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 지난 지금도 가족 학살한 이유 몰라.” 21 ~ 22일 한국 정부 고발하고 ‘시민평화법정’ 참여
“남동생이 울컥울컥 피를 토해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베트남(올바른 발음은 ‘비엣남[Vietnam]’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씨(여성/58세)[‘응우옌’은 한자로는 ‘완[阮]’이고, 비엣남에서는 흔한 성씨다 – 옮긴이]는 19일(서기 2018년 양력 4월 19일 – 옮긴이)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군이 쏜 총에 남동생을 잃은 사연을 털어놨다.
응우옌 티 탄 씨는 “왜 한국군은 여성과 어린아이뿐이었던 우리 가족(식구 – 옮긴이)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라며(하며 – 옮긴이), “어째서 한국군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나요?”라고 호소했다.
(탄 씨의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는 ‘순혈’ 한국인들에게 묻겠다. 이렇게 말이다 : < 이 문장에서 ‘응우옌 티 탄’이라는 이름 대신 ‘박○○’이라는 한국인의 이름, 그러니까 동학 교도인 근세조선 사람의 후손이나 정미[丁未]의병이 들고 일어난 해에 대한제국에서 살았던 대한제국 신민의 후손이 쓰는 이름을 넣어보라. 그리고 “한국군” 대신 제 2차 동학 혁명과 [서기 1907년에 시작되어 서기 1911년에 끝난] 의병전쟁을 탄압하고 동학 교도/대한제국 신민을 잔인하게 잡아 죽인 ‘근대 왜군[倭軍]’을 집어 넣어보라. 나아가 “50년”대신 “온 스물아홉 해[129년. 근대 왜군이 동학 교도를 죽인 해부터 올해까지 흐른 시간]”나 “온 열여섯 해[116년. 의병전쟁이 시작된 해부터 올해까지 흐른 시간]”를 넣어보라! 그 다음 글을 다시 읽어봐라. 그래도 당신은 탄 씨의 말이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텐가? 그래도 당신은 탄 씨가 분노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 - 옮긴이)
그는 “죽은 남동생은 한국군이 쏜 총에 입이 다 날아갔다.”고 말하면서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하미 마을 생존자이자, 동명이인인 ‘응우옌 티 탄’ 씨(여성/61세)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한국군에 의해 각각 5명의 가족을 잃었다는 두 증언자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잔인한 학살의 이유(까닭 – 옮긴이)를 알지 못한다.”며 “한국 참전군인들의 사과를 받고 싶다. 최소한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순혈’ 한국인인 나 또한 왜국[倭國] 정부와 근대 왜군[倭軍]의 후손인 왜인[倭人]들이 제 2차 동학혁명/의병전쟁/[서기 1920년에 일어난]간도 경신참변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피해자와 그 후손들에게 사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두 ‘탄’ 씨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두 분에게 천 번 만 번 공감할 수 있다 – 옮긴이).
이들은 21일(서기 2018년 양력 4월 21일 – 옮긴이)부터 양일(兩日. 두 날, 그러니까 이틀 – 옮긴이)간 서울에서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한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 학살 피해자가 원고가 되어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으로, 지난해(서기 2017년 – 옮긴이) (양력 – 옮긴이) 11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한베평화재단’등 24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준비해왔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베트남 중부 ‘꽝남성(省)’에 위치한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모두 (서기 – 옮긴이) 1968년에 일어나 올해 50주기를 맞은 사건”이라며 “50년이나 지연된 정의를 세우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퐁니/퐁넛 마을 출신 응우옌 티 탄은 “무섭고 떨리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 때문”이라며,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시민평화법정의 재판은 ‘김영란’ 전 대법관과,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로스쿨 교수가 재판부를 맡는다. ‘김복동’ 일본군(근대 왜군[倭軍] - 옮긴이) ‘위안부’(올바른 명칭은 ‘성[性]노예’ - 옮긴이) 피해 할머니의 연대사도 예정돼 있다.
(내가 퐁니/퐁넛 마을 사람들과 하미 마을 사람들에게, 아니, 당시 한국군의 총에 죽임을 당하고 한국 언론에게는 ‘붉은 테러범’/‘반란군’/‘살인마’로 매도당한 남베트남 사람들 – 그리고 그 후손들과 동족들 - 에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순혈’ 한국인 남성이기 때문에 이미 그 사람들 앞에서는 죄인이고, 그 일들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이며, 스물 네 해 전까지는 그 일들을 몰랐기 때문에 죄인이다. 나는 그 사람들과 창조주/구세주[메시아/그리스도] 앞에서는 “무릇 저는 죄를 아니, 죄가 제 안에 가득함을 아나이다[ 『 성경 』 ].”하고 말하며 순순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옮긴이)
- 류석우 기자
- <뉴스1(news 1)> 기사
- 날짜 : 서기 2018년 양력 4월 19일
- 단기 4356년 음력 9월 13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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