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계사] 300년 만에 선교사 앞에 나타난 사람들

개마두리 2025. 2. 16. 09:23

(서기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1854년 일본이 개국을 단행하자(이로부터 열네 해 뒤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근대 일본이 세워진다 옮긴이), 서양에서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앞다투어 이 미개척지에 밀려 들어왔다. 막부(에도 막부 옮긴이) 당국은 무역은 허락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교(예수교 옮긴이)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어렵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865(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세 해 전 옮긴이) 천주교 선교사들은 개항장인 나가사키에 숙원이던 성당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건설현장을 구경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군의 무리들(한 무리 옮긴이)이 선교사를 찾아와 신앙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들은 포상촌이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서기 옮긴이) 1500년대 포르투갈 선교사에게서 신앙을 전수받은 후(옮긴이) 300여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지켜 왔다고 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기리시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포르투갈어의 크리스천(예수교인 옮긴이)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었다.

 

근대 일본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에도 천주교, 기독교(개신교 옮긴이) 등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견주어 옮긴이) 보면, 300년 동안 선교사들의 지원은 고사하고 무시무시한 막부의 탄압을 받아 가면서도 신앙(믿음 옮긴이)을 유지해 온 이들 기리시탄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여기서 이들의 고난에 찬 세월을 잠시 더듬어 보자.

 

그리스도교(예수교. 좀 더 정확히는 천주교 옮긴이)(서기 옮긴이) 1549년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에 오면서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때 선교사들은 다이묘들이 관심을 갖는 서양의 무역선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접근해 갔다.

 

당시 전국시대 일본의 다이묘들은 실력이 없으면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는 내전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책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서양의 선박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높은 이익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총포 따위의 신무기를 갖고 있었고, 새로운 군사 전술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각지의 다이묘들은 경쟁적으로 이들과 교역을 행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나타내, 선교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훗날 조선 침략의 선봉장으로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옮긴이])’등 몇몇 다이묘는 아예 개종을 하고 자기 영내의 백성들에게도 개종을 권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전국 통일에 박차를 가하던 당대 최고의 군사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최대 적대 세력인 불교를 억누르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후대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옮긴이) 그리스도교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교세의 확장에 고무된 선교사들은 일본인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세워 스콜라 철학, 라틴 문학, 자연과학 등을 가르쳤다. 또한 일반 일본인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학교제도를 도입하고 많은 소학교를 세웠는데, 당시 예수회의 교육제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기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정통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은 후일(뒷날 옮긴이) 일본의 근대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주교 옮긴이) 신도 수는 한때 15만을 헤아릴 정도였고, (일본 안에서는 옮긴이) 서양풍이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로마자()[라틴 알파벳 옮긴이] 도장, 십자가 문양 등이 유행했고, 비석에도 십자가나 로마자를 새기는 경우까지 있었다. 지금도 일본의 의복, 식품류 이름에 포르투갈어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때의 잔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 옮긴이) 전국을 통일하고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자, 세상은 일변했다. 히데요시는 일본은 신국(神國. 신들의 나라/신성한 나라 옮긴이)”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서양의 종교가 신국을 더럽힐 수 없다.”반텐렌’(성직자를 의미하는[뜻하는 옮긴이] 포르투갈어의 일본식 발음) 추방령을 내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집권하여 도쿠가와 막부(다른 이름은 에도 막부’ - 옮긴이) 시대를 개창(開創. ‘만들어서[] []’ 처음으로 시작하거나 세움 : 옮긴이)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한술 더 떴다.

 

그도 집권 초기에는 대외정책에 선교사들을 이용하기 위해 잠시 묵인정책을 폈다. 이 틈에 포르투갈의 예수회를 대신한 스페인(에스파냐 옮긴이) 계통의 프란시스코회는 일본 동부 지역에까지 세를 확장했고, 일본 극동 지역의 유력한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이달 정종 옮긴이])’는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의 외교 방침이 쇄국정책으로 정해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무역 행위조차 금지하고 1614금교령을 강화해서 선교사는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일본인 신도들까지 마닐라, 마카오 등지로 추방했다. 이어 시바하라에서 그리스도인(천주교 신자들 옮긴이)들이 포함된 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막부는 이를 빌미로 극단적인 탄압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1639년 이제 포르투갈 배의 입항이 아예 금지되었고, 백성들 사이에는 5인조 연좌제를 실시, 밀고자에게는 후한 포상을 하는 등 그리스도인 색출 작업에 혈안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그림을 밟으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을 색출하던 유명한 답회’(踏繪. 그림을 밟는다는 뜻)는 이때 생겼다.

 

이어 도쿠가와 막부는 단나제도라는 것을 실행했다. 이것은 백성의 출생(태어남 옮긴이)과 사망(죽음 옮긴이), 결혼 등 모든 일상사를 지역 사찰(옮긴이)에 보고하고 여기서 백성의 호구(戶口. 집의 수효와 식구 수 옮긴이) 수 등 일거수일투족을 관장하게 한 것이었다. 막부는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개종한 사람이라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친척과 3, 4대의 자손까지 감시했다.

 

이처럼 철저한 금압정책을 실시했지만, 1657년과 1661 ~ 1673년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도가 대량 검거되는 등 신앙은 근절되지 않았다. (비록 그 수는 적었어도 옮긴이)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규슈(구주[九州] - 옮긴이) 지방을 중심으로 기리시탄은 극비리에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왔던 것이다.

 

― 『 상식 밖의 동양사 ( ‘박윤명지음, ‘도서출판 새길펴냄, 서기 1994)에서

 

단기 4358년 음력 119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