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4)

개마두리 2023. 11. 3. 18:58

이와쿠라 도모미, 고메이 왕에 이어 무쓰히토 왕자도 독살하다?

 

그럼 진짜 무쓰히토 왕자(그러니까, 고메이 왜왕의 친아들이자, 원래 다음 왜왕이 되었어야 했던 사람 옮긴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고용한 의사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와쿠라는 (왜국 옮긴이) 국내 행정 전반과 궁중(宮中. 대궐 안 옮긴이)의 서무(庶務. 특별한 명목[名目]이 없는 여러 가지 잡다한 사무 옮긴이)를 감독하는 직책인 보상(輔相)으로, 실질적인 수반이었으므로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런데 이와쿠라는 진짜 무쓰히토 왕자의 아버지인 고메이 왕도 독살했다는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는 작자다.

 

홋카이도 대학(흔히 북해도[北海道]’로 불리는, ‘아이누 모시리에 있는 왜국의 대학교. ‘홋카이도북해도를 왜국식으로 읽은 말이다 옮긴이)의 역사학자인 다나카 아키라(田中 彰[전중 창. 서기 1928~ 2011])’ 교수는

 

고메이 왕은 자신의 누이동생(그러니까, 왜국의 여성 왕족 옮긴이) 가즈노미야 지카코(和宮 親子[화궁 친자])’를 바쿠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5,000냥을 받고 시집보냈기(팔았기 지은이의 주석) 때문에(이건 매매혼이 아닌가? - 옮긴이) 바쿠후 타도 자체에는 반대했고, 평소 이를 주장한 이와쿠라를 내쫓자 이와쿠라가 고메이를 짐독(鴆毒. 짐새의 깃에 있는 강한 독 옮긴이)으로 독살했다.”

 

고 주장했다.

 

또한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의사학 학자였던 사에키 스지이치로(佐伯 理一郞[좌백 이일랑]. 서기 1862~ 1953)’19407월 일본의사학회 간사이 지부 학술대회에서 고메이 왕의 전의(典醫. ‘규정된[] 의원[]’ 임금을 치료했던 의원 : 옮긴이)였던 이라코 코존(伊良子 光尊[이량자 광존])’의 병증일기(病症日記. 병의 증상을 쓴 날적이[‘일기’] - 옮긴이)를 검토한 결과를 밝히면서 이와쿠라 도모미가 그의 조카딸을 시켜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며 다음처럼 말했다.

 

고메이 천황의 증세가 1222~ 23일께 순조로운 경과를 이루고 있다(그러니까, ‘고메이 왜왕의 병이 서서히 낫고 있다.’ 옮긴이)는 대목에서 일기 기록이 툭 끊어져 있다 ……. 천황이 두창(천연두 지은이의 주석)에 걸린 것을 기회로 삼아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궁에 궁녀로 있던 조카딸을 시켜 (고메이 왜왕을 간병하는 척 하면서 옮긴이) 천황에게 독약을 한 모금 먹인 것이다 . 일기는 이와쿠라의 (고메이 왜왕 옮긴이) 독살을 입증하는 하나의 귀중한 방증(傍證. 주변의 상황을 밝힘으로써, 범죄의 증명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증거 옮긴이)이라고 생각한다( 의담 , ‘사에키 선생의 중요한 일’, 나카노 조, 1953 ).”

 

이와쿠라 도모미는 고메이 왕에 이어 아들(진짜 무쓰히토 왕자 옮긴이)도 독살한 일본 역사 희대의 살인마로서, 살인으로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추정된다.

 

그가 메이지 왕의 에도(오늘날의 도쿄 옮긴이) 천도(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교토가 왜국의 수도였고, 에도는 중요한 행정도시일 뿐이었다 옮긴이)를 앞두고 갑자기 스스로 사임한 것도 무쓰히토 왕자의 독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쿠라의 이 지독한 역천(逆天. ‘역천명[逆天命]’을 줄인 말. ‘하늘의 뜻[天命]을 거스름[]’ 여기서는 반역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행각을 최초로 밝힌 사에키 박사의 발언은 당시(서기 1940옮긴이) 일반에 공표되거나 출판물 등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당시 군국주의 황국신도국가(皇國神道國家)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어느 누구도 메이지 정부의 최고의 치부이자 최대 아킬레스 건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는 냉전시대에 한국 안에서 친일파들의 죄/[반공주의를 내세운] 한국 독재자들의 죄를 폭로하는 일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던 사실과 비슷하다 옮긴이).

 

이 강연 내용이 활자화돼 알려진 것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나아가 중일전쟁을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옮긴이) 패전하고 8년이 지난 1953(이 해에 6.25 전쟁이 멈추고 휴전이 시작된다 옮긴이) 6월의 일이었다(친일파들의 악행/해방정국 시대의 국가 폭력/서기 1960년대 이후의 군사정권이 저지른 잘못들도 한국이 민주국가가 되고 냉전이 끝난 뒤부터야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갈마[‘역사’]의 참모습은 전쟁이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끝난 다음에야 드러날 때가 많다. 나는 그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전쟁사나 정치사를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나 투쟁에서 이겨야 또는 정권이 바뀌어야 - 진상이 드러나는 갈마가 많고,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오랫동안 묻혀 버리는 갈마도 많으니까 : 옮긴이).

 

역시 의사였던 나카노 조(中野 操[중야 조]. 서기 1897~ 1986)’가 설립한 행림온고회(杏林溫古會)의 의사학회 간사이 지부 기관지 의담(医譚) 사에키 선생의 중요한 일(佐伯先生ども) 이라는 글로 이를 처음 알렸다.

 

고메이 왕의 독살 사실은 영국 공사관의 어니스트 사토우의 회고록에도 등장한다.

 

그의 책 일본의 한 외교관(A Diplomat in Japan) (서기 1921런던 실리사가 처음 출판한 것을, 서기 2002터틀사가 다시 출판했다[first published by Seeley, Service & Co., London, 1921, reprinted in paperback by Tuttle, 2002]. - 지은이의 주석)에서, 사토우는 고메이 왕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672월 효고 항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썼다.

 

소문에 의하면 미카도(천황)는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다는데, 몇 년 뒤 소식에 정통한 한 일본인이 내게 확인시켜준 바에 의하면, 독살된 것이라고 한다.

 

미카도(고메이 왜왕 옮긴이)(왜국의 옮긴이) 개국에 단호하게 반대해왔다. 향후 바쿠후의 붕괴로 어쩔 도리 없이 조정이 서양 제국(諸國. 여러[] 나라[] - 옮긴이)과 교섭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고, 이를 예견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수적인 미카도를 모시고서는 (서양 여러나라와의 옮긴이) 전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인물의 사인(死因. 죽은[] 까닭[] - 옮긴이)을 독살로 짐작하는 것은 동양제국(아시아 여러 나라 옮긴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에도 막부 치하 왜국의 실권자이자, 막부의 우두머리인 옮긴이) 쇼군 이에모치[도쿠가와 이에모치 옮긴이]도 독살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미카도가 겨우 열대여섯 살 된 소년(메이지 왕)을 후계자로 남겨두고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점이 이런 소문이 나돌게 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토우가 지적했듯, 겨우 16살 된 소년(무쓰히토 왕자 옮긴이)이 왕이 되어야만 하기에, 그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더욱 수상쩍기만 한 것이다.

 

사토우의 이 책은 일본에서도 번역돼 출판됐는데, 독살설을 언급한 이 대목은 삭제된 채 출간되었다.

 

( 5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