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중화 사상과 민족주의 - 4 (끝)

개마두리 2024. 8. 21. 21:06

4. 여론(餘論. ‘남은[] []’ 주된 의논 뒤의 나머지 의론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 중화 사상의 근대적 변용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로 밀려와 (그곳에 있는 나라들에 옮긴이) ‘만국공법(萬國公法. 오늘날로 치면, 국제법 - 옮긴이)’에 기초한 국제 질서로의 편입을 강요하며 통상(通商. 다른 나라와 교통하며 장사함 옮긴이)을 요구하였을 때, 기본적으로 중화사상의 틀을 유지하며 중국’ 5)의 가치와 국체(國體. 나라의 형태 옮긴이)’를 각각 중화로 자부하던 중국(사실은 제하[諸夏]가 아닌 청나라 옮긴이)/조선(근세조선 옮긴이)과 일본의 일차적인 대응이 모두 그것과 이질적인 (특히 禮敎[예교 옮긴이]國體에 반하는[를 거스르는 옮긴이] 기독교[예수교 옮긴이]로 상징된) ‘서양이적(夷狄. 오랑캐 옮긴이)’으로 규정, ‘양이(攘夷. “오랑캐[]를 물리침[]” 서양 사람을 오랑캐로 얕보고 배척함 : 옮긴이)’와 쇄국의 강행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하였다.

 

만국공법 을 내세운 열강(여러 강대국들 [Ro]시야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 : 옮긴이)의 통상 요구는 실제 불평등 조약의 강요를 기초로 한 단계적인 이권 침탈과 영토 분할에 뒤이은 식민지화의 단초(端初. 일이나 사건의 시작/실마리 : 옮긴이)를 사실상 의미하였으며(뜻하였으며 옮긴이), 그들의 선봉 역을 담당한(맡은 옮긴이) 기독교 전파는 동아시아 전통 문화를 개종시키지 않을 수 없는 이교(신의 은총을 모르는 야만의)로 단정한 독선적인 서구 문화 또는 백인 우월주의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양이(攘夷)’는 주체적인 반제국주의 또는 전통 문화 수호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었고, 실제 외세에 저항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서기 19세기 옮긴이) 동아시아의 각국은 이미 내적 모순으로 전반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체제의 해체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다. 이제 그들이 그토록 자부한 전통적 중화의 가치는 더 이상 체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원리가 될 수도 없었으며, 그들 앞에 새로 나타난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 서양 백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 옮긴이)’의 위협도 그 체제의 수호만으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조직적이고 강력한 물리적인 힘을 동원할 수 있는 문명체제였다.

 

그렇다면 감정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일방적인 양이(攘夷)’는 무력 충돌과 식민화의 위기를 재촉할 뿐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국 역시 전통의 해체는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식민지로의 전락을 자초할 뿐일 수도 있었다, ‘양이(洋夷)’와의 접촉을 통해서 그 장기(長技. 가장 능한 재주. 여기서는 장점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를 습득하며 자신의 위기적인 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양이(洋夷)’의 위협도 대처하고 중화의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주장한 동양 도덕 서양 예술’, 중국(사실은 청나라 옮긴이)중체서용(中體西用)’,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원칙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이 모색에 대한 동일한 결론이었다.

 

물론 시대와 상황 그리고 논자(論者. 이론이나 의견을 내세워 말하는 사람 옮긴이)의 입장에 따라 서용(西用)’ ‘서양 예술’ ‘서기(西器)’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군사 기술에 국한되었던 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고성현(古聖賢. [] 성인[]과 현인[] - 옮긴이)의 뜻에 암합(暗合. 우연히 들어맞음 옮긴이)된 것이라는 명분으로 서양 학술, 서양 정치 제도까지도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한때 서양 문명 자체를 보편적인 가치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사상인 옮긴이) 구화주의(歐化主義)가 풍미(風靡. ‘바람[]에 날려 [풀과 나무가] 쓰러짐[]’ 어떤 현상이나 사조 따위가 사회에 널리 퍼짐 : 옮긴이)하면서 일본 인종 개량론(日本人種改良論) (서기 1884년에 高橋 義雄[고교 의웅 옮긴이]’이 씀) 같은 주장까지 나온 녹명관(鹿鳴館) 시대도 있었고, 중국(제하[諸夏]. 그러니까 중화민국옮긴이)에서도 5.4 운동을 전후하여 호적(胡適[후스 옮긴이])전반서화론(全般西化論[제하(諸夏)의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바꾸자는 주장 옮긴이])’을 주장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서구 문명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면서 중체서용적 발상은 서양 과학/동양 정신의 구조로 이어졌고, 서양의 물질 문화에 대한 동양 정신 문화의 우월성이 끈질기게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서기 1992옮긴이]까지도) 강조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이러한 동서 문화론의 타당성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서양 문화의 왜곡적(왜곡된 옮긴이) 수용 또는 극복해야 할(이겨내야 할/뛰어넘어야 할 옮긴이) 동아시아 내부 문제의 합리화뿐 아니라, 동양(아시아 옮긴이)과 서양 그리고 동양 각국 간의 질서를 중화 사상적인 틀로 인식하는 부정적인 발상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각기 중화를 자부하던 동아시아의 각국이 모두 서양로 설정, ‘양양이(攘洋夷. 서양[] 오랑캐[]를 물리침[] - 옮긴이)’양이(洋夷)’의 장기를 배워 양양이를 하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양양이를 하건 옮긴이) 이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를 야기하였다.

 

 

1) 동아시아 각국과 서양 각국간의 관계 설정과 국내 개혁,

 

2) 청 제국(淸 帝國)에 속한 제민족(諸民族. 여러[] 겨레[民族] - 옮긴이)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 관계의 재조정,

 

3) 동아시아(동양/아시아/황인종) = ‘중화서양’(백인종) = ‘의 대결 구조의 형성

 

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1)의 경우, 비록 개국과 동시에 서양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통하여 주권과 이익을 상당히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종래의 조공 체제 아래에서와는 달리 형식적인 독립국으로 인정되고, 적어도 열강은 조약 당사국이 청의 속방(屬邦. ‘소속된[] 나라[]’ 속국 : 옮긴이)이라는 것을 부정한다(예컨대 조선과 일본 및 열강의 관계).

 

이런 상황에서 개국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철저히 반대하는 수구파(예를 들면, 근세조선의 위정척사파 옮긴이)를 일단 논외(論外. 논의[]의 범위 밖[] - 옮긴이)(설정 옮긴이) 하면, 개국을 통한 서양 문물의 수용을 찬성하는 세력은 당권파(當權派. 정권[]을 잡은[] 무리[] - 옮긴이)’()당권파(정권을 잡지 못한 무리 옮긴이)’로 일단 분류되는데, 객관적인 평가와 역사적 책임이야 어찌 되었든, 양파는 모두 자국 또는 자민족의 부강과 독립 발전을 원하며(바라며 옮긴이), 서양과의 불평등 관계의 청산과 이권 회수를 일차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당권파는 현실적으로 열강의 계속적인(계속되는/되풀이되는 옮긴이) 압력에 직접 대응하는 위치에서 외세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권력 독점자의 성격상 적극적인 개혁보다는 권력의 강화와 (침략이 될 가능성이 높은 옮긴이) 대외 팽창을 통한 국권 신장을 모색함으로써, 국내의 질서를 확보하고, 아울러 외세 타협의(외세와 타협했다는 옮긴이) 비난을 상쇄(相殺. 셈을 서로 비김 상반되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어 효과가 없어지는 일 : 옮긴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팽창의 대상은 결국 역시 서양의 침탈에 시달리는 동아시아의 이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상기(上記. 글의 위[]나 앞쪽에 적음[]/글의 위나 앞쪽에 적은 내용 옮긴이) 2)의 문제, 즉 동아시아 제국간의 관계가 새로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간에는(이들 사이에는 옮긴이) 사실 독립 주권국간의 대등한 관념이란 생소하였던(낯설었던 옮긴이) 만큼, 중화 사상에 기초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유산을 (허상이건 실상이건) 다시 확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미국과 조선(근세조선 옮긴이)의 수교를 주선한 (청나라 대신 옮긴이) 이홍장의 요구에 따라, (근세조선의 왕인 옮긴이) 고종이 (서기 옮긴이) 1882조선은 청의 속방이며, 조선과 미국의 호혜 평등 조약은 이 속방 관계와는 무관하다.”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사실이 쌍방간에 별다른 물의 없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만(, 이랬던 고종도 열다섯 해 뒤인 서기 1897년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사대질서와 중화사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지적해야 한다 옮긴이), 중국(사실은 만주족의 나라인 청 왕조 옮긴이)의 양무파(洋務派)가 신강(新疆. 올바른 이름은 위구르 사람들이 직접 붙인 이름인 []투르키스탄 - 옮긴이)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한 것, 그리고 (청나라가 옮긴이) 월남(越南. 비엣남[Vietnam]의 한자이름 옮긴이)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서기 1884),

 

명치(明治. ‘메이지시대인 서기 1868 ~ 1912옮긴이) 초 일본의 정한론(征韓論)과 대만 정벌(서기 1874)[‘대만 <침략>’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옮긴이]에 이은 조선의 개항 강요(서기 1876)와 유구합병(琉球合倂. ‘유구 처분이라고도 불리며, []으로 굴러떨어진 유구[琉球] 왕국이 해체되어 완전히 멸망한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확한 이름은 유구 번 멸망이나 유구 번 해체옮긴이)[서기 1879] 등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비당권파는 당권파의 권력 독점을 반대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민권(民權. 시민/국민의 권리 옮긴이) 확대를 보장하는 개혁을 통한 문명화가 (동아시아가 옮긴이) 서양의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선책(善策. 뛰어난 계획이나 대책 옮긴이)임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민권자유를 보편적인 공리(功利. 이익과 행복 옮긴이)’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전제 정치를 반대하는 동아시아 제국의 개혁파/혁명파와의 제휴를 통한 공동의 목표 달성을 지지하였다.

 

정한론(征韓論)에서의 패배 이후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한 일본의 재야 세력과 뿌리가 같다는 이른바 대륙낭인(大陸浪人)’을 중심으로 한 민간 단체들이 조선의 개화파뿐 아니라 동학군의 지원에도 관심을 가졌고,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의 입헌파와 손문(孫文, ‘쑨원옮긴이)의 혁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이[] - 옮긴이) 이들 민권파 중에는(가운데는 옮긴이) 열강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반대하고 세계 헌법만국공의정부( 萬國共議政府. 모든 나라[ 萬國 ]가 함께 의논하여[ 共議 ] [ 세상을 다스리는 ] 정부 옮긴이 )’에 의한 세계 평화의 확립을 주장한 식목지성(植木 枝盛[ 일본어로는 우에키 에모리’ - 옮긴이 ])무상정부론(無上政府論) ( 서기 1880), 국가간의( 나라들 사이의 옮긴이 ) 교류는 인민과 인민간의 교제가 되어야 한다는 마장진저(馬場 辰猪[ 일본어로는 바바 다쓰이’ - 옮긴이 ])외교론 ( 서기 1880), ‘자신의 개화를 자랑하며 타국을 능멸하는열강을 비판하고 도의에 기초한 소국 일본의 길을 제시한 중강조민( 中江 兆民 [ 일본어로는 나카에 쵸민’ - 옮긴이 ] )외교론 ( 서기 1881) 등과 같이 진정한( 참된 옮긴이 ) 호혜 평등에 입각한 국제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성공적인 신라에 감복한(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오타인가? 아니면, ‘일본의 성공이라는 신화에 감복한이라는 뜻인가? 일단,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나, 원문을 그대로 싣고 이렇게 주석을 따로 단다 옮긴이) 조선의 개화파와 중국의 개혁 혁명파가 이들의 관심과 지원을 신뢰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 당연하였다.

 

그러나 민권 운동 자체도 국권 회복의 일책( 一策. ‘한 가지[ ] 계책[ ]’ : 옮긴이 )으로 추진되었던 만큼, 초기 민권파의 대부분이 공공연하게 대륙의 침략을 지지하는 국권파로 전신( 轉身. ‘[ ]을 굴러서 옮김[ ]’ 주의나 생활 방침을 바꿈 : 옮긴이 )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문제와 관련, 필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1) 조약 개정과 국회 개설 청원 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민권파의 단체 축전공애회(筑前共愛會)1881황실경애(皇室敬愛. 황실[왜국 왕실]을 받들고 사랑함 옮긴이)’민권즉국권(民權則國權[백성의 권리가 곧 나라의 권력 옮긴이])’의 헌칙(憲則. 법칙이나 법령을 통틀어 이르는 말. 여기서는 단체의 [기본] 원칙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을 내건 현양사(玄洋社)로 개편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이후(그 뒤 옮긴이) 조선의 개화파와 특수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 개혁파/혁명파의 성실한친구(순수한 배달말로는 동무” - 옮긴이)들이기도 하였지만, 실제 조선 합방(대한제국 멸망 옮긴이)과 대륙 침략에 크게 활약한 두산만(頭山 滿[왜어(倭語)로는 도야마 미쓰루” - 옮긴이])’/‘내전평양(內轉 平良[“내전 양평(內田 良平)”, 그러니까 우치다 료헤이를 잘못 적은 것 같다 옮긴이])’ (같은 옮긴이) ‘대륙 낭인(大陸 浪人)’의 총 집합체였다.

 

2) 1881시사소언( 時事小言 ) 에서 아시아 동방을 보호하기(지키기 옮긴이) 위한 일본의 아시아 맹주론(盟主論)’을 주장한 복택유길( 福澤 諭吉[ 왜어로는 후쿠자와 유키치” - 옮긴이 ] )’1885년 문명 개화와 함께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아시아의 악우( 惡友. 나쁜[ ] [ ]/사귀어서 해로운 벗 옮긴이 )’ 중국( 청나라 옮긴이 )과 조선을 사절하자는 유명한 탈아론( 脫亞論. ‘아시아[ ]에서 벗어나자[ ]는 주장[ ]’ 이라는 뜻 옮긴이 ) 을 발표, 1885년 이후 ( 근대 왜국 안에서 옮긴이 ) 급속히 확산된( 재빠르게 퍼져나간 옮긴이 ) 아시아 멸시 풍조를 대변함으로써, 사실상 아시아에 대한 침략 지배의 방향을 확고히 제시하였다.

 

3) 1885도덕/평등/사회 공중의 최대 행복을 강령으로 내건 동양사회당(東洋社會黨)’의 결성(서기 1882) 주모자로 체포된 경력의 소유자 준정등길(樽井 藤吉[왜어(倭語)로는 다루이 도키치” - 옮긴이])’백인종(서양 백인들 옮긴이)이 우리 아시아의 황인종(몽골로이드 옮긴이)을 진멸(盡滅. “몰살하여[] 멸망시킴[]” 모두 멸망시킴 : 옮긴이)하려는위기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 어짊/[도타운] 사랑 옮긴이)’을 존중하는 조선(근세조선 옮긴이)과 일본(근대 왜국 옮긴이)의 양 민족이 대등한 조건으로 합방하고, 청과 동맹하여 아시아 제민족을 해방시키자는 내용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을 발표하였다.

 

([다루이의 보충설명에 따르면 옮긴이] []을 합방에서 제외한 것은 [그가 제안한 합방이 옮긴이] 민족 단위의 합방이므로, 청과도 합방할 경우, 현재[서기 19세기 후반 옮긴이] [왕조와 만주족의 옮긴이] 압제하에 있는 漢土[한토. ‘한족(漢族)’의 땅(). 그러니까 중원으로도 불리는 제하(諸夏) - 옮긴이]/타타르/몽고[蒙古(몽골 옮긴이)]/西藏[서장. 서양에서는 티베트라 부르는 의 한자 이름 옮긴이]을 독립시켜야 할 터이나, 청이 그것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뚜렷하기 옮긴이] 때문이라고 한다. [다루이가 옮긴이] 청에 복속된 제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인식한 점이 주목된다 글쓴이의 주석)

 

준정(다루이 옮긴이)합방론 은 마침내 앞서 지적한 3) 동아시아(동양/아시아/황인종) = ‘중화서양’(백인종) = ‘의 대결 구도를 선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합방의 원리로 도덕과 ()’을 강조함으로써 힘과 패권의 상징으로 인식된 서양 문명을 지양하고 전통적인 중화의 가치, 중국’ 5)에 입각한 왕도의 이상 또는 동양 정신에 대한 회귀를 시사한 점에서 이후 아시아인의 아시아또는 아시아는 하나를 외치는 대() 아시아주의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해도 과언(過言. 지나친[] [] - 옮긴이)은 아닐 것이다.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 ‘중화[]’오랑캐[]’를 나누어서 바라보는 관념[] - 옮긴이)의 구도에서는 별로 강조되지 않은 인종이 크게 부각되고, 합방의 원리가 참여 민족의 대등 관계였다는 점에서, 합방론 자체는 단순한 중화 사상의 재현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제민족에 대한 압박자 백인 문명국이 오히려 황화론(黃禍論. “황인종[]이 재난[]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 황인종인 아시아인이 백인의 땅을 침략함으로써 해를 입히거나, [백인에게] 압력을 행사한다.”는 주장. 훈족과 몽골군의 유럽 침략이 이 주장의 뿌리라고 한다. 근대의 황화론은 훈/몽골 대신 제하[諸夏]와 일본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 옮긴이)을 유포하며 인종 차별을 자행하고, 미국에서는 중국인(청나라 치하의 한족[漢族]’ - 옮긴이)의 이민을 제약하는 배화법안(排華法案. 화교[. “중화권한족이민자]를 배척하는[] 법안[法案] - 옮긴이)’(Chinese Exclusion Act of 1882)이 통과되는 상황에서(서양 사회에서는 서기 1870년대부터 서기 20세기 초까지 황화론이 유행했고,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그 주장을 바탕으로 황인종인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했다 옮긴이), 앞서 지적한 식목지성(植木枝盛[우에키 에모리 옮긴이])이나 중강조민(中江兆民[나카에 쵸민 옮긴이])의 주장과도 상통할 수 있는 준정(樽井[다루이 옮긴이])의 구상이 아시아인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는 다분하며(많으며 옮긴이), 필자 역시(또한 옮긴이) 그의 순수성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루이 옮긴이)의 이상과 아시아의 구도는 그 순수성을 믿었다는 조선의 일부 민권 개화파의 협력하에 조선 왕(사실은 대한제국의 황제 옮긴이)을 일본 천황’(왜왕[倭王] - 옮긴이)의 제후로 전락시킨 합방’(대한제국 멸망/근대 왜국의 구한국 점령 옮긴이)으로 귀결되었다.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이[] - 옮긴이) 이것은 일본(근대 왜국 옮긴이) 당권파의 국권주의적 팽창 정책의 성공(?)이었고, 준정(樽井)의 구상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황실경애민권즉국권이란 헌칙을 가진 현양사를 중심으로 연대한 조선과 일본의 지사(志士)’들이 (馬場辰猪[‘바바 다쓰이’ - 옮긴이]의 말대로 인민[人民]과 인민간[人民間]의 교제[交際]’가 아닌가) 이 과정에 협력한 명분은 준정[樽井. (다루이 옮긴이)]합방론 이상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실제의 결과(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하고 근대 왜국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일 옮긴이) 크게(?) 항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이들의 순수성과 진의를 따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민권파들도 아시아의 연대론이 본질적으로 국권주의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숨기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의 대륙 침략도 기정화(旣定化. 이미[] 정해진[] 것이 됨[] - 옮긴이)된 시점에서 힘의 균형이 뒷받침되지 않은 만국공법 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천황(왜왕 옮긴이) 체제 일본의 훌륭한 국체를 찬미한 준정(樽井)합방론 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결국 그것은 일본(근대 왜국 옮긴이)에 의한 아시아의 속방화를 위한 외형적 명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 = 백인종을 로 설정한 천황의 천하’(동양/아시아 = 황인종)는 준정(樽井)대등이상(對等理想[대등한 (관계라는) 이상 옮긴이])’에 포장된 복택유길(福澤諭吉[후쿠자와 유키치 옮긴이])탈아(脫亞. 아시아[]에서 벗어남[] - 옮긴이)’의 구현이었다면, 조선과 일본의 재야(在野.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민간에 있음 옮긴이) ‘지사들은 전자를, (근대 왜국의 옮긴이) 군부와 관료들은 후자를, 각각 분담한(나눠서 맡은 옮긴이) 셈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합방론 에 무술변법(戊戌變法. 청나라의 개혁운동인 변법자강운동의 다른 이름. 무술년[戊戌年]인 서기 1898년에 실시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입헌군주제 실시, 군제 개혁, 과거제의 폐지, //상업의 진흥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서태후[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 戊戌政變, 1898]으로 103일 만에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 옮긴이)을 전후한 시기 강유위(康有爲)를 비롯한 (청나라의 옮긴이) 개혁파 역시 커다란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실현 가능성마저 진지하게 검토하였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다.

 

본래 청은 합방의 대상에서 제외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영도력이 전제된(민두기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 강유위 일파의 선전 기관 대동역서국[ 大同譯書局 ]에서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 로 번역/출판되면서 천황체제의 찬미나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영도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부분은 삭제하고, 온건한 다른 문구로 바뀌었다고 한다 글쓴이의 주석) 합방론 에 개혁파가 적극적인 호의를 표한 것은 민두기(閔斗基) 교수의 지적대로 중국(청나라 옮긴이) 분열/멸망이 임박하였다는 위기 의식에서의 최후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러시아([Ro]시야 제국 옮긴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일과의 연맹에 큰 관심을 가졌고, 개혁을 위해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옮긴이])객경(客卿. “손님[]으로서 벼슬[]을 사는 사람다른 나라에서 와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 옮긴이)’으로 초빙하는 문제까지 거론하였을 뿐 아니라, 사실상 중국(청나라 옮긴이)을 영//3국의 보호국으로 설정한 리처드(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 옮긴이)(리처드는 강[]일파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글쓴이의 주석)의 개혁론도 찬동하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동양의 왕도적 전통과 황인종 즉 동문동종(同文同種. “같은 문화를 지닌 같은 종족” - 옮긴이) ’ 의 연대와 해방을 강조하는 합방론 에 호의적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관심 역시 황종(黃種. “황인종[黃人種]”을 줄인 말 옮긴이)을 보전하기 위한 중/일 연맹을 주장하며 대륙 침략에 앞장서왔던 일본의 민간 단체 아세아협회(1900년 동아동문회[東亞同門會]로 흡수)의 적극적인 선전의 결과였다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중국(청나라 옮긴이) 개혁파와 조선 합방(대한제국 점령 옮긴이)에 협력한 조선(대한제국 옮긴이)의 일진회 일파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은 결국 민족국가에 대한 투철한 의식도 그 자체 완결된 독립성이 없으면 국가(나라 옮긴이)로서 의미가 없다.’는 것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단계, 즉 의연히(依然. []과 다름 없이 옮긴이) 중화 사상적 천하질서 의식을 근본적으로 유지한 것으로 해석하지(풀이하지 옮긴이)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은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민족 혁명의 아버지라는 손문(孫文. 쑨원 옮긴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손문/쑨원이 옮긴이) 항상(옮긴이) 일본 대륙 낭인의 긴밀한 협조와 존경을 받았고,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부족한(모자란 옮긴이) 것은 어느 정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신해혁명 직후 러시아 남하의 방지라는 명분하에(명분 아래 옮긴이) 일본에게 만주를 교급(交給. 한어[漢語]건네어 주다.”라는 뜻 옮긴이)’하는 대가로 혁명 정부(중화민국 정부 옮긴이)를 지원하겠다는 일본(근대 왜국[倭國] 옮긴이)의 제안을 수락한 것, (서기 옮긴이) 19195.4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손문 자신도 적극 반대하였던 이른바 일본의 () 중국 요구 21개조(중국의 주권을 광범위하게[폭넓게 옮긴이] 침해한)’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중일 맹약 11를 손문 자신이 일본의 대 중국 혁명의 지원이란 조건으로 1915년에 동의하였다는 것은 과연 먼저 (나라 안에서 옮긴이) 혁명을 진행하고 후에([] 뒤에 옮긴이) 양외(攘外. 외세[]를 물리침[] - 옮긴이)를 도모하는혁명 전술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이런 손문1924년 국공 합작을 단행한 직후 일본을 방문, “왕도 문명을 지키며 서구의 패도 문명(覇道 文明. 무력이나 권모술수를 바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문명 옮긴이)에 대항하는 아시아 제민족의 공동 전선 결성을 주장하는대아시아주의 를 강연하면서 당분간만몽(滿蒙. ‘만주[滿]’와 몽골[] - 옮긴이) 문제의 불거론(거론하지 않음 옮긴이)에 동의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가 일단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혁명이 성공하면 베트남(비엣남 옮긴이)/버마(오늘날의 미얀마’ - 옮긴이)/네팔/부탄 등은 반드시 (제하, 그러니까 중화민국에 옮긴이) 귀부(歸附. ‘돌아와서[] 따름[]’ 스스로 와서 복종함 : 옮긴이)하여 중국의 번병(藩屛. ‘울타리[]나 대문 앞의 가림 담장[]’ 나라를 지키는 먼 밖의 감영이나 병영 천자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조공국 : 옮긴이)이 되기를 원할(바랄 옮긴이) 으로 기대하였다면, 그의 아시아 질서관의 기본 발상이 무엇에 기초하였는가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한국인인 나는 이 때문에, 쑨원을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중화사상을 따르는] 황색 제국주의자로 여기며, 그가 중화권이 아닌 다른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존경받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 옮긴이).

 

이러한 의식 구조라면, (‘한족[漢族]’들이 옮긴이) 혁명파의 배만(排滿. 만주족[滿]을 배척함[]. 원문에는 배만[拜滿]’으로 나오나, ‘[]’자는 절하다/고마워하다라는 뜻이므로, 중화민국을 세운 제하 혁명파의 말/행동 이들은 만주족과 청나라를 부정했다 과 맞지 않아 이렇게 고쳤다 : 옮긴이) 혁명의 구호에 감정적인 열정을 보였던 신해혁명 이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혁명 이후에는 옮긴이) 만주족은 물론 청조(淸朝. 청 왕조 옮긴이)에 복속하였던(청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옮긴이) 제민족(예를 들면, 가뤼[‘’]/[‘티베트’]/위구르인/회족[回族]/[‘’]/몽골인 옮긴이)의 독립 문제에 전혀(조금도 옮긴이)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당연하겠지만,

 

대아시아주의와 왕도 이념의 미명하에 강행된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의 허상이 많은 일본인들을 감동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2차 대전 옮긴이) 초기에는 서양 제국주의 통치하(지배 아래 옮긴이)에 있었던 아시아 제민족에게도 일정한 해방의 의미가 없지도 않았던 것,

 

그리고 이 허상을 타도하고 민족 해방을 쟁취한 직후 중국 공산당이 소수민족에게 자결권과 연방제를 승인한다.’는 종래의 정강(政綱. 정당이 국민에게 실현을 공약한 정책의 큰 줄기 옮긴이)을 버리고 민족 자치권(民族 自治權)의 보장으로 후퇴하면서 중화 민족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옮긴이) 허상(이것을 다른 말로는 다민족 통일국가론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지나[支那] 정부와 지나 공산당이 갈마[‘역사’]를 비트는 기본 원리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옮긴이)을 관철하고 있는 것도 모두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자에게는 관용의 미덕문명 보급의 의무란 명분으로 (침략/정복/점령과 옮긴이) 지배의 논리를, 힘의 한계를 인식한 자에게는 절제의 논리, 약자에게는 보편적인 문명 가치에 대한 참여와 그 수호란 이름으로 복종(따름 옮긴이) 의 논리, 단절과 고립을 원하는 자에게는 외(: 외부와 바깥 옮긴이)/(: 옮긴이)/(: 다름 옮긴이)이적(夷狄) = 금수(禽獸. 날짐승과 길짐승 행실이 무례하고 추잡한 사람 : 옮긴이)’로 여기며 배척 또는 저항할 수 있는 논리를, 정복과 팽창을 원하는 자에게는 무한한 통합의 원리를 모두 제공하지만, 국가와 민족(나라와 겨레 옮긴이) 심지어는 개인간의(사람과 사람 사이의 옮긴이) 대등(옮긴이) 관계를 인정하는 논리는 결여된 중화사상.

 

제민족의 통합과 평등한 평화 공존’, 그리고 민족 구성원 모두의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고상한 민족주의의 이상에 비하면 중화 사상은 너무나 저급한 상황의 정당화 체계에 불과한(지나지 않는 옮긴이)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상한 민족주의의 이상이 과연 인류 역사상 언제 어디에서 실현되었던가 …… 그것을 발전시켰다는 유럽의 몇 나라간에서의 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민족 내부의 완전한 평등과 자유는 일단 차치(且置. 우선[] [내버려] [] - 옮긴이)하면], 그것 역시 (제국주의/군국주의 같은 옮긴이) 강자의 정복과 팽창의 논리를, ‘후진 문화에 대한 선진 문명의 독선적인 보급 의무, 사실상의 정복과 침략을 민족 통합의 성전(聖戰. 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 - 옮긴이)’으로 합리화해준 한편, ‘성스러운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무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 그리고 민족의 자존과 통합에 불가결하다.’(없어서는 안 된다는 옮긴이) 민족 의식 또는 민족 정서의 고양도 대부분 배타(排他. []을 배척함[] - 옮긴이)의 본능과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비이성적인 감성에 주로 호소한 결과가 아닌가 …… 그리하여 그것은 민족간의 대결과 불화를 오히려 조성한 것이 아니었는가 …….

 

(여기까지 읽다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도 중화사상과 다를 바 없이, ‘악역을 맡은 이념일 뿐이란 말인가? - 옮긴이)

 

물론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옮긴이) 이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그것의 옮긴이) 극히 잘못된 왜곡에 불과하다고(지나지 않는다고 옮긴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타()와 이류(異類. 서로 다른[] 무리[] 서로 다른 종류나 종족 : 옮긴이)에 대한 동물적 공포와 증오, 여기서 유래하는(비롯되는 옮긴이) 상대의 부정 및 차별과 지배 욕구, 가치의 상대성을 부정하는 유일/최고/최선의 우월 의식, 이에 기초한(바탕을 둔 옮긴이) 허구적인 사명 의식, 상대의 부정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비합리적 생존 양태, 이것을 모두 본원적으로(근본부터/뿌리채 옮긴이) 청산하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인류에게 어떤 이상을 약속하는 이념과 사상도 실제 중화 사상과 본질적인 차이를 자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것이 극복된 단계에서는 그토록 정치(精緻. ‘자세하고[] 촘촘함[]’ 정교하고 치밀함 : 옮긴이)하고 세련된 사상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 이상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정문길/최원식/백영서/전형준 엮음, ‘()문학과지성사펴냄, 서기 1995)에서 발췌

 

​- 단기 4357년 음력 7월 18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