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벵골
히말라야 최고봉 남쪽의 고원 위에서 발원해서 북서쪽으로부터 흘러오는 갠지스강(현지 이름은 ‘강가 강’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의 진흙탕물과 북동쪽의 ‘브라마푸트라’ 강이 흘러와 만나는 곳에 ‘벵골’이라는 비옥한(기름진 – 옮긴이) 델타(삼각주[三角洲]. 강과 바다가 만나는 어귀에 강물이 날라 온 흙/모래가 쌓여서 이루어진 땅. ‘충적평야’라고도 한다. 대개 세모꼴[‘삼각형’]이라 이렇게 부른다 – 옮긴이)가 수천 년 동안 뻗어 있다.
선사 시대부터 이 강들과 그 강들의 많은 지류들로 인해 이 주(州)와 이 주 위의 지방 및 벵골만 연안 지방 전역에 배나 거룻배를 통한 수상 무역이 가능했다.
이곳은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같은 정복자들에게는 풍부한 전리품이었고, 그 이후의 (영국인 – 옮긴이) 총독들이 동인도회사의 영향력과 무역권을 확대할 수 있었던 안전한 기반이었다.
번성하고 있던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 - 옮긴이)라는 항구는 영국령 인도(영국의 인도 식민지 – 옮긴이)의 사실상의 수도로서 급속하게 그 지역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동인도회사와 사람들의 언어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동인도회사 관리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의 후원에 의해 자극받은 인도(정식 국호 ‘바라트’ - 옮긴이)의 새로운 지식인 계급이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영어와 벵골어는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경우에 따라서는 산스크리트어나 페르시아어(파르시. 무굴 제국 시절에는 제국의 공용어였다 – 옮긴이)를 모두 구사하는 탁월한 작가들도 나타났다. 영국과 유럽 문명을 연구하고 과거부터 내려온 인도의 전통을 재해석하고 재결합시키는 일에 앞장선 것은 이들과 이들의 후손이었다.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시 – 옮긴이)의 민족주의 지도자인 ‘곡할레(Gokhale)’가 (서기 – 옮긴이) 1810년대에 “벵골이 오늘 생각하는 것을 전인도(온 인도 – 옮긴이)는 내일(來日. 순수한 배달말/옛 배달말로는 ‘올재’ - 옮긴이) 생각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맞는 말이었다.
19세기를 통해 벵골의 이중 문화 지식인들은 종교와 정치와 문학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위한 색조를 선정했으며, 이러한 색조는 인도 아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영어를 말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라모훈 로이(Rammohun Roy)’와 ‘드벤드라나트 타고르(Debendranath Tagore)’의 저작물들을 통해, 그리고는 ‘케셥 천더 센(Keshub Chunder Sen)’과 ‘비베카난다(Vivekananda)’의 직접적인 방문이나 강연 등을 통해 힌두 사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풀이 – 옮긴이)이 마드라스, 봄베이, 펀자브 등지로 전해졌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인도 국민회의(바라트[‘인도’]가 독립하고 나서는 바라트의 정당이자 여당이 되었다 – 옮긴이)를 조직하기 위한 첫 번째 움직임이 캘커타 대학 졸업생들에 의해 회람 형식으로 일어났다.
문학에 있어서조차 벵골 작가들의 혁신과 실험은 다른 북부 인도의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어휘와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벵골 르네상스’가 인도 전체에 영향을 끼친 까닭은 대체로 모든 교육받은 인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던 기본적인 문제, 즉 그들이 영국인 지배자들의 문명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리고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를 벵골의 상류 신분의 힌두 지식인들이 해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벵골이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떨어진 첫 번째 지역이었고, 그 주요 도시인 캘커타는 1912년까지 광대한 영령(‘영국령’을 줄인 말 – 옮긴이) 인도와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 옮긴이)의 수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벵골인들은 이런 문제에 직면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수십 년 동안 벵골의 상류 신분 힌두인들은 영국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구축해왔는데 이 공생 관계는 처음에는 상업과 관청에서 이루어졌고, 그리고 마침내는 문화와 사상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됐다.
인도나 동양(아시아 – 옮긴이)의 문화가 정신적인 것이고 따라서 영국이나 서구의 ‘물질 문명’과 전적으로 상보적(相補的. 서로[相] 보완하는[補] 관계인[的] - 옮긴이)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이러한 벵골 – 영국의 공생 관계로부터 나왔고, 벵골의 가장 위대한 시인인 ‘타고르’는 이러한 생각을 가장 우아하게 주창한 사람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된 수십 년간은 힌두인과 영국인의 관계에 주요한 정치적 변화를 몰고 왔고, 그로 인해 그 자신의 고장에서 타고르의 위치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영어 교육과 그에 따른 영국의 정치 이념의 확산은 1900년경 목청 높은 다수의 온건 민족주의자들을 낳았다. 1898년에서 1905년 사이 보수적인 ‘커즌 경(Lord Curzon)’이 이끈 영국의 관료들은 이들 영국화한 계급을 ‘단절된 소수’로 파악하고 1905년(이 해에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을 강요당하고 외교권을 잃는다 – 옮긴이) 벵골을 힌두 지역과 모슬렘 지역으로 분할함으로써(나눔으로써 – 옮긴이) 이들과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들 계급은 결국 1912년 그 분할을 철회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 나타난 반영국 감정은 영국의 지배와 인도 문화에 대한 영국의 영향 모두를 거부하는 새로운 극단주의적 민족주의 학파를 만들어냈다. 타고르는 이들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떨어져나왔고 극단주의자들은 그를 ‘투항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오히려 종교적 인도와 정치적 영국 사이의 동반 관계란 높은 이상을 벗어던지고 (극단적인 민족주의/국수주의에 – 옮긴이) 투항한 사람들이었다.
이때부터 타고르는 정치적 민족주의를 비판할 때는 언제나 벵골에서 고립을 면치 못했지만, 인도 문화와 이념을 시적으로 표현하거나 국외(國外. 나라 밖 – 옮긴이)에서 인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자를 만들어낼 때는 언제나 칭송받았다.
벵골의 한 극단주의 지도자도 인도가 아시아 정신 문명의 지도자라는 타고르의 이념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이 이념을 이 시기의 타고르 자신보다도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타고르처럼 ‘브라모 사마지’ 가문(집안 – 옮긴이)의 일원인 ‘오로빈도 고즈(Aurobin-do Ghose)’는 7세부터 20세까지 영국에서 교육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인도 정부(영국의 인도 총독부 – 옮긴이)에 문관으로 들어갈 뻔 했으나, 1893년 ‘바로다’ 공국에 자리를 잡고 산스크리트어와 힌두 사상을 진지하게 공부하기(배우기 – 옮긴이) 시작했다. 에딘버러(스코틀랜드의 중심지인 도시 – 옮긴이)에서 공부했던 중국의 ‘구훙밍(辜鴻銘[고홍명 – 옮긴이])’처럼 오로빈도 고즈도 해외(국외/나라 밖 – 옮긴이)에 나간 적이 없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자기 나라의 옛 문화를 더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러한 사랑을 유창한 영어로 표현했다.
오로빈도의 동료 민족주의자들 중(가운데 – 옮긴이)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알았고, 그 때문에 분할 반대 논의(벵골 주를 둘로 쪼개자는 영국 관료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논의 – 옮긴이) 기간중 나온 그의 강력한 연설과 글들은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아시아의 어머니로서의 인도, 세계 질병의 치유제로서의 인도 – 아시아의 정신성’ : 타고르의 아시아 강령에 있어(강령에서 – 옮긴이) 핵심적인 이러한 부분은 오로빈도가 1908년 쓴 사설 「 아시아의 역할 」 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도가 아시아 문명의 고향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자명한(自明한. 증명이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정도로 명백한 – 옮긴이) 사실이었다(그러나 이 말대로라면 서아시아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지역, 그리고 동아시아에 속하는 요서 지방과 화북 지방과 화중 지방과 사천[四川] 지방에서 나온 문명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다. 그 여섯 지역에서 나온 문명은 “아시아 문명”이 아니란 말인가? - 옮긴이).
“과거 세기에 있어(과거 세기에 – 옮긴이) 인도는 세계와 떨어진 일종의 사상과 평화의 은신처였다. [ …… ] 인도의 사상은 삽시간에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가 문명을 창조했고, 그러한 사상의 아들들은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었다. 철학은 그 무한한 지혜 가운데 빗나간 파편들을 기반으로 하고 과학은 그 지적 산물의 쓰레기에서 생겨났다.” 지금은 인도와 (다른 – 옮긴이) 아시아(의 나라/민족들 – 옮긴이)가 유럽을 그들(인도와 다른 아시아 나라들 – 옮긴이)의 높은 문명으로 끌어올릴 때였다.
조용하고 명상적이며 침착한 아시아의 정신은 (자연과학에서) 유럽의 발견을 받아들여 그 발견의 과장됨과 고의적인 착오를 시정할 수 있으며 아시아의 정신만이 세계를 불밝힐 수 있다. [ …… ] 그러므로 유럽이 정체에 직면해 자기 자신의 과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허한 몽상과 헛된 실험 및 쓸데없는 투쟁으로 스스로를(자신을 – 옮긴이) 소진시키고 있는 이때 인류의 진보라는 일을 담당하는(맡는 – 옮긴이) 것이 아시아의 책무(責務. 직무에 따른 책임이나 임무 – 옮긴이)이다. 그리고 인류사에서 그러한 시간은 지금 오고 있다.
인도 아시아 문명에 대해 갖는 오로빈도의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이상적이고 대체로 희망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극단주의적 민족주의의 수사와 많이 닮았다.
오로빈도의 이상주의는 너무나 순수해서 1908 ~ 1909년 그는 요가 수련자가 되기 위해 정치와 영령 인도를 떠나 퐁디셰리의 프랑스 조계로 주거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동서의 차이를 주장하는 남인도 출신 사람들(드라비다인들 – 옮긴이) 가운데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벵골의 지성사에서 그가 갖는 중요성은 이상화된 그의 민족주의가 인도 – 아시아의 ‘정신성’을 정치화하는 첫 단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타고르는 초기의 비정치적인 성격의 이런 이념을 지지했지만, 1928년 그들의 유명한 인터뷰 이후에는 오로빈도와 그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타고르는 “그대는 세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대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기다리네.”/“인도는 그대의 목소리를 통해 세계에 말할 것이다.”라고(하고 – 옮긴이) 오로빈도에게 바치는 시에서 썼다.
벵골이 종교적 아시아주의에서 정치적 아시아주의로 전환한 두 번째 단계는 1917년부터 그가 숨진 1925년까지 인도의 주요한 민족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한 ‘치타란잔 다스(Chittaranjan Das)’의 부상(떠오름 – 옮긴이)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스는 1908년 알리포르 폭탄 공모 사건에서 오로빈도를 변호해 그가 테러리스트 활동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벗기는 데 성공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수지맞는 변호사 활동 외에 다스는 벵골어 문학 잡지를 내면서 타고르의 문학적 이념이 지나치게 서구 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비판하고, 그 대신 중세 벵골어 시의 힌두적 경건주의를 칭송했다.
유려한 연설가이며 진지한 애국자([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 옮긴이)였던 그는 1917년 정치에 입문한 후(뒤 – 옮긴이) 곧 전국적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처녀(여기서는 ‘첫’/'처음으로 하는'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정치 연설에서조차 타고르를 이렇게 비판했다.
“모호하고 흐리멍덩한 ‘보편적 인간성’이란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바탕을 둔 – 옮긴이) 이 반민족적 이념은 도대체 구체성이 없다. 각 민족이 그들 사이에서 진정한(참된 – 옮긴이) 친밀감과 형제애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각 민족이 각기 한 민족으로서의 잠재적인 인간성을 개발해야만 한다. [ …… ] 여러분은 진공 속에서 보편적 인간성을 창출(創出. 처음으로 만들어내거나 지어냄 – 옮긴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배달말의 문법/어법에 맞는 글이 된다 – 옮긴이) 다스는 인도가 ‘동방이란 이념’을 주창해야 한다는 타고르의 생각에 동의했다.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결합시킬 것을 주장하는 일본과 중국(중화민국 – 옮긴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스 – 옮긴이)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천재성에 부합하는(딱 들어맞는 – 옮긴이) 것만을 받아들이고, 우리 영혼에 맞지 않는 것은 배격해 완전히 던져버려야 한다.”
1922년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된(뽑힌 – 옮긴이) 다스는 국민회의 연례 회의에서 행한 긴 연설의 일부를 범아시아 동맹에 대한 제안에 할애했다.
우리는 세계 운동과 접촉을 유지해야 하며, 전세계(온 누리 – 옮긴이)의 자유 애호민(愛好民. 사랑하고[愛] 즐기는[好] 사람들[民] – 옮긴이)들과 계속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인도가 지금 결성 과정에 있는 대(大)아시아 연맹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편협한 기반 위에서 성립된 범이슬람 운동이 전 아시아 인민 연맹에게 자리를 양보해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리라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시아의 억압받는 인민들의 연합이다. 인도와 나머지 아시아 국가(나라 – 옮긴이), 아니 나아가 인도와 세계 모든 자유 애호민 사이의 우정과 사랑의 유대와, 공감과 협력의 유대는 이 세계에 평화를 가지고 올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다스가 범이슬람 운동을 언급한 것은 타고르의 인도 – 아시아 이념에서 암시적으로 나타나고, 오로빈도의 그것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났던 힌두 사상이라는 기반에서 그가 벗어나 있는 거리를 보여준다.
타고르가 1924년 중국(중화민국 – 옮긴이)과 일본을 여행한 후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 - 옮긴이)에 돌아왔을 때, 다스는 그 기회를 범아시아 감정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자신의 제안을 정교하게 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대중 일간지 『 전진(Forward) 』 의 사설에서 “우리는 이 칼럼에서 줄곧 아시아 연방의 필요성을 촉구해왔다.”고 선언했다.
“아시아에는 문화와 문명의 공동체가 있었고 현재도 있다. 우리는 같은 관점에서 삶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 세계에 종교적 스승들을 배출했다.”
고대 문화의 연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구의 지배와 인종주의라는 “우리 모두를 함께 겨냥하고 있는 위협”이다.
캘커타에 도착한 날, 타고르는 “아시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외쳤다. 이틀 후, 다스는 그의 외침에 호응해 그의 말에 실질적 모양을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아시아의 흑인종(피부가 갈색이거나 고동색인 남아시아 사람들을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홍인종, 황인종이 수시로 만나게 하자. 그들이 서로의 바람과 고통(괴로움 – 옮긴이)을 공유할 수 있게 하자. 그들로 하여금 서로 단결해 아시아가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찾게 하자. 아시아는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중국에 대한 타고르의 메시지와 그 기본적인 전제는 1924년의 벵골의 힌두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대체적으로 그러한 메시지와 전제는 정치적 수단에 의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이 첨부되곤 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우선 순위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스는 범아시아 연맹이란 형식을 즉시 만들 태세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벵골의 더 전투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인도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는 이것을 ‘비실용적(실지로 쓰기에 알맞지 않은 것 – 옮긴이) 계획’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의 견해는 다스의 『 전진 』 보다 좀 덜 세련된 스타일과 철자를 사용하는 그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어 일간지로서, 필자나 독자도 상류층보다는 중류층이 많은 『 암리타 마카르 파트리카 』 를 통해 표현됐다.
『 파트리카 』의 사설은 타고르가 중국(중화민국 – 옮긴이)에서 직면했던 수많은 비판을 전혀(조금도 – 옮긴이)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박사가 중국 여행에서 인도로 돌아온 것을 충심으로 환영한다. 그 나라에서 그가 받은 엄청난 존경과 대접에 우리 동포들(인도 사람들 – 옮긴이)도 아주 감사하게 여기리라 생각한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 사설은 그의 메시지에서 아무런 잘못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시아는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의 출생지이고 모든 위대한 종교의 탄생지이다. [ …… ] 그러므로 아시아는 세계의 정신적 안내자였으며 세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불멸의 진실을 가르쳐 왔다.”
인도는 물론(말할 것도 없이, - 옮긴이) 아시아의 스승이었다. “인도가 중국과 일본에게 그 종교와 문명을 전해줬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도(‘현재에도’ - 옮긴이) 인도는 문명화된 세계에 경이와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낳고 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로 중국과 일본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과거 영광의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나서 『 파트리카 』 는 타고르의 메시지에 그 자신의 메시지를 덧붙였다.
아시아 연방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아시아 국가(나라 – 옮긴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도가 그 자신의 스와라지 즉 책임 있는 정부를 확보하는 것이다. 중국(중화민국 – 옮긴이)과 일본에 불교 선교사를 보낸 것은 독립 주권국인 인도였다.
그리고 아시아 인민들의 연방이란 이념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전세계(온 누리 – 옮긴이)가 보편적 인간애라는 위대한 이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또한 자치권을 가진 인도여야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타고르 – 옮긴이)이 중국과 일본에 대해 한 커다란 공헌을 조금이라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인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과 평가를 더욱 높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통해 인도와 그들 아시아 나라들 사이의 이해를 더욱 공고화하는 길을 닦았다.
그의 위대한 노력이 영구적으로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인도는 아시아의 위대한 시인이 우아하게 가르쳤던 아시아 국가들의 연합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시아 연방을 향한 즉각적인 조처를 촉구한 다스의 열정과 자치 정부를 구하는 『 파트리카 』 의 전투적 요구 사이의 차이는 이 결정적인 시기에 벵골의 힌두인들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정서의 분열을 반영하는데, 이 분열은 다스의 정치적 힘을 약화시켰고 나아가 1925년 그가 요절한(젊은 나이에 죽은 – 옮긴이) 것에도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는 타고르나 오로빈도와 마찬가지로 개혁주의적 힌두인(브라모[브라만? - 옮긴이])이었지만, 벵골 모슬렘(무슬림 – 옮긴이)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유화 정책을 취함으로써 일반적으로 『 파트리카 』 가 대변하고 있던(대변하던 – 옮긴이) 정통 힌두 사회에서 인기가 떨어졌다.
다스의 죽음으로 벵골은 전인도(온 인도 – 옮긴이)에 영향력을 가진 벵골 출신의 가장 위대한 정치 지도자를 잃었을 뿐 아니라, 힌두인과 모슬렘의 단결을 이끌어내려 노력한(애쓴 – 옮긴이) 가장 현명한 지도자를 잃었다.
그 후(그 뒤 – 옮긴이) 1년도 안 돼 공개적 분열이 이들 두 사회의 지도자들을 갈가리 찢어놨고, 모슬렘이 다수인 동부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 – 옮긴이)이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동쪽 영토(그러니까. ‘동파키스탄’.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뒤 나라 이름을 ‘방글라데시’로 바꾸었다. 이 글은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 그러니까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쓰였기 때문에 방글라데시를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동쪽 영토'로 소개하는 것이다 – 옮긴이)가 된 1947년의 최종적인 분열을 예고했다.
모슬렘(무슬림 – 옮긴이)은 1920년대 4천 8백만 벵골 인구의 반(순수한 배달말로는 ‘가봇’ - 옮긴이)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경제적/교육적 수준은 힌두 사회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낮았다. 벵골 힌두인 중 7명 가운데 1명(그러니까, 대략 14% - 옮긴이)이 문자를 해독(解讀. ‘[뜻을] 풀어[解] 읽음[讀]’ → 읽어서 뜻을 알아냄 : 옮긴이)한 반면, 모슬렘은 19명 중(가운데 – 옮긴이) 1명(대략 5% - 옮긴이)만 쓰고 읽을 줄 알았다.
이러한 불균형은 정부(영국 인도 총독부 – 옮긴이)에 공무원으로 들어가거나 전문직이 되는 데 필수적이었던 영어 해독이라는 결정적인 분야에서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났다.
힌두인들은 34명 중 1명이 영어를 알았는 데 비해, 모슬렘들의 그것은 194명 가운데 1명이었다. 그러므로 영어를 아는 벵골의 모슬렘 한 명당 힌두인은 5명 이상 꼴이었다.
이 지역 정치 경제 지성의 중심지인 캘커타의 힌두 쪽 편향은 이 도시 1백 10만 인구의 3분의 2가 힌두인이고 나머지 3분의 1이 모슬렘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이 도시의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의 대부분은 힌두인들에 의해 발간됐다.
벵골의 모슬렘 지식인들은 타고르의 동아시아 여행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듯했다.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가장 위대한 현대 시인 ‘나즈룰 이슬람’의 저작에서 꽤 분명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의 경력만 보더라도 벵골의 모슬렘들이 좀 더 부유한 힌두 공동체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년 동안 (캘커타와 메카의 중간에 있는) ‘카라치’에 머물렀던 그는 우르두어(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 옮긴이)와 페르시아어를 배워 페르시아의 형식과 어휘에 고전적인 이슬람적 주제를 이용해서 벵골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전쟁 후 캘커타에 정착한 그는 모슬렘과 힌두의 주제와 군(軍)과 민족주의자를 결합시킨 「 비드로비 (반군) 」란 시 하나로 유명해졌다.
비정통파적인 이슬람관을 갖고 있던 그는 힌두인과 모슬렘인 사이의 단결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그의 두 번째 아내는 원래 힌두 집안 태생이었다) 그럼에도 정의와 평등에 대한 모슬렘들의 초기 열정 – 필요하다면 무기(병기/잠기 – 옮긴이)를 들어서라도 달성하겠다는(성취하겠다는/이루어 내겠다는 – 옮긴이) - 의 부활에 대한 그의 촉구는 모슬렘들의 정서에 큰 호소력을 가졌다.
나즈룰은 타고르를 그의 스승이라고 부르고 그 자신을 ‘태양의 광휘에서 떨어져나온 혜성’에 비유하면서(빗대면서 – 옮긴이) 타고르의 위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대의 위대한 힌두 지도자들에 대한 반역을 계속했다.
나는 마음을 가둬둘 수 없다.
내가 마음을 가둬두려 하면 그것은 사슬을 둘로 잘라버린다.
계속 때림으로써 마음은 광폭해지고 거의 제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 미친 정신은 누구의 말도, 심지어 라빈(타고르)이나
간디의 말도 듣지 않는다.
( → 원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으나, 문맥상 나즈룰의 시에서 따온 부분으로 보인다 : 옮긴이)
따라서 나즈룰은 타고르처럼 ‘아시아에서의 인도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 옮긴이) 모슬렘으로서 인도를 전체 이슬람 세계에 비춰 바라봤다. “아라비아, 이집트(미스르 –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그리고 인도 등 전체 이슬람 세계는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져 있다(제하[諸夏]에는 ‘회족[回族]’이라는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이 있고 – 단, 회족들 자신은 그 이름보다는 “무슬림”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 이들의 갈마[‘역사’]는 멀게는 제2 당 왕조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 옮긴이). 아무도 너무 높거나 너무 낮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바탕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제하[諸夏]. 그러니까 중화민국 – 옮긴이)과 일본에 대한 타고르의 메시지는 벵골의 힌두인들에게는 그들이 그것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든 않든간에 매우 흥미진진한 것일 수밖에 없다. 『 전진 』 과 『 암리타 바자르 파트리카 』 이외의 캘커타의 영어 신문들은 하나같이 열광했다.
“인도는 비록 그 평안한 시대의 영광을 상실했지만, 그의 저명한 아들을 통해 아시아에 새로운 빛을 가져오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까닭이 – 옮긴이) 있다.”고 『 뉴 엠파이어 』는 썼다.
보수적인 민족주의 기관지 『 벵골리 』 는 “중국은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예를 들면, 서양 문화 – 옮긴이)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생명력의 침투를 원했다(바랐다 – 옮긴이).”고 썼다. (그 신문의 말에 따르면 – 옮긴이) 중국의 지식인들이 타고르를 초청한 이유는 타고르가 “동방의 모든 위대한 나라들에 문화를 제공해온 인도의 이상주의를 전달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인(타고르 – 옮긴이)이 다음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후(뒤 – 옮긴이), 『 뉴 서번트(New Servant) 』 는 이렇게 낭만적으로 쓰고 있다.
오늘 벵골은 자랑스럽다. 먼 옛날에 자랑스러웠듯이 자랑스럽다. 인도는 동방에 다시 한번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여겨졌으며, 태양 앞에서 별빛은 그들의 줄어든 머리를 숨긴다.
영광의 구름을 길게 드리우며 그는 온다. 그는 중국을 보고, 그곳에서 전과 다른 생명력이 솟구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일본을 비난했고 일본은 이로 인해 단련을 받았을 것이며 이제는 좀 더 얌전히 굴 것이다. [ …… ]
무엇보다도 그는 세계적 시인이다. [ …… ] 그가 신비로운 응시와 부드러운 발걸음, 달콤한 악센트(억양 – 옮긴이)와 불가사의한 펜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은 피바다를 만들고서도 이룩하지 못한 세계 정복을 달성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고르의 ‘메시지’와 동아시아에 대한 사명감은 교육받은 벵골의 힌두인들은 물론 그들 가운데 가장 세련된 사람들조차 어떻게 저항할(맞설 – 옮긴이) 도리가 없을 정도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역사가였던 ‘자두나스 사르카르’이다. 사르카르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무굴 제국과 그의 쇠망에 대한 연구에 집중됐는데(우리 식으로 치면, 대일[對日] 항전기에 살았던 한국인 역사가가 근세조선이 쇠퇴하고 대한제국이 망한 까닭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과 같다 – 옮긴이), 그는 그(연구 – 옮긴이)를 주로 페르시아 원전(原典. 원서 – 옮긴이)을 통해 천착(穿鑿. ‘구멍[穿]을 뚫음[鑿]’ → 학문을 깊이 연구함 : 옮긴이)했지만, 유럽 역사에도 조예(造詣. 학문/기술/예술이 깊은 지경에 이른 정도 – 옮긴이)가 깊었으며, 인도 사회의 세속적 진보를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자신을 – 옮긴이) 현대화해서 전면적으로 (경제 및 군사력 측면까지) 외부 세계와 경쟁할 수 있게 되지 않는다면 [ …… ] 우리는 파멸하는 인종이 될 것이다.”라고(하고 – 옮긴이) 그는 인도 역사를 살펴보는 1928년의 일련의 강연 마지막에서 말했다. 이것은 인도의 과거가 주는 교훈이었다.
우리나라(인도 – 옮긴이)의 역사(갈마 – 옮긴이)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인도인들 – 옮긴이)는 흔들림 없는 온전한 신념을 갖고 진보의 정신을 수용해야 하며, “우리 선조들(고대 ~ 근세의 인도인들 : 옮긴이)의 희석되지 않은 지혜(슬기 – 옮긴이)로 돌아가자.”는 유혹적인 외침에 저항하는 일이 ‘대중성이 없는 일’이라는 사실도 직시(直視. 사물의 진실을 바로 봄 – 옮긴이)해야 하고, 먼먼 과거 아리아계 인도의 독특한 유산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일도 피해야만 한다.
사르카르는 이 강의의 초기에 타고르가 말하는 “인도의 세계적인 사명”이란 것의 목표와 개념이 (서기 – 옮긴이) 19세기 러시아(로[Ro]시야 – 옮긴이)의 슬라브주의 운동(나라와 종교를 떠나서, 핏줄이 슬라브인인 모든 겨레가 하나로 뭉치자는 주장을 펼친 운동 – 옮긴이)의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가(비슷한가 – 옮긴이)를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예상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인도 사상의 이러한 최근(서기 1920년대 – 옮긴이)의 경향은 기독교(예수교 – 옮긴이)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고대 『 우파니샤드 』 철학을 새롭게 해석(풀이 – 옮긴이)한 것에 기초하고(바탕을 두고 – 옮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몇 달 전 타고르가 동남아시아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그를 위해 열린 대중 집회를 주재하면서, 사르카르는 신앙 부흥론자 같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고대 인도의 현인과 영웅들이 우리의 정신 속에 함께해서 현대 인도의 위대한 문화 대사이며 아시아 정신의 진정한(참된 – 옮긴이) 대변인으로서 이 부가장제 시대에 조화와 치유라는 사명을 달성하러 나가는 그를 축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나라(인도 – 옮긴이)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전향적이었던 캘커타 대학의 부학장이었고, 동시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고대 인도의 문화적 영향에 대한 연구와 그 부활을 촉진하기 위해 1926년 설립된 ‘대인도협회’의 회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모임의 주재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두 직책은 사르카르의 외견(外見 : 겉보기 – 옮긴이)에 나타나는 야누스적인 이중성을 상징하고 있는 듯했다.
이 시기에 눈에 띈 좀더 젊은 힌두 지식인들도 과거의 고대 힌두 전통에 대해 이처럼 이중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 옮긴이) 윗세대 사람들보다는 사르카르 같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세속적 길로 더 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향유(享有. 누려서[享] 가짐[有] - 옮긴이)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점은 해외(국외 – 옮긴이)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가 더 많아진 점이다. 19세기에는 아주 용감한 남성만이 해외 여행을 금지하는 힌두의 계율을 깰 수 있었으나, 20세기 초반에는 영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대륙은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일본으로까지 유학가는 학생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타고르 자신의 여행도 문명화된 세계 전체와 직접 접촉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벵골인들의 사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일 뿐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3개 대륙에 대한 그 자신의 11년간의 경험을 백과사전식 보고로 벵골인들에게 바깥 세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했던 끝없이 호기심 많은 젊은 사회학자 ‘베노이 쿠마르 사르카르’의 여행이었다.
타고르처럼 베노이 사르카르도 그의 해외 여행 경비 조달을 위해 자주 강연에 나섰지만,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의도적으로 타고르의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아시아의 정서가 유럽이나 미국의 정서와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하고 – 옮긴이) 그는 인도 밖에서 출간된 그의 첫 책의 서문에서 썼다.
아시아인과 유럽인들은 모두 물질주의적이고, 동시에 정신적이다. “두 정신 사이의 차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지난 세기 산업 혁명(올바른 이름은 ‘공업 혁명’ - 옮긴이)에 따라 인류의 일부가 놀라운 성공을 거둔 후 처음 이야기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그것은 엄청나게 과장됐다.”
그는 『 젊은 아시아의 미래주의 』 란 제목의 그의 두 번째 책에서 인도인 자신이 이러한 과장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다.
“미국에서 ‘비브카난다’의 베단차 협회들이 거둔 성공과 동시대의 ‘새로운 사상가들’에게 침투한 견신론(見神論. ‘모든 종교에는 근본적 진리가 있다.’는 주장. 이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직관이나 묵상으로 신과 접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옮긴이)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3년 노벨상 수상 이래 만들어지고 있는 타고르 숭배 – 이런 모든 것들이 유럽과 미국의 시선을 ‘피와 살이 있는 인도’, ‘인간의 이해 관계와 야망이 있는 인도’에서 ‘환상과 낭만의 인도’로 돌리게 만들어왔다.”
이러한 잘못된 그림을 바로잡기 위해 베노이 사르카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동양인(아시아인 – 옮긴이)들은 그리스인(헬라스인 – 옮긴이), 로마인, 유럽인 또는 미국인들이 가진 것과 같은 이상과, 같은 에너지와, 같은 실용적인 상식과, 같은 분투의 정신을 갖고 인류에 봉사해야 한다. [ …… ] 동양인들도 다른 인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복리를 증진하고 정신적 관심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 낙관적이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었다. [ …… ] 짧게 말해 동양인들도 인간이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도 인간의 성공과 실패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재는 것과 똑같은 척도로 판단되어야 한다.
물질 문명의 측면에서 인도와 서양의 동등성을 증명하려고 하면서도, 베노이 사르카르는 그가 힌두 문명을 그 정수(精髓. ‘뼈 속에 있는 골수’ → 사물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것 : 옮긴이)로 여기고 있는 ‘아시아 정신’이란 이상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중국과 인도 종교 사이의 유사성(그게 뭐지? 도교와 힌두교가 똑같이 다신교라는 사실? - 옮긴이)을 발견한 흥분에 들떠 중국인과 일본인도 힌두인이고 “힌두스탄이 먼저 진정으로 아시아 학파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선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아시아적 정신은 그러므로 하나이다.”라고 그는 결론지었다(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서기 17 ~ 19세기에 서양 제국주의 나라들이 아시아를 침략하기 전까지, 아시아는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들 사이의 문화와 종교와 사회구조도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 옮긴이). “민족적/언어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단결을 심리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심리적 기초이다.”
베노이 사르카르는 여기서 고대 인도 문명에 대해 자두나스 사르카르의 경우에 우리가 주목했던 것과 같은 이중성을 보여주지만, 이러한 언급은 그의 발전 과정에서 한 단계를 반영할 뿐이며, 그의 후기 저작에선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는 1915 ~ 1916년 중국에서, 9년 후 타고르가 아시아의 정신성에 대한 그의 가장 극단적인 구상을 밝히도록 자극했던 것과 같은 영향 아래서 그러한 그의 생각, 즉 중국 문명과의 만남을 통해 받은 인상을 표현했다.
베노이 사르카르는 타고르와 달리 누구의 초청도 받지 않은 채 베이징(북경[北京]. 이 때는 제하[諸夏]의 수도가 아니었다 - 옮긴이)의 3류 호텔의 하인들 방에서 머물렀다. 왕립 아시아협회 화북 지부 국제협회에서 행한 그의 강연을 주선한 것은 타고르의 마지막 베이징 방문을 주선했던 ‘길버트 레이드(Gilbert Reid)’ 목사로, 그가 강연 내용을 모두 중국어(한어[漢語] - 옮긴이)로 통역했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문법/어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 옮긴이) 그(베노이 사르카르 – 옮긴이)의 강연은 실제로 중국 지식인들에게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지나갔다.
타고르와 베노이 사르카르의 ‘범(凡)아시아(“온 아시아”/“모든 아시아”라는 뜻 – 옮긴이)’란 사상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니베디타’ 수녀와 그가 번역한 ‘오카쿠라’의 『 동양의 이상 』 이었다.
18세의 젊은 사르카르는 캘커타 대학의 학생이었던 1905년(이 해에 근대 왜국[倭國]이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는다 – 옮긴이) 분할 반대 운동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베디타와 ‘오로빈도 고즈’ 및 타고르를 포함한 그 밖의 사람들이 이 격동의 시대에 선전하고 있던(선전하던 – 옮긴이) ‘힌두 문화의 부활’, ‘인도의 부활’, 그리고 ‘아시아의 부활’이라는 생각에 빠졌었다.
그 무렵 사르카르는 여행을 마치고 캘커타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캘커타에 정착했지만, 인도 문화와 그것의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덜 낭만적이고 더 세속적인 견해를 만들어냈다. 그는 1931년(이 해에 근대 왜국의 관동군이 이른바 ‘만주’를 침략하고 점령한다 – 옮긴이) 타고르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세속적 전망에 비춰 타고르의 세계 여행을 해석했다.
지난 4반세기(1세기인 100년의 4분의 1, 그러니까 스물다섯 해 – 옮긴이)는 인도인의 창조적 활동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 이러한 창조물들의 가장 높고 숭고한 표본인 라빈드라나트(타고르)의 존재와 그의 시, 산문 및 그림들은 인도인들이 그 자신의 이익 확대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경제/문화적 분야의 국제적인 세력을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통제할 수 없는 희망”의 가수이자 “세계를 매료시킨 댄스 음악”의 시인이며 인간의 마음속을 헤매는 낭만의 방랑자인 타고르는 그러므로 아시아와 유럽 및 미국의 크고 작은 세력들과 끊임없는 연합을 통해 “세계의 생명수를 마시고” 자유롭고 속박되지 않으며 힘세고 번영하는 신선한 조차지를 얻으려고 노력하는(애쓰는 – 옮긴이) 인도, 즉 “동맹 관계를 뒤헝클어버리는” 인도의 설계자로 평가받아야 한다.
사르카르나 타고르보다 훨씬 혁명적인 여행가로서 서방에 대한 인도의 19세기 관계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 사람은 ‘로이(M.N.Roy)’였다. 로이도 베노이 사르카르처럼 분할 반대 운동 시절에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이었지만, 이 운동의 테러리스트파(사실은 무장투쟁파? - 옮긴이)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그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1915년 비밀리에 인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의 – 옮긴이) 자바를 거쳐 (미국의 – 옮긴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그는 마르크스주의(맑스주의, 그러니까 공산주의 – 옮긴이)로 전향했고, 1920년 독일(도이칠란트 – 옮긴이)을 거쳐 소련으로 들어가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기서 아시아 국가 출신의 장래 혁명가를 훈련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게 된 그는 점차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1924년 그는 코민테른의 주석단에 선출됐다. 로이는 그해 타고르가 ‘도시와 농촌’의 문제에 관해 타이위안(太原[태원. 제하(諸夏)의 지역 이름 – 옮긴이])에서 먼저 했던 강의 내용을 읽고 시인의 사회경제적 견해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는 얼마나 귀족주의적인가?”라고 그는 냉소적으로 외쳤다.
현재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기존의 소유 관계 형태를 현대 문명의 진화 속에서 이미 뒤떨어져버린 더 이전의 소유 관계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가부장적 봉건 귀족주의로 대체하려 한다. 그는 사회적 생산의 개선에 뒤따르는 상대적으로 좀더 나아진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시샘한다. 그는 근대 산업주의(공업주의 – 옮긴이)가 그가 속한 토지 소유 귀족 계급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한다.
타고르의 이념이 증명하고 있는 모든 것은 동양의 ‘문화적 문명’과 서양의 물질 문명 모두가 사적 소유권에 기반한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로이는 선언했다.
타고르의 메시지에 대한 로이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그가 모스크바에서 만났음에 틀림없고 1927년 코민테른의 대표로서 6개월간(여섯 달 동안 – 옮긴이) 중국에서 일했을 때 다시 만나게 되었을 ‘추취바이(瞿秋白[구추백 – 옮긴이])’의 비판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로이의 중국 활동은 타고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나쁜 소동을 빚었으나 이유는 꽤 달랐다.
국공 합작이 깨져가고 있던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스탈린은 그를 중국에 파견해 중국 공산당의 정책을 지도하게 했다.
로이는 자신이 복잡한 정치적/군사적 상황 속에 뒤엉켜 있는 것을 알아냈으나, 그가 지도하려고 하는 중국인들의 동기와 목표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스탈린이 처치하기를 원했던(바랐던 – 옮긴이) 온건 민족주의 세력의 지도자 ‘왕징웨이(王精衛[왕정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근대 왜국에 항복하여 괴뢰정권의 지도자가 되었다 – 옮긴이])’에게 급진적 방침을 촉구하고 있는 스탈린의 훈령을 보여주었다.
이 서툰 행위는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온건파들이 공산당에 등을 돌리고 국민당 우파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을 포위해 처단하러 나섰다. 로이는 특별히 무거운 스프링과 여분의 가솔린 탱크 및 소련 비밀 경찰 요원을 실은 관광용 차를 타고 ‘한커우(漢口[한구 – 옮긴이])’를 도망쳐 고비사막을 거쳐 러시아(당시에는 소련 – 옮긴이)로 도망가지(달아나지 – 옮긴이) 않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를 스탈린은 만나주지 않았다. 코민테른에서의 로이의 용도(쓸모 – 옮긴이)는 끝이 났다.
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공산당원은 이렇게 말했다. “로이 동지는 본질적으로 지식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론적으로는 원칙을 지지했지만, 실제로는 단 한 건의 문제도 해결하지(풀지 – 옮긴이) 못했다.”
1924년 타고르를 향해서도 거의 같은 비판이 제기됐다. 분명히 중국인들은 1920년대에 그들의 문제에 대한 정해진 답을 가지고 왔던 벵골의 브라만 출신인 이들(로이와 타고르 – 옮긴이)이 제시한 불필요한 충고에 감명받지 않았다.
로이는 1928년 러시아에서 몰래 빠져나와 1930년 인도로 비밀리에 들어옴으로써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영국 당국에 의해 ‘위험한 혁명가’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 옮긴이) 붙잡혀 체포된 로이는 5년간 감옥 생활을 했으며, 이 5년간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조국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숙고(熟考. ‘한도에 이를 만큼[熟] 곰곰이 생각함[考]’ → 잘 생각함/깊이 고려함 : 옮긴이)했다.
그(로이 – 옮긴이)는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기에는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문법/어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 옮긴이) 그는 적극적인 세속주의자이며 물질주의자로, 그리고 종교에 대한 맹렬한 반대자로 남았다.
‘인도의 정신성’에 대한 믿음의 확산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 인도의 메시지 』 라는 그의 책에서 그것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들을 모았다. 1930년, (타고르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체 인도인들이 서구 사회의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덜 타락했고, 감정적으로 더 순수하며 이념적으로 덜 세속적이고, 짧게 말해 정신적으로 더욱 고양된 사람이라는 주장은 현실을 멋대로 무시한 데서 나오는 말이다.”
1954년 그가 죽기 얼마 전에 한 이 주제에 관한 그의 마지막 말은 타고르의 동서 이념에 대한 조종(弔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뜻으로 치는 종’ → 일의 마지막을 뜻하는 말 : 옮긴이)을 울리는 것 같았다.
‘물질주의적 서구에 대한 인도의 정신적 메시지’에 대한 믿음은 시어빠진 맥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낸) 유쾌한 도취는 열등 의식을 가진 자존심 있는 지식인들에게 위안을 줬다. 그러한 심리적 공격성의 유산은 자산이 아니라 채무다. 그것은 인도가 민족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로이는 전국적 영향력을 행사한 벵골의 지식인 가운데 마지막 사람이었다. 인도 전통을 벵골적으로 재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세계에 대한 벵골인의 접촉이란 측면에서도 그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서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내다봤다. “과거는 죽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매장되어야 한다.” ‘인도의 메시지’를 마무리짓는 호소 속에는 그가 마감한 위대한 ‘벵골 르네상스’에 대한 향수(鄕愁. 그리워하는 마음 – 옮긴이)의 흔적이 여전히 존재했다. “인도는 르네상스(문예부흥 – 옮긴이) - 정신적 재생 –을 경험해야(겪어야 – 옮긴이) 한다.”
19세기의 캘커타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영국의 인도 식민지 중심지 – 옮긴이)였고 상품과 사상이 갠지스 평원의 광대한 내륙으로 통과해가는 통로였다. 세금이 오르지 않을 것이란 보장 아래서 그들의 토지 소유권에서 나오는 수입이 오르리라는 보장을 받고 있었던 이 지역의 상류 계급은 인도와 서구의 전통을 선택해서 재해석하고 통합시키는 데 앞장선 지식인들의 독특한 계보를 만들어냈다.
타고르는 일반적으로 내(글쓴이인 ‘헤이’ 교수 – 옮긴이)가 ‘19세기 벵골의 힌두 – 영국의 공생’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훌륭한 과실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인도나 동양(아시아 – 옮긴이)의 정신성과 서양의 물질 문명 사이의 통합은 20세기에 들어와 점차 많은 (인도의 – 옮긴이) 젊은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그들의 민족주의적 정신이 영국과의 정치적 평등(예를 들면, 인도의 독립이나 자치 – 옮긴이)을 요구했기 때문이고, 후에는(나중에는 – 옮긴이) 그들의 세속적인 세계관이 정신의 영역에 대한 정당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라빈드라나트(타고르)는 전과 마찬가지로 인기있었고, 그의 외국 여행이 인도의 대외적 지위를 드높일 때는 언제나 그의 민족에 대한 헌신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동서 관계(‘동양과 서양’, 그러니까 아시아와 유럽의 관계 – 옮긴이)에 대한 철학자로서 그는 그를 뒤이은 벵골 힌두 지식인들에 의해 버림받았다. 그리고 벵골의 모슬렘들은 그의 시적 천재성을 흠모하면서도, ‘인도가 아시아의 지도자’라는 본질적으로 힌두적인 그의 견해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 → 3 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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