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계사]인도인의 동아시아관 (3)

개마두리 2024. 12. 11. 21:41

3. 봄베이 : 간디와 사바르카르

 

서구의 정치 이념과 힌두의 종교적 이념의 결합은 (서기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860년대 이래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바라트의 벵골 주[]를 합친 땅 옮긴이)에서 그리고 1880년대 이래 서부 인도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은 다른 역사적 경험과 다른 지리적 상황의 영향 아래 있었던 다른 시대 다른 그룹(집단 옮긴이)에서는 다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현재 서파키스탄[이 글은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기 전에 쓰였고, 그때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으로 불렸다 옮긴이]에 있는) 신드에서 고아에 이르는 인도 아대륙의 서부 해안 지대를 포괄하는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옮긴이) 관구(管區. ‘관할 구역을 줄인 말 옮긴이)에서는 근대적 민족주의가 먼저 봄베이의 파르시(원래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도들 사이에서 부상했고(떠올랐고 옮긴이), 뒤이어 (관구의 동부와 남부에 있는) 마하라슈트라의 치트파반 브라만인들 사이에서 나타났으며, 그 후에야(그 뒤에야/그 다음에야 옮긴이) (봄베이 북방에 위치한) 구자라트의 힌두교와 자이나교 신자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은 동부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 지배의 침투 및 영국 교육의 확산과 더불어 이뤄졌지만, 서부 인도에서는 20세기 초의 십수 년간 종교가 정치에 대해 좀 더 중요하게 영향력을 키웠다. 1920년경 종교적 민족주의의 두 중요 학파가 등장했는데(나타났는데 옮긴이), 하나는 구자라트에서 널리 퍼져 있는 바이슈나바자이나정서(바라트의 전통 종교 가운데 하나인 자이나교를 바탕으로 삼은 정서 옮긴이)에 기반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하라슈트라의 18세기 마라타 제국과 연관된 좀더 전투적인 힌두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마하라슈트라 브라만 암살자에 의해 1948년 생을 마감한 모한다스 간디(Mohandas K. Gandhi. 흔히 마하트마 간디로 불리는 사람의 본명. “마하트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옮긴이)1920년대와 1930년대 봄베이뿐 아니라 전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형성기에 그에게 끼친 지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지만, 벵골의 위대한 동시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간디의 정신적 세계를 분리하는 간격을 설명하기 위한 정도만이라도 약간의 시험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그 첫 단계는 그의 고향 구자라트의 문화적/역사적 배경에 비춰 간디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 구자라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아랍권은 아라비아 만으로 부르는 곳. 중립적인 명칭은 걸프’ - 옮긴이), 홍해의 바닷가 항구들과 북부와 중부 인도의 내륙 지방 사이의 무역으로 번성한 지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20여년 전인 옮긴이) 기원전(서기전 옮긴이) 2000년께부터 배가 다닐 수 있는 몇 개의 강의 하구에 훌륭한 항구들이 있었다. 이렇듯 전통적인 상업 중시의 풍조가 영국과의 관계로 더욱 자극됐기 때문에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교리에 따르면 평민이자 바르나/자띠 질서에서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보다는 낮은 신분인 바이샤에 속하는 옮긴이) 상인 계급이 오랫동안 구자라트 사회를 지배했다(다스렸다 옮긴이). 구자라트 지역은 바다에서 쉽게 접근할(다가갈 옮긴이) 수 있었지만 북쪽이나 북서쪽의 육로로는 비교적 접근이 어려웠다. 이 지역이 상업을 중시한 것과 함께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상인 계급 지배 현실이 사회적/종교적 문제에 있어 예외적인 자유와 다양성을 고무한(鼓舞. 북을 치며[] 춤을 춘[] 격려하여 기세를 돋운 : 옮긴이) 듯하다.

 

역사적으로 이곳에는 브라만식 힌두교나 수니 이슬람교의 정통성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상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자이나교가 14세기 모슬렘(‘무슬림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옮긴이)의 정복이 있기 전까지는 지배적이었고 자이나교와 바이슈나바힌두교는 최근까지 근친 결혼을 하며 계속 전해지고 있다.

 

간디의 종교적 민족주의의 뿌리는 그의 고향 지역인 카시아와드반도에 특히 강한 바이뉴사바와 자이나의 종교 전통과 라지푸트(산스크리트 어로 왕가의 자손이라는 뜻.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무리다 옮긴이)의 정치적 전통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영국이 결코 2백 개 이상 되는 공국(公國. 왕보다는 등급이 낮은 지배자인 들이 다스리던 작은 나라 옮긴이)들을 직접 지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으려 했던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이 고립된 반도에 있는 몇몇 라지푸트 지배자들을 위해 총리로 일했었다.

 

(‘향료 제조인이란 의미를 갖는) 간디 집안은 바니아들로서 19세기 후반까지는 다수인 자이나교의 카시아와드 바니아보다는 소수였던 바이슈나바 지지자들이었다(쉽게 말해, 간디 집안은 바이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옮긴이). 그러나 간디가 자서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자이나교는 구자라트에서 그 영향력이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서나 느껴질 정도로 강력했다.

 

동정심과 금욕주의, 그리고 비폭력과 진실성에 대한 간디 자신의 엄격한 주장은 간혹 바이슈나바 용어로 표현되기도 했던 그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던 자이나교적인 핵심을 보여준다.

 

모한다스(이른바 마하트마 간디의 본명. ‘모한다스가 이름이고 간디는 성이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존칭이지,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옮긴이)는 아버지 간디의 세 아들 중(가운데 옮긴이) 가장 어리고 영리한 소년이었다. 그가 17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정의 명예를 지키기로 결심한 간디는 아버지의 브라만 친구로부터 런던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해서 구자라트의 여러 공국 가운데 한 곳의 총리가 될 준비를 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는 이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지극히 신심(信心. ‘믿는[] 마음[]’ 종교를 믿는 마음 : 옮긴이)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머니의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같은 모드 바니아 신분에 속하는 자이나 승려 앞에서, ‘런던에 가서 고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맹서(‘맹세의 본딧말 옮긴이)를 할 때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분명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결심한 간디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적 실천을 받아들였고, 이것은 그의 일생을 통해 독특한 정치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간디의 사상에 대한 자이나교의 영향은 (서기 옮긴이) 1891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옮긴이) 겪게 됐던 고통스러운(괴로운 옮긴이) 몇 달 동안에 더 강화됐다.

 

그가 맹서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한국어의 어법/문법에 맞는 문장이 나온다 옮긴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와 같은 신분의 동료들은 그들이 금지한 런던으로의 더러운 여행’(영국 유학 옮긴이)을 했다는 이유로(까닭으로 옮긴이) 그를 추방자처럼 대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자이나교 가정이 그를 받아들였고, 그 시대의 지도적 자이나교 개혁가였던 그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주었다. 한동안 그는 인도 자이나협회의 서기이고 1893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렸던 세계 종교 회의에서 자이나교의 공식 대변인으로 활약한 젊은 자이나교도 비르찬드 간디와 함께 숙식(宿食. 자고[宿] 먹음[] - 옮긴이)을 했다.

 

1893년경 모한다스 간디는 해외에서 공부한 것이 총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옮긴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지 못했으며, 고향 카시아와드에서는 엄격한 영국의 지배로 인해(지배 때문에 옮긴이) 독립적 생각을 갖고 있던 인도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세돼 있었다.

 

또 한 번의 해외 여행은 나갈 길을 제시할 듯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나탈()에 있는 인도인 사회의 한 모슬렘(무슬림 옮긴이) 회사가 변호사를 필요로 했고, 간디는 그 기회를 잡았다. 그곳에 가자마자 그는 곧 그 사회의 정치 지도자(사실상의 총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가 돼 남아프리카의 지배 집단인 백인들(영국 백인과, 근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뿌리내린 네덜란드 계 백인인 아프리카너 옮긴이)이 인도계 사회에 가하고 있는 모욕과 불공평을 제거하기 위한 21년간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2년이 안 돼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서, 그리고 도덕적 개혁가로서 그가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일의 바탕이 되는 기본 전제를 구축해냈다. 그 자신의 아버지의 경력과 그가 이상적인 인물들로 여겼던 지도자 글래드스턴나오로지(파르시[바라트에서는 조로아스터 교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옮긴이] 쪽 의원)’ 같은 당시의 자유주의 정치가들의 삶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본적인 정치적/윤리적 두 범주는 그의 놀라운 경력의 초기부터 상호 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거친 변경 지방 나탈주와 드랜스발에서 당시 인도나 영국에서 겪었던 것과 극히 다른 정치적 상황에 직면했고,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급진적 이념과 수단의 체계를 개발했다.

 

법률 공부를 하고 인도와 영국에서 법 앞에 평등한 대우를 받는 데 익숙했던 그는 남아공 사회에서 피부 빛깔의 차이가 법의 내용이나 정신보다 우선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남아공에 온 지 몇 주 안 돼서 한 백인 남아공인이 그를 객차 밖으로 밀어내버렸고, 다른 한 백인은 우편마차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발로 차고 때렸으며, 호텔 주인은 유색인(그러니까, 서양 백인이 아닌 사람 옮긴이)’인 그가 호텔에 투숙하면 곤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정작 간디를 가장 격분시킨 것은 이러한 개인적 모욕이 아니라 인도 정착민의 공민권을 빼앗고 열등한 법적 지위로 떨어뜨리려는 백인 지배 집단의 계속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었던 간디가 정작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선주민인 줄루족을 비롯한 흑인들을 모욕하거나 경멸하는 글을 쓴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자기 나라만을 사랑하였을 뿐, 자기 나라와 같은 불행을 겪은 인종이나 겨레나 다른 나라는 사랑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 옮긴이)

 

처음에 간디는 청원서를 작성함으로써 이 움직임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그의 진정한(참된 옮긴이) 적은 백인 사회가 아니라 그들의 근대적 물질 문명임을 더욱더 확신하게 됐다.

 

영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독서는 간디가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해 이런 자세를 취하도록 상당히 고무했다.

 

런던에서 공부할 때, 그는 조지 버나드 쇼’, ‘애니 비선트’, ‘에드워드 카펜터’, ‘헨리 솔트’, ‘에드인 아놀드같은 (빅토리아 시대 기준에서 보면) 기인(奇人. 성질//행동이 기이한 사람 옮긴이)들이 포함돼 있는 채식주의자회의 헌신적인 회원이었다.

 

검소한 생활과 무성(無性. [] 구별이 없음[] - 옮긴이) 생활 및 동양의 지혜를 적극 주장한 카펜터는 간디가 숭배했던문명 그 원인과 치유 라는 인기있는 소책자(작은 책자 옮긴이)를 썼다. 다른 채식주의자(이고 때론 견신론자)에드워드 메이트랜드는 영국에서 서신과 책을 보내줌으로써 남아프리카에 있는 간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1894(이 해에 2차 동학 혁명이 일어났고, 청일전쟁도 일어났다 옮긴이) 간디는 나탈의 신문들에 그 자신을 <메이트랜드의 밀교적 기독교연맹의 출판물에 대한 지역 대리인>으로 소개하면서 여러분 독자들 가운데 오늘날의 물질주의와 그 모든 광휘가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그 출판물들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예수교 옮긴이)의 가르침 역시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런던에서 신약 성경 을 읽었을 때 이미 큰 기쁨을 느꼈던 간디는 남아공에서 요약 성경 신의 왕국은 당신 안에 라는 책에서 톨스토이가 제시한 성경 의 내용을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영국 친구(순수한 배달말로는 동무’ - 옮긴이)들은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애썼고 또 기도했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준 모든 책들을 읽었고, 3일간의 신앙 부흥론자들의 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설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한국어 문법/어법과 맞는 문장이 된다 옮긴이) 그는 힌두 신앙과 실천 방법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답하는 것이 어려움을 깨달았고, 한동안 인도인 공동체에 가해지고 있는 불의에 맞선 외부적인 투쟁을 전재하면서 내적 위기, 심각한 정신의 동요를 겪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특징적인 방법론에 따라 인도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에게 충고를 구했다. 봄베이에 있는 그의 자이나교도 친구 레이찬드 메르타의 답장만이 그가 찾던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18941020일자 레이찬드의 편지는 영혼과 물질을 생물들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분명하고도 영원한 두 물질이라고 보는 자이나교의 가르침을 단순한 언어로 설명했다.

 

( 그 설명에 따르면 옮긴이 ) 영혼의 속성은 완벽하고 온전한 의식이며, 물질의 성격은 생명이 없고 불가지(不可知. [] 수가 없음[不可] - 옮긴이)한 것으로서, 영혼은 그를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자기 인식을 모호하게 만드는 물질로부터 스스로를(자신을 옮긴이) 해방시키기 위해 애쓴다.

 

물질적인 육체로부터의 해방(‘목샤’)은 영혼이 그의 진정한 성격을 인식해서 쾌락이나 고통에 눈 돌리지 않게 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해방을 향한 영혼의 진보는 계속적인 경계와 자기 성찰 및 네 가지의 주요 규율, 즉 진실성(거짓이 의식을 모호하게 하므로), 손상 없음(‘아시마’ : 폭력은 물질을 이용해서 생명에 위해를 가하거나 파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영혼과 그 자체의 비물질적 특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므로), 정숙(성적 행위는 의식을 모호하게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적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었을 무수한 살아 있는 정액선을 파괴하기 때문에), 가난(소유는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을 육체로 혼동하게 만들기 때문에)의 준수를 요구하는 지난한(至難. 이르기[] 어려운[] 매우 어려운 : 옮긴이) 것이다.

 

그의 생활을 이러한 규율에 적응시키는 데 여러 해가 걸렸지만, 간디는 레이찬드의 가르침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 듯하다. 그는 다른 종교로의 개종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돼 특히 안도했다.

 

레이찬드가 지적했듯이 그는 힌두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것은 전생에서의 그의 활동의 영향에 기인한(起因일이 일어나는 까닭인/까닭을 둔 : 옮긴이)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그는 힌두인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간디는 레이찬드의 충고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는 바깥의 형식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종교는 한 영혼의 품성이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람 속에 존재한다. 종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게 되는 정신적 자기 완성의 규율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 규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인도일 수도 있고, 유럽일 수도 있으며, 아라비아일 수도 있다.

 

영혼의 성격과 해방에의 갈구에 대한 레이찬드의 가르침은 간디에게 인도인 공동체의 백인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싸움 옮긴이)을 정치적 투쟁에서 정신적인 투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시킬(바꿀 옮긴이)수 있게 하는 종교적 확신을 주었다.

 

1909년 무렵 그는 이러한 남아공 상황에 맞는 포괄적인 문명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힌두 스와라지( 인도 자치 )에 관한 구자라트 선언에서 진정한 문명이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열정에 대한 주인됨을 달성하는 데 있다.”고 전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자신을 옮긴이) 안다. [ …… ] 이런 정의가 정확하다면, 인도는, 많은 작가들이 지적했듯이, 다른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 배워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인도 문명의 성향은 도덕적인 것을 향상시키고 서구 문명의 그것은 부도덕성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명론에 따르면 옮긴이) 유럽인들은 반쯤 미친 것 같다. 그들은 진정한 육체적 힘이나 용기가 없다. 그들은 독극물로 그들의 에너지를 유지시킨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는 도대체 행복할 수 없다. 집안의 여왕이어야 할 여성들은 거리를 헤매고 공장에서 노예 생활로 시들고 있다. [ …… ] 사람들이 오직 견딜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명은 스스로 멸망으로 이끌게 될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마호메트(올바른 발음은 무함마드’ - 옮긴이)의 가르침(그러니까, 이슬람교 옮긴이)에 따르면 이것은 악마의 문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도인들은 영국의 문명을 버리고 영국 문명을 진정한(참된 옮긴이) 문명, 즉 인도 문명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러한 진단에 이어졌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간디는 서구문명과 근대문명 사이의 차이를 끌어냈다. (그는 옮긴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영국인들이 아니라 철도, 전신(電信. 전류/전파를 써서 두 지점 사이에 행하는 통신 옮긴이), 전화 및 문명의 승리로 얘기돼온 거의 모든 발명품을 통해 지배하는 근대 문명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문명을 제거하면 인도와 영국은 평화롭게 살 수 있고 양국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간디는 동양과 서양은 서양이 근대 문명을 거의 완벽하게 벗어던질 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인들은 무기(병기[兵器]. 순수한 배달말로는 잠기’ - 옮긴이)를 사용하지(쓰지 옮긴이) 않고 어떻게 영국의 지배에 저항할(맞설 옮긴이) 수 있는가?”란 질문(물음 옮긴이)에 답하면서, 간디는 그의 사턍그라하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스스로 이 단어(순수한 배달말로는 낱말’ - 옮긴이)를 만들어 진실의 힘’, ‘영혼의 힘으로 번역했다. 산스크리트어로 진실, 사실을 의미하는 사탸단호함, 결의를 의미하는(뜻하는 옮긴이) ‘앙그라하를 결합시킨(이어붙인 옮긴이) 이 말은 신이 우리에게 옳은 것을 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옳은 것에 단호해야 한다.”는 링컨의 생각과 상당히 비슷한 것을 시사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친숙했던 두 가지의 인도 전통, 즉 라지푸트 전사들의 절대적인 용기와 해방을 갈구하는 자이나 교도들이 추구하는 절대적 진실성, 무해성 및 육체에 대한 냉혹한 무시가 그의 사턍그라하란 이념 속에 들어 있다.

 

사턍그라하의 실천자는 그가 부당한 법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맞서, 자신의 영혼의 힘이 억압자를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불의를 시정(是正.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 옮긴이)하게 만들리라는 희망을 갖고, 신중하게 그것에 불복하고 즐겁게 법정이 내린 벌을 받는다.

 

간디 자신은 1908년 사턍그라하를 본질적으로 자이나교의 용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힘의 성공적 사용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육체로부터 떨어져나온 영혼의 존재와 영혼의 영구적이고 우월한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1909년경 그는 이미 그의 방법이 인도의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확신했으며, “그것은 가장 오래된 종교의 터전이고 근대 문명 인간의 신성(神性. []과 같은 성격[] : 옮긴이)을 부인하고 그 자체 파멸의 길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가장 암울한 형태의 폭력에 기초하고 있는 에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뛰어난 우리 국민(인도인 옮긴이)과 우리나라(인도 옮긴이)에 적합한 유일한 무기라고 믿었다.

 

감동스러운 모범과 탁월한 지도력을 통해 간디는 점차 남아공 인도인 사회에 사턍그라하의 정신을 불어넣었으며, 1914년경에는 지배 백인 사회에서 상당한 양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의 원칙과 방법이 인도를 (식민지로 옮긴이) 지배하는 영국 정부에 맞서서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1915년 인도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그가 한 첫 번째 일 가운데 하나는 6년 후(그러니까, 서기 1921옮긴이) 그의 정치적 프로그램에 가장 단호한 반대를 하게 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접촉하는 것이었다.

 

간디는 1901년 캘커타에서 국민회의가 열렸을 때 늙은 마하르쉬(타고르 시인의 아버지에게 주어진 존칭 옮긴이)’를 만나려 했지만, 그 오래 전부터 브라모 사마지운동(서양 교육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이 19세기 전반에 전개한 힌두교에 대한 영적/사회적 개혁 운동이다[종교 순화 운동]. 그들은 서양의 합리주의와 인도주의를 수용하여, 힌두교의 교리와 이에서 비롯된 사회 풍속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힌두교의 개혁을 통한 반외세를 겨냥한 것으로, 전통의 정비를 통한 근대화 운동이다. - 옮긴이)의 위대한 지도자로 드벤드라나트 타고르(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인의 아버지 옮긴이)’를 알고 있었다.

 

84세의 이 늙은 현자는 너무나 늙어서 간디와의 인터뷰에 응할 수 없었으나, 젊은 간디와 그의 친구들은 타고르 집에서 열린 브라모 사미지 예배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다. 라빈드라나트는 그 당시 산티니케탄(지역 이름 옮긴이)’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간디와의 첫 접촉은 그의 친구 앤드루스(C.F.Andrews)’가 당시 남아공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사턍그라하 캠페인을 인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1913년에 이뤄졌다. 앤드루스는 간디를 돕기 위해 나탈에 오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벵골 시인의 격려 메시지를 지니고 왔다.

 

간디가 1915년 인도로 돌아와 아직 정해진 주거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앤드루스의 요청을 받은 타고르는 그(간디 옮긴이)와 그의 친구들을 위해 산티니케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초청장에서 그는 간디를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을 뜻하는 마하트마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그 후(옮긴이) 계속 간디의 호칭이 됐다. 옛 힌두 의식이 뒤따른 산티니케탄의 예술적인 환영식에 이어 간디는 타고르적인 색채가 강한 말로 답사를 했다.

 

봄베이의 엄청난 화려함이 우리를 맞이했지만, 거기에 있는 어느 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단지 서구적 양식에 대한 세심한 모방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인(아시아인 옮긴이)이기 때문에, 서양적 방식이 아닌 동양적(아시아적 옮긴이) 방식으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우리는 인도의 아름다운 태도와 관습 속에서 키워져야 하며, 인도의 정신에 따라 다른 이념(또는 문화나 종교 옮긴이)을 갖고 있는 나라들과 친구가 돼야 한다. 실제로 인도의 동양(아시아 옮긴이) 문화를 통해 인도는 동양과 서양 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수립할 것이다.

 

간디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서구 문명에 대한 종교적인 거부와 온건 민족주의자들의 폭력적 방법에 대한 혐오를 묶어낸 것은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중산층에 아주 호소력이 있는 것임이 5년 사이에 입증돼 원로 국민회의 지도자들조차 간디를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타고르는 간디가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1919(이 해에 근대 왜국[倭國]에게 점령당한 한국 땅에서 3.1 혁명이 일어난다 옮긴이) 사턍그라하는 반드시 그 자체가 도덕적인 것만은 아닌 물리력으로 진실을 위해 쓰여질 수 있지만 반대로 진실에 맞서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고 공개 경고했다.

 

타고르가 일종의 정신적 평화라는 치유의 메시지를 갖고 유럽 여행길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은 1920, 간디는 법원, 입법 기관, 영어 사용 학교, 영국 상품 판매 상점 등(같은 옮긴이) 인도에 있는 모든 영국 기관에 대한 전국적인 비협조 운동을 조직했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완전히 비폭력적인 프로그램은 젊은 (인도 옮긴이) 민족주의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으며, 그 후 그들은 간디를 그들의 최고 지도자로 우러러보게 됐다.

 

타고르는 처음에는 간디의 비폭력 운동 소식을 환영하며(반갑게 맞아들이며 옮긴이) 시카고에서 앤드루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육체적으로 약하면서도 모든 물질적 자원을 거부하는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빈궁하고 모욕받은 민중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양순함 속에 감춰져 있던 엄청난 힘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 우리 동방의 굶주린 채 누더기를 걸친 부랑아들이 모든 인류를 위해 자유를 쟁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타고르 시인 옮긴이)의 열광은 간디가 근대 서구 문명을 통째로 부정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옮긴이) 갑작스럽게 실망으로 변했다(바뀌었다 옮긴이). 그는 앤드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디가 인도인들에게 옮긴이)대양(大洋. 넓고 큰 바다 옮긴이)의 반대편에서 비협조를 설교하고 있는(설교하는 옮긴이) 바로 이 순간에 나는 이 편(미국 땅 옮긴이)에서 문화 사이의 협력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운명의 아이러니(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옮긴이)가 아닌가?”라고 썼다.

 

간디의 인도에 대한 개념을 너무 좁은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 자신의 기도는 인도가 세계 모든 인류의 협력을 대변했으면 하는 것이다. [ …… ]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지성은 다른 앵글에서 다른 측면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앤드루스는 타고르의 편지를 인도의 주요한 영어 월간지 모던 리뷰 에 게재했고, 타고르의 비판에 직면한 간디는 즉시 그 자신의 영어 주간지(‘주간 잡지를 줄인 말. 1주에 한 번씩 나오는 잡지를 일컫는 말이다 옮긴이) 젊은 인도 에 게재한 두 개의 기고문을 통해 답변했다.

 

인도의 메시지를 세계(世界. 순수한 배달말로는 누리’ - 옮긴이)에 전한 그의 시적 해석이라고 타고르에 외교적인 찬사를 보낸 후, 그는 비타협 운동이 부정적 이념이라는 이 시인의 비판을 슬쩍 받아넘겼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닌 것을 거부하는 것도 필요하다. 악과의 비타협은 선과의 협력과 마찬가지로 의무이다.”라고 간디는 주장했다. 간디는 인도의 사명에 대한 타고르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지만, 그것은 독립되고 각성된 인도에 의해서만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고르 시인 옮긴이)가 그의 평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고, 인도가 비타협 운동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체현(體現. ‘[]으로 나타냄[]’ 정신적인 것을 구체적인 형태나 행동으로 나타내거나 몸으로 실현함 : 옮긴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타협이란 시인(타고르 옮긴이)이 추구해온 애국주의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유럽의 발밑에 깔린 인도는 인류에게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다. 각성하고 자유로운 인도는 신음하는 세계에 평화와 선린의 메시지를 전한다. 비타협은 그가 그러한 메시지를 밝힐 바탕을 제공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성공적인 유럽 여행을 마치고 1921년 중반 인도로 돌아온 타고르는 간디를 비판하는 것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당시 간디의 운동은 점차적으로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간디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밝혀달라는 기자들의 등쌀(몹시 귀찮게 구는 짓 옮긴이)에 타고르는 나는 내 양심의 지시에 따라,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밝힘으로써 겸손하게 그의 추종자가 되려 할 것이다.”라고(하고 옮긴이) 답했다.

 

그러나 비타협 운동의 목적과 방법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스스로에게(자신에게 옮긴이) 부과한 침묵을 지키기가 어려워짐을 깨달았으며, 캘커타에 돌아온 몇 주 후 두 차례의 공개적 강좌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 첫 번째인 문화의 통합은 그의 국제주의적 이념을 강조하고 그가 두려워하는 간디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애매하게 비난했다. 두 번째 진실의 부름은 진실을 모든 인간이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본질적 통합을 인식했던 조화의 상태로 보아온 그의 견해와 진실은 모든 비도덕적인 것을 부정하는 분투적(奮鬪的. ‘성내며[] 싸우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거나 애쓰는 : 옮긴이) 과정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도덕적 상태라고 본 간디의 견해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간디는 타고르의 두 번째 강연 후 그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캘커타의 시인의 집(캘커타, 그러니까 콜카타는 벵골에 속한 도시고, 타고르 시인은 바라트의 동부인 벵골 주 출신이다 옮긴이)을 방문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동안 밖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간디, 와서 내 베란다 밖을 보시오. 그러면 거기서 당신의 비폭력 운동 추종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은 상점에서 (영국제) 옷을 훔치고 있습니다. [ …… ] 그들은 내 뜰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서 발광한(병으로 미친 증세가 일어난 옮긴이) 수도사처럼 울부짖고 있습니다. 저것이 당신의 비폭력 운동인가요? 당신은 (인도 군중의 옮긴이) 이런 감정들을 당신의 비폭력 원칙으로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할 수 없는 줄 알 거요.”라고 타고르는 말했다.

 

이에 대해 간디가 알았습니다. 당신이 국민을 이끌고 장광설(長廣舌. 길고 세차게 잘하는 말솜씨/쓸데없이 너저분하게 오래 지껄이는 말. 여기서는 두 번째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을 늘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좋습니다.”라고 맞받아치자,

 

타고르는 나는 시를 쓰고 노래를 지을 수 있소. 그러나 간디, 내가 값진 면제품으로 무얼 만들든 무슨 소동이란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서기 옮긴이) 20세기 인도 최대의 지성인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극적인 충돌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한 사람(간디 옮긴이)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바꾸는 옮긴이) 데 관심이 있는 개혁가였고, 또 한 사람(타고르 옮긴이)은 덜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조화를 듣고 있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직업과 기질에서의 이러한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은 인도와 세계를 그 자신의 지역, 신분, 그리고 가족 전통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봤다. 보수적인 자이나 바이슈나바의 종교적 전통과 라지푸트의 정치적 전통 속에서 키워진 카티아와드 바니아(그러니까, 바이샤 출신인 간디 옮긴이)’의 눈으로 본 인도는, 근대 서구 문명에 동화되는 것에 앞장서서 그러한 서구 문명을 힌두의 종교적/예술적 전통과 통합시키려 해 온 비정통파적인 벵골의 브라만 출신(그러니까, 타고르 시인 옮긴이)이 보는 인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간디가 갖고 있는 인도와 서구에 대한 이미지는 개별적인 서구인들과 그가 나눈 매우 다른 경험을 반영하기도 한다. 남아공 백인 우월주의자들 지배하의 식민지 전초 기지에서 그가 겪은 것은 서구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의 문학 서클(순수한 배달말로는 동아리’ - 옮긴이)에서 타고르를 환영한 것이 그렇게 야단스러웠던 만큼이나 잔인한 것이었다.

 

타고르가 간디에 반대한 것의 아이러니컬한(역설적인 옮긴이) 결과는, 그가 일본과 중국(중화민국 옮긴이)에서 동양의 정신적 문화를 찬양함으로써 집중 포화를 받은 데 반해, (적어도 1920년대에는) 인도 동포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서양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는 이유로(까닭으로 옮긴이) 인도에서 심하게 비판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 대한 (인도 옮긴이) 민족주의자들의 적대감은 그의 고향인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바라트의 벵골 주를 합친 땅 옮긴이)에서 가장 심했다. 간디의 이념에 대해 그 자신 유보적 입장에 있었지만, 1921년에는 그(간디 옮긴이)의 이념을 따랐던 다스는 매일(날마다 옮긴이) 라빈드라나트(타고르 시인의 이름 - 옮긴이)에 대한 일장(一場. 한바탕 : 옮긴이)의 비난을 하는 것을 끝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간디에 반대하기 시작한 후 타고르의 인기는 눈에 띄게 하락하였는데, 그것은 1921년에서 1924년 사이 캘커타 독자들의 반응으로 측정할 수 있다.

 

1921년 유럽과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후 첫 강연 당시 청중의 수는 어찌나 많았던지 가득 찬 강당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청중들로 인해 창문이 깨질 정도였다. “시인이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아주 열렬한 환영이 계속돼 박수와 환호가 한동안 계속됐다.” 며칠 후 두 번째 연설회에서는 청중 수가 줄어들었으며, “열광이 줄어들었고”, “일부 청중들의 얼굴에 우려의 표정이 나타났다.” 몇 달 후 그가 자신이 새로 설립한 비스바 바라티 국제대학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해 산티니케탄에서 캘커타로 돌아와 강연했을 때, 그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냉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중화민국 옮긴이)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 19248월 캘커타 대학에서 한 회의를 주재했을 때, 처음부터 소음과 고함과 혼란으로 인해(혼란 때문에 옮긴이) 회의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가 돼 시인은 (P. C. Pal)(그 역시 [간디의 옮긴이] 불복종 운동에 반대했다)’과 함께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캘커타에서 간디와 만난 후 타고르는 그의 비스바 바라티 대학을 창설하기 위해 192112월 산티니케탄을 떠났다. 그 대학 설립 목표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는 동양과 서양의 진정한 협력을 촉구하고 이러한 협력의 달성은 보편적 문화의 완전성을 이룩하기 위해 서로 상보적이고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간디의 불복종 운동에 대해 언급하는 듯했다.

 

간디는 19222월 연합주의 농촌 지역 출신 추종자들이 22명의 경찰관을 불태워 죽임으로써 엄격한 비폭력 운동의 계율을 깨뜨린 후 이 위대한 운동을 중지함으로써 많은 인도 민족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었지만, 그는 원칙을 굳건히 고수했다.

 

갑작스런 운동의 중지는 거의 모든 저명한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다. [ …… ] 우리의 충천(衝天. ‘하늘[]을 찌름[]’ 분하거나 의로운 기세 따위가 북받쳐 오름 : 옮긴이)한 희망이 땅에 굴러떨어졌다.”고 젊은 자와할랄 네루는 (이 일에 대해 논평한 글을 옮긴이) 썼다.

 

간디의 애국심은 19223월 그가 인도 정부(사실은 영국의 인도 총독부 옮긴이)에 대한 모멸감과 증오감을 부추긴다는 혐의로 체포돼 심문받고 실형을 선고받자, 일반대중의 마음속에 다시(이 말은 군더더기라 빼야 한다 옮긴이) 되살아났다. 1924년 석방된 후 그는 1928년 그의 6년 형기가 종료될(끝날 옮긴이) 때까지 적극적인 정치의 장에서는 떠났지만 젊은 인도 에 인도 문제에 관한 논평 게재는 계속했다.

 

예를 들어 앤드루스가 1924년 타고르의 중국과 일본 방문에 관한 인상 깊은 보고서를 보내왔을 때 그는 시인의 인도적이고 평화 애호적인 활동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함께 그 글을 재수록했다.

 

1927년 그는 인도와 다른 아시아 국가 사이의 문화/기업적 연합이라는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배격했다. “문화 연합은 우리의 위대한 시인(타고르 시인을 이렇게 비꼰 것인가? - 옮긴이)이 충분히 경청했고, 기업 연합은 대규모 상업 회사들이 충분히 검토했다고 감히 주장한다.”

 

간디가 타고르의 활동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시인(타고르 옮긴이)은 마하트마(간디 옮긴이)에 대해 언급하고 다녔다. 그는 간디가 힌두 사회 개혁을 위한 전제로 삼는 자이나교의 교리에 대해 너무 몰랐기 때문에(타고르 시인이 자이나교도들이 사는 구자라트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벵골 출신이고, 자이나교도가 아니라 힌두교 신자였기 때문에, 이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옮긴이) 1928년 간디의 금욕주의를 근거가 먼 중세 유럽의 수도주의적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했다. 타고르는 퐁디셰리에 있는 그의 휴양소에서 오로빈도와 인상적인 회견을 가진 직후(바로 뒤 옮긴이)에 이러한 말을 했다. 그는 오로빈도야말로 영원한 말이 베다 의 형태로 현신(현세에 나타난 신의 몸 옮긴이)한 힌두 성인의 참 후예라고 썼다.

 

(오로빈도 옮긴이)의 얼굴은 내면의 빛으로 빛났고, 그의 평정한(平靜. 평안하고 고요한 옮긴이) 모습은 삶의 상처로부터 기쁨을 앗아가는 전제적인 수단에 의해 그의 영혼이 절름발이가 되거나 짓눌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결코 자기 과신(過信. 지나치게[] 믿음[] - 옮긴이)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쌍둥이인 자기 희생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는 유럽의 금욕주의적 기독교 수도승에게서 배우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타고르 시인 옮긴이)는 고대 힌두리시(‘힌두 사람’? - 옮긴이)의 말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영혼 속으로 온전히 하나가 돼 들어가는 자유를 부여하는 저 평정(평안함과 고요함 옮긴이)을 말하게 했다고 여겼다.

 

이러한 글귀는 다시 한번 힌두교 정신에 대한 현대 벵골과 현대 카티아와디의 해석(풀이 옮긴이)이 그리고 인도 전체의 해석이 다름을 보여준다. (타고르 시인이 주장한 옮긴이) 벵골의 비전은 (남아시아의 고전이고 힌두교의 경전이자 철학 서적인 옮긴이) 우파니샤드 의 즐거운 평정에 지배된 반면, (간디가 주장한 옮긴이) 카티아와디의 이미지는 자이나(자이나교 옮긴이) 수도주의의 정복할 수 없는 의지와 결합되어 있다.

 

타고르와 간디는 개인적인 친구로 남았다. 그들은 1925년에서 1940년 사이 네 차례 서로를 방문했지만, 그들 사이의 지적인 간격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1938년에 씌어진 좀 너그러운 평가에서 타고르는 이론이나 그가 주장하고 있는 신념의 판타지(환상 옮긴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지성의 독특함을 증거하는 실천을 통해시인을 이해하듯이 간디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간디는 어쩔 수 없는 이상주의자여서 모든 행위를 그 자신의 지론에 맞추려는 사람이지만 [ …… ] 본질적으로 단순한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간디 역시(또한 옮긴이) 타고르의 학교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1945(이 해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다 옮긴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차이를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옮긴이) 무시했다.

 

나는 구르디예프와 나 자신의 갈등을 찾아낼 뜻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갈등으로 부를 만한 것은 옮긴이) ‘아무것도 없다.’는 영광스러운 발견으로 끝났을 뿐이다.”

 

이러한 진술은 두 사람 사이에 정말로 좋은 감정이 존재하지만, 둘 가운데 누구도 1921년 논쟁 기간 동안에 드러났던 그들의 사상과 방법론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참된 옮긴이) 차이를 해결해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두 사람은 일치했다. 타고르가 여러 차례 말했고 간디가 1921년에 선언했듯이, 인도가 신음하는 세계에 대한 평화와 선의의 메시지라는 것이다(글쎄다. 바라트에서 브라만 ~ 수드라에게 탄압당하고 차별받는 달리트들이 그 말에 동의할까? 바라트 안에서 걸핏하면 두들겨맞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 무슬림과 시크교도들이 그 말에 동의할까? 바라트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네팔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할까? 몇십 년 전에 바라트 때문에 독립을 잃은 시킴 왕국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할까?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할까? - 옮긴이).

 

간디는 1947(이 해에 인도가 바라트 연방 공화국과 파키스탄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져서 독립한다 옮긴이) 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국가간 관계 회의에서 그의 제자 자와할랄 네루가 대독(축사나 식사 따위를 대신 읽음 옮긴이)한 연설에서 한 것처럼 그의 말년에 아주 강력한 어조로 이러한 믿음을 되풀이 강조했다.

 

아시아 국가에서 온 대표들에게 보낸 간디의 성명은 모든 주요한 점에서 동양(아시아 옮긴이)의 정신적 재생에 대한 타고르의 메시지를 반복했지만(되풀이했지만 옮긴이), ‘영혼의 힘을 통해 성취된 비폭력의 승리에 대한 마하트마 자신의 열정으로 그러한 메시지를 강조했다.

 

동방의 메시지, 아시아의 메시지는 유럽의 시각을 통해서 배우지 말자는 것이며, 총포와 원자탄(원자폭탄 옮긴이) 같은 서방의 악들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만약 바라트 정부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모습을 보았다면, 제하[諸夏 : 북경(北京)] 정부와 군대도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고 근대 왜국[倭國] 군부가 2차 대전 때 목숨 걸고 원자폭탄을 만들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간디는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 옮긴이). 서구에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면 그 메시지는 사랑의 메시지이고 진실의 메시지여야 한다. 아시아는 (총칼이 아니라 사랑과 진실로 옮긴이) 서방을 정복해야 한다. 여러분과 나는 사랑의 메시지의 상속자들이다. 여러분은 이 민주주의의 시대에 그리고 가난한 자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들이 각성하는 시대에 그 메시지를 다시 전달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여러분은 서구 전체에 대한 정복(사실은 교화 옮긴이)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 …… ] 오늘날(서기 1947옮긴이) 서구는 지혜를 갈구한다. 서구는 원자탄의 확산이 서구뿐만 아니라 전세계(온 누리 옮긴이)를 파괴할(부술 옮긴이) 것이기 때문에 원자탄의 확산에 절망하고 있다(그러나 그런 서구에 속하는 프랑스나 영국이 핵무기를 만들어서 가진 사실을 생각하면, 그 두 나라는 원자탄의 확산에 절망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옮긴이). [ …… ]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사악함과 죄악에서 구해낼 수 있는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여러분(회의에 참석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표들 옮긴이)의 스승들과 나의 스승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귀중한 유산이다.

 

타고르도 마찬가지지만 간디에게도 인도는 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간디는 암살되기 4개월 전(넉 달 전 옮긴이) 일상의 기도 모임에서 인도가 무너지면 아시아가 죽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인도가 여러 문화와 문명의 요람으로 불려왔다. 인도로 하여금 아시아, 아프리카 및 그 밖의 세계의 모든 착취받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이었다([동아프리카 나라인] 우간다나 [남부 아프리카의 나라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나라에서는 영국이 데려온 바라트 사람들이 경제를 손에 넣고 흑인 위에 군림하여 흑인과 남아시아인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옮긴이).

 

당시 힌두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인도의 종교 전통의 우수성에 대한 믿음은 (타고르나 간디가 아닌 옮긴이) 인도의 다른 지역의 다른 사상가들의 마음속에는 꽤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을 수 있다. 간디 자신의 고향인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옮긴이) 내에서도 힌두 정신을 비폭력으로 해석한(풀이한 옮긴이) 간디의 견해는 마하라슈트라(바라트 주[]의 이름 옮긴이)의 마라티어 지역 출신의 열정적 민족주의자인 비어 다무다르 사바르카르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사바르카르는 전투적인 정당으로 그 옛 당원이 1948년 간디를 암살했던 전인도 힌두 마하사바(힌두인 대연합)’의 지도적인 대변인(이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총재)이었다.

 

사바르카르와 간디 사이의 긴장은 그들 각각이 존경하는 인물인 극단주의자 틸라크(B.G. Tilak)’와 온건주의자 곡할레(두 사람 모두 마하라슈트라의 브라만이었다)’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긴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념적으로 구자라트와 마하라슈트라는 두 가지 점, 즉 인도의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의 여부와 인도의 민족주의 투쟁에 모슬렘(무슬림 옮긴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에서 입장을 달리했다. 이러한 차이 또한 그들 각각의 지역의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위대한 왕국마하라슈트라는 마라타 제국의 본고장으로서 그곳의 힌두 지도자들은 17세기 무굴제국의 권위에 맞서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며(봉기하는 데 성공했으며 옮긴이), 18세기에는 무굴제국을 대체해 이 대륙의 주도적 세력이 됐다. 마라타의 투쟁 정신은 1818년 그들 연방이 영국에게 패퇴한 뒤 식었지만, 19세기 말경 다시 불타올랐다.

 

마라타의 호전성은 특히 틸라크의 민족주의 속에 그 모습을 보이는데, 틸라크는 1907(이 해에 대한제국에서 정미의병이 들고 일어난다 옮긴이) ‘오로빈도와 그의 벵골 추종자들의 도움을 얻어 국민회의 내의 새로운 극단파와 옛 온건파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틸라크는 모반(사실은 반영[反英] - 옮긴이) 활동 혐의로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수감됐으며, 말년에는(그는 1920년에 사망했다) 더욱 온건해졌지만, 젊은 혁명가 사바르카르는 14(서기 1910 ~ 1924)간의 수감 생활 동안 마라타 전통을 기초로 한 분명한 힌두 종교 민족주의를 만들어냈다.

 

사바르카르의 이념은 사이바’, ‘바시나바’, ‘자이나(자이나교 옮긴이)’, ‘시크(시크교 옮긴이)’, 불교 등(같은 옮긴이) 인도가 그들의 종교의 발생지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단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따라서 이 모두가 힌두인들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했다(자이나교와 불교가 힌두교의 전신[前身]인 브라만교/베다교에 반발해서 만들어진 종교고, 시크교가 힌두교의 중요 교리인 바르나/자띠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종교라는 점을 무시하는, 너무나도 잘못된 주장이다 : 옮긴이). 힌두와 인도는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의 땅)’을 의미하는 신두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극적 정의는 분파적 논쟁을 종식시키고, 인도를 강성한 국가(나라 옮긴이)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의 국제 의례에서 중국만이 힌두와 같은 지리적/인종적/문화적/수적인 특성을 풍부하게 타고났다(적어도 1세기 전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인도인의 인식이 반중[反中]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옮긴이). 우리가 민족적 단결에 기여해야 할 정예인 한, 신성하고 완벽한 공통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신성한 조국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운이 좋다고 할 것이다.

 

인도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결코 인도를 그들의 성지로 여길 수 없는 모슬렘들은 (나아가 인도의 서남쪽 끝인 께랄라[]에서 서기 1세기부터 예수교 신자로 살아온 사람들이나, 서기 19세기 이후에 개신교로 개종한 인도 사람들이나, 페르시아의 무슬림들을 피해 이란에서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 ‘인도는 영어 인디아(India)’를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옮긴 말이고, ‘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바라트로 부른다]로 달아나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도 옮긴이)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예를 들면,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옮긴이)을 배제할 뿐 아니라, 아시아 전 대륙을 힌두교의 정신적 외투로 덮으려는 타고르나 간디의 노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바르카르의 생각에는 그러한 범아시아 운동은 힌두인들로 하여금 인도(바라트 옮긴이)에서 강한 민족국가를 건설한다는 그들의 주요 사명을 잊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명은 인도가 그들의 활동 근거지이며, 그들의 조국이고, 그들의 성소이며, 그러한 역사를 공유하고 같은 피(사실은 남쪽의 드라비다계와 북쪽의 아리안계와 동북쪽의 몽골로이드로 혈통이 나뉘며, 페르시아인이나 튀르크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도 있다 옮긴이)와 같은 문화의 끈으로 묶인 그들 3억 인민(당시 인도 아대륙의 인구 수 옮긴이)이 그들의 목표를 전세계(온 누리 옮긴이)에 분명히 할 수 있을 때 달성될 수 있다. 인류가 무력에 맞서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간디와 사바르카르의 종교 이념은 어느 것도 1947년 수립된 인도 정부의 공식 이념이 되지 못했다. 인도의 공식 정책은 간디가 참여하기 전인 1885년에서 1920년 사이 인도 국민회의가 바탕으로 삼아온 세속적 원칙들을 따랐다(요즘은 힌두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정당이 여당이 됨으로써, 이 원칙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 옮긴이). 국민회의에서 간디가 갖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의 그의 성자적 스타일은 종교적 감정에 대한 호소를 일축하고 법적/정치적 문제의 도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국민회의 지도자 대부분에 의해 추수(追隨. [남을] 뒤쫓아[] 따름[] - 옮긴이)근대적 스타일에 의해 균형이 잡혔고, 궁극적으로는 그 근대적 스타일로 대체됐다.

 

다스가 숨진 후(옮긴이) 세속적 국민회의(나중에 바라트의 정당이자 여당이 된다 옮긴이) 대의원 중(가운데 옮긴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북부 인도의 지도자들인 마티랄 네루와 그의 아들 자와할랄 네루로 그들은 간디와 함께 1920년대 후반의 국민회의 정치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불렸다. 인도, 아시아 그리고 타고르의 메시지에 대한 네루의 견해는 그가 독립한 인도의 초대 총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견해가 그의 세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고 또 만들어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타고르, 간디 및 다른 민족적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네루도 그를 키워낸 그의 가정과 지역 배경에 비춰 검토해야만 한다.

 

 

( 4 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