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의 등장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지나친 말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이 아닌 사건이다. 이는 특히 인류의 물질생활보다는 정신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각종 매체에 휩싸여 사는 우리는 인쇄된 책의 영향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에서 여전히 인쇄된 책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간에는 서유럽에서 인쇄술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사람들의 지적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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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술 도입 이전의 삶, 구술 문화와 필사 문화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쇄된 책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거의 공기처럼 여겨지는 물건입니다. 우리는 학교(갈터 – 옮긴이)에 다니면서 책을 보고 공부하며,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도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책을 찾아보곤 하겠죠.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책의 중요성이 예전만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각종 전자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늘어나고, 인터넷(누리그물 – 옮긴이)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과거보다 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전자책(e-book)이 널리 보급되면서 종이에 인쇄된 책은 머지않아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쇄된 책은 이미 ‘한물간’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쇄된 책의 등장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은 이런 ‘수박 겉핥기’식 관찰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커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도 책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일일이(하나하나 – 옮긴이) 손으로 베껴 써야 했기에 만드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인쇄술의 도입은 기존에 이미 있던 책을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값싸게 만드는 방법을 제공했을 뿐이고, 따라서 그것이 미친 영향도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 사람들이 누리던 지식 문화는 지금과 전혀(완전히 – 옮긴이) 달랐어요. 인쇄술이 보편화하고, 변화한 지식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가 그 이전의 문화를 이해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쇄술 도입 이전에는 책이 정말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대부분 사람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어요. 평생 책 한 번 구경하지도 못하고 죽는 이가 태반(太半. 반수 이상/절반 이상 – 옮긴이)이라서, 아마 책을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구불구불 그려진 형상(문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뜻하는지 – 옮긴이) 전혀(조금도 – 옮긴이) 이해하지 못했을 테죠. 중세에는 왕이나 귀족이 문맹인 경우도 많아서, 편지를 주고받으려면 주위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서기를 따로 둬야 했어요. 책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기록해 놓을 만한 양피지나 종이 같은 물건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기억에 의지해야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억법과 암기술이 유행했고(주로 연상 작용을 이용해 외우는 방법이 쓰였습니다.), 요새 기준으로 보면 깜짝 놀랄 만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았죠. 책으로 만들면 수백 쪽에 달하는 분량의 서사시를 줄줄 외는 이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심지어 1,000개 정도의 단어(낱말 – 옮긴이)를 딱 한 번만 듣고 바로 되풀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 문화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의 말 한 마디가 절대적인 권위였어요. 그들은 오래 살면서 다른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들에 대해 길고 온전한 기억을 가졌기 때문이죠.
대부분 사람이 문맹인 이런 사회에서 문자 문화의 명맥을 이어 나간 이들은 ‘성직자’였습니다. 그들은 『 성경 』에 기록된 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기에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수도원이나 성당에 있는 작은 도서실에서 책을 베껴 쓰며 새로운 책을 만들어 내고 지식을 유지/보존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책을 손으로 옮기는 필사(筆寫) 작업은 신께 바치는 성스러운 노역이었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죠.
수사(修士 : 수도사 – 옮긴이)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공들여 필사했고, 특정 문구를 강조하는 붉은 글씨를 군데군데 집어넣은 뒤, 여백에는 화려한 삽화를 그렸어요. 하루 꼬박 작업해도 단 한 쪽도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수사 한 사람이 『 성경 』 한 권을 필사하는 데 보통 3년의 세월이 흘렀죠.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당연히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일례로(한 예로 – 옮긴이) 당시 영국 잉글랜드 지방에서 책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진 캔터베리 대성당 도서실에는 (오늘날 웬만한 개인 장서가가 보유한 책보다도 훨씬 적은) 2,000여 권,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는 겨우 300여 권의 책밖에 없었죠.
필사 문화에서는 책의 권수가 적은 것은 당연하고, 보고픈 책을 찾기도 어려웠어요. 요즘 우리가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 갔을 때 당연하게 여기는 분류 체계나 검색 시스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죠.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책들은 도서관 서가에 무질서하게 배열돼 있었고, 이나마도 책등이나 표지에 저자 또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이 도서관에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디 있는지 알아보려면 일일이 책을 펼쳐서 읽어 보는 방법뿐이었어요. 또한 책은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었기에 도난을 우려해 책을 서가에 쇠사슬로 비끄러매 놓은 도서관이 많았고, 책을 펼치면 도둑에게 경고하는 문구(글귀 – 옮긴이)가 적혀 있기도 했답니다.
▶ 활판 인쇄의 등장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서유럽 사회에 널리 ‘대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 나타난 (서기 – 옮긴이) 13세기부터였습니다. 일찍이 대학이 들어선 이탈리아 볼로냐(서기 1088년), 영국 옥스퍼드(서기 1096년), 프랑스 파리(서기 1150년) 등의 도시에는 교수와 학생이 몰려 책의 수요가 커졌고, 처음으로 상업적 출판업이 등장했죠. 물론 그때의 출판업은 필사한 책을 판매한 것이었고, 출판업자가 책을 베껴 쓰는 필경생(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 글쓴이의 주석)을 여러 명 고용해 필사를 나눠 맡기는 식으로 팩을 주문 생산했습니다. 이때쯤부터 부유한 귀족 등 상류층 가운데 취미로 책을 사 모으는 개인 소장가가 생겨나기도 했어요.
그러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필경생은 많지 않았고, 여전히 책은 웬만한 사람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희귀하고 비쌌습니다. 대학에서도 책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으며, 교수의 강의도 교재 없이 모두 말로 이뤄졌죠.
(서기 – 옮긴이) 15세기 중연 서유럽에 인쇄술이 등장한(나타난 – 옮긴이) 배경은 그러합니다. 서유럽에서 활자를 짜 맞춰 책을 찍어 내는 활판(활자로 짜서 만든 인쇄용 판) 인쇄술을 누가 발명했는지는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독일(도이칠란트 – 옮긴이) 마인츠 출신의 은 세공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 ~ 1468)’가 가장 먼저 해냈다는 것이 통설이에요.
그의 생애애 대해서는 아쉽게도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요. 구텐베르크는 성물(聖物. 거룩한 물건. 여기서는 ‘성인[聖人]이 남긴 옷가지 등의 유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 글쓴이의 주석)을 보려고 여행에 나선 순례자들을 위해 1440년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납과 주석 합금으로 거울을 만들어 팔았는데, 학자들은 그가 금속을 다루는 과정에서 활자를 이용해 책을 인쇄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는 1450년경부터 ‘요한 푸스트(Johann Fust)’라는 상인과 동업해 하나하나 분리된 활자를 써서 『 성경 』 을 인쇄하는 사업을 시작했죠. 구텐베르크는 서로 짜 맞췄을 때 행과 열이 가지런히 배열되도록 규격이 일정한 활자를 주조하였고, 램프의 그을음과 아마인유(아마의 씨에서 짜낸 기름)를 섞어 인쇄용 잉크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주를 짜는 데 쓰이던 압착기로 종이 위에 놓인 활판에 강한 압력을 가해 글자들이 선명히 찍혀 나오게 하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죠. 3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구텐베르크와 그의 조수들은 총 1,282쪽으로 이뤄진 일명 『 42행 성경 』 을 180권 인쇄하는 데 성공을 거뒀습니다.
▶구텐베르크 혁신의 보수성
오늘날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 구텐베르크 성경 』 은 모두 21권입니다(낱장이나 일부분만 남은 것까지 합치면 49권이 있죠). 현존하는 『 구텐베르크 성경 』 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필사한 책은 한 권 한 권이 모두 다르지만, 인쇄한 책은 같은 활판을 써서 만들었다면 100% 똑같을 것 같죠?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만든 『 성경 』 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인쇄된 책을 만든 구텐베르크는 ‘책’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기대에 부응해야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만든 『 성경 』 을 필사한 책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려고 애썼죠.
구텐베르크는 필사본의 서체를 모방하려고 필요한 알파벳의 개수보다 훨씬 더 많은 290여 종의 활자들을 만들었습니다(손으로 글자를 쓰면 이웃한 글자가 무엇인지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는 이런 점까지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글자에 여러 개의 활자를 만들고, 2개 이상의 글자가 들어간 활자인 ‘합자(合字)’도 만들었어요).
또한 그렇게 일단 인쇄한 『 성경 』 에는 필사한 책처럼 붉은 글씨로 강조하는 문구를 넣을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일일이(하나하나 – 옮긴이) 손으로 써넣고, 삽화가를 따로 고용해서 여백을 화려한 삽화로 채워 넣기까지 했답니다.
지금 남아 있는 『 구텐베르크 성경 』 들은 검은색으로 인쇄된 부분은 똑같지만, 이외의 부분은 모두 서로 다른, 고유한 판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구텐베르크가 찍어 낸 『 성경 』 의 가격은 생각보다 저렴하지 않았다고 해요.
기술은 사회를 반영합니다(물론 기술이 사회를 바꾸기도 하죠). 뛰어난 기술을 가졌지만, 당대 사회의 문화적 기대를 고려해야 했던 그는 고민이 참 많았을 거예요.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혁신적인 기술에 숨은 발명의 보수적 측면을 엿볼 수 있죠.
구텐베르크의 성공 이후 서유럽의 여러 도시에는 마치 들불처럼 인쇄소들이 퍼져 나갔습니다. 30년도 채 못 되어 수십 개 도시에 인쇄소가 생겨났고, 그전까지 인쇄되지 않은 책을 서로 경쟁적으로 찾아내 인쇄하는 사업에 나섰죠.
1450년부터 1500년까지 불과 50년 동안 서유럽에서는 1,000만 권이 넘는 책이 인쇄돼 나왔는데, 이는 그보다 앞선 1,000년 동안 만들어진 책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참고로 그 이후 1500년부터 1600년까지 100년 동안 인쇄된 책의 수는 대략 2억 권에 달했어요).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식의 폭발’이 일어난 셈이죠.
그렇게 인쇄된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쇄된 책이 필사한 책과 비슷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사라졌어요. 또한 1480년경부터는 인쇄된 책에 삽화가가 일일이 손으로 그림을 그려 넣는 대신 목판 인쇄로 만든 삽화(17세기 이후에는 좀 더 세밀한 표현이 가능한 동판화)를 추가하는 방법이 쓰이면서 책의 형태도 예전과 (많이 – 옮긴이) 달라졌습니다. 이는 단지 책의 겉모습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지식 문화도 바뀌었음을 의미했죠.
(아래 줄임[‘이하 생략’])
- ‘김명진’ 선생의 글
- 『 고교 독서 평설 』 지 제 310호(서기 2017년 양력 1월호)에 실린 기사
- 단기 4358년 음력 1월 2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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