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배달민족사] 『 삼국사기 』 에 보이는 고조선의 흔적들 – 고조선의 사서

개마두리 2025. 2. 22. 23:21

고구려(고구리. 좀 더 정확히는 전기 고리[高麗]’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영양왕 11년 춘정월([음력] 1옮긴이), 遣使入隋朝貢 詔大學博士 李文眞 約古史 爲 新集 五券 國初始用文字 時有人記事一百券 名曰留記 至是刪修( 사신을 수나라로 보내 조공했다. [임금이] 대학 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문서를 보내어 옛 역사서들을 간추린 뒤 그것을 신집[新集] 5권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고구리의] 건국 초기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고 []때에 [어떤] 사람이 [] 기사[記事]가 온[100]권인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 유기[留記] 라 하였고 이[]에 이르러 [ 이문진이 신집 을 편집하면서? - 옮긴이] [그 분량이] 깎이고 [내용이] 고쳐졌다 옮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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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초에 이미 있었다는(쓴 것도 아니고) 留記(유기) 100권은 도대체 어느 나라 역사서인가? 1천년(즈믄 해 옮긴이)이나 되는 세 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도 그 절반(가봇 옮긴이)밖에 안 된다.

 

史記(사기) (사마천)는 어느 나라의 역사서인가? 史記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서가 아니고, ()나라가 봉한 여러 제후국의 흥망성쇠를 거쳐 (. 더 정확히는 전한/서한 옮긴이)에 이르는 과정을 적은 역사서이다.

 

유기 史記 에 해당하는 우리(배달민족. 그러니까 한국과 조선 공화국 옮긴이)의 역사서로, 어느 한 나라의 역사서가 아니라 고조선(아사달 옮긴이)과 고조선이 봉한 여러 제후국(거수국 옮긴이)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역사서임이 틀림없다.(나도 같은 생각이다. 고구리 이전에 아사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옮긴이) 북중국이나 동중국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도 겹치므로, 사기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나, 그 분량으로 보아 1천 년 이상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의 역사서일 것이다(참고로 삼국유사 에 따르면, 아사달은 “1908동안 유지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가 다루는 기간인 992년보다 916년은 더 긴 기간이다. 만약 유기 가 아사달의 역사서라면 삼국보다 916년 더 오래 유지된 나라인 아사달을 다룬 유기 삼국사기 보다 두 곱절은 더 많은 분량인 100권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옮긴이).

 

필자(김상 교수 옮긴이)는 고조선의 정통 역사서로 이 留記(유기) 를 들고 싶다. 짐작이지만 그 편찬 양식도 史記(사기) 와 같은 기전체(紀傳體)가 아닌가 생각된다.

 

(덧붙이자면, ‘유기[留記]’[]’변하지 아니하다.’오래다.’는 뜻을 지닌 한자이므로, 나는 유기 는 열국시대 이전에, 그러니까 원[] 부여가 제국을 세운 해인 서기전 425년에 부여 왕실의 명을 받은 사관들이 쓴 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원 부여 사람들에게 아사달이 세워진 해인 서기전 2333원 부여가 세워진 해로부터 1908년 전 - 이나 전기 고조선이 망한 서기전 1285그러니까 원 부여가 세워진 해로부터 860년 전 오랜 옛날이고, 그 오래전에 일어난 일들을 적은 역사책에 오래된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유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자연스러우며, 무릇 한 나라나 왕조가 망하면 그 뒤를 이은[또는 그 나라/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망한 나라/왕조의 역사를 적는 것은 갈마[‘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도 삼국이 멸망한 뒤 그 뒤를 이은 후기 고리[高麗] - 왕건이 세운 나라 - ’가 쓴 역사책이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도 후기 고리가 망한 뒤 그 뒤를 이은 근세조선이 쓴 역사책이었음을 떠올려 보라.

 

한 마디만 더하자면 원 부여 왕실은 아사달의 갈마와 그 문화와 가치를 보존하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달의 갈마를 담은 책을 쓰면서 그 이름을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담은] 기록이라는 뜻으로 유기라고 지은 건 아닌지. 그렇다면 유기오래된 기록변하지 않는 기록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담은 이중적인 이름인 셈이다 옮긴이)

 

고구려는 왜 이때 고조선의 사서를 요약했을까? 사서의 편찬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 때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대륙에 인구 1억이 넘는 역사상 최대의 ()라는 대국(큰 나라 옮긴이)이 등장한(나타난 옮긴이) 직후(바로 뒤 옮긴이).

 

이것은 마치 약 1천년 전 중국 대륙에 전국시대가 끝나고 ()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한 것과 같다. ()의 등장은 (. 정확히는 전한/서한 옮긴이)의 등장에 해당하며, 대륙의 안정된 통일정권의 등장은 주변 민족(겨레 옮긴이)들에게 거대한(커다란 옮긴이) 파도를 몰아와, 그들의 해체와 대 이동을 가져왔다는 것이 필자가 고조선의 해체와 나당(/옮긴이)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보는 기본 시각이다.

 

고구려 제 26(태왕[太王]옮긴이) 영양왕은 새로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을 통일한 ()에 사신을 보낸 직후 새 역사서를 편찬한다. 그것도 고구려사가 아닌 그 이전의 역사서를. 이전의 중국에 등장했던(나타났던 옮긴이) 나라들(서진 왕조나 남조 왕조들이나 516국이나 북조 왕조들 옮긴이)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 제국의 등장은, 인구 약 5백만 정도로 추정되는 고구려인에게 위기의식과 함께 자기 성찰을 강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내부 결속의 해답은 역시 1천년 전 秦漢(진한) 제국과 맞섰던 고조선으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영양왕대의 留記(유기) / 신집 편찬의( 留記(유기) / 신집 을 편찬한 옮긴이 ) 이유( 까닭 옮긴이 )이다. 留記(유기) 는 아마도 고구려 멸망 시 소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통일신라로 망명한 전기 고리 유민들이 유기 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일본으로 달아난 전기 고리 유민들도 유기 를 가지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자는 몽골군이 후기 고리를 침략하기 전까지는 후기 고리 안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후자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일본 왕실 도서관에 있을지도 모른다 옮긴이)

 

김 상,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 38 ~ 39

 

― 『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김 상편저, ‘도서출판 주류성펴냄, 서기 2001)에서

 

단기 4358년 음력 125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