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남아시아의 문화 우주
일본이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에서처럼 인도(정식 국호 ‘바라트 연방 공화국’. 줄여서 ‘바랏’/‘바라트’ - 옮긴이)에서도 타고르 시대의 창조적 개인들은 고대/중세/근세의 다양한 서구의 자료들과 토착 자료로부터 사상과 방법론을 조사하고 선정해서 결합시키는 일을 해왔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 사실이 남아시아의 지식인들을 동아시아의 동시대인들과 상당히 다른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 나라 전체의 학교(순수한 배달말/새로운 배달말로는 ‘가르치는 터’라는 뜻인 ‘갈터’ - 옮긴이)와 대학, 나아가 고등 교육과 사상에 있어 영어가 행사한 지배적인 역할이었다.
예를 들어, 타고르는 그의 고향인 벵골 이외의 인도 지역에서의 강연은 언제나 영어로 했다. 20년대와 30년대 인도의 가장 인기 있는 잡지는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 - 옮긴이)에서 나온 영어 월간지 『 모던 리뷰( Modern Review ) 』 로서, 이 잡지는 타고르의 많은 논문과 단편(단편소설 – 옮긴이)과 시를 게재했다(타고르 시인은 시만 쓴 게 아니라, 단편소설도 써서 발표한 사람이었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다 – 옮긴이).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 옮긴이)의 ‘아메다바드’에서 발행된 간디의 주간지 『 젊은 인도( Young India ) 』 도 다른 주요 신문들이 그러하듯이 영어로 씌어졌다. (서기 – 옮긴이) 1921년 (인도의 – 옮긴이) 3억 5백만 전체 인구 중(가운데 – 옮긴이) 문자 해독 인구(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나아가 글의 뜻도 알 수 있는 인구 – 옮긴이)는 1천 9백 30만 명이었고, 그 중(그 가운데 – 옮긴이) 2백 40만 정도의 인도인들은 영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로부터 열 해가 흐른 뒤인 – 옮긴이) 1931년(이 해에 근대 왜군[倭軍]인 관동군이 이른바 ‘만주’로 쳐들어가 그 땅을 점령한다 – 옮긴이)에는 문자 해독 인구 중 영어 사용 인구의 비율이 21년의 12.5%에서 14.8%로 늘었다. 공무원 중 좀더 영향력 있는 직책이나 전문가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도록 요구됐기 때문에, 영어의 인기는 무엇보다도 유창한 영어 구사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에 기인(起因. 일이 일어나는 원인 – 옮긴이)했다.
인도인들의 생활에서 영어의 중심적 역할은 일부 관측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실제로 이 나라의 14개 주요 언어 지역 가운데 어떤 지역의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입된 전(全 : 온 – 옮긴이) 인도의 언어로 지식인들이 대화하는(이야기를 나누는 – 옮긴이) 매우 오래된 남아시아의 관습을 새로운 형태로 계승한(이어받은 – 옮긴이) 것이다. (아리아인 정복자들이 가져와 그들의 후예들이 발전시킨) 산스크리트어가 옛 인도의 궁정에서 이런 목적에 사용됐다.
모슬렘 정복자들과 관리들이 이 나라를 지배했던 중세 시대에, 그들은 페르시아어(‘파르시[Farsi]’라고도 한다 – 옮긴이)를 전 인도의 의사 교환 수단으로 소개했다. 폐허화된 무굴제국의 기초 위에 자신들의 정권의 안정화를 추구했던 영국은 실제로 1830년대까지는 (인도 사람들에게 – 옮긴이)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계속 사용하게(쓰게 – 옮긴이) 했다.
높은 신분의 힌두인들이 이들 수입 언어를 배울 태세를 갖추는 것은 그들의 세속적인 지위 향상에 실질적으로 중요했다. 무굴제국의 치하에서 많은 힌두인들은 페르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그 일부는 고위직에 올랐다.
영국이 영어로 페르시아어를 대체하고(Maucaulay의 추천에 따라) 영어로 하는 고등교육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벵골의 학식 있는 힌두 사회에서 점차 늘고 있는 수요에 그들이 응답한 것이기도 했다(이러한 남아시아 패턴과 아주 대조적으로, 중국의 [‘한족漢族’ - 옮긴이] 관료들은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 애썼고, 계속 이어져온 북아시아의 정복자들[예를 들면, 선비족이나 탁발부나 주션족 – 옮긴이]에게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하려 했다).
이전의 페르시아어의 확산과 마찬가지로, 영어의 확산은 일차적으로 군사적 정복과 그 이후의 행정적 통합의 결과였다.
모슬렘 정복자들은 3천 년 전 아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남아시아 대륙의 북서쪽에 자리잡고(자리하고 – 옮긴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산악 지역 및 고원에서 왔지만, 영국인들은 동쪽과 남쪽과 서쪽의 해변에서부터 내륙으로, 북쪽을 향해 올라가는 반대길로 왔다.
그 결과 영국 문화의 영향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지역은 앞의 두 문화 체계의 변방에 있던 지역, 즉 아리아인들의 영향이 부분적이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영향은 훨씬 더 엷었던 저 남쪽 드라비디아(드라비다인의 땅 – 옮긴이)의 ‘타밀’ 지역이나 힌두와 모슬렘(올바른 명칭은 ‘무슬림’ - 옮긴이)의 정통성이 북부보다는 훨씬 약한 동부의 벵골 같은 지역들이었다.
이에 따라 마지막으로 영국의 영향 아래 들어오게 된 지역은 페르시아의 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지역인 ‘라호르’, ‘러크나우’, ‘델리(오늘날의 뉴델리 – 옮긴이)’ 등 북부 도시들이었다.
1849년 펀자브의 정복과, 1856년 우드의 병합 및 1857년 반란(세포이의 항쟁 – 옮긴이) 이후 델리를 복속시키기까지는 영국이 남부와 동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뒤 – 옮긴이) 거의 1세기가 걸렸다.
영어의 영향력의 도입은 중세의 페르시아 문화의 카펫(양탄자. 여기서는 ‘영향력’/‘압력’을 빗대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을 가장자리에서부터 걷어올림으로써 그 밑에 눌려 있던 지역 언어와 그들의 문자(글자 – 옮긴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유럽의 현대 언어와 문학이 라틴어의 그늘 아래에서부터 되살아나고 있던 시대(중세 말 또는 근세? - 옮긴이)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 언어로 된 작품과 인쇄는 19세기 인쇄술의 도입과 선교사들과 동양학자들의 문법서와 사전의 편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수천 개의 학교, 수백 개의 단과대학 및 수십 개의 종합대학의 설립에 의해 크게 고무됐다. 동부의 벵골, 남부의 타밀과 텔루구, 서부의 마라타 및 구자라트 그리고 북부의 우르두 및 힌디어가 가장 활발한 성장을 보였다.
인쇄, 출판 및 현대적 교육 기관의 진출로 인도에서 사상의 순환은 급속히 늘어났고, 옛 사상들의 새로운 조합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힌두어(힌디어? - 옮긴이) 베단타 일신론, 또는 좀더 짜여진 샤이바 전통이나 바이슈나바 헌신 숭배 학파 가운데 하나, 아니면 대지의 여신들 주위를 맴도는 샤트카 종교 집단 등에 가까워지는 쪽을 선택할(고를 – 옮긴이) 수 있었다.
북인도에서는 특히 이슬람의 유일신주의가 힌두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수피와 바이슈나바 신비주의 사이의 상호 관계는 11세기 이래 진전돼왔다. 서부 인도에선 고대 자이나교의 전통이 매우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렇듯 복잡한 고대와 중세의 언어 및 전통의 망 위에 근대 영국의 언어, 문학, 지적 전통이 첨가됨으로써 2세기경(‘20세기 경’을 잘못 적은 건가? - 옮긴이)에는 극히 복잡한 남아시아의 문화적 우주가 만들어졌다. 각 지역이 그 자체의 언어로 그 자체의 문학적 삶을 수행하는 일종의 봉건적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그 체제를 넘어 2개 국어나 3개 국어를 말하는 문학과 정치의 지도적 인사들은 영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전 인도 또는 전 세계적인 활동에 참여했다.
아마도 이러한 체제의 가장 근접한 역사적 유사성은 라틴어가 시실리(시칠리아 – 옮긴이)에서 노르웨이에 이르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언어였지만, 시인들과 음유시인들은 그들 각자의 고장의 언어로 말했던 중세 후기의 유럽일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는 유럽에서 사라진 반면 남아시아는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주요 ‘매개’ 언어로 영어를 사용했을(썼을 – 옮긴이) 뿐 아니라, 타고르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분열되기 전의 영국령 인도(그러나 영국이 침입/침략/점령하기 전, ‘인도’가 케랄라/타밀나두 같은 남부와, 무굴 제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북부와 중부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 옮긴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한 오늘날(이 글은 동파키스탄이 오늘날의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에서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되기 전에 쓰여졌다 – 옮긴이)까지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교는 더 멀리 나갈 수 없다.
지역적 상황의 다양성이 일본이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보다는 인도에서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까지 한 것처럼 직업과 직업 사이의 차이를 살펴보는 쪽보다는 영국령 인도(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 옮긴이)의 5개 주요 지방의 주요한 인물들의 사상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남아시아의 지적 풍경의 전반적 모습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
이 다섯 개 지역 중(가운데 – 옮긴이) 둘은 북부 인도의 본거지인 (‘힌두스탄’이라고도 알려진) 연합주(united provinces)와 펀자브이다. 나머지 3개 지역은 연안 지역인 벵골, 마드라스,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 옮긴이)로 영국은 이 지역에서부터 내륙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영국의 지배를 더 오랫동안 받아온 이들 연안 지역 사람들은 내륙 사람들보다 문자 해독률이 높았고, 영어 및 서구 사상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서기 – 옮긴이) 1920년대에는, 연안 지역의 인구는 전체 인도 인구의 3분의 1밖에 안 됐지만, 전체 문자 해독 인구의 2분의 1, 전체 영어 구사 인구의 5분의 3을 차지할 수 있었다.
벵골의 상황은 근대 서구의 영향력이 훨씬 더 깊게 침투했음을 보여주는데, 인도 전체 인구의 15%밖에 안 되는 이 지역 사람들이 전체 인도의 문자 해독 인구의 22%, 영어 구사 인구의 32%를 차지했다.
( → 2 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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