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고구리. 좀 더 정확히는 ‘전기 고리[高麗]’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영양왕 11년 춘정월(봄 [음력] 1월 – 옮긴이), 遣使入隋朝貢 詔大學博士 李文眞 約古史 爲 新集 五券 國初始用文字 時有人記事一百券 名曰留記 至是刪修( 사신을 수나라로 보내 조공했다. [임금이] 대학 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문서를 보내어 ‘옛 역사서들을 간추린 뒤 그것을 『 신집[新集] 』 5권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고구리의] 건국 초기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때에 [어떤] 사람이 [쓴] 기사[記事]가 온[100]권인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 『 유기[留記] 』 라 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 이문진이 『 신집 』 을 편집하면서? - 옮긴이] [그 분량이] 깎이고 [내용이] 고쳐졌다 – 옮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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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초에 이미 있었다는(쓴 것도 아니고) 『 留記(유기) 』 100권은 도대체 어느 나라 역사서인가? 1천년(즈믄 해 – 옮긴이)이나 되는 세 나라의 역사서인 『 삼국사기 』 도 그 절반(가봇 – 옮긴이)밖에 안 된다.
『 史記(사기) 』(사마천)는 어느 나라의 역사서인가? 史記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서가 아니고, 周(주)나라가 봉한 여러 제후국의 흥망성쇠를 거쳐 漢(한. 더 정확히는 전한/서한 – 옮긴이)에 이르는 과정을 적은 역사서이다.
『 유기 』 는 『 史記 』 에 해당하는 우리(배달민족. 그러니까 한국과 조선 공화국 – 옮긴이)의 역사서로, 어느 한 나라의 역사서가 아니라 고조선(아사달 – 옮긴이)과 고조선이 봉한 여러 제후국(거수국 – 옮긴이)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역사서임이 틀림없다.(나도 같은 생각이다. 고구리 이전에 아사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북중국이나 동중국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도 겹치므로, 사기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나, 그 분량으로 보아 1천 년 이상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의 역사서일 것이다(참고로 『 삼국유사 』 에 따르면, 아사달은 “1908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는 『 삼국사기 』 가 다루는 기간인 992년보다 916년은 더 긴 기간이다. 만약 『 유기 』 가 아사달의 역사서라면 삼국보다 916년 더 오래 유지된 나라인 아사달을 다룬 『 유기 』 가 『 삼국사기 』 보다 두 곱절은 더 많은 분량인 100권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 옮긴이).
필자(김상 교수 – 옮긴이)는 고조선의 정통 역사서로 이 『 留記(유기) 』 를 들고 싶다. 짐작이지만 그 편찬 양식도 『 史記(사기) 』 와 같은 기전체(紀傳體)가 아닌가 생각된다.
(덧붙이자면, ‘유기[留記]’의 ‘유[留]’가 ‘변하지 아니하다.’나 ‘오래다.’는 뜻을 지닌 한자이므로, 나는 『 유기 』 는 열국시대 이전에, 그러니까 원[原] 부여가 제국을 세운 해인 서기전 425년에 부여 왕실의 명을 받은 사관들이 쓴 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원 부여 사람들에게 아사달이 세워진 해인 서기전 2333년 – 원 부여가 세워진 해로부터 1908년 전 - 이나 전기 고조선이 망한 서기전 1285년 – 그러니까 원 부여가 세워진 해로부터 860년 전 – 은 ‘오랜 옛날’이고, 그 오래전에 일어난 일들을 적은 역사책에 ‘오래된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유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자연스러우며, 무릇 한 나라나 왕조가 망하면 그 뒤를 이은[또는 그 나라/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망한 나라/왕조의 역사를 적는 것은 갈마[‘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 』 도 삼국이 멸망한 뒤 그 뒤를 이은 ‘후기 고리[高麗] - 왕건이 세운 나라 - ’가 쓴 역사책이고, 『 고려사 』 와 『 고려사절요 』 도 후기 고리가 망한 뒤 그 뒤를 이은 근세조선이 쓴 역사책이었음을 떠올려 보라.
한 마디만 더하자면 원 부여 왕실은 아사달의 갈마와 그 문화와 가치를 보존하고 싶어했으며, 그것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달의 갈마를 담은 책을 쓰면서 그 이름을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담은] 기록’이라는 뜻으로 ‘유기’라고 지은 건 아닌지. 그렇다면 ‘유기’는 ‘오래된 기록’과 ‘변하지 않는 기록’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담은 이중적인 이름인 셈이다 – 옮긴이)
고구려는 왜 이때 고조선의 사서를 요약했을까? 사서의 편찬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 때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대륙에 인구 1억이 넘는 역사상 최대의 隋(수)라는 대국(큰 나라 – 옮긴이)이 등장한(나타난 – 옮긴이) 직후(바로 뒤 – 옮긴이)다.
이것은 마치 약 1천년 전 중국 대륙에 전국시대가 끝나고 秦(진)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한 것과 같다. 唐(당)의 등장은 漢(한. 정확히는 전한/서한 – 옮긴이)의 등장에 해당하며, 대륙의 안정된 통일정권의 등장은 주변 민족(겨레 – 옮긴이)들에게 거대한(커다란 – 옮긴이) 파도를 몰아와, 그들의 해체와 대 이동을 가져왔다는 것이 필자가 고조선의 해체와 나당(신/당 – 옮긴이)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보는 기본 시각이다.
고구려 제 26대 (태왕[太王]인 – 옮긴이) 영양왕은 새로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을 통일한 隋(수)에 사신을 보낸 직후 새 역사서를 편찬한다. 그것도 고구려사가 아닌 그 이전의 역사서를. 이전의 중국에 등장했던(나타났던 – 옮긴이) 나라들(서진 왕조나 남조 왕조들이나 5호 16국이나 북조 왕조들 – 옮긴이)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 제국의 등장은, 인구 약 5백만 정도로 추정되는 고구려인에게 위기의식과 함께 자기 성찰을 강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내부 결속의 해답은 역시 1천년 전 秦漢(진한) 제국과 맞섰던 고조선으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영양왕대의 『 留記(유기) 』 / 『 신집 』 편찬의( 『 留記(유기) 』 / 『 신집 』 을 편찬한 – 옮긴이 ) 이유( 까닭 – 옮긴이 )이다. 『 留記(유기) 』 는 아마도 고구려 멸망 시 소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통일신라’로 망명한 전기 고리 유민들이 『 유기 』 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일본으로 달아난 전기 고리 유민들도 『 유기 』 를 가지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자는 몽골군이 후기 고리를 침략하기 전까지는 후기 고리 안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후자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일본 왕실 도서관에 있을지도 모른다 – 옮긴이)
― 김 상, 『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 38 ~ 39쪽
― 『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김 상’ 편저, ‘도서출판 주류성’ 펴냄, 서기 2001년)에서
― 단기 4358년 음력 1월 25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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