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중화 사상과 민족주의 – 3

개마두리 2024. 8. 21. 21:48

3. /이와 동아시아의 질서

 

전장(이 글의 제 2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중국천하(순수한 배달말로는 누리” - 옮긴이)’는 그 구체적인 공간과 범위는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주체인 ()’의 민족적 실체도 유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나라 옮긴이)와 민족(겨레 옮긴이)’(천자의 군현제하[군현제 아래 옮긴이]에 통일된 단수)’(각기 그 군왕[君王 - 임금]의 지배를 받는 복수)로 구분되며, ‘()’의 본질적 속성이야 어쨌든 그들이 에게 불신(不臣.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음[] - 옮긴이)’의 태도를 보이거나 의 안녕을 위협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1 당 왕조의 신하인 옮긴이) ‘방현령(房玄齡)’이 당태종(唐太宗. 이름은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은 이름이 아니라 시호다 옮긴이)의 고구려 원정(고구리 침략 옮긴이)을 반대하면서도

 

1) 불신(不臣),

 

2) 백성의 침량(斟量.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림 옮긴이)

 

3) 장기적으로 보아 중국의 우환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이란 3가지 조건 중에서(가운데 옮긴이) 하나만 해당되어도 그 이적의 주멸(誅滅. 토벌하여 없앰 옮긴이)에 하루 만(1/10000. 순수한 배달말로는 거믄’ - 옮긴이) 명의 생명이란 대가를 지불해도 부끄럽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구당서[ 舊唐書 ] [ ] 66, 방현령전( 房玄齡傳 ) ) 바로 이 원칙을 재천명한 일례(한 예 옮긴이)에 불과하다(지나지 않는다 옮긴이).

 

2)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3)도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지만 (억지로 옮긴이) 백 보를 양보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을지 모른다면, 여기서 중화사상이 일단 의 정치적 통합과 정체성의 확립 및 그 위협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배격의 논리가 될 수 있으며, 이 문제와 관련 흔히 거론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임금[]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뜻 옮긴이)’는 바로 이 측면을 구호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등한 평화 공존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이 분명한 1)이 중화 사상의 불가결한 일부였다면(중국에서 [다른 나라와의 - 옮긴이] 대등한 관계의 예[: 관례/예절]'항례[抗禮. 직역하자면, "맞서 싸우는 자에게 (차리는) ()"라는 뜻이다 - 옮긴이]' 또는 '적례[敵禮. 직역하자면, "적대하는 자에게 (차리는) "라는 뜻이다 - 옮긴이]'로 표현된 것은 적대 관계가 아닌 평화적 대등 관계는 그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데, 사실 이런 사회에서 민족 또는 국제간의 대등한 평화 공존의 논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 글쓴이의 주석), 중화사상은 단순한 (. 여기서는 우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의 주체적 확립과 생존의 논리에 그칠 수 없다는 것도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배자는 항상(옮긴이) 가능한 한(할 수 있는 데까지 옮긴이) 피지배자의 철저한 복속을 원하게(바라게 옮긴이) 마련이지만, 그 현실적인 강도는 쌍방의 힘의 강약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는데, 전통 시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도 높은 지배의 방식은 군현 지배였고, 가장 약한 지배는 그 군장(君長. 족장 또는 임금 옮긴이)에게 관작을 수여(授與. 상장이나 훈장 따위를 줌 옮긴이)하여 형식적인 신속(臣屬. 신하[]로서 엮임[] 신하로서 예속됨 : 옮긴이) 관계만 설정하는 이른바 책봉/조공 체제였다.

 

따라서 (. 여기서는 중화[中華]”를 줄인 말로 쓰였다 옮긴이)’의 강약에 따라 (. “오랑캐”. 여기서는 한족[漢族]”이 아닌 다른 겨레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옮긴이)’에 대한 신속도 군현의 설치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에서 극히 형식적인 책봉 관계(이 관계는 오늘날로 치면 국제연합[UN]을 비롯한 국제 기구가 한 나라의 독립이나 새 정권 수립을 인정하는 일이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에 가깝다 옮긴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추진되었지만, 여기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 이후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책봉/조공 체제였지만, 대체로 이것은 의 일방적인 강압의 결과라기보다는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관계였으며, 오히려 가 더 적극적으로 이 관계를 원한(바란 옮긴이)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천하의 귀의는 천명을 받은 가장 중요한 증거였던 만큼, 수명천자(受命天子. [하늘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천자[天子 : 직역하자면 하늘의 아들진 제국 이전의 ()’/진 제국 이후의 황제’] - 옮긴이)를 자임(自任. 스스로[] 맡음[] 어떤 일에 대해 자기가 적임자라고 여김 : 옮긴이)하는 의 천자에게 의 신속(臣屬)은 단순한 허영심의 충족이 아니라 지배의 정당성을 제고하는 데 불가결한(뺄 수 없는 옮긴이) 요건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불신(不臣. 신하[]으로서의 예를 지키지 않음[]’. 여기서는 < 제하[諸夏] 안이나 밖의 이민족이 제하 임금[자칭 천자’]의 신하가 아니라고 말하며 들고 일어나거나 제하를 치거나 외교 관계를 끊는 일 >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의)의 예는 (이를 보거나 듣고 자극받은 다른 나라나 겨레의 옮긴이) 또 다른 불신을 고무(鼓舞. ‘북을 치며[] 춤을 춤[]’ 격려하여 기세를 돋움 : 옮긴이)하게 마련이라면, (중화사상을 따르는 제하[諸夏] 왕조는 옮긴이) 일부의 불신도 방치할 수(내버려 둘 수 옮긴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천자는 그것이 비록 형식에 불과할(不過. 지나지[] 않을[] 옮긴이) 뿐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인 손실을 의미하는(뜻하는 옮긴이) 것일지라도 가능한 모든 의 예외 없는 조공의 실현에 부심(腐心. ‘마음[]을 썩힘[]’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마음을 쓰고 애씀 옮긴이)한 것은 당연하였다.

 

순전히 무역을 목적으로 찾아온 외국 상인들(예를 들면, 소그드 사람들이나 아랍인들이나 동아프리카 사람들이나 포르투갈 사람들 옮긴이)이 왕왕(往往. 이따금/때때로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관리에 의해서 조공사(朝貢使.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 : 옮긴이)’로 둔갑된 것도(조공 자체가 무역[그러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인 공무역 옮긴이]의 기회가 되었고, 무역을 조공의 형식으로 유지시킨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특히 수[]에서 又以西域多諸寶物 令裴矩往張掖 監諸商胡互市 啖之以利 勸令入朝 自是西域諸蕃 往來相繼 所經州郡 疲於迎送 靡費以萬萬計[ “또 서역(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여러 가지 보물로써, 배구(裴矩)에게 영을 내리기를 이따금 크게 베풀어 교역을 위해 (수나라에) 온 여러 오랑캐 장사꾼들을 살피고, (그들을) ()로써 꾀며,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서역의 여러 번(: 나라)들에게 (수나라의) 궁전에 들어와 알현하고, (그럼으로써 사신을 비롯한 사람들이) 오고 가며 (수나라와 서역이) 서로 이어질 것을 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나라의) 주와 군 가운데 (그들이 지나가는) 길이 있는 곳은 (그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보내는 일로써 지쳤고, (나아가 그들 때문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큰 액수로 돈을 써서 낭비가 심했다.” - 옮긴이의 번역].” [ 수서(隋書) 』 「 식화지( 食貨志 ) ].”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예이다 글쓴이의 주석) 상대가 전혀(조금도 - 옮긴이) '조공'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상대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표현된 외교가 조공으로 기록되기도 하는 것은( 조셉 F. 플레처[Joseph F. Flectcher], “서기 1386 ~ 1884년의 제하[諸夏]와 중앙아시아”[China and Central Asia 1386 ~ 1884] < The Chinese World Order 所收 >에 의하면[따르면 옮긴이], 특히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군주들은 중국[ 사실은 제하(諸夏)인 명나라와, 만주족의 나라인 청 왕조 옮긴이 ]의 외교적 우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 ] 영락제[ 永樂帝 ] 역시 [ 그 군주들에게 옮긴이 ] 대등한 문서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명사[ 明史 ] 에는 그들이 모두 조공국[ 朝貢國 ]’ 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글쓴이의 주석) 모두 이 때문이다.

 

한편 가 굴욕적인 신속(비록 형식적인 것일지라도)을 감수 또는 자청한 이유로는(까닭으로는 옮긴이) 우선 예상되는 무력 침공(제하[諸夏] 왕조나 중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민족 왕조의 침략 옮긴이)을 면하기 위한 목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표면적인 수사(修辭. ‘[][갈고] 닦다[]’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조리 있게 만드는 일. 또는 그런 기술 : 옮긴이)야 어찌 됐든 왕도(王道. 인덕[어진 덕]을 근본으로 다스리는 도리. 유가가 이상으로 삼는 정치사상이다 옮긴이) 구현의 이상이란 사실상 무력 침공(내지는 침략 옮긴이)을 합리화할 수 있는 모든 논리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실제 수()/() 시대의 고구려(고구리. 좀 더 정확히는 전기 고리[高麗]’ 옮긴이)나 원대(元代. 원나라 때 옮긴이)의 일본처럼 불신의 태도를 고집한 가 대대적인 침공에 시달린 예도 역사상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 군장 역시(또한 옮긴이) 천자가 주재하는 천하질서에 참여함으로써(오늘날로 치면 국제연합[ UN ] 회원국이 되고 그 기구가 요구하는 국제 표준 이나 국제법 을 따르는 것 과 같다 옮긴이)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자기 나라의 옮긴이) 내외(內外. []과 밖[] 안팎 : 옮긴이)에 과시할 수 있었던 것(오늘날로 치면 한 나라의 정권이 나라의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합법적이고 정통성을 지닌 정권이자 정부로 인정받는 것과 같다 - 옮긴이)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자에게 신례(臣禮. 신하[]로서 지켜야 할 예의[] - 옮긴이)를 갖추는 대가로 받는 관작은 그들에게 국내의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는 정치적 지위를 보장하였으며, 가장 선진된 문물 수용 창구의 독점은 그들이 권력 기반의 강화에 필요한 여건들을 확보하는 데 위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군장권(君長權. 족장[]이나 임금[]의 권력[] - 옮긴이)이 무축(巫祝. 무당, 그러니까 무속인. 여기서는 제사장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옮긴이) 또는 전사적(戰士的) 족장의 성격에서 고대 국가의 왕권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율령 제도(律令制度. 법률과 제도 옮긴이)와 유교/불교의 수입은 결정적인 역할(구실 옮긴이)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過言. 지나친[] [] - 옮긴이)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와의 항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특정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의 주장에도 천자의 권위는 어느 정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책봉 체제의 형성만으로도 중화 사상은 그 현실적인 구현에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에 신례를 갖춘 가 많은 경우 주변 제집단(여러 무리 옮긴이)과의 관계를 중화사상과 거의 같은 논리와 형식으로 설정하면서 스스로 ’, 또는 중국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은 더욱 흥미있는 사실이다.

 

우선 고구려(올바른 발음은 고구<>’.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이름으로 쓰이면 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옮긴이) (제하[諸夏] - 옮긴이)의 예를 들어보자.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는 남북 양조(兩朝. [] 나라의 왕조[] - 옮긴이)로부터 모두 책봉을 받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자신이 포함되면서 중국 황제가 중심인 대천하를 인정한 것이다(그러나 전한//후한과 여러 번 맞부딪치며 싸운 나라인 고구리가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천하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다 옮긴이).

 

그러나 그들(고구리)은 시조가 천제(天帝. 천신[天神]/하늘의 신 옮긴이)’ 또는 황천(皇天. 크고 넓은 하늘/하늘의 신 옮긴이)’의 아들인 천손국(天孫國. 천손의 나라 옮긴이)인 자신이 중심인 소천하를 상정하고 그 안에 포함된 제집단을 자신에 조공하는 속민(屬民. 어디에 딸린[] 백성[] - 옮긴이)’ ‘(예컨대 신라를 동이[東夷]’로 표현하듯이) 간주하였으며, 비록 칭제(稱帝. [임금을] 황제[]라 일컬음[] - 옮긴이)는 하지 않았으나 대왕’(또는 태왕[太王]’ - 옮긴이)으로 자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고구려로부터 남이(南夷. “남쪽[] 오랑캐[]”라는 뜻 옮긴이)’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의 경우도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 왕은 예하(隸下. 딸린 사람/소속된 사람 옮긴이)를 왕()/()로 책봉하며 대왕’(또는 진왕[辰王]’ - 옮긴이)을 자칭하였고, 적어도 탐라(오늘날의 제주 특별 자치도 옮긴이)를 조공국으로 여긴 것은 확실한 만큼 (백제가 옮긴이) 고구려와 비슷한 소천하’(작은[]‘천하’ - 옮긴이)의 중심국을 자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라 역시(또한 옮긴이) 통일 이후 전국을 95소경으로 재편성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 소천하의식을 어느 정도 가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오랜 중국의 군현 지배(사실은 제하[諸夏] 왕조와 한화[漢化]한 유목민 왕조의 지배 옮긴이)로부터 독립한 월남(越南. 비엣남[Vietnam]의 한자 이름 옮긴이) 역시 (서기 옮긴이) 10세기 이후에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과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대등 의식을 과시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라 일컫고[] 연호를 정함[建元] - 옮긴이)의 전통을 지켰으며, 스스로를(자신을 옮긴이) ‘중국’, 자국인(自國人. 자기 나라[自國] 사람[]. 다른 말로는 자국민’ - 옮긴이)화민(華民. “중화[] 세계의 백성[]” - 옮긴이)’ 또는 한인(漢人)’으로 칭하기도(일컫기도 옮긴이) 하였을 뿐 아니라 주변의 소국들(예를 들면, 오늘날의 비엣남 중부에 있었던 참파[Champa]’ 왕국이나 라오스 옮긴이)에게 조공 체제를 강요하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소(. 작은 옮긴이) ‘중화’, ‘천하의 세계를 형성하였다고 한다(월남에서는 중국을 중국또는 중주[中洲. 세상의 중심[]에 있는 큰 땅[] - 옮긴이]’로 부른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그 나라에서는 옮긴이] 중국인[‘한족(漢族)’ - 옮긴이]은 주로 북인[北人. 제하(諸夏)가 비엣남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제하에 사는 사람들은 비엣남 사람들에게는 북쪽 사람이다 옮긴이]’([비엣남 사람인 옮긴이] 자신은 남인[南人. 비엣남이 제하의 남쪽에 있으므로, 비엣남에 사는 사람은 남쪽 사람이다. 이는 배달민족이 자신의 나라를 동쪽 나라동국(東國)”이라고 일컬은 것과 같은 이치다 옮긴이]) 또는 당인(唐人. “당나라 사람이라는 뜻. 제하 한족을 일컫는 말로 널리 쓰였다 옮긴이)’/‘청인(淸人. “청나라 사람이라는 뜻. 청 왕조의 지배를 받던 명나라 유민들의 후손이자, 제하 한족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옮긴이)’으로 불렀다고 한다. 글쓴이의 주석).

 

이것은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략) 일본은 중국 율령제의 도입으로 왕토왕민(王土王民)’의 사상(‘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은 없고, 임금의 백성이 아닌 사람도 없다.’는 사상 옮긴이)과 양천(良賤. 양민과 천민 옮긴이) 신분제를 기초로 천제(天帝. 하늘의 신/천신 옮긴이)의 명을 받은 천황천하’ = 일본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다스리는 옮긴이) 국가 체제를 확립하면서 변경을 화외(化外. “교화[]의 바깥쪽[]”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로 규정, 그 주민인 동북(관동 지방을 뺀 본주[本州 : 혼슈] 섬 동북쪽 옮긴이)의 하이(蝦夷, 에미시)와 구주(九州 : 규슈 옮긴이)의 준인(隼人, 하야도)로 분류하여 /로 구성된 천하의 구도를 일본 열도 안에 축소/재현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양천제(良賤制) 신분 질서와 관련 수직적 구조를 수평적 구도와 결합함으로써 천(천민 옮긴이)과 이적에 대립된 양(양민 옮긴이)의 확립 계기로 이해하는 견해도, ‘중앙과는 이질적인 비가치(非價値. 가치[價値]가 없음[] - 옮긴이)/야만/미개’(하고, - 옮긴이) 따라서 부정/극복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을 설정하고 이미 과거가 된 문명화와 통일 정복의 과정을 새로운 현실의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고대 국가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견해도 모두 일리가 있다면,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화이 사상의 원초적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중국 왕조(옮긴이) ‘에 대해 조공 형식을 취하는 의 위치를 인정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의해서 각기 설정된 소천하역시 로 구성되면서 양자의 관계 역시 동일한 조공 형식으로 규정되었다면, 중화사상은 동아시아 세계의 천하와 그 안에 분화된 소천하의 내부까지 모두 규제하는 원리였다고 해도 과언(過言. 지나친[] [] - 옮긴이)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동아시아 전체가 상호 대등 관계가 있을 수 있는 서층적(위계질서가 위에서 아래로 층층이 갖추어진 옮긴이) 질서가 되었지만, 각자 구축한 소천하(작은 천하 옮긴이)’가 대부분의 경우 현실과 유리된 허상에 불과하여([전략] 특히, 19세기 월남(비엣남[Vietnam] 옮긴이) 응우옌 조[한자로는 완조(阮朝)’. - 옮긴이]의 자롱제[한자로는 嘉隆帝(가륭제)’]는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 등 모두 13개국을 조공국으로 주장하였지만, 베트남[비엣남 옮긴이] 중부 고원에 위치하였던 [소수민족들이 세운 작은 나라인 옮긴이] ‘화사국[火舍國]’수사국[水舍國]’도 스스로 [비엣남의 옮긴이] 조공국이란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유인선(劉仁善) 교수의 설명), 주변국과 불필요한 명분적 경쟁과 충돌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린 관계의 형성도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예컨대 통일신라[후기신라 옮긴이]와 일본의 관계처럼) 상황의 변화에 따른 희화적인 작태도 면할 수 없었다(그나마 화이[華夷]’로 구성된 소천하[小天下]’ 형식의 지주[支柱. 받침대 옮긴이]였던 준인[隼人]과 하이[蝦夷][]’화내[化內]’ [교화. 사실은 동화 - 옮긴이]가 사실상 완료되고 신라[新羅][같은 옮긴이] ‘제번[諸蕃 : 여러 오랑캐 나라 옮긴이]’도 소멸된 가마쿠라[鎌倉(겸창)] 막부 시대에 교토[京都(경도)]의 조정과 막부가 각각 중하[中夏 : 제하(諸夏) 사람이 자기 나라를 높여서 부르는 말. “중화와 같은 뜻이다 옮긴이]’/‘동이[東夷]’로 대칭되어 다시 소천하의 형식을 유지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 글쓴이가 인용한 우에테 미치아리[植手通有(식수통유)]의 글).

 

그러나 소천하내부에서(안에서 옮긴이) ‘를 자처하며 의 조공을 받는 천하’ = ‘의 구체적인 실체가 앞에서 검토한 중국’ 3) 즉 우공 구주(禹公九州)의 공간에 중국’ 2)의 확대 즉 한족이 건국한 왕조로서 중국’ 5)의 문화적 가치를 수호하였다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며, 실제 중화 사상이 상정(想定. ‘생각해서[] 정함[]’ 어떤 상황이나 조건을 가정적으로 생각하여 판정함 : 옮긴이)한 동아시아 질서는 바로 이것이 원형이었다.

 

그러나 진()/() 이후 중국’ 3)의 반(순수한 배달말로는 가봇’ - 옮긴이) 이상 또는 전체가 이적에 의해서 점령된(그리고 지배받은 옮긴이) 기간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근 700년 이상에 달하며, 더욱이 (북위를 세운 타브가치[탁발선비]족이나 몽골인은 뺀 옮긴이) 들은 중국’ 5)의 문화적 가치의 적극적인 수용에 성공하면서 스스로 소중화를 자부하던 동아시아 농경 지배의 여타(餘他. 그 밖의 다른 것/그 나머지 옮긴이) ‘들에 비해 중국’ 5)의 문화적 가치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북방의 유목민들이었다.

 

이것은 실로 중화사상에서 가장 경고하는 만이활하(蠻夷猾夏. 오랑캐[蠻夷]가 중하[]를 어지럽힘[] - 옮긴이)’의 국면이었다. 제하(諸夏) 즉 한족의 저항 즉 양이(攘夷. 오랑캐[]를 물리침[] - 옮긴이)’는 당연한 의무였고, 실제 (유목민이 세운 옮긴이) 정복 왕조의 초기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 [] 임금[]을 섬기지[] 않음[] 원래의 임금이나 나라를 부당하게 없애고 새로이 왕위에 오르거나 새 나라를 세운 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 옮긴이)’의 신절(臣節. 신하[]가 지켜야 할 절개[] - 옮긴이)과 결합하여 적어도 출사(出仕. ‘벼슬을 해서[] 나감[]’ 벼슬을 해서 관아에 나감 : 옮긴이)를 거부하는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정복자 로 인정하면서 타협하고 만 것이다. 즉 정복자와 피정복자는 만이활하현실을 용하변이(用夏變夷. “중화[]를 써서[] 오랑캐[]를 바꿈[]” 제하[諸夏]의 풍속으로써 오랑캐의 풍속을 바로잡음 : 옮긴이)’로 인정하는 데 모두 동의하였는데, 여기서 그들이 주로 들먹이는 논거는 이적(夷狄. 오랑캐 옮긴이)도 본래 선왕(先王. 옛날[]의 어진 임금[] 옮긴이)의 후예였다는 것, ()과 문왕(文王)도 각각 동이지인(東夷之人[동이의 사람 옮긴이])’서이지인(西夷之人[“서쪽 오랑캐인 서융의 사람 옮긴이])’이었다는 것과 아울러 특히 중국’ 5)의 개념이 항상(옮긴이) 강조되었다. 도 이제는 중국’ 5)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勿論. []할 것도 없이[], - 옮긴이) 춘추시대의 제하(諸夏) 집단(무리 옮긴이)도 이미 단일한 종족 구성이 아니었지만(한 예로, []와 월[]은 화북 지방에 있는, 서주[西周]의 후신인 동주[東周] 왕실과 진[]나라에게 오랑캐취급을 받았고, []목동의 자식으로 불릴 정도로 기마민족/유목민족과 관련이 깊은 나라였다 옮긴이), 이것을 중심으로 발전/형성된 한족(漢族)이란 실제 역사상 동아시아 주변에서 활동한 거의 모든 종족의 부단한(不斷. 끊어지지[] 않는[]’ 꾸준하게 잇대어 끊임이 없는 끊임없는 : 옮긴이) 흡수와 융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過言. 지나친[] [] - 옮긴이)이 아니며, 오늘날(서기 1992옮긴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소수 민족의 조상 중(가운데 옮긴이) 상당 부분은 한족의 형성에 합류한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정복자 ’(예를 들면, [‘티베트’]족 계통인 족이나, 몽골족 계통인 선비족이나, 튀르크족 계통인 타브가치[탁발선비]’옮긴이)가 한족 사회를 통치(내지는 지배 옮긴이)하려면 한인(漢人) 사대부의 협력이 불가결하고, 이것은 곧 중국’ 5)의 문화적 가치와 전통의 적극적인 보호/존중을 의미하였다면(그러나 타브가치 족의 화북 지방 지배가 이른바 한화 정책이 일어난 뒤에도 타브가치 족이나 훈나[‘흉노’]족이나 선비족 같은 유목민족들의 문화/정체성이 유지되는 결과를 불러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받아들인 문화가 지배층인 타브가치 족 뿐 아니라 화북 지방에 남아있던 한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오히려 한족이 타브가치 족의 문화나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는 오늘날의 연구결과를 생각하면, 516국 시대나 남북조 시대나 수나라 때나 요//몽골/청나라 때 이른바 한족이 정복자/지배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바꿔야 했던 상황을 인정하고, 이른바 한화만 강조할 게 아니라 한족호화[胡化 : 유목민족화/서역화]’도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유목민족/기마민족의 한족문화와 전통 보호/존중도 어디까지나 지배자가 필요해서 내놓은 정책일 뿐이고, 그것이 지배자인 유목민족들을 송두리째 한족으로 바꾸지는 않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옮긴이),

 

어차피 관료의 특권적인 신분을 포기할 수 없는 사대부들이 비록 화이(華夷)감정까지는 완전히 없을 수는 없어도 사실상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될 정도로 한화(漢化)되어 가는 조정을 로 인정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위에서도 말했듯이, 최근의 연구는 이민족한화가 과장된 것이거나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추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족사대부들이 이민족의 정복왕조를 적어도 겉으로는 - ‘로 받아들인 까닭은 이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한화해서가 아니라, 이민족이 지배자가 되어 창칼로 청나라는 총칼과 대포로 - [사대부들에게] 자신들을 따르라고 명령/강요했기 때문이며, 사대부들이 그것을 거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제하[諸夏] 땅을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달아나지 않는 한 빠져나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옮긴이).

 

그렇다면 비교적 한족에게 가혹하였던 원()[몽골 제국의 원나라 옮긴이]에서도 다수의 불사파(不仕派. 벼슬하지[] 않은[] 무리[] - 옮긴이)에도 불구하고(‘다수의 벼슬하지 않은 무리가 있었음에도’ - 옮긴이) 결국 많은 한인 사대부가 출사를 선택한(고른 옮긴이) 것도(그러나 송[: 남송]이 망하였을 때 많은 사대부가 충절을 지킨 것과는 달리, [: 몽골]에 대한 충절 때문에 [중화사상을 내세우며 한족의 부흥을 강조했던 나라인 옮긴이] []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고[아주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옮긴이] 한다 글쓴이의 주석),

 

구축호로 회복중화(驅逐胡虜 回復中華. “오랑캐 종놈들[胡虜]을 몰아내고[驅逐] 중화[中華]를 되찾자[回復].”라는 뜻 옮긴이)’의 구호를 내걸며 원(몽골제국 옮긴이)을 타도한 명() 태조(주원장 옮긴이)조차 사해내외(四海內外. 온 누리와 그 안팎 옮긴이)가 원에게 모두 복종한 것은 인력(人力. 사람의 힘 옮긴이)이 아니라 원이 천명을 받은 때문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도,

 

청대 중기 이후의 (‘한족[漢族]’ - 옮긴이) 사인(士人.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옮긴이)들이 조선(근세조선 옮긴이) 학인(學人. 배우는[] 사람[] 학자나 문필가 : 옮긴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청조(淸朝 : 청나라 조정 옮긴이)(제하[諸夏] 지배라는 옮긴이) 현실을 인정하였다는 것도,

 

강렬한 중화 의식을 바탕으로 만주족의 구축(驅逐. ‘몰아내고[] 내쫓음[]’ 어떤 세력이나 해로운 것 따위를 몰아 쫓아냄 : 옮긴이)을 호소한 태평천국의 격문 봉천토호격포사방론(奉天討胡檄布四方論) 보다 수천 년 이래의 중국 예의(禮儀)/인륜(人倫.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위와 아래를 구분한 인간 관계나 질서 옮긴이)/시서(詩書. 유교 경전인 시경[ 詩經 ] 서경[ 書經 ] 을 통틀어 일컫는 말)/전칙( 典則 : 법칙. 꼭 지켜야만 하는 규범 옮긴이 )’에 기초한( 바탕을 둔 옮긴이 ) 명교체제( 名敎體制. ‘유교체제를 일컫는 말 옮긴이 )의 수호를 위하여 그 진압을 호소한 한인 관료 증국번(曾國藩)토오비격(討奧匪檄) (청나라의 옮긴이) 한인(漢人) 신사층(紳士層 : 선비/유학자/지식인 계층 옮긴이)이 결집하였다는 것, 그리고 ( 나중에는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는 옮긴이 ) ( ‘한족[漢族]’ - 옮긴이 ) 혁명파의 배만( 排滿 : ‘만주족[滿]을 물리치자[]’는 뜻 옮긴이 ) 종족 혁명론을 ( 청나라의 옮긴이 ) 입헌파가 무의미한 것( 의미 없는 것 옮긴이 )’으로 반대한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여기서 필자는 이러한 태도에 대한 찬반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다. 다만 관점에( 특히 화이론[ 華夷論.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주장() - 옮긴이 ] ) 따라서는 한간( 漢奸. “한족[ 漢族 ]” 출신으로서 한족또는 한족이 세운 나라를 배신하고 다른 나라의 제하[ 諸夏 ] 침략이나 지배에 협력한 매국노를 일컫는 말 : 옮긴이 )’으로 매도될 수 있는 이들의 현실 긍정이 오히려 중화사상의 불가결한 요소인 중국’ 5)의 개념에 의해서 합리화되었던 만큼,

 

한족(漢族)의 강한 자기 주장의 원리로서 이적의 교화/정복까지 무제한 용인할 수 있는 중화사상이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적에 의한 한족의 정복/지배를 합리화하는 역할(구실 옮긴이)을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것만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이에 비해 소중화를 자부하던 (특히 그 지식인들) ‘중국’ 3)을 정복한 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었다(나는 그것을 흥미있는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옮긴이). 이것은 만주족이 중원에 청을 건국하였을 때 특히 강조되었다.

 

이들은 만주족이 중국’ 3)의 공간에 왕조를 세웠다고 해서 그들을 , 그 왕조를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웠고, 그 나라는 옛 명나라의 땅인 이른바 중국을 점령해서 2세기 이상 식민지로 다스렸으니, 이런 인식은 아주 정확한 것이고 올바른 것이다 옮긴이 ),

 

만주족 의 철저한 파괴로 중국’ 3)에는 더 이상 중국’ 5)가 존재하지 않고(난 이 인식만큼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명나라는 망했어도 한족들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그 정통을 계승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라고 주장하였다(나는 이 의견에 가봇[‘()’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은 동의하고 가봇은 동의하지 않는다. 만주족의 점령이나 직접 지배를 피한 근세조선 땅에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 문화가 많이 살아남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학문이자 다른 나라의 이념이라는 것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하며, 성리학을 뺀 근세조선의 다른 문화는 명나라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옮긴이).

 

이제 그들은 중화를 받들던 소중화( 小中華. 작은[] 중화[中華] - 옮긴이 )’가 아니라 그들이 세계의 중심인 유일한 중국이요 였다.

 

17세기 이후 조선 사대부들의 북벌론( 北伐論. ‘북쪽[]을 치자[]는 주장[]’ 근세조선의 북쪽에 있는 후금/청나라를 치자는 주장 : 옮긴이 )과 숭정(崇禎) 연호( 명나라의 연호 옮긴이 )의 계속 사용( 물론 이것은 사적 ),

 

철저한 성리학적 의리관(義理觀)에 입각하여 중국의 유교 성현을 배향( 配享. 문묘나 사원에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 옮긴이 )하는 문묘( 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옮긴이 )를 재정돈하고 송시열( 宋時烈 )이 사사로이 세운 만동묘( 萬東廟 )의 정신을 계승하여 임란시( 서기 1592 ~ 1598: 옮긴이 ) ( 명군의 옮긴이 ) 파병으로 이른바 재조지은( 再造之恩. “다시[] 만들어 준[] 은혜[]”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 옮긴이 )’을 입었다는 명()의 신종(神宗)과 그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제사를 위하여 대보단(大報壇)이 국가에 의해서 설치된 것,

 

활발한 송사(宋史) 명사(明史) 의 편찬을 통하여 중국 문화의 정통 계승자임을 과시한 것, 조선의 역사를 천자의 위상에서 서술하려는 주체적 역사 의식 등은 모두 이러한 자존 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는 바로 청을 로 인정할 수 있었던 논거, 중국’ 5)의 강조였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 유봉학 교수의 최근(서기 1990년대 초 옮긴이) 연구는 많은 자료를 수집/제시하고 있지만(제시하지만 옮긴이), 다음과 같은 황경원(黃景源)[ 서기 18세기에 활동한 근세조선의 문신이자 문장가 옮긴이 ]과 이종휘(李種徽)[ 서기 18세기에 활동한 근세조선의 학자. 양명학을 받아들인 사람이기도 하다 옮긴이 ]의 주장만 소개해도 족할 것이다.

 

1) “소위(이른바 옮긴이) ‘중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옮긴이) 예의(禮義)일 뿐이다. 예의가 밝으면 융적(戎狄. ‘한족[漢族]’들이 서융[西戎]’이라고 불렀던 화북 지방 서북쪽의 민족과, ‘북적[北狄]’으로 불렀던 몽골초원/‘만주의 민족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 그러니까,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옮긴이)도 중국이 될 수 있지만, 예의가 밝지 못하면 (‘한족옮긴이) ‘중국융적이 될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때로는 중국이 되고 때로는 융적도 되는 것은 본래 (그 기준이) 예의의 밝음과 밝지 못함에 있기 때문이다.” ( 강한집(江漢集) [ ] 5,여금원박서( 與金元博書 ) )

 

2) “지금 중국을 구하자면 마땅히 여기[ 조선(朝鮮) ]에 있는 것이지 그쪽[ 청국(淸國) ]에 있는 것이 아니다. [ …… ] 중국이 중국인 소이( 所以. 까닭 옮긴이 )는 사람에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산집(修山集) [ ] 10,제동국여지승람후( 題東國與之勝覽後 ) )

 

이와 같은 자존 의식이 당시 왜란( 6년 전쟁 옮긴이 ) 및 호란( 후금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옮긴이 )에 이어 명 제국( 明 帝國 )의 몰락으로 야기된 국내외의 위기적인 상황( 위기상황 옮긴이 )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조선( 근세조선 옮긴이 )에게 일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여기서 홍대용( 洪大容 )/이익( 李瀷 ) 등에 보이는 것과 같이 화이 사상의 틀을 벗어난 화와 이의 대등한 가치의 인식을 통한 주체적인 자아의 논리로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5)가 건재할 뿐 아니라 더 이상 외부 문물의 수용이 불필요하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중국보다 훨씬 선진된 단계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다시 대청( 對淸. 청나라[ ]에 대한[ ] - 옮긴이 ) 종속 의식으로의 퇴영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지만, 그것이 중국’ 5)와는 이질적이면서도 체제의 근본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된 서양로 인식하는 발상으로 연결되었을 때, 비극적인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열풍과 ( 서양과 근대 왜국을 그 대상으로 삼은 옮긴이 ) 쇄국의 명분은 예상된 순서에 불과하였다(예상된 순서에 지나지 않았다 - 옮긴이).

 

한편, 월남( 비엣남[ Vietnam ] - 옮긴이 )의 황제들도 청을 이적(夷狄. 오랑캐 옮긴이)의 왕조란 이유에서( 까닭으로 옮긴이 ) 특히 경멸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지만( 유인선[ 劉仁善 ] 교수의 논문인 중월관계와 조공제도[ 中越關係朝貢制度 ] 179쪽에서 인용함 글쓴이의 주석 ), 명말( ‘명나라 말기를 줄인 말 옮긴이 ) 이후 공식 관계를 단절한, 따라서 형식적으로도 청의 조공 체제 밖에 있었던 일본의 경우 청과 이적의 등치나 이에 따른 중국’ 5)의 정통 계승자란 자부심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덕천 시대( 德川時代. 도쿠가와 시대. 그러니까 도쿠가와 집안이 다스렸던 시대인 에도 시대 옮긴이 )( 일본인 옮긴이 ) 지식인들은 조선(근세조선 옮긴이)에 대한 강한 우월감을 갖는 한편(왜국[倭國]의 국수주의 학문인 왜국 국학[國學]’이 이런 감정을 밑바탕으로 삼아 자라났다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문화의 선진성을 인정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모화(慕華. ‘중화[]를 바람[]’ 제하 한족의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르고 사모함 : 옮긴이)를 비웃는 단계를 거쳐 일본이 중국이요 중화임을 자랑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에도 시대 말기의 일본에서는 옮긴이) ()/()화하중국(華夏中國)’으로 칭하는(일컫는/부르는 옮긴이) 것조차 < ‘국체(國體. 나라의 체면 옮긴이)’의 오욕(汚辱. [명예를] 더럽히고[] 욕보임[] - 옮긴이) >으로 비난되기도 하였다.

 

이 주장들이 인종이나 지역과 무관한(관계가 없는 옮긴이) 문화를 기준으로 한 화이구분론(華夷區分論)에 입각한(立脚. ‘바탕[]으로 선[]’ 어떤 사실이나 주장에 근거를 두고 그 입장에 선 : 옮긴이) 점에서는 청과 조선 사대부들의 논리와 일단 상통한다.

 

이 문제와 관련, 항상 거론(擧論. 어떤 사항을 이야기의 주제나 문제로 삼음 옮긴이)되는 태재춘대(太宰 春臺[다자이 슌다이. 서기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에도 시대 일본의 유학자 옮긴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라.

 

사이(四夷. [] ‘오랑캐[]’. 그러니까 자신을 중화로 일컬은 제하[諸夏] ‘한족[漢族]’들이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같은 주변의 이민족들을 깎아내린 말 옮긴이)를 이적으로 부르고 (그들이 옮긴이) 중화(‘한족의 나라 - 옮긴이)로부터 천시된 것은 예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옮긴이) 중화의 인()[중화의 사람 한족(漢族)’ : 옮긴이]일지라도 예의가 없으면 이적과 같고, 사이(四夷)의 인()[사이의 사람 이민족 : 옮긴이]일지라도 예의가 없으면 중화의 인()과 다르지 않다.”( 경제록( 經濟錄 ) [ ] 2 )

 

청과 조선 사대부들에게 있어서(‘청과 조선 사대부들에게로 써야 한다 옮긴이) ‘예의는 곧 중국’ 5)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인 특히 수호 학파(水戶學派[미토 학파 옮긴이])[에 속하는 옮긴이] 그것은 고유 사상으로서의 신도(神道)’ ‘국학(國學. 원래는 <자기 나라의 고유한 갈마[“역사”]//풍속/믿음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나, 왜국에서는 국수주의를 바탕으로 왜국의 갈마와 문화를 추켜세우는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옮긴이)’ 또는 그것에 기초하여(그것을 바탕으로 옮긴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순수성을 지켜온 우수한 국체(여기서는 나라의 체제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를 의미하였다(뜻했다 옮긴이).

 

그러므로 그들은 중국’ 5)의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중국(사실은 중국 왕조로 부를 수는 없는 나라인 청나라 옮긴이)에 대한 우월감도 과시할 수도 있었으며,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산록소행(山鹿 素行[야마가 소코. 서기 17세기에 활동한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병학자[兵學者] - 옮긴이])(서기 1622~ 1685)과 같이 고대 일본의 한반도(코리아[Corea]반도 옮긴이) 지배(지배라는’ - 옮긴이) 허상을 회고하면서 그 복속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5)신도(神道)’의 일부였고, 그 자체가 국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중국(사실은 청나라 옮긴이)과 조선(근세조선 옮긴이)은 배격(排擊. 남의 의견/사상/행위/풍조 따위를 또는 그 자체를 물리침 옮긴이)해야 할 이적은 결코 아니었다.

 

반면 서양국체의 근본을 위협하는 기독교(예수교. 좀 더 정확히는 개신교와 천주교 옮긴이)를 신봉(信奉. [사상/학설/교리를 옳다고 여기며] 믿고[] 받듦[] - 옮긴이)한다면 그들은 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이 주도하는 중국 또는 조선과의 연대(동맹 또는 합체[合體]’)를 통한 존왕양이(尊王攘[])’와 쇄국은 그들의 의무였을 것이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