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3)

개마두리 2023. 11. 3. 21:04

메이지 왕은 조슈 번 조선인 부락 출신 기병대원을 바꿔치기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잘 읽으시도록! - 옮긴이)

 

그런데 경악할 만한 반전이 또 있다. 철저하게 일본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의 저자 미우라 요시마사는 다나카 백작이 말하는 이 이야기가 완전 엉터리라고 주장한다.

 

이 비사(祕史. 숨겨진[] 갈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 : 옮긴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생존해 있는 사람 가운데는 자신 말고 사이온지 긴모치밖에 없다는 다나카 미쓰아키의 말은 정확하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고메이 천황의 실제 아들인 무쓰히토 친왕(睦仁 親王[목인 친왕])의 유년기를 지켜보았다.

 

당연히 조슈(오늘날의 왜국 야마구치 현. 혼슈 섬 서쪽 끝에 있다 옮긴이) 기병대 출신의 大室寅之祐(<대실연지우[그러나 내가 직접 <네이버 한자사전><한글 2018>의 자전[字典]을 뒤져본 바에 따르면, ‘으로 읽지, ‘으로 읽지는 않는다 옮긴이]>라는 이름의 일본어 발음은 어느 문헌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아마 왜인들에게는 너무 민감하고 위험한사안이라, 일부러 기록을 삭제해 버렸으리라 옮긴이]. 보통이라면 <오무로 도라노스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왜국식 이름은, 같은 한자로 된 이름을 발음으로 읽을 수도 있고, 뜻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적힌 글자를 읽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 그래서 왜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명함을 주면, 그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 실례가 아니라고 한다 옮긴이]. 그래서 인용한 책에서도 모두 대실연지우라고 써놓았다. 다만 [그가 옮긴이] 오무로(大室[대실]) 성씨인 것만은 확실하므로, 이 책에서는 대실연지우오무로라고 통칭하겠다 지은이의 주석)가 실제 무쓰히토를 대신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온지 옮긴이)의 형인 도쿠다이지 사네쓰네(德大寺 實則[덕대사 실즉. 서기 1840~ 1919]’도 조슈군() 군문(軍門. 군대/병영 옮긴이)에서 그(오무로 옮긴이)와 함께 복무했다.

 

그런데 다나카 쓰아키가 말하는 大室寅之祐고다이고 천황(왜왕 옮긴이)의 제 11번째 황자(皇子. 황제[]의 아들[]. 여기서는 왜왕의 아들, 즉 왕자 옮긴이) 미쓰나가 친왕의 어자손(御子孫. 임금 집안의 자손/후손 옮긴이)이라는 것은 완전 엉터리다.

 

나는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大室寅之祐는 야마구치 현 구마게 군(熊毛郡[웅모군]) 다부세초(田布施町[전포시 정])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옮긴이) 조선계 부락민(部落民. 왜국에서는 천민을 부락민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살던 곳은 피차별 부락으로도 불렸고, 왜국 평민들의 부락민들에 대한 차별이나 반감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옮긴이)이다.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부락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옮긴이)가 쇼타이의 리키시타이(力士隊[역사대]. 씨름꾼들로 구성한 민병대)를 조직했을 때 참가한 병졸 중 한 명이었다.

 

이 기병대에는 도사 근왕당(勤王黨.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무리. 여기서는 왜왕을 위해 일하며 에도 막부에 반대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옮긴이) 출신으로 도사를 탈번(번에서 달아남 옮긴이)히지카다 히사모토(土方 久元[토방 구원])’다나카 미쓰아키(田中 光顯[전중 광현])’가 있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고, (그 시대에 즉위한, 새로운 옮긴이) 천황인 大室寅之祐의 자유를 빼앗고 인형처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엄청난 이야기다. 메이지 일왕이 사실은 다부세초라고 하는 조선인 부락 출신 대실연지우(대실인지우 옮긴이)라니! 게다가 왕실과는 한 줌의 피도 섞이지 않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직한 민병대에서 천민을 차출(差出. 사람을 골라서 뽑아냄 옮긴이)해 왕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앞에서 보았던 왕궁의 구스노키 동상과 그의 재평가는 어떻게 된 것일까? 실제로 메이지 일왕(그러니까, 세간에는 무쓰히토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오무로였던 사람 옮긴이)이 남조 후예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메이지 일왕이 남조 왕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치들을 만들었다면 어떨까? 바로 그래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고 이야기가 회자(膾炙. ‘잘게 저민 날고기[]와 구운 고기[]’ 널리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 : 옮긴이)되도록, 누가 봐도 남조 관련설을 떠올리도록 왕궁에다 구스노키의 동상을 일부러 만들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무쓰히토 왕자를 조슈 기병대(奇兵隊. '말 탄 병사들의 부대'를 뜻하는 '기병대[騎兵隊]' 와는 다른 말이다. 종래 중세 봉건 왜국의 귀족과 그 부하로 구성된 신분제 군대가 아닌, 조슈 번 특유의 사병 집단이었다. 에도 막부가 무너지기 다섯 해 전인 서기 1863년에 만들어졌으며, 하급 무사와 여름지기['농민']의 아들들을 망라해 신분을 초월한 부대였다. - 옮긴이) 출신의 천민(오무로 옮긴이)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이 이야기를 믿도록 만드는 정황들은 참으로 많다.

 

첫째, 앞에서 나온 것처럼 히로부미, 히사모토 그리고 미쓰아키 세 명이 잇따라 궁내대신을 맡은 것부터가 정말 수상쩍기 그지없다. 무엇인가 단단히 비밀을 지켜야 했기에 오무로(大室[대실])가 민병대에서 있던 시절 그의 직속상관이었을 인물들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란 해석(풀이 옮긴이)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

 

히사모토의 경우에는 1887년 히로부미로부터 궁내대신을 물려받아 1898년까지 무려 11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이를 미쓰아키에게 바톤 패스(배턴 패스[baton pass]. “바톤 넘겨주기라고도 한다. 릴레이 경주의 선수가 [짧은 막대기인] 배턴을 주고 받는 일이다. 배턴을 넘겨받은 선수는 배턴을 넘겨준 선수의 뒤를 이어 달린다 옮긴이)한다.

 

그런데 미쓰아키 역시 1898년부터 1909년까지 또 11년 동안 궁내대신 자리를 지킨다. 즉 두 사람만 무려 22년 동안 궁내대신을 지냈다. 이들만 유신(메이지 유신 옮긴이)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도저히 상식적인 인사가 아니다.

 

그러니 메이지 일왕(왜왕 옮긴이), 오무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그토록 오래 궁내대신에 있었다고밖에 해석이 안 된다.

 

둘째, 무쓰히토 왕자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본 사이온지 긴모치의 친형 도쿠다이지 사네쓰네가 메이지 왕이 죽을 때까지 시종장을 지냈다는 사실도 남다른 대목이다.

 

위에서 미우라 요시마사는 도쿠다이지가 오무로와 같은 조슈 부대에서 복무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니 도쿠다이지 또한 히로부미, 히사모토, 미쓰아키 세 명만큼이나 오무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왕실 업무를 전담하는 궁내성에 들어가 시종장과 궁내경을 겸임한 것이 1871년이다. 1891년에는 내대신 겸 시종장이 되어 1912년 메이지 왕의 사망 때까지 최측근에서 있었다. 무려 41년의 세월이다.

 

그러니 오무로는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평생 엄중한 감시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도쿠다이지 시종장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언론인 옮긴이)이자 평론가인 오야 소이치(大宅 壯一[대택 장일. 서기 1900~ 1970])’가 남긴 글을 모은 오야 소이치 선집(大宅 壯一 選集. 선집[選集]’가려 뽑아서[] 모았다[]’는 뜻이고,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글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 엮은 책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모두 12권으로, 카이죠사[改造社/개조사]1982년에 출간했다. 지은이의 주석]의 제 11권은 종교와 황실편인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메이지 정부가 생기고 얼마 후, 16세의 소년 천황이 제멋대로 해서 원훈(元勳. 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사랑하고 믿어 가까이 하는 노신[老臣] - 지은이의 주석)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렇게 하면은 다시 예전 신분으로 되돌릴 겁니다.”라고 말하며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천황은 금세 얌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도쿠다이지는 평소 메이지 왕의 정치 참여에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 11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하자, 이를 기회로 여긴 메이지 왕의 시보(侍補. 왕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신하 지은이의 주석) 모토다 나가자네(元田 永孚[원전 영부])’가 왕의 친정(親政. 임금이 몸소[] 나랏일을 돌봄[] - 옮긴이) 체제를 강화하는 운동을 벌이자, 도쿠다이지는 궁내에서 이를 강력히 저지했다.

 

또 하나, 진짜 무쓰히토 왕자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온지 긴모치는 왜 프랑스 유학 생활을 10년 동안이나 해야 했을까? 당시 상황에서 조정의 고관이 정부의 녹(‘녹봉[祿俸]’을 줄인 말. 나라가 벼슬아치에게 한 해 또는 철[계철]마다 나눠 주던 재물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월급이고 봉급이다 옮긴이)으로 10년이나 유학을 한다는 것은 이례적이어도 너무 이례적이다. 아니, 그런 경우가 없다.

 

사이온지는 당시 공비유학생(公費留學生. ‘공비[公費]’는 관청이나 공공단체의 비용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비유학생은 나라나 정부나 관청이 내는 돈으로 다른 나라에 유학한 학생을 일컫는 말이다 옮긴이)으로 일본 정부에서 연간 1,400달러를 지급받았다. 이는 일반 공비유학생보다 400달러가 더 많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옮긴이) 1878년부터 2년 동안은 메이지 왕이 자신의 용돈에서 매년(해마다 옮긴이) 300파운드를 (사이온지에게 옮긴이)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니 이 역시 사이온지가 (근대 왜국에 옮긴이) 안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못 들어온 것으로 봐야 한다.

 

메이지 정부 입장(처지 옮긴이)에서는 진짜 무쓰히토를 너무 잘 아는 사이온지가 국내에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까 봐 입을 막아놓을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오랜 시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으로 승승장구해서 결국 총리까지 올라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추론된다.

 

셋째, 메이지 왕가는 메이지 왕의 생모인 나카야마 요시코의 무덤에 참배를 간 적이 없다.

 

메이지 왕은 후궁 요시코에게서 태어났지만, 고메이 왕의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메이지 유신 전인 1860826일 칙령에 의해 에이조(英照[영조])’ 왕비, ‘구조 아사코(九條 夙子[구조 숙자])’의 친자식이 되어 그해 928일 왕세자 칭호를 받은 이름으로 무쓰히토라고 붙여졌다.

 

논픽션 작가 오니즈카 히데아키(鬼塚 英昭[귀총 영소. 서기 1938~ 2016])’의 책 일본의 가장 추악한 날(日本のいちばん) 에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메이지 왕 생모인 나카야마 요시코의 무덤이 도쿄 분쿄(文京區[문경 구])토요시마게오카(豊島[풍도게강])’ 묘소에 있는데, 메이지 왕 때부터 그 이후까지 어느 왕족도 이 무덤을 찾아 참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나카야마 가문의 당주는 오니즈카 씨의 문의에 대해 생모에 관해서는 함구령(緘口令. ‘[]을 봉하라[]는 명령[]’ 어떤 일의 내용을 말하지 말라는 명령 : 옮긴이)이 되어 있어 일절 답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만약 메이지 왜왕이 정말로 나카야마 요시코의 아들이라면, 왜국 정부가 굳이 이런 식으로 “<천황>의 생모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겠는가? - 옮긴이).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는 곧 메이지 왕이 고메이 왕과 나카야마 요시코 사이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메이지 왕은 생전에 자신의 생모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 것이다.

 

비록 생모가 아니더라도, 명목상으로는 자신이 그녀의 자식으로 돼 있는 만큼 한 번쯤은 요시코의 무덤을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메이지 왜왕은 옮긴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덤을 찾는 일이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도 (“ <천황폐하>께서 이렇게 효성스러우시다! 그러니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게 아니면 무엇이냐? ” 하고 선전할 수 있으므로 옮긴이) 훨씬 유리했을 텐데 말이다(서기 19세기 중/후반의 왜국은 오늘날, 그러니까 서기 21세기 전반보다 가족주의와 효도/우애를 강조하는 정서가 더 강했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를 평가할 때, 그가 효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식구들을 챙기느냐, 안 챙기느냐?’가 중요한 기준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근세조선과 대한제국과 유구[琉球(루추)]다이남[大南(대남)]과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옮긴이).

 

사실이 그렇다. 쇼와 왕(히로히토 왜왕 옮긴이)은 물론 현재(이 책이 나온 해인 서기 2018옮긴이)의 왕(아키히토 왜왕 옮긴이), 그밖에 어느 왕족도 자신들을 고메이 왕의 자손으로 생각한다면, 나카야마 요시코의 무덤을 결코 소홀히 할 리가 없다. ‘ 이러한 인간관계의 차가운 성품이 일본의 어두움을 더 심화시켜,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돌진하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 라고 오니즈카는 쓰고 있다.

 

넷째, 얼굴과 체격, 분위기 등에서 왕으로 즉위하기 전과 즉위한 다음의 무쓰히토가 너무 다르다.

 

즉위 전의 무쓰히토는 체격도 왜소했고, 내성적으로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았고, 궁녀들에 둘러싸여 유희에 열중했다. 이런 성격 탓인지 (그는 옮긴이) 승마(乘馬. [] 타기[] - 옮긴이)저속하다.’고 생각해 말을 타지 못했다. 1864(당시 13지은이의 주석) 금문의 변당시 포성(砲聲. 대포[]를 쏠 때 나는 소리[] - 옮긴이)과 궁녀들의 비명에 놀라 실신했다고 한다.

 

또한 엄격한 교육을 받은 탓에, 오른손잡이였지만(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 아이들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오른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 왼손은 [변소에서 볼일을 본 뒤 하는 일인 뒤 닦기 같은] ‘더러운 일을 할 때나 쓰는 거야!” 하는 교육을 받았다.

 

서기 1979년에 태어난 나도 소년 시절에 그런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원래는 왼손잡이였지만 지금은 양손잡이로 바뀌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나 북동 아프리카의 이슬람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념, 그러니까 오른손은 좋은 손이고, 왼손은 더럽고 나쁜 손이다.’라는 관념이 있다 옮긴이) 정무(政務. 행정 사무/나랏일 – 옮긴이)에 무관심했고, 글자를 쓰는 것도 매우 서툴렀다.

 

(그리고 그는 옮긴이) 어렸을 때 (천연두 예방접종의 일종인 옮긴이) 종두 주사를 맞았으므로, 얼굴이 매끈하고 곰보 자국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16살 때 왕에 즉위한 다음의 무쓰히토(그러니까, 오무로 옮긴이)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체격이 매우 건장한 편이었고, 야외 활동을 즐겨서 승마와 씨름을 아주 좋아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스모 선수들로 민병대를 조직했던 것을 감안하면, (세간에는 무쓰히토로 알려진 16세 소년 왕이 옮긴이) 씨름을 좋아했다는 점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또한 왼손잡이였고, 집이 가난해서 2살 때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입 주변에 곰보 자국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메이지 왕은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부러 키요소네(본명 에두아르도 키요소네[Edoardo Chiossone, 서기 1833~ 1898]”.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초청한 이탈리아의 판화가이자 화가. 지폐국을 지도해 일본 인지 및 정부 증권, 지폐와 우표 인쇄의 기초를 마련했다 지은이의 주석)에게 그리게 했고, (메이지 왜왕 옮긴이)는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어 어진영(御眞影. 폐하의 초상화나 사진 – 지은이의 주석)으로 올렸다.

 

메이지 왕은 또 곰보 자국을 숨기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오무로는 옮긴이) 네 살 때 어머니(고메이 왜왕의 왕비 말고, 오무로의 친어머니 옮긴이)가 이혼해 집에서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아 왼손잡이가 되었고, 체중(몸무게 옮긴이)90이 넘어 측근과 씨름을 하면 상대방을 휙 집어던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옮긴이) 왕이 된 다음부터는 학문에도 열심이었고, 교양도 풍부해서 글씨 또한 달필이었다고 하니, 많이 바뀌긴 바뀌었다(나는 오무로가 궁전 안에 들어간 뒤 이렇게 바뀐 게 이상하진 않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갈마[‘역사’]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에 제하[諸夏]에서 서한[전한] 왕조를 세운 황제인 유계[劉季]는 즉위한 뒤 이름을 유방[劉邦]’으로 바꾸었고, 원래는 건달에 깡패에 산적 두목이었고, 입에 욕을 달고 살았으며, 예의범절이나 인의예지나 교양이나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황제가 되고 난 다음에는 신하인 육가[陸賈]의 충고 - “사람이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배우셔야 합니다.” 하는 간언 를 들은 뒤 태도를 바꾸어 동아시아 고전[古典]들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어느 정도 능력 있는 임금이 되어 4세기 동안 유지된 한[]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선례가 있으니, 오무로가 임금이 된 뒤 뒤늦게나마 공부를 하고 교양도 익혀 자신을 어느 정도는 군주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바꾼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옮긴이).

 

그러므로 왕에 즉위할 당시 내성적이고 왜소하며 나약하기만 했던 진짜 친왕은 온데간데없고, 키가 170가 넘는 우람한 젊은 왕이 도쿄 지요다(千代田[천대전]) ()에 나타난 것이니, 진짜 왕자를 아는 고관들이 보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래서 오무로를 무쓰히토로 바꿔치기 한 조슈 번사들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조정을 교토에서 도쿄로 서둘러 옮기고, (자신들이 몸소 모시고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진짜 무쓰히토 왕자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옮긴이) 교토의 궁녀를 거의 데려가지 않고 현지(도쿄)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철저하게 일본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에 따르면, 삿초연합에 대해서도 다나카 미쓰아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삿초연합으로 이끈 주역인 기도 다카요시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우리는 남조의 정통을 확립하고 왕정을 복구하는 것이다.”라고 털어놓았을 때, 사이고는 충심(衷心.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마음 옮긴이)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이고는 남조의 대충신인 기쿠치[菊池(국지. 규슈의 <히고>국 기쿠치 군 중심의 일족.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호인 <난쥬[南州/남주]>는 남조[南朝]에서 온 것이라 한다 지은이의 주석)]”씨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에 찬동하고 마침내 사쓰마 번도 왕을 받들고 바쿠후를 토벌하는 일에 동의함으로써 삿초연합이 성공했다.

 

존왕양이파의 산조 사네토미”, “히지카다 히사모토가 계획하고, “나카오카 신타로사카모토 료마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중간에서 움직인 삿초연합은, <오무라>라는 자를 (새로운 옮긴이) 천황으로 해서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밀약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위 계급의 무사인 향사(鄕士)라서, 무가 사회에서 활개를 치면서 살아가는 신분은 아니었다.

 

사이고 난쥬(西鄕 南州[서향 남주]. 그러니까 사이고 다카모리의 다른 이름.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이고 난쥬로도 불린 사실은 정약용이 <정다산>으로도 불린 사실이나, 유비가 <유현덕>으로도 불린 사실과 같다 옮긴이), 오쿠보 도시미치,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 資紀[화산 자기. 서기 1837~ 1922. 사쓰에이 전쟁과 보신전쟁 등에 참여했고, 육군 소좌 계급으로 세이난 전쟁에 참여해 사이고 군대로부터 구마모토 성을 지켜냈다. 이후 소장까지 승진하고 도쿄 경시총감도 지냈다. 이후 해군으로 전속(轉屬. ‘소속[]을 바꿈[]’ : 옮긴이)해 청일전쟁 때는 해군대장으로 참여했다. 초대 타이완(대만 옮긴이) 총독을 지냈다 : 지은이의 주석]), “오야마 이와오등은 가고시마 가지야초[鍛治屋町(단치옥정)]라는 부락 출신인데,

 

이 부락은 오물 처리라든가 청소, 화장장을 생업으로 했다. 무사라는 이름만의 최하층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중기 ~ 후기신라의 사두품[四頭品]/오두품[五頭品]이나, 근세조선의 잔반[殘班. ‘무너진/허물어진() 양반()’ 집안 살림이나 세력이 보잘것없어진 변변치 않은 양반]이 이름만 지배층이지, 사실은 평범한 백성과 다를 게 없는 처지였던 것처럼, 이들도 이름만 [왜국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무사지, 사실은 천민과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 옮긴이).

 

삿초연합은 그런 그들이 조슈, 사쓰마, 도사의 영주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한 쿠데타 계획이었다. 사쓰마 영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사이고와 오쿠보가 오무라[문맥상 지은이가 소개하는 <오무로>와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옮긴이]를 데리고 와서, “(오늘부터 옮긴이) 이 남자가 (왜국의 새로운 옮긴이) 천황이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오무로? - 옮긴이)를 칼로 베려고 했다. 그러나 (시마즈는 옮긴이) 사이고가 (진짜 옮긴이) 무쓰히토는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하자, 칼을 내려놓았다.

 

(내 생각이지만, 시마즈는 진[] 제국의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이고와 오쿠보는 진 제국의 환관이었던 조고[趙高]와 같은 짓을 했다.

 

나아가 오무로는 진 제국의 2세 황제였던 영호해와 마찬가지로 정통성이 없는 새 임금이었고, 진짜 무쓰히토는 영정의 맏아들이자 태자였던 영부소와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왕족이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위해, 보충설명을 하자면 이렇다.사기[史記] 를 비롯한 제하[諸夏]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영정[시호 진시황제’]이 순행하던 도중에 짐의 제위는 맏이인 영부소에게 넘기겠다. 영부소는 함양으로 와서 짐의 장례를 치르고 황위를 이어 받아라.”는 유서를 남긴 뒤, 그것을 영부소에게 전하라고 말한 다음 죽었는데,

 

이때 영정을 모시고 다니던 조고는 영정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이사에게 만약 영부소 태자가 제위를 물려받으면, 승상에게는 좋을 게 없다. 그러니 그 대신 지금 이 순행에 함께 참가한 황자[皇子]인 영호해[시호 2세 황제]를 새 황제로 모시자. 그리고 다른 서신을 보내 영부소에게는 자결을 명령하자.”고 제안했다.

 

이사는 처음에는 화를 내며 반발하고 반대했지만, 결국 조고의 설득 겸 협박에 넘어갔고, “난세에 태어나 죽을 수도 없고, 어찌한단 말이냐?”고 한탄하며 조고의 계획에 동참했다.

 

그래서 영정의 진짜 유서는 불에 타서 사라졌고, 영부소 태자에게는 자결을 명령하는 가짜 유서가 보내졌으며, 조고와 이사와 영호해 일행은 진 제국의 도읍인 함양으로 돌아와 그제야 영정의 죽음을 알렸고, 영호해는 영부소를 비롯한 영정의 다른 황자들을 사형에 처한 뒤 진 제국의 새 황제가 되었다.

 

그러니까 조고가 옛 임금이 점찍은 올바른 후계자 대신, 다른 후계자를 새 임금으로 내세우고 진짜 후계자는 죽이려고 한 것처럼, 사이고와 오쿠보는 고메이 왜왕이 후계자로 여긴 진짜 무쓰히토 왕자 대신, 왕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오무로 소년을 새 왜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가 처음에는 반발/분노하다가 나중에는 조고의 설득에 넘어가 한탄하면서도 억지로 조고의 계획에 동참한 것처럼, 시마즈는 처음에는 오무로를 새 왜왕으로 삼겠다는 사이고와 오쿠보의 계획에 분노해 오무로를 죽이려고 했지만, 진짜 무쓰히토 왕자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진짜가 죽었으니 가짜라도 새 임금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절망하면서도 계획을 막는 것을 포기한 건 아닌가 한다.

 

오무로 소년이 위조된 계보와 위조된 명령을 바탕으로 무쓰히토 행세를 하며 새 왜왕, 그러니까 메이지 왜왕이 된 건 영호해 황자가 정통성이나 정당성이 없고, 옛 황제인 영정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새 황제로 즉위하는 데 성공한 사실과 비슷함을 덧붙인다.

 

이렇게 무대[나라]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비슷한 점이 많은 일이 여러 번 일어나는 걸 보면, 역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옮긴이)

 

이 일화는 가고시마의 향토사가로부터 내가 직접 가서 들은 이야기이다.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삿초연합 그리고 사쓰마와 도사의 비밀연합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메이지 정부가 완성됐다. ‘오무라는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도 모르는 새 천황이 되었다. 이른바 사후승낙(事後承諾. ‘[]을 끝낸 뒤[] 승낙[承諾. 상대가 바라는 바를 들어줌]을 받음승낙을 요하는 사안을 승낙받지 않고 한 뒤, 그 일에 대한 승낙을 나중에 받는 일 : 옮긴이)이란 것이다. 삿초 연합을 결정한 기도 다카요시(메이지라는 새로운 옮긴이) 천황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구슬놀이를 했다.”고 말했다. ‘구슬([]. - 지은이의 주석)은 천황을 말하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이렇게 두 주춧돌인 사쓰마(오늘날의 왜국 가고시마 현 옮긴이)와 조슈의 다이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나중에 폐번치현(번을 없애고, 대신 그 빈 자리에 현을 만드는 일. 메이지 유신 초기에 진행되었다 옮긴이)이 되었을 때 사쓰마 영주 히사미쓰가 사이고와 오쿠보에게 내가 네놈들에게 놀아났다.”고 펄펄 뛰었다는 일화는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 있다.

 

하긴 천민에 가까운 조선계 부락 출신의 일개 병졸을 (왜국의 새로운 옮긴이) 천황(왜왕 옮긴이)으로 내세운다는데, 이에 찬성할 영주는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상급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들(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람들 옮긴이)은 더욱더 철저히 하위계급의 무사들로 똘똘 뭉쳤다.

 

그러면 바꿔치기 한 오무로는 진짜 누구인가.

 

위에서 인용한 책인 일본의 가장 추악한 날 가지마 노보루(鹿島 昇[녹도 승. 서기 1926~ 2001]) ’의 책 배신당한 세 명의 천황 메이지 유신의 수수께끼(裏切られた三人天皇 - 明治維新) 에 따르면, 오무로 가문(집안 옮긴이)은 오무로의 증조부 때부터(그러니까, 에도시대 중기인 서기 18세기부터 옮긴이) 시작된다(그 이전에도 오무로 집안은 존재했겠지만, ‘오무로라는 성씨를 쓰며 족보를 남기기 시작한 게 에도시대 중기라는 뜻이리라 옮긴이).

 

그런데 할아버지 오무로 분우에몬(大室 文右衛門[대실 문우위문])’때 오무로 집안이 촌장집(大庄屋[대장옥])이 된 분세(文政[문정. 서기 1818년부터 서기 1831년까지 왜국에서 쓰였던 연호 옮긴이]) 시절부터 남조의 후예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2대 오무로 분우에몬은 아들이 일찍 사망해서 어쩔 수 없이 딸 하나(ハナ)’오무로 마타베(大室 又兵衛[대실 우병위])’의 아들인 24오무로 야헤(大室 弥兵衛[대실 미병위])’와 결혼시키고, (원래는 사위인 오무로 야헤를 옮긴이) 양자로 들였다.

 

이들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모두 요절함으로써 바쿠후(‘에도 바쿠후’, 그러니까 에도 막부를 줄인 말 옮긴이) 말기 오무로 집안은 오무로 야헤 대에서 단절되고 만다.

 

한편 치카(地家[지가])’ 가문의 (아들인 옮긴이) 치카 사쿠조(地家 作藏[지가 작장])’21세에 사이엔지(西円寺[서원사]. 전국적으로 매우 많은 사이엔지이름의 절이 있지만, 여기서는 야마구치 현 구마게 군 다부세초에 있는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本願寺(본원사)] 파의 절을 말한다 지은이의 주석)’15세 딸 스헤(スへ)’와 결혼을 해서 31녀를 낳았다.

 

이들은 사이가 매우 안 좋아 1854년에 이혼을 하는데, 사쿠조가 셋째 도모히라(朝平[조평])’와 장녀 타케(タケ)’를 맡고, 스헤가 장남 도라키치(寅吉[인길])’와 차남 쇼치(庄吉[장길])’를 맡았다.

 

도라키치는 스헤가 18세에 낳은 아들이다. 스헤는 이혼한 다음 해인 18551월 당시 31세인 오무로 야헤와 바로 재혼한다. 그래서 장남 도라키치(그러니까, 치카 도라키치 옮긴이)(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성을 바꾸었기 때문에 옮긴이) 오무라 도라키치가 되고, 차남 쇼치는 오무라 쇼치가 된다.

 

스헤는 야헤와 재혼하고 일 년 후에 오무라 도라스케(大室 寅助[대실 인조])’를 낳지만, (도라스케는 옮긴이) 폐결핵으로 바로 사망한다. 그러자 스헤도 사이엔지 연못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태어나고 자라난 옮긴이) 사쿠조의 장남 도라키치가 메이지 (원년인 옮긴이) 1868115일에 진짜 메이지 왕(진짜 무쓰히토 왕자 옮긴이)과 바꿔치기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설명대로라면, 에도시대 말기에 치카 사쿠조와 스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왜국 왕족이 아니라 평민인 치카 도라키치라는 소년이,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오무로집안으로 가서 새아버지인 오무로 야헤의 성을 따라 자신의 성씨를 오무라로 바꾸고 오무라 도라키치가 되었고, 이후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왕궁 밖에서 살다가, 열여섯 살 때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궁 안으로 들어가 이미 죽은 진짜 왕자 무쓰히토대신 새 왜왕으로 즉위하고 이름도 무쓰히토로 바꿔 버렸다는 이야기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만세일계라는 왜국 왕실과 왜국 정부와 왜국 우익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일 아닌가? - 옮긴이)

 

치카 사쿠조가 1887년 사망했을 때(이 때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지 열아홉 해가 흐른 뒤이기도 하다 옮긴이), 메이지 왕의 후궁(後宮. 제왕의 첩 옮긴이)이자 다이쇼(大正[대정]. 메이지 왜왕의 아들이자, 근대 왜국의 두 번째 왜왕이었던 요시히토가 쓰던 연호 옮긴이) 왕의 생모인 야나기하라 아이코(柳原 愛子[유원 애자. 서기 1859~ 1943])’는 도쿄에서 직접 다부세초 오코존(麻鄕村[마향촌])까지 와서 사이엔지에서 그(치카 사쿠조 옮긴이)의 위패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사쿠조가 메이지 왕의 친아버지이기 때문에,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사이엔지에는 사쿠조의 위패도 없다. 물론 사찰 과거 장부에 사쿠조라는 이름 자체가 없다. (원래는 메이지 왜왕의 친어머니인 옮긴이) 스헤의 위패도 아이코가 가져가려고 했지만, 그녀의 위패는 (이미 옮긴이) 화재로 소실되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장부에 기록돼 있다. 고쇼지(興正寺[흥정사]) 장부에 따르면 스헤의 법호(法諡[법시]. 불교 승려가 본명 말고 따로 가진 호. 불교도들은 죽은 사람에게 붙여주는 이름도 이렇게 부른다 : 옮긴이)겸덕원전예인기대자거사(謙德院殿叡仁基大姉居士)’,(‘겸손한 덕성이나 밝고 어진[예인/叡仁]’이라는 말이 들어간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옮긴이) 최고의 법호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분명히 평민 여성으로 살다가 죽은 스헤 부인의 법호에 임금이나 천자[天子]의 말과 행동에 대해 붙이는 말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인 자와, 무쓰히토의 이름 안에 들어간 한자인 자가 들어가 있다.

 

이는 예인[叡仁]’무쓰히토 님이라는 천자의라는 또다른 뜻을 담은 말이 아니냐는 의문 겸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스헤 부인이 메이지 왜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죽은 뒤에 천자의 말과 행동에 붙이는 말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가 들어간 법호를 얻을 수 있는가? 못해도 왜왕의 친어머니 정도는 되어야 이런 법호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혹시 서기 1856, 그러니까 에도 막부 말기에 살았던 고쇼지의 주지는 치카 도라키치/오무라 도라키치 집안의 사연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친어머니인 스헤 부인이 죽었을 때, ‘<천황>의 친어머니이신 분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담아 그리고 위로 차원에서 - ‘자가 들어간 법호를 지어서 붙여준 건 아닐까?

 

그리고 무쓰히토를 줄인 말인 히토를 뜻하는 []’자도 함께 집어넣어서, 겉으로는 밝고 어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무쓰히토라는 천자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암호를 담은 법호를 만들었던 건 아닌지.

 

예인바로 뒤에 붙은 글자인 기대자[基大姉]’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 []이신 어머니[]’라는 뜻이기 때문에, ‘[나라나 집안의] 큰 터/기초가 되신 어머니라는 뜻으로 의역할 수 있어, 이것을 예인[叡仁]’과 함께 읽어보면, ‘무쓰히토로 알려진 천자를 낳고 키우심으로써 [새로운 천황집안의] 큰 기초가 되신 어머니라는 뜻이 되어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다 - 옮긴이)

 

그러므로 오무로는 고다이고 왕의 11번째 왕자 미쓰나가 친왕의 후예가 아니라, 평민 치카 사쿠조의 아들이다.

 

게다가 치카 집안의 후손인(아마 치카 도모히라나 치카 타케 가운데 한 사람의 후손이리라 옮긴이) 치카 야스오(地家 康雄[지가 강웅])’도 증언을 통해

 

오무로 집안이 미쓰나가 친왕의 후예로 500년 이상 계속되었고, 오무라 집안의 24대손이라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더구나 오무로 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주 놀러왔는데, 난데없이 도라키치(오무로 도라키치 옮긴이)가 사라져서 온 마을이 난리가 나서 그를 찾고자 했고, 나중에서야 도라키치는 필시 옥(. 메이지 초기에는 왜왕을 일컫는 은어로도 쓰였다 옮긴이)이 된 거야.”라고 서로 은밀하게 말했다고 한다. 다부세초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