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천황을 독살한 천황주의자들

개마두리 2023. 11. 3. 22:05

(서기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867125.

 

때는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전국이 막부(에도 막부 - 옮긴이)를 타도하려는 파와 막부를 지키려는 파로 갈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밖으로는 영국, 프랑스 등 외국 세력이 언제 군대를 이끌고 일본의 내전에 관여할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만약 - 옮긴이) 그렇게 된다면 우려했던 대로 일본은 인도(무굴 제국과 케랄라/타밀나두의 독립왕국들 - 옮긴이)처럼 '서양 오랑캐'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

 

전날(그러니까 124- 옮긴이) 궁중의 한 의식을 별다른 무리 없이 치러 낸 효명천황(孝明天皇. 고메이 왜왕 - 옮긴이)은 이날 갑자기 고열과 헛소리 증상을 보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궁중의 어의(御醫. 임금이나 왕족/황족의 병을 고치던 의원 - 옮긴이)들은 천연두로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천황(왜왕 - 옮긴이)의 병세는 점점 나아져, 사람들은 안도했다.

 

그러나 30일 오후 1시경, 천황은 갑자기 심한 구토와 설사를 계속한 뒤, 피를 흘리고는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그 상황은 눈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왜국 - 옮긴이) 조정은 신속히 (고메이 왜왕의 - 옮긴이) 사인(死因. 죽은[] 까닭[] - 옮긴이)이 천연두라고 발표하고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어의들의 치료로 (병이 - 옮긴이) 순조롭게 차도(差度. 병이 조금씩 나아가는 정도 - 옮긴이)를 보이던 효명천황이 왜 갑자기 숨졌을까.

 

지금(서기 1994- 옮긴이)까지 남아 있는 당시 치료 경과서를 보면, 천황의 병세는 죽기 하루 전날까지 아주 양호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담당 어의들은 기록하고 있다. 천연두에 의한 병사라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서기 1867 ~ 1868: 옮긴이) 민간에는 천황이 막부를 타도하려는 (그리고 새 정부를 세우려는 - 옮긴이) 존황양이파(尊皇攘夷派. 에도 막부 말기에, 왜국에서 '황제[왜왕]를 받들고, 오랑캐[서양]를 물리치자.'고 주장한 세력 - 옮긴이)에게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어의 중의 한 사람도 천황(고메이 왜왕 - 옮긴이)의 사인이 독물에 의한 급성중독이라며 '천연두에 의한 사망'이라는 발표를 부인했다.

 

사람들은 존황양이파 무사들과 끈이 닿아 있는 조정 고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 具視[암창 구시])'가 천황 독살의 주범이며, (이와쿠라 도모미 - 옮긴이)의 여동생인 '모토코'등 궁중 여관(女官. 궁궐 안에서 임금/왕비[황비]/세자[태자]를 가까이 모시며 시중들던 여성 - 옮긴이)들이 그 하수인(下手人. 손을 대어 직접 사람을 죽인 사람/남의 밑에서 부하 노릇을 하는 사람. 여기서는 이 두 가지 뜻이 뒤섞인, '이와쿠라 도모미의 명령을 받아, 고메이 왜왕을 죽인 일을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이라고 수군댔다.

 

그렇다면 '천황을 떠받들고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황양이파는 왜 그들의 '우상' 천황을 독살했을까.

 

당시 존황양이파 무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부를 타도하여 집권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막부 타도'의 명분으로 천황을 등에 업었지만, 천황조차도 이들에게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때 천황을 '다마()'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천황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막부 타도 세력을 결집해 가고 있을 때, 예기치 않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그들이 등에 업으려고 했던 효명천황이 막부 타도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원래 일본 천황은 오랜 역사에서 거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왜국의 중앙집권은 서기 7세기에야 이루어졌고, 그조차도 서기 12세기 이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 서기 1185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진 뒤부터 왜왕의 권력이 약해졌으므로, 왜왕 집안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려 682년 동안 허수아비 신세였음을 알 수 있다 - 옮긴이).

 

그런데 효명천황은 (왜국의 옮긴이) 개항(開港. ‘항구[]를 엶[]’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게 항구를 열어 다른 나라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허락함. 갈마[‘역사’]에서는 주로 아시아 나라들이 자신들의 항구를 서양에 개방해 서양 백인들과 서양의 배가 마음대로 드나들게 허락하는 조치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 한국과 조선 공화국과 제하[諸夏]의 갈마에서는 서양뿐 아니라, [Ro]시야 제국이나 근대 왜국도 개항 대상에 포함되었다 : 옮긴이)을 전후하여 일본에 불어닥친 천황주의 사상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외세(서양과 로시야 제국 옮긴이)를 혐오했기 때문에, 외적(外敵.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적[] - 옮긴이)에 대한 대처가 항상 정책 일순위(1순위 옮긴이)였다. 따라서 (그는 옮긴이) 국내 정치체제의 격변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옮긴이) 그래도 외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막부의 쇼군(장군[將軍] - 옮긴이)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뛰어난 현실감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막부 폐지에는 반대하고, (그 대신 옮긴이) 조정(왜왕 집안 옮긴이)과 막부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할 것을 지지했다.

 

이렇게 되자 막부 타도파는 당황했다. 자신들이 막부를 타도하려는 것은 지엄한 천황을 막부가 무시하고 정권을 제멋대로 탈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천황 자신이 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막부 타도파의 정치적 입지는 지극히 위태롭게 되었다. (그들은 옮긴이) 이미 막부와의 일전(一戰. 한바탕[] 싸움[] : 옮긴이)을 위해 각 번()들과 동맹을 맺었고, 군사력도 키워 왔다.

 

그러나 효명천황의 정치노선이 이대로라면, 막부 타도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효명천황의 제거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마침 궁중 세력은 이미 막부 타도파 대신들로 꽉 차 있었다.

 

효명천황을 살해한 뒤, 그들은 16세의 명치천황(메이지 왜왕. 실제로는 무쓰히토왕자가 아니라 치카[오무라] 도라키치’ - 옮긴이)을 즉위시켰다.

 

이제는 천황의 뜻을 맘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 해가 가기 전, 막부 타도파는 막부 토벌을 명령하는 천황의 밀서를 조작해, 이를 근거로 쿠데타(군사반란 옮긴이)를 감행, 왕정복고(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체제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막부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그것을 왜왕에게 준다.’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를 단행(斷行. 결단[]하여 실행[]옮긴이)하고 막부 타도를 위해 에도(오늘날의 도쿄 옮긴이)로 진군해 갔다.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 유신 옮긴이) (서기 1868년 이후 옮긴이) 막부 타도파가 집권하자, 효명천황의 사인은 자연히 천연두에 의한 것으로 확정되었고, 1945년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할 때까지 독살설을 입에 담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효명천황 독살설을 실증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다. 천황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천황 독살의 진상은 정말 밝혀질 것인가.

 

- 박윤명, 상식 밖의 동양사 , 142 ~ 144

 

→ 『 상식 밖의 동양사 ( 박윤명 지음, ‘도서출판 새길펴냄, 서기 1994)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