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2)

개마두리 2023. 11. 3. 21:26

메이지 유신은 남북조시대에서 멸망한 남조(南朝)476년 후에 성공한 쿠데타였다?

 

야마구치는 이 건을 즉시 전()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 光顯[전중 광현]. 1843~1939)’ 백작에게 상담했다. 다나카 백작(다나카 미쓰아키 옮긴이)(왜국 에도 막부의 옮긴이) 도사( : 영지)의 번사(藩士. 제후인 번주[藩主 : 영주]를 모시는 무사[武士. 줄여서 ] - 옮긴이) 출신으로, 도사 번의 근왕당(왜왕을 모시는 무리 옮긴이)에도 참여했다가, ‘다카스키 신사쿠의 제자가 되어 조슈 번을 위해 일했고, ‘나카오카 신타로의 육원대에도 가담했다.

 

나카오카 피살 이후, 부대장이 되어 보신전쟁(메이지 시대 초기에 왜국에서 일어난 내전 옮긴이)과 세이난 전쟁(역시 메이지 시대 초기에 왜국에서 일어난 내전 옮긴이)에서 활약한 공적을 인정받아 육군 소장, 내각 서기장관, 경시총감, 학습원 원장 등의 요직을 거쳐 궁내대신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사 번 출신으로 궁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핵심인물이다.

 

야마구치의 질의(質疑. 의심나거나 모르는 점을 물어 밝힘 옮긴이)를 받은 다나카 백작은 오랜 침묵 끝에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는 지난 60년간 어떤 사람에게도 단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일을, 당신에게 말씀드리지요. 현재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는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 公望. 서원사 공망. 1849 ~ 1940]’ 한 명이 생존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고인[故人. 죽은 사람 옮긴이]이 되었습니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교토 도쿠다이지(德大寺. 덕대사)’ 가문 당주(當主. 당대[현재]의 집 주인/집안의 지도자 옮긴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사이온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가독(家督. 집안[]을 감독하는[] 사람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맏아들 신분/옛 민법에서, 집주인에게 딸린 모든 권리와 의무 : 옮긴이)을 상속했다. 일찍부터 고메이 일왕(메이지 왜왕 바로 전에 왜국을 다스린 임금 옮긴이)이 설립한 학습원에 들어가 공부했고, 11세 때부터 궁궐에 출사해 나중에 메이지 일왕(이른바 "明治天皇[‘명치천황’]". - 옮긴이)의 어릴 적 통칭인 사치노미야(祐宮[우궁])’의 긴주(近習[근습]. 군주나 영주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신하로, 여기서는 말동무처럼 같이 놀아주는 역할을 말한다 지은이의 주석)가 되었다.

 

메이지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고관으로 오무라 마스지로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인 최초로 소르본느 대학교에 다녔고, 10여 년간 파리에서 수학(受學. 학문을 배우거나 수업을 받음 옮긴이)했다.

 

유학에서 돌아와 신문사 사장을 지내다 참사원(參事院) 의관보(議官補)가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 되었다. 이후 주 베를린 공사, 상훈국(賞勳局) 총재를 거쳐 교육부와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이토가 병에 걸렸을 때 총리 임시대리를 맡았고, 결국 이토의 지원으로 자신의 내각까지 꾸리는 총리가 되었다.

 

다음은 미우라 요시마사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조금 길지만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인용 대목에서는 일왕(왜왕[倭王] - 옮긴이)(원문 그대로 옮긴이) 천황으로 표기하겠다.

 

사실 메이지 천황은 (그 바로 전에 왜국을 다스린 왜왕인 옮긴이) 고메이 천황의 아들이 아니다. 고메이 천황은 드디어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을 말할 때, 갑자기 승하했다. 메이지 천황을 고메이 천황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 그 어머니를 < 다이나곤(大納言[대납언]. 왜국의 벼슬 이름. 정부 고관[高官. 직위가 높은 관리나 벼슬]에 속하며, 이 벼슬을 받은 사람은 국정 최고 기관에서 일했다 : 옮긴이) >을 지낸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중산 충능])”의 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 慶子[중산 경자]. 서기 1836~ 1907)”로 하여, 태어난 다음에는 나카야마 타다야스의 집에서 잘 자라고 있던 것으로 말하게 하고, 이를 천하에 공표하여 어명(御名. 임금[]의 이름[] - 옮긴이)무쓰히토(睦仁[목인])”라고 알렸다.

 

(그리고 그가 옮긴이) 고메이 천황의 붕어와 동시에 바로 대통(大統. 임금 자리를 이어받는 계통 옮긴이)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메이지 천황(세간에 알려진 본명은 무쓰히토. “메이지는 이 왜왕의 연호다 옮긴이)은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후제호 천황]. 서기 1318~ 1339년 재위)11번째 아들 미쓰나가 친왕(滿良親王[만량친왕. <친왕親王>은 황제/천자의 아들이나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옮긴이])”의 자손이다.

 

모리(毛利[모리]) 가문의 조상인 오에(大江[대강])씨가 이 사실을 감추고, 오우치(大內[대내]) 씨에게 부탁한 다음 조슈로 피했다. 이윽고 오우치 씨가 망한 다음에는 오에 씨의 자손 모리 가문이 조슈를 차지하고, 조슈의 하기에서 대대로 이 왕손을 잘 보호해왔다. 이것이 요시다 쇼인 이하, 조슈의 왕정복고 유신을 떠받친 근왕(勤王.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함 지은이의 주석) 운동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고다이고 왕 당시의 자세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가마쿠라 바쿠후(막부[幕府] - 옮긴이) 시절이던 (서기 옮긴이) 1318, 고다이고 왕이 즉위했지만, 그는 사실 중간 계투(繼投. 이어서[] 던짐[] 야구 경기에서, 막 바뀐 투수가 앞 투수(投手)의 뒤를 이어 공을 던지는 일 : 옮긴이) 용도의 왕이었다.

 

그는 형 고니조(後二條[후이조])’ 왕의 어린 아들인(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조카인 옮긴이) 쿠니요시왕자(邦良親王[방량친왕])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자리를 유지하는 조건부 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조건을 지지하는 바쿠후(가마쿠라 막부 옮긴이)를 타도하기 위해 1324년과 1331년의 두 차례 바쿠후 타도 계획을 세웠는데,

 

(당시 왜국의 실권자가 가마쿠라 막부의 장군[‘쇼군’]이었고, 왜왕은 명목상의 임금이었을 뿐이었던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 상황을 제하[諸夏]의 동한[후한] 말기에 조조[曹操]가 실권자였고, 유협[劉協. 시호 한 헌제(獻帝)’]은 허수아비 황제였던 사실과 견주면 된다.

 

다시 말해, 막부의 장군은 [승상이자 위왕(魏王)이었던] 조조와 비슷한 위치였고, 왜왕은 유협과 비슷한 위치였던 것이다.

 

조조가 유협의 권위를 내세우며 황제를 위해역적[실제로는 경쟁자들]을 친다는 명분을 내걸고 권력을 유지했듯이, 막부의 장군도 천황을 보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권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참고로 조조와 유협의 관계와 비슷한 권력 구조는 동한이 무너진 뒤에는 제하[諸夏]에서 사라졌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장군과 왜왕의 관계와 같은 권력 구조는 - 남북조 시대나 전국시대를 빼면 -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뒤에도, 그러니까 에도 막부가 멸망한 해인 서기 1868년까지 수 세기 동안 왜국에서 유지되었다 옮긴이)

 

[그 계획이 옮긴이] 사전에 바쿠후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고, 고다이고 왕은 현재 시마네 현 북쪽에 있는 오키시마(隱岐島[은기도])로 유배된다.

 

그 다음으로는 바쿠후의 후광에 힘입어 고곤(光嚴[광엄])’ 왕이 즉위했지만, 고다이고 왕과 그 아들 모리요시(護良[호량])’ 친왕의 주도로 바쿠후 타도 운동은 계속되었다(이는 조조가 동한 왕조의 실권을 잡고 점점 힘이 세지자, 서한[전한] 황실의 후손임을 내세운 유비나, 동한 왕조의 귀족 집안들이 이에 반감을 품고 조조를 죽이려 한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오늘날의 호북성/호남성]와 촉[: 사천四川 분지]을 차지한 뒤, 한중[漢中 : 사천성四川省 동북쪽의 산악지대]에서 조조군[]과 싸우기까지 했다 옮긴이).

 

여기에 바쿠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가신(家臣. []이나 대부[大夫] 같은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 딸려 그들을 섬기고 받들던 사람 옮긴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족리 존씨])’닛타 요시사다(新田 義貞[신전 의정])’ 등이 가세했고, 1333년 이들이 이끄는 바쿠후 토벌군이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호조 다카토키(北條 高時[북조 고시])’를 비롯한 호조씨 일족을 멸망시킴으로써 결국 (왜국의 첫 막부인 옮긴이) 가마쿠라 바쿠후의 시대가 끝이 난다.

 

그러나 가마쿠라 바쿠후가 종식되었다고 해서, 고다이고 왕의 바람대로 자신이 다시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6년 고다이고 왕과 화의(和議. 화해[]하는 의론[] - 옮긴이)를 맺고, 왕을 상징하는 왕실 전래의 삼종신기(三種神器. 삼종 신기는 초치검[草薙劍], 야타노의 거울인 팔지경[八咫鏡], 야사카니의 굽은 구슬 팔척경곡옥[八尺瓊曲玉]이다. - 지은이의 주석)[ 쉽게 말해, 이른바 삼종 신기/청동거울/곱은옥[]’이다. 고대 이래 왜왕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참고로, 아사달, 그러니까 고조선의 단군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물건들은 청동기였는데, 그것이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이다.

 

나는 아사달의 유풍[遺風]이 왜국으로 이어져, 왜국 왕실이 칼과 거울과 옥을 자신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기게 된 건 아닌지 의심한다.

 

한반도/조선반도와 연해주와 만주에 남은 배달민족은 세월이 흐르면서 임금이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 앞에서 몸소 청동거울을 몸에 걸고 한 손으로는 청동방울을 쥐고 흔들며 다른 손으로는 칼을 휘둘러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는 풍습>을 버리고, 대신 제하[諸夏]의 군주들처럼 옥새[그러니까, 임금의 도장]를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삼게 되었으나,

 

왜 열도에 뿌리내리고 왜인[倭人]이 된 배달민족의 후손들은 본국이 버린 풍습을 꾸준히 간직했고, 그래서 왜국에서는 중세시대인 서기 14세기에도 삼종 신기가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옮긴이]를 건네받아 고묘(光明[광명])’ 왕을 옹립하여 정식으로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실정막부/무로마치 막부])를 연다.

 

그러자 고다이고 왕은 교토(서기 794년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인 서기 1867년까지는 교토가 왜국의 수도였다. 이는 배달민족의 갈마에서 근세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개성[송악/개경]이 수도였고, 후기 고리[高麗]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상경용천부와 금성[경주]이 수도였던 사실과 같다 옮긴이)를 탈출하여 요시노(吉野[길야])로 달아나 북조(北朝. 북쪽 조정. 여기서는 무로마치 막부와 그 막부의 장군이 옹립한 고묘 왜왕을 일컫는 말이다 옮긴이)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왕위는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요시노에 남쪽 조정, 즉 남조(南朝)를 열어, 호쿠리쿠(北陸[북륙]. 왜국의 지역을 일컫는 말. 오늘날의 왜국 토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니가타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다. 혼슈 섬 중부의 서북부에 있다 옮긴이)와 규슈 등 각 지방에 자신의 왕자를 파견해 후위를 도모한다.

 

이렇게 해서 60여 년 동안 남쪽과 북쪽에 각기 변칙적인 두 개의 조정, 무신(武家[무가])의 북조문신(公家[공가])의 남조가 양립하는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참고로, 이 시대는 왜국에서 수많은 왜구[倭寇]가 나타나 후기 고리[高麗]와 명나라를 침략/약탈한 때이기도 하다. 왜구가 나타난 까닭이 왜국 북조와 남조의 전쟁으로 남조 정권의 군자금과 물자가 모자라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본국에서 얻을 수 있는 돈과 군수물자가 줄어들고, 전쟁에서도 계속 밀리자, 난관을 타개할 생각으로 왜국 밖으로 눈을 돌려 해적질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옮긴이)

 

이후 바쿠후가 지지하는 북조와, (원래의 왜왕인 고다이고 왕과 그 후계자들이 이끌던 옮긴이) 남조 사이에는 (도읍, 그러니까 수도인 옮긴이) 교토를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남조도 교토를 4번이나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교토 시민들이 겉과 속이 다른 기질을 지니고, 진심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으며, 위선을 떠는 사람들이 된 까닭이, 중세 이래 계속된 전쟁에서 여러 번 짓밟혔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우선 군사들의 창칼을 피해 살고 봐야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교토를 점령한 군사들이 휘두르는 폭력이나 그들의 약탈에 솔직하게불만을 드러냈다가는, 어떤 용서도 자비도 없이 죽임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옮긴이)

 

그러던 1392(이 해에 이성계가 후기 고리[高麗]를 무너뜨리고 근세조선을 세운다 옮긴이) 무로마치 바쿠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 義滿[족리 의만])’가 남조에 대해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후귀산])’ 왕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북조가 모시는 왜왕에게 옮긴이)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왕의 아들을 (북조 왜왕의 뒤를 이을 옮긴이) 왕세자로 삼는다는 조건이었다(그렇다면, 고다이고 왜왕의 말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면, 북조가 굳이 남조가 갖고 있던 이른바 삼종 신기를 달라고 요구할 까닭이 있는가? 옮긴이). 이는 왕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가면서 계승하자는 의미였다.

 

이에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쇠퇴하고 있었던 남조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고카메야마 왕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으며,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조는 곧 남조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고카메야마 왕의 왕자가 아니라 옮긴이) 고코마쓰(後小松[후소송])’ (그러니까, 북조가 모시던 왜왕 옮긴이)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북조가 백 번 잘못했네! 옮긴이).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왕이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남조를 되살리려 옮긴이)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상이 고다이고 왕과 그 후손들이 얽힌 남북조 내란의 전말이다.

 

그러니 위에서 다나카 미쓰아키 백작이 말한 대로라면, 남조가 멸망한 다음에도 고다이고 왕의 적통이 끊어지지 않고 조슈의 하기에서 모리 가문에 의해 그 혈맥이 몰래 이어져 왔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조슈의 요시다 쇼인이하 유신 지사들의 근왕운동은 이렇게 몰래 이어져 온 남조의 왕맥을 다시 왕(‘천황’)으로 복원시키기 위한, 참으로 기나긴 세월 동안 충정의 결과이고,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는 충격적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해석하면, 남북조 내란이 1392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커튼(장막 옮긴이) 뒤에서는 476년 동안 계속 이어져서 1868년 메이지 유신 성공과 함께 드디어 남조 정권이 다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기막힌 스토리다.

 

다시 말해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왜국 옮긴이) 전국을 격랑(激浪. 거칠고 세찬 파도가 이는 바다 옮긴이)에 싸이게 만든 내부 분열은 476년 동안 지속된 남조의 쿠데타요, 남조가 북조에서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도쿄 왕궁외원(皇居外苑[황거외원]. ‘황거[皇居]’는 글자 그대로는 황제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왜국 왜왕의 궁전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그리고 외원[外苑]’궁궐 바깥에 있는 넓은 정원이라는 뜻이므로, 이른바 황거외원왜왕의 궁궐 바깥에 있는 넓은 정원인 것이다 옮긴이)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남목 정성]. ? ~ 서기 1336)’의 동상이 서 있는 것도 참 수상한 일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가마쿠라 바쿠후로부터 악당이라 불리며, 고다이고 왕 편에 섰던 남북조시대 무신(武臣. 무관인 신하)이다. 그는 고다이고 왕을 도와 바쿠후 타도에 동참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왕을 등지고 다시 바쿠후를 세우려 하자, 아시카가와 대립해 끝까지 고다이고 왕을 지키다 미나토([])’ 강 싸움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그런 남조의 고래적(“고랫적”, 그러니까 고릿적의 경상도 사투리를 잘못 적은 것 같다. “고릿적옛날옛적이라는 뜻이다 옮긴이) 인물을 메이지 유신 후에 재평가해서 1880년 정1위에 추증(追贈. 나라에 공을 세운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품계를 높여주는 일 옮긴이)한 것도 너무 이상하고, 다른 곳도 아닌 왕궁에 동상을 떡하니 세워놓은 것을 뚱딴지같다.’고 하고 그냥 넘어가기는 참 껄끄럽다.

 

(이 모든 일은 옮긴이) 여러모로 이 왕실은 남조의 후예요.”라고 강조하는 대목으로 읽히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왕궁의 구스노키 동상은 벳시(別子[별자]) 구리 광산 시작 200년 기념사업으로 스미토모 재벌이 메이지 23(서기 1891) 도쿄미술학교에 제작을 의뢰해 벳시 광산의 구리를 사용해 10년에 걸쳐 완성해 헌납한 것이다.

 

( 3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