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메이지 일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오무라 도라키치라는 설명을 믿을 수 있는 까닭

개마두리 2023. 11. 3. 21:49

(개마두리)가 이 블로그의 게시판에 올린 글인, 「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1 ~ 9 에는, 에도 시대의 마지막 왜왕(倭王)인 고메이(효명)’의 아들이며, 이름은 무쓰히토로 알려진 사람이 사실은 메이지 유신 직전에 독살당했고, 그 뒤 새 왜왕으로 즉위한 사람(그러니까 메이지 일왕)은 왜국(倭國) 왕족이 아니라, 천민 출신 군인인 치카 도라키치(또는 오무라/오무로 도라키치)’라는 소년이라는 설명이 나온다(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글들을 차례대로 읽어보시라).

 

여러분은 그 설명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리라.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왜 그런가?

 

첫째, 일본의 언론인인 오야 소이치씨의 글을 모은 책 오야 소이치 선집 11권에 메이지 정부가 생기고 얼마 후, 16세의 소년 천황이 제멋대로 해서 원훈(元勳. 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사랑하고 믿어 가까이 하는 노신[老臣])’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렇게 하시면 다시 예전 신분으로 되돌릴 겁니다.라고 말하며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천황은 금세 얌전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메이지 왜왕이 진짜 무쓰히토 왕자라면,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사이고가 왜 그에게 예전 신분으로 되돌리겠다.”는 말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메이지 왜왕은 왜 그 말을 듣고 무슨 헛소리요?”하고 따지기는커녕 금세 얌전해졌단 말인가? 이는 메이지 왜왕이 진짜 왕자가 아니고, 왕족도 아니었으며, 그 사실을 본인 뿐 아니라 사이고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 아닌가? 이것이 첫 번째 증거다.

 

둘째, 메이지 왜왕이 즉위한 뒤에 한 정책이나 그의 체격이나 성향이나 세운 계획들을 보면, 그는 궁궐에서 귀하게 자란 왕자가 아니라 전쟁을 좋아하는 군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의 무쓰히토 왕자는 체격도 왜소했고,” 말타기도 저속하다.’고 여겨 말을 타지 못했다. 게다가 열세 살 때인 서기 1864(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네 해 전이기도 하다)에는 반란군이 쏜 대포 소리를 듣고 놀라 실신하기까지 할 정도로 나약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를 연 메이지 왜왕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다. “우선 체격이 매우 건장한 편이었고, 야외 활동을 즐겨서 승마와 씨름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몸무게는 “90이 넘어, 측근과 씨름을 하면 상대방을 휙 집어던질 정도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자(前者)가 즉위한 지 하루도 안 되어서 후자로 바뀔 수 있는가? 사람의 버릇이나 체격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메이지 왜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일본의 천민 출신으로서 군인이 된 사람인 치카 도라키치(오무라 도라키치)라면, 이 모순을 쉽게 설명하고 의문을 풀 길이 열린다.

 

원래 군인이었으니, 대만(臺灣) 침략이나 유구(琉球) () 해체(일본식 이름은 유구 처분’. 서기 1879. 이때 유구가 완전히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나 동학군()학살이나 대한제국 침략 같은 정책을 명령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고,

 

청일전쟁 때 전황이 일본군에게 유리해지자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메이지 왜왕 본인이 직접 전장인 요령성(오늘날의 요동반도와 요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일본군을 지휘하고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던 것이리라. 러일전쟁 때 아무런 동요 없이 전쟁을 승인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테고.

 

그는 자신이 원래 하던 일이자, 익숙했던 일을 군주의 신분으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다.

 

셋째, 역시 일본인인 다나카 미쓰아키선생이 쓴 책인 철저하게 일본의 오류를 바로잡는다 에 따르면,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가 사쓰마, 그러니까 오늘날의 가고시마를 다스리던 번주(서양으로 치면, 영주)에게 오무라 도라키치를 데리고 와서, “오늘부터 이 사람이 일본의 새로운 천황(왜왕 – 개마두리)이 됩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번주가 화를 내며 오무라를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사이고가 진짜 무쓰히토 황자(왕자 – 개마두리)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자, 칼을 내려놓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나카 선생은 이 야사(野史)가고시마의 향토사가로부터 내(다나카 선생 – 개마두리)가 직접 가서 들은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는데, 가고시마는 정한론을 내세운 왜국 정치가와 사상가들의 근거지라, 왜국의 메이지 정부에 불리한 거짓말을 일부러 지어낼 까닭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 야사도 사실이고, 다만 메이지 이후의 왜국 왕실과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왜국 학교의 일본사 교과서와 다른 나라에 소개된 왜국 역사책들에는 빠진 것일 뿐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이 메이지 왜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오무라 도라키치라는 세 번째 증거다.

 

넷째, 역시 일본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책인 배신당한 세 명의 천황 에 실린 오무로(오무라 – 개마두리)집안 당주(當主. 집안의 주인 – 개마두리)오무로 긴스케(大室 近佑[대실 근우])’씨의 증언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나의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유신 직전 열여섯 살 때(공교롭게도, 공식 기록에도 메이지 일왕은 열여섯 살 때 즉위했다고 적혀있다 개마두리) 조슈(오늘날의 야마구치 현 개마두리) 번주에게 불려가면서 만두를 만들어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교토(이 도시는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일본의 수도였다 개마두리)에 가서 즉위한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고 하며, 오무로 당주의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또한 (서기 개마두리) 1877년 군함 한 대가 집(오무로 집안의 집 개마두리)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왔는데, (메이지 왜왕이 개마두리) 함상(艦上. 싸움배[] [] 군함 위 : 개마두리)에서 모습을 보이며 안녕히, 잘 있느냐?’라고 외쳤다.”

 

고 한다.

 

만약 메이지 왜왕이 궁 안에서 태어나 자랐던 무쓰히토 왕자였다면, 즉위한 지 열 해 만에 굳이 평민(!)이자 백성인 오무로 집안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몸소 군함을 타고 와서 오무로 집안 사람들에게 안녕히, 잘 있느냐?”고 인사할 까닭이 있는가?

 

이는 오무로 집안이 그가 즉위하는 데 도움을 주었거나, 즉위하기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거나, 아니면 그가 오무로 집안 출신일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공식 기록에 따르면 메이지 왜왕에게 권력을 쥐어 준(이른바 대정봉환’) 세력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메이지 유신을 밀고 나간 사람들의 조직이었지, 오무로 집안은 아니었고, 귀족 집안이라면 모를까 한낱 평민일 뿐인 오무로 집안이 에도시대부터 왜왕 집안과 가까웠을 리는 없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가능성은 무쓰히토라는 이름을 쓰며 즉위한 메이지 왜왕이 원래는 성이 오무로였고, 이름은 도라키치였으며, 그 사실을 본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군함을 타고 와서 집안 사람들에게 안녕히, 잘 있느냐?”고 인사했다는 것뿐이다(아마 지역 관리들과 다른 백성들에게는 다른 명분[예를 들면, “짐이 몸소 조슈 번을 격려하거나 위문하겠노라.”든지]을 대고 적당히 둘러댔으리라).

 

그리고 아직도 왜왕(倭王)()’으로, 더 정확히는 인간으로 나타나신 신현인신(現人神)’으로 여기는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는 왜국(倭國)에서, ‘만세일계를 받드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은 나라인 왜국에서,

 

일본인인 오무로 긴스케 씨가 굳이 그 관념과 다른 이야기(따라서, 극우파나 우익이나 그 지지자인 왜국 국민들에게 공격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일본 안에서는] ‘위험한이야기)를 굳이 지어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오무로 씨는 - 메이지 왜왕이 오무로 집안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이기 때문에 - 그런 증언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메이지 왜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오무로 도라키치라는 네 번째 증거다.

 

나는 이 네 가지 증거 때문에, 이른바 만세일계를 주장하고 메이지 일왕이 바로 전대 일왕인 고메이(효명)’ 일왕의 아들이라는 왜국 정부/우익/국민들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는 메이지 왜왕과 그 아들인 요시히토(연호 다이쇼”)’(고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말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왜국 왕실의 후손이 아니라 평민(또는 천민)인 오무라(오무로) 집안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한국을 비롯한 누리(‘세계[世界]’/‘천하[天下]’를 일컫는, 옛 배달말이자 순수한 배달말 낱말)역사( 갈마 ) 교과서는, 메이지 시대를 일본의 옛 왕통이 끊긴 시대이자, ‘임금을 바꾼 사기극으로 시작된 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 단기 4356년 음력 920일에, ‘왜국 정부/우익과, 종일파(從日派)들과 <친일국가 출신 사냥개(예를 들면, 마크 램지어 교수)>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신성한 집안으로 추켜세우는 왜국 왕실의 참모습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개마두리가 올리다

 

참고 자료

 

- 한일공동정부 (작은 제목 메이지 후예들의 야욕 . ‘조용준지음, ‘()퍼시픽 도도펴냄, 서기 2020)

 

-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 조용준 지음, '()도서출판 도도' 펴냄, 서기 2018)

 

- 일본인과 천황 (‘가리야 테츠지음, ‘슈가 사토그림, ‘김원식옮김, ‘길찾기펴냄, 서기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