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쿠라 도모미, 고메이 왕에 이어 무쓰히토 왕자도 독살하다?
그럼 진짜 무쓰히토 왕자(그러니까, 고메이 왜왕의 친아들이자, 원래 다음 왜왕이 되었어야 했던 사람 – 옮긴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고용한 의사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와쿠라는 (왜국 – 옮긴이) 국내 행정 전반과 궁중(宮中. 대궐 안 – 옮긴이)의 서무(庶務. 특별한 명목[名目]이 없는 여러 가지 잡다한 사무 – 옮긴이)를 감독하는 직책인 보상(輔相)으로, 실질적인 수반이었으므로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런데 이와쿠라는 진짜 무쓰히토 왕자의 아버지인 고메이 왕도 독살했다는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는 작자다.
홋카이도 대학(흔히 ‘북해도[北海道]’로 불리는, ‘아이누 모시리’에 있는 왜국의 대학교. ‘홋카이도’는 ‘북해도’를 왜국식으로 읽은 말이다 – 옮긴이)의 역사학자인 ‘다나카 아키라(田中 彰[전중 창. 서기 1928년 ~ 2011년])’ 교수는
“고메이 왕은 자신의 누이동생(그러니까, 왜국의 여성 왕족 – 옮긴이) ‘가즈노미야 지카코(和宮 親子[화궁 친자])’를 바쿠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5,000냥을 받고 시집보냈기(팔았기 – 지은이의 주석) 때문에(이건 매매혼이 아닌가? - 옮긴이) 바쿠후 타도 자체에는 반대했고, 평소 이를 주장한 이와쿠라를 내쫓자 이와쿠라가 고메이를 짐독(鴆毒. 짐새의 깃에 있는 강한 독 – 옮긴이)으로 독살했다.”
고 주장했다.
또한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의사학 학자였던 ‘사에키 스지이치로(佐伯 理一郞[좌백 이일랑]. 서기 1862년 ~ 1953년)’가 1940년 7월 일본의사학회 간사이 지부 학술대회에서 고메이 왕의 전의(典醫. ‘규정된[典] 의원[醫]’ → 임금을 치료했던 의원 : 옮긴이)였던 ‘이라코 코존(伊良子 光尊[이량자 광존])’의 병증일기(病症日記. 병의 증상을 쓴 날적이[‘일기’] - 옮긴이)를 검토한 결과를 밝히면서 “이와쿠라 도모미가 그의 조카딸을 시켜 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며 다음처럼 말했다.
“고메이 천황의 증세가 12월 22일 ~ 23일께 순조로운 경과를 이루고 있다(그러니까, ‘고메이 왜왕의 병이 서서히 낫고 있다.’ – 옮긴이)는 대목에서 일기 기록이 툭 끊어져 있다 ……. 천황이 두창(천연두 – 지은이의 주석)에 걸린 것을 기회로 삼아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궁에 궁녀로 있던 조카딸을 시켜 (고메이 왜왕을 간병하는 척 하면서 – 옮긴이) 천황에게 독약을 한 모금 먹인 것이다 …. 일기는 이와쿠라의 (고메이 왜왕 – 옮긴이) 독살을 입증하는 하나의 귀중한 방증(傍證. 주변의 상황을 밝힘으로써, 범죄의 증명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증거 – 옮긴이)이라고 생각한다( 『 의담 』, ‘사에키 선생의 중요한 일’, 나카노 조, 1953 ).”
이와쿠라 도모미는 고메이 왕에 이어 아들(진짜 무쓰히토 왕자 – 옮긴이)도 독살한 일본 역사 희대의 살인마로서, 살인으로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추정된다.
그가 메이지 왕의 에도(오늘날의 도쿄 – 옮긴이) 천도(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교토가 왜국의 수도였고, 에도는 ‘중요한 행정도시’일 뿐이었다 – 옮긴이)를 앞두고 갑자기 스스로 사임한 것도 무쓰히토 왕자의 독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쿠라의 이 지독한 역천(逆天. ‘역천명[逆天命]’을 줄인 말. ‘하늘의 뜻[天命]을 거스름[逆]’ → 여기서는 ‘반역’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행각을 최초로 밝힌 사에키 박사의 발언은 당시(서기 1940년 – 옮긴이) 일반에 공표되거나 출판물 등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당시 군국주의 황국신도국가(皇國神道國家)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어느 누구도 메이지 정부의 ‘최고의 치부이자 최대 아킬레스 건’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는 냉전시대에 한국 안에서 친일파들의 죄/[반공주의를 내세운] 한국 독재자들의 죄를 폭로하는 일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던 사실과 비슷하다 – 옮긴이).
이 강연 내용이 활자화돼 알려진 것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나아가 중일전쟁을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 옮긴이) 패전하고 8년이 지난 1953년(이 해에 6.25 전쟁이 멈추고 휴전이 시작된다 – 옮긴이) 6월의 일이었다(친일파들의 악행/해방정국 시대의 국가 폭력/서기 1960년대 이후의 군사정권이 저지른 잘못들도 한국이 민주국가가 되고 냉전이 끝난 뒤부터야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갈마[‘역사’]의 참모습은 전쟁이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끝난 다음에야 드러날 때가 많다. 나는 그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전쟁사나 정치사를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나 투쟁에서 이겨야 – 또는 정권이 바뀌어야 - 진상이 드러나는 갈마가 많고,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오랫동안 묻혀 버리는 갈마도 많으니까 : 옮긴이).
역시 의사였던 ‘나카노 조(中野 操[중야 조]. 서기 1897년 ~ 1986년)’가 설립한 행림온고회(杏林溫古會)의 의사학회 간사이 지부 기관지 『 의담(医譚) 』 이 「 사에키 선생의 중요한 일(佐伯先生の事ども) 」 이라는 글로 이를 처음 알렸다.
고메이 왕의 독살 사실은 영국 공사관의 ‘어니스트 사토우’의 회고록에도 등장한다.
그의 책 『 일본의 한 외교관(A Diplomat in Japan) 』(서기 1921년 ‘런던 실리’ 사가 처음 출판한 것을, 서기 2002년 ‘터틀’ 사가 다시 출판했다[first published by Seeley, Service & Co., London, 1921, reprinted in paperback by Tuttle, 2002]. - 지은이의 주석)에서, 사토우는 고메이 왕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67년 2월 효고 항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썼다.
‘소문에 의하면 미카도(천황)는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다는데, 몇 년 뒤 소식에 정통한 한 일본인이 내게 확인시켜준 바에 의하면, 독살된 것이라고 한다.
미카도(고메이 왜왕 – 옮긴이)는 (왜국의 – 옮긴이) 개국에 단호하게 반대해왔다. 향후 바쿠후의 붕괴로 어쩔 도리 없이 조정이 서양 제국(諸國. 여러[諸] 나라[國] - 옮긴이)과 교섭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고, 이를 예견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수적인 미카도를 모시고서는 (서양 여러나라와의 – 옮긴이) 전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인물의 사인(死因. 죽은[死] 까닭[因] - 옮긴이)을 독살로 짐작하는 것은 동양제국(아시아 여러 나라 – 옮긴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에도 막부 치하 왜국의 실권자이자, 막부의 우두머리인 – 옮긴이) 쇼군 “이에모치[도쿠가와 이에모치 – 옮긴이]”도 독살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미카도가 겨우 열대여섯 살 된 소년(메이지 왕)을 후계자로 남겨두고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점이 이런 소문이 나돌게 하는 데 한몫 거들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토우가 지적했듯, 겨우 16살 된 소년(무쓰히토 왕자 – 옮긴이)이 왕이 되어야만 하기에, 그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더욱 수상쩍기만 한 것이다.
사토우의 이 책은 일본에서도 번역돼 출판됐는데, 독살설을 언급한 이 대목은 삭제된 채 출간되었다.
( → 5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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