “사도광산, 강제노동 현장 아니다.” 의견광고 선동

개마두리 2023. 10. 25. 21:20

(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이 기사가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배달민족이 왜국[倭國]과 목숨걸고 싸워야 하는 까닭을 설명한다고 여겨 이곳에 소개한다. 이 글을 읽고도, 윤석열과 뉴라이트와 엄마부대와 웹툰 작가 윤 아무개 씨와 대다수 한국[?] 언론사가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는 친일’, 아니 종일[從日. 왜국()을 따름(). 이완용 같은 자들의 성향을 설명할 때는, <왜국과 친하다>는 뜻을 지닌 말인 <친일>이 아니라 이 말을 써야 한다고 한다]’이 옳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

 

- “20명 할당 촌락서 40명 응모/일본인과 같은 대우주장

 

- 위험한 갱내 작업에 조선인 많이 투입한 차별은 외면

 

- 역사서에서 맥락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인용해 왜곡

 

(도쿄 = 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왜국[倭國].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한 사도(佐渡[좌도 옮긴이]) 광산의 조선인(근세조선은 서기 1897년에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고, 서기 1919년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으므로, 2차 대전 때인 서기 1930~40년대에 사도 광산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사람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불러야 한다! 황인종이나 남아시아인이나 백인이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것이 인종차별이라 고발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서기 1897년 이후의 한국인을 조선인으로 부르는 왜인[倭人]들도 모욕죄나 민족차별을 한 죄로 배달민족에게 고발당해야 한다! - 옮긴이) 강제 노동(좀 더 정확히는, ‘노예노동’. 이 이름은 이미 영어권 언론사가 쓴 사례가 있다 옮긴이)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 세력이 현지 언론에 의견 광고까지 게재하며 선동한 것으로 15(서기 2022년 양력 215옮긴이) 파악됐다.

 

이들은 조선인 강제 노동(노예노동 옮긴이)의 실태를 조명한 역사서에서 입맛에 맞는 내용만 인용하는 등(따위의 일을 하면서 옮긴이),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를 왜곡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역사 문제에서 일본의 명예를 지키겠다.’(서기 옮긴이) 2016(양력 옮긴이) 10월 발족한 일본의 우익단체인 역사인식문제연구회(이하 <연구회>)’사도 금산(금광)은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이 아니다. 사실에 토대를 둔 반론을!”이라는 제목의 의견 광고를 사도 광산이 있는 니가타(新潟[신석])’(왜국 혼슈 섬 중부에 있다 옮긴이)을 거점으로 하는 지방지 니가타(新潟[신석])일보 에 이달(서기 2022년 양력 2옮긴이) 3일 실었다.

 

이들은 한국 정부(이 때는 아직 종일파인 윤석열이 왜국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기 전이었다 옮긴이)와 언론이 사도 광산은 조선인 강제 노동의 현장이라고 연일 비판하고 있지만(비판 정도에서 그치지 말고, 거칠고 잔인하게 비난했어야 했다! - 옮긴이),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서, 국제사회를 향해 제대로 반론할 것을 촉구했다.

 

연구회는 사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의 3분의 2정도는 모집에 응한 이들이며, 촌락에 20명을 할당했는데, 40명이 응모한 사례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또 관() 알선이나 징용으로 일본에 온 이들도 있으나, ‘강제 노동이 아니라 합법적인 전시 노동 동원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 때문에라도 한국 사회가 강제징용대신 노예노동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자를 고집한다면, 적어도 겉으로는 모집이나 알선이라는 형식으로 일터로 간 한국인 노동자들이 입은 피해를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증언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근대 왜국 정부와 왜국 기업과 왜국 군대와 조선총독부가 노동자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 전쟁터나 광산 같은 위험한 일터로 끌고 갔다 하더라도, 만약 그 절차과정광고를 통한 모집이나 왜국 정부의 알선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사정을 모르는 제 3국이나 국제사회는 피해자인 한국인들에게 도대체 이 일이 어딜 봐서 강제야? 너희가 알아서 제 발로 간 일인데!”하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노예노동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을 모으고 데려간 과정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터에 도착한 다음 벌어진 일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노예노동은 겉으로는 합법인 절차로 모은 노동자들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따라서 노동자를 부리는 자나 기관의 절차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터에 온 뒤 겪은 일문제 삼아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부나 회사가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광고로 노동자들을 속인 뒤, 막상 일터에 도착하고 나면 월급을 안 주거나 가죽 채찍/쇠몽둥이로 때리면서 일을 시켰다면, 법원이나 국제사회는 고용주가 광고로 노동자들을 모았다고 변명해도, 일터에서의 인권 유린과 착취와 임금 체불을 문제삼아 고용주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를 처벌할 수 있다  

 

2차 대전 때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그리고 그들을 쥐어짜고 죽이고 부리고 짓밟은 근대 왜국에게도 이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데, 만약 노예노동이라는 이름을 쓰고 노동자들이 일터에 도착한 뒤 겪은 일에 초점을 맞추면,

 

이 기사에 나온 연구회가 제아무리 근대 왜국 정부의 모집과 한국인들의 응모를 강조해도,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도광산에 도착한 뒤 겪은 임금 체불과 고문과 학대와 인권 유린은 엄연히 남으므로, 당시 사도 광산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 3권과 인권을 짓밟은 근대 왜국은 [이론상/법률상]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노동 계약 과정에서 속이고 거짓말한 죄까지 더해지니, 더 큰 처벌을 받게 되고 - 옮긴이)

 

연구회는 <‘아이카와 마치(相川 町[상천 정. 이라는 한자로 쓰고 마치로 읽는 왜국의 행정구역은 한국으로 치면 읍이나 면이다 옮긴이])’ 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 등을 이런 의견 광고의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인용은 자의적(恣意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옮긴이)이었고, 연구회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소개한 것으로 파악됐다.

 

야노 히데키(矢野 秀喜[시야 수희 옮긴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사무국장은 15(서기 2022년 양력 215옮긴이) 일본 시민단체가 도쿄 소재 일본 중의원 제 1 의원 회관에서 개최한 집회에서 연구회의 의견 광고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야노 사무국장이 이날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따르면 옮긴이),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 20명 모집에 40명이 응한 사례를 소개하고서, 조선인들이 탄광 노동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설명을 덧붙였지만, 연구회는 이를 외면했다.

 

이 역사서는 40명이 응모한 것에 대해

 

이것은 광산 취업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종전(從前. 지금보다 이전, 그러니까 여기서는 2차 대전 이전 옮긴이)에 자유 도항한 선배나 지인(知人. 아는[] 사람[] - 옮긴이)에 의지해(기대어 옮긴이) 내지(內地. [식민지에서 본국을 일컫는 말 옮긴이], 식민지와 구분해서 일본 본토를 지칭한 용어 기자 주)에서 살고 싶다는 자가 많았고, 시모노세키(下關[하관 옮긴이])나 오사카(大阪[대판 옮긴이])에 도착한 후 (사도 광산으로 가지 않고 옮긴이) 도망한 사람이 많았다.

 

고 기술했다.

 

아울러 사도 광산이 조선인을 모집한 것은 갱내에서 일한 일본인 노동자 중 폐병의 일종인 규소폐증을 앓는 이들이 많았고, (왜인[倭人]옮긴이) 젊은이들이 차례로 징병 돼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사도 광산 관계자의 설명을 소개했다.

 

연구회는 가족 숙소나 독신자 기숙사가 무료로 제공됐고, 회사가 비용을 일부 부담해 저렴한 식사도 나왔다면서, “(조선인의) 대우는 모두 내지인(왜인 옮긴이)과 같았다.”고 의견 광고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도아이카와의 역사 는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이 착암(鑿巖. 바위에 구멍을 뚫음 기자 주), 운반 등 갱내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구회는 옮긴이) 조선인이 위험한 작업에 더 많이 종사하는 등, 차별을 받았다는 점을 소개하지 않고, ‘동일한 대우를 했다.’는 설명이 나오는 부분만 광고에 실은 셈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신문기사와 TV 뉴스에서 2차 대전 때 노예노동에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가 수박 껍질이나 콩깻묵을 먹으면서 버텨야 했다는 증언을 접했고, 한국인 노동자가 하루에 한 번 콩깻묵을 먹으면서 버틸 때, 왜국 감독이 기르는 쌀밥에 생선을 배불리 먹었다는 증언도 접했으며, 몇 해 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고된 일과 배고픔과 임금 체불과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일터에서 달아난 한국인 노동자가 왜국 군인과 감독에게 붙잡혀 끌려온 뒤,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꾸로 매달렸고”, 결국 그 자리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산 채로 불타 죽었다.”는 사실도 접했다.

 

사실이 이런데, 도대체 어떻게 사도 광산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인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2차 대전 때 근대 왜국한테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인들이 내지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는가? 근대 왜국이 왜인 노동자들에게 수박 껍질이랑 콩깻묵만 먹였단 말인가? 왜인 노동자가 일터에서 달아나다가 붙잡혀 꽁꽁 묶인 뒤 산 채로 불타 죽었단 말인가? 왜인 노동자가 임금 체불이나 구타를 겪었단 말인가? 이 기사에 나오는 연구회와 왜국 정부의 관리들과 나루히토 왜왕[倭王]은 당장 대답하라! - 옮긴이)

 

야노 사무국장은 “<임금에 관해서는 내선(일본과 조선 기자 주)의 구별이 없었다>고 보고돼 있다.”사도 아이카와의 역사 에 기재돼 있지만(그럼 내가 몇 해 전 언론에서 접한, “89이라는 임금도 일흔일곱 해 동안 받지 못하고 왜국 기업이랑 법정 투쟁을 하셔야 했던 한국인 피해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 거야? “임금에 관해서는” “구별이 없다면서, 왜 한국인 노동자만 임금을 받지 못했냐고? - 옮긴이), 국제 노동 기구(ILO)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임금 지급이나 숙소 제공 여부는 강제노동 판단과는 무관하다(“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그것을 어길 수도 있고, 노예에게도 둥지’/‘우리’/‘잠자리는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잘 곳을 주고 일을 시켰으니, 노예노동이 아니고 합법 노동이야!” 하고 우기는 건 안 통한다는 이야기다 옮긴이)고 지적했다.

 

―  <연합뉴스> 서기 2022년 양력 215일자 기사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이 기사에 나온 연구회를 비롯한) 왜국 우익 단체가 왜국 정부와 함께 노예노동을 부정하는 걸 보면, 한국인인 나는 나를 공격하는 자를 공격하라. 왜냐하면 그 자는 나한테 공격을 받고 싶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라는 원칙에 따라,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소련의 후신[後身]인 오늘날의 로[Ro]시야 연방 공화국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만주국에서 붙잡은 60만 명이 넘는 관동군 포로들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끌고 가, 수용소에 집어넣고 때리고 푸대접하며 강제로 일을 시킨 사실을 왜국에 사죄할 필요가 없다. 그때 관동군이 했던 게 강제노동이라니, 당치도 않다. 전쟁범죄자이자 전쟁에서 진 것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었지. 어쨌건 소련군이 관동군 출신 전쟁범죄자들이 수용소이자 일터인 곳에서 배를 채울 수 있게 먹이는 줬잖아? 지저분하고 춥긴 했지만 잘 곳도 내 줬잖아? 나치 출신인 전쟁범죄자/포로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잖아? 뭐가 문제야?”

 

하고 말하고 싶어진다. 난 농담하는 게 아니다.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다.

 

나아가 그자들에게 강철 족쇄를 채우고, “가죽 채찍과 굵은 몽둥이로 때리면서 휴전선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일을 시키고, 한국의 탄광에서 일을 시키며, 하루에 수박 껍질콩 찌꺼기를 딱 한 번만 주고, 만약 일터에서 달아나다가 걸리면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단 뒤 불태우는 일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급? 풀려난 뒤 한 일흔 뒤 해 뒤에 준다고 말하고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안 주면 된다.

 

그자들은 그런 일을 겪어야 노예노동이 결코 합법적인 노동 동원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이제 도덕비폭력으로 따질 때는 지났다.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는 종일(從日) 세력 말살과 총칼과 미사일과 군함과 잠수함과 경제보복과 진짜 보수파(민족주의자)가 강조하는 항일(抗日) 교육으로(그리고 국제사회와 국제기구에 올바른 갈마 자료를 내놓으면서 하는 설득으로) 왜국(倭國)과의 전쟁을 치르고, 무력과 행동으로 노예노동의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만약 싸움이 시작된다면, 절대 왜국에 부드럽게 굴지 말자!

 

이 기사에 나온, 야노 사무국장 같은 일본인을 뺀 나머지 왜구(倭寇)노예노동을 부정하는 왜국 정부의 관리들/이 기사에 나온 연구회/ 니가타 일보 처럼 왜국 우익의 편을 드는 왜국 언론사의 기자들/자위대 대원과 간부들/혐한에 앞장서는 넷우익/우익을 지지하는 왜국 왕족들/한국인을 마음 깊이 혐오하는 대다수[!] 왜인들 에게는 총알을 박아 넣어야 한다!

 

단기 4356년 음력 911일에, 왜국과 대다수 왜구(倭寇)들을 향한 분노와 울분으로총을 들고 싶은 마음을 (주위의 종일 정서 때문에) 숨기고 감추어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싫은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