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계사]핀란드의 독립과 명예를 지킨 ‘연장전’

개마두리 2023. 11. 4. 21:40

[ 해방일기 ] 19451224

 

19451224

 

[ 모스크바 25SF發 合同 ] //3국 외상 회담의 제1회 공동 성명서가 24일 발표되었는데, 要旨는 다음과 같다.

 

//3국 정부는 평화 조약 준비에 관한 이하의 수속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어 佛國 及 中華民國 정부에 대하여도 평화 준비 遵守를 요청하였다. 외상이사회가 기초하는 데 있어서는 외상이사회 설치에 관한 베를린 會議 사항에 하여 항복 조건 조인국이라고 인정되는 동 이사국 또는 현재 항복 조건에 조인한 이사국만의 참가를 허락한다.

 

, 피조인국인 외상이사국으로서 그 나라의 직접 관계있는 문제에 관한 採否를 이사회 회의에 요구할 때에는 此限不在한다. ,

 

A) 伊太利에 관한 평화 조약의 조건은 ///4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B)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의 평화 조약은 //3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C)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은 /2국 외상 간에서 기초된다.

 

각국 외상 대리자는 제1차 런던 외상이사회에서 협의된 제 문제에 관한 양해를 기초로 하여 즉시 런던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此等 평화 조약 기초에 관한 준비가 완료하면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와의 평화 조약 검토의 목적으로서 국제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는 외상이사회 참가 5개국 외에 구미 제국에 대하여 실질적인 노력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연합각국 전부가 참가한다. , 美國, 蘇聯, 英國, 中國, 佛國, 濠洲, 벨기에, 白露西亞, 伯剌西爾(브라질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그리스, 네덜란드, 印度, 캐나다, 뉴질랜드, 諾威(노르웨이 옮긴이),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 에치오피아, 유고스라비아, 南阿聯邦(오늘날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옮긴이)의 제국이다. 회의는 194651일 이전에 개최한다.” (<서울신문> 1945122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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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옮긴이) 1943년 말의 테헤란 회담, 19452월의 얄타 회담, 그리고 19457월의 포츠담 회담 등 중요한 연합국 회담은 미//3개국 사이에 이뤄졌다. 194512월의 모스크바 외상 회담도 그 연장선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3국 체제는 전쟁 수행을 위한 비상 체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제, 평화체제 수립에는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유엔(국제연합[國際聯合] - 옮긴이)도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직접적 전쟁 처리를 위해서는 연합국 공조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었고,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서는 각 안건의 구체적 토론에 앞서 안건의 관할 범위를 먼저 결정했다.

 

안건 관할 결정 중, 핀란드(정식 국호 수오미’. - 옮긴이)의 이름에 눈길이 머무른다. 30가 넘는 국토지만 인구 500여만 명에 불과한 조그만 나라. 1809년까지 스웨덴에 속해 있다가 러시아([Ro]시야 옮긴이)의 통치(사실은 지배 옮긴이)를 받게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와중에 비로소 독립을 얻은 나라(그러니까, 수오미는 온 여덟 해[108] 동안 로시야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이다. 40대 이상인 한국인들과 조선 공화국[수도 평양]의 공민[公民]들과 고려인/ - 흔히 조선족으로 불리는 - 코리아[Corea]계 제하[諸夏] 인민들이 근대 왜국[倭國]의 침략과 대한제국 점령과 식민 지배 때문에 왜국을 싫어하고 경계하고 비난하듯이, 수오미 시민들도 로시야의 지배와 탄압 때문에 로시야를 싫어하고 비난하고 욕한다. 수오미는 타이[Thai]나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친일 국가이기도 한데, 이는 로시야와 왜국이 서로 싸우고 대립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사이가 안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의 적은 나의 동무라는 논리와, 한국/조선 공화국과는 달리 왜국과 멀리 떨어져 있고 왜국의 침략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수오미와 왜국의 사이가 좋은 것은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다 옮긴이).

 

독립 후에 바로 좌우 대립의 내전을 겪은 핀란드는 독일(도이칠란트. 정확히는 도이칠란트 제 3 제국인 나치 정권 옮긴이)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는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조치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수오미가 독립한 뒤 얼마 안 되어 좌우 대립의 내전을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두 힘센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는 사실은 한국인인 나에게도 낯익은 사실이다. 한국도 왜국에서 독립한 지 다섯 해밖에 안 되었을 때 내전이자 국제전이고, 힘센 나라들 사이의 대리전이자 좌우 대립때문에 일어난 전쟁인 6.25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 19세기 말에는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이 로시야/청나라/근대 왜국이라는 세 나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그들에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험악한 주변 정세 속에서도 민주 정치를 유지한 핀란드는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련에 대항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어려운 형편에 빠진 것을 보며, 해방 한국(서기 1945 ~ 1949년의 한국. 당시 용어로는 38선을 기준으로 갈라진 남조선북조선’ - 옮긴이)이 처해 있던 국제적 상황을 음미해 본다.

 

(비록 2차대전의 옮긴이) 패전국이기는 하지만, 핀란드는 추축국(2차대전을 일으켰던 나라들. 도이칠란트 제 3제국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과 근대 왜국이 여기에 들어간다 옮긴이)은 아니었다. 추축국들과 함께 반() 코민테른 동맹에는 참여했지만, 추축동맹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옮긴이) 테헤란 회담에서도 핀란드는 연합국(국민당의 중화민국과, 프랑스의 망명정부와, 영국과 미국과 소련 옮긴이) 자체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개별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19398월 하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분할의 밀약(영어권에서 폴란드로 불리는 나라인 폴스카의 동쪽은 소련이, 서쪽은 도이칠란트 제 3 제국이 나눠 갖는다는 밀약.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 폴스카는 두 나라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했고, 이때 연합국 쪽으로 달아났던 폴스카 사람들이 [‘폴란드 군단으로도 불리는] ‘자유 폴란드군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연합군과 함께 추축국에 맞서 싸웠다. 이 폴란드 군단에 대해서도, 언젠가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옮긴이)을 맺을 때, 독일은 발트해 3(오늘날의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발트해를 낀 세 나라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옮긴이)과 핀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했다. 소련은 네 나라에 군사 기지 설치를 요구했고, 세 나라(그러니까, 발트해 3옮긴이)는 이 요구를 수용한(받아들인 옮긴이) 결과 1년 내에(안에 옮긴이) 주권을 빼앗겼다. 핀란드만이 소련의 요구를 거절했고, ‘겨울전쟁으로 맞섰다.

 

100여 일(그러니까, 석 달 아흐레 옮긴이)에 걸친 겨울전쟁이 1940313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으로 종결될 때, 핀란드는 (소련에게 옮긴이) 영토(가운데 많은 부분을 넘기는 옮긴이) 등 상당한 양보를 강요당했지만, 타격은 소련 쪽이 더 컸다.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가 엄청나게 낮아져서 히틀러가 소련 공격 결정을 앞당기는 빌미가 된 것이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야욕은 계속되었다. 겨울전쟁에서 구겨진 체면을 되살릴 필요도 있었다. 모스크바 평화조약의 이행이 소련의 무리한(지나친 옮긴이) 요구 때문에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옮긴이) 핀란드는 영국에 무기 공급을 청했지만, 영국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옮긴이) 독일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옮긴이) 소련과의 동맹을 파기할 계획을 가진 독일은 1940년 말부터 핀란드의 요청에 응하기 시작했다.

 

19416, 독일의 소련 침공(이른바 /소전쟁’.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과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다 옮긴이)과 함께 핀란드도 소련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핀란드인들은 연장전(Continuation War)’이라 불렀다. 겨울전쟁의 연장전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연장전이 원래 전쟁보다 더 길게 끌었다. 19449월에야 휴전이 이뤄졌고, 19472월의 파리평화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핀란드인은 이 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하되, 전쟁 목적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수오미 군은 옮긴이) 개전 초 몇 주일(‘[]’라는 말을 써야 한다 옮긴이) 동안 겨울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한 후로는 적극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나치가 요구한 옮긴이) 불과(겨우 옮긴이) 몇 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옮긴이) 포위 작전 참여도 거부했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몇 달 내에 소련을 꺾을 계획이었고, 핀란드도 그런 기대 하에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수오미는 옮긴이) 이 기대가 어긋난 뒤에는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방어 전략에 치중했다. (이 무렵 수오미 군은 옮긴이) 소련 이외의 연합국과는 적대행위가 거의 없었다. 영국이 194112월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뿐, (영국군은 옮긴이) 핀란드를 실제로 공격하지 않았고, 테헤란 회담에서는 미국과 함께 소련을 설득,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지 않게 했다.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동부전선 전세가 역전되자, 핀란드는 전쟁(2차 대전 옮긴이)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은 강화회담에 응하지 않고, 압도적 군세로 핀란드를 석권하려 들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탱크 부대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독일은 (소련과의 옮긴이) 단독 강화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수오미에 옮긴이) 대전차 무기를 제공했다. 19446월에 핀란드 대통령 리스트 리티는 대통령직을 걸고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94481일 소련의 치열한 하계(夏季 : 여름철 옮긴이) 공세를 물리친 뒤, 휴전 협상의 길이 열렸을 때, 리티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수오미 옮긴이) 의회는 카를 구스타프 마너하임(서기 1867 ~ 1951)’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뽑았다 옮긴이). 전쟁을 끝낸 것은 국부마너하임의 조국에 대한 마지막 큰 봉사였다. 그의 취임사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국가의 운명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국가 원수 직을 맡으면서, 저는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장래를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순간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5년째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 군인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예수교와 유대교의 신인 여호와’. 서기 20세기 중반의 수오미는 예수교 국가였다 옮긴이)에 대한 믿음 위에, 국민의 단합된 지지를 받는 의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존재를 지킬 수 있기를 저는 희망하고, 또한 믿습니다.”

 

혁명(서기 1917년에 일어난 로시야 혁명 옮긴이) 전 러시아군 장군이었던 마너하임은 독립한 핀란드에 돌아와 1918년 내전에서 적군에 대항해 백군을 지휘했다. 독일(비스마르크가 세운 도이칠란트 제 2 제국’. 이 무렵에는 아직 나치가 정권을 잡지 않았다 옮긴이)의 지원을 받은 백군이 승리하자 왕정을 실시하려 했는데, 곧이어 독일의 패전으로 이 계획이 무너졌다.

 

(그래서 수오미 사람들이 왕정의 대안으로 옮긴이) 공화정을 준비하는 동안, 마너하임이 섭정(攝政. 임금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나 그의 다스림 옮긴이)의 신분으로 국가 원수 역할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옮긴이) 은퇴했다가, 겨울전쟁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으로 복귀, 대통령을 대신해서 군 통수권을 맡았다. 그는 군사적 영웅일 뿐 아니라, 대통령을 초원하는 정치적 권위를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존재였다.

 

(로시야 제국의 군대에서 일했던 수오미 사람인 마너하임이 수오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로시야 제국의 후신인 소련과 싸운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한국 독립군 장교인 지청천[다른 이름은 이청천’] 장군도 3.1 혁명 이전에는 근대 왜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군인이 되는 교육을 받았고, 혁명 이후에는 간도로 달아나 독립군이 되었다. 그리고 마너하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겨레를 위해 총을 들고 자신이 몸 담았던 나라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나라나 겨레를 지배/억압/탄압하는 나라에 가거나 몸담은 적이 있다고 해서 그를 매국노’/‘배신자로 못 박아서는 안 되고, 그 뒤에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 나라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주장/요구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그를 평가해야 한다.

 

[이봉창 투사도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기 전에는 왜어(倭語)를 배워서 근대 왜국에 건너간 뒤 거기서 일을 했고, 3.1 혁명을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며 깎아내리고 비난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 상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전쟁에 몸을 던지겠다고 말했고,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어 히로히토 왜왕에게 폭탄을 던짐으로써 자신이 한 말을 실천했다. 우리는 그가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기 의 일이 아니라, 의 일을 바탕으로 그를 한국의 독립투사이자 나라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지청천 장군을 평가할 때도, ‘나라를 잃었을 때 근대 왜국의 학교에 가서 군인이 되는 교육을 받은 사실을 문제 삼는 대신, ‘3.1 혁명 이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목숨 걸고 간도로 달아나 대한 독립군이 되었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정미의병보다 강하고 잘 싸우는 군대로 바꾸었으며, 독립군이 된 뒤부터는 한 번도 근대 왜국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총을 들고 싸운 사실에 초점을 맞춰 지 장군의 용기와 공로와 적에게서 배우되, 적에게 동화하지 않고 중요한 시기에는 목숨 걸고 적에게서 빠져나와 동포들에게로 간 일/적의 강점을 배워 그것으로 적을 친 일을 칭송해야 한다.

 

나는 마너하임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19426월 히틀러가 마너하임의 75회 생일을 축하하러 찾아왔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핀란드가 소련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히틀러와 독일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때였다.

 

마너하임은 히틀러의 방문으로 핀란드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방문이 공식 행사가 아닌 개인적 행사가 되도록 만전의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히틀러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시가를 꺼내 물었다. 히틀러가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고, 누구도 그 앞에서 담배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너하임은 히틀러가 (자신과 수오미에게 옮긴이) 저자세인지 고자세인지 판별하기 위해 일부러 담배를 꺼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너하임이 시가 피우는 것을 못 본 척했다고 한다.

 

마너하임의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소련과 휴전이 성립되었다.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마주쳤던 어느 다른 나라와도 달리,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다. 스탈린도 마너하임과의 휴전 협상을 외면할 경우 핀란드의 극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핀란드 국민도 그(마너하임 대통령 옮긴이)를 믿었기 때문에 가혹한 조건을 감수했던 것이다. 1944년 가을 시점에서, 소련은 서부전선 연합국들(캐나다군과 영국군과 미군 옮긴이)(‘누가 더 빨리 베를린으로 진격해서 도이칠란트 제 3 제국의 항복을 받아내느냐?’ 는 목적을 지닌 옮긴이) 진격 경쟁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를 끝장내지 못하고 휴전에 응해야 했다.

 

전쟁 기간 중, 특히 개전 초기 소련이 밀려나고 있을 때, 핀란드에서도 () 핀란드 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소련 영토를 최대한 빼앗아 북방의 대국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이는 <“만약 러시아나 지나가 약해지고 여러 나라로 갈라지면”, 간도나 신도나 녹둔도[鹿屯島]를 되찾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연해주나 흑룡강성이나 요령성까지 한국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오르게 하는 주장이라, 그 비슷함에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온건한 민족주의를 따르는 나는 간도/신도/녹둔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그리고 간도 협약을 비난하고 북경(北京)에 그 불법성을 강조하며 간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자는 데에는 찬성하지만], 그 이상을 한국의 영토로 요구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녹둔도의 영유권을 되찾아오는 일도, 로시야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끝난 뒤, 한국 정부가 로시야 정부와 11로 협상해서 비폭력적으로 해결해야지, 근대 왜국의 시베리아 침략[서기 1920년대 초]처럼 총칼이나 전투나 전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는 로시야와 우크라니아와의 전쟁에서 [적어도 겉으로는] 중립을 지켜야 하고, 로시야에 선전포고를 하거나, [‘우크라이나 파병이건 일본 파병이건 가릴 것 없이] 로시야 군대와 싸우거나, 로시야와 전면전을 치르거나, 로시야를 먼저 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독도와 동해라는 이름을 인정하는 나라이자, [한국은 지니지 않은] “핵 미사일핵 잠수함을 지닌 나라와 싸워서 좋을 건 없지 않은가? 옮긴이).

 

그러나 마너하임이 이끄는 군 지도부는 전쟁 목표를 최소한의 범위로 엄격하게 지켰다. 그래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섰을 때도 극한적 파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김기협(역사학자)의 글

 

- < 프레시안 > 서기 2010년 양력 1224일 기사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러시아/중국이냐, 서양/일본이냐? 하나를 골라!” 하는 압박을 받고, “우크라이나를 위해 친일할 거냐, 아니면 러시아를 위해 반서양’/‘반일로 돌아설 거냐?”하고 윽박지르는 서양이나 왜국이나 종일(從日) 세력과 맞서 자신의 독립과 평화와 안정을 지켜야 하는 처지인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겨울전쟁과 2차 세계대전(연장전)을 치르며 자신들의 독립과 명예를 지킨 수오미 사람들에게서 한 수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여러분에게 인용/소개한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빈다.

 

- 단기 4356년 음력 921일에, 우리에게는 남의 성공으로부터 배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