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계사]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개마두리 2025. 3. 3. 22:49

사실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의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 놓은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민족에게 수백 년간 정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명한 인물(사람 옮긴이) 중에도(가운데도 옮긴이) 한족이 아닌 사람들이 숱하다.

 

그 예를 하나 보자.

 

(서기 옮긴이) 5,6세기 중국은 선비/흉노(올바른 발음은 후나’/‘훈누’ - 옮긴이)/([서양 이름 티베트’]족 계통인 겨레 옮긴이)/(중앙아시아의 백인종 옮긴이)/강족(역시 뵈족 계통인 겨레 옮긴이) 5개의 이민족이 16개의 나라를 세우며 명멸(明滅.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함나타났다 사라졌다 함 : 옮긴이)해 간 이른바 516국의 혼란기였다. 오랜 기간 섞여 살게 되자 이민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胡漢. “오랑캐[]와 한족[]” 이민족과 한족 : 옮긴이) 체제라는 독특한 정치/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게다가 통혼이 성행함에 따라 광범한 혼혈이 이루어져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북위 조정의 한화정책이 나온 뒤에도 탁발선비[타브가치]족을 비롯한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유지했고, 북중국의 한족[漢族]’과 유목민족들은 남북조 시대 말기까지 서로 대립하며 상대방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옮긴이).

 

양자강(장강 옮긴이)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의 동진 정권(그리고 그 뒤를 이은 남조 왕조들인 유송[劉宋]/남제[南齊]/[]/[] 옮긴이)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화북(북중국 옮긴이)을 통일한 선비족(정확히는 타브가치[한자로는 탁발선비’]옮긴이)의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하자(밀고 나가자 옮긴이), 북방 요새인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뒷날 수/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은 애초에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의 고유성을 지킬 것을 목적으로 거병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제국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6진 가운데 하나인 무천진(武川鎭)의 군벌 세력들은 북위를 멸망시키고 서위/북주의 정권을 독점하면서 배타적인 기득권 세력을 형성했다. 이 군벌 집단은 선비족인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는 데 반발해서 난을 일으킨 만큼 중국식(한식[漢式] - 옮긴이)으로 바뀌었던 성을 다시 선비족 원래의 성으로 되돌리는 등 강한 호족(胡族. 이민족 옮긴이) 성향을 띠었다. 이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바로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 수문제)과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 당고조)의 할아버지 이호(李浩)’ 등이었다.

 

(이호가 속한 옮긴이)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大野氏)’라는 성을 가진 호족 집안이었다고 한다. 한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북위 효문제(孝文帝) 때 이씨로 성을 고쳤다가 무천진 군벌의 우두머리인 우문태(宇文泰. 성이 우문[宇文]’이고 이름이 []’. ‘우문은 원래 선비족의 한 부[]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우문부 출신인 사람들이 그 말을 자신들의 성씨로도 썼다 옮긴이)로부터 다시 대야씨를 하사받았다. 중국인(‘중화권한족[漢族]’옮긴이)이 자랑하는 수/당 제국의 황제들이 오랑캐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고구리. 좀 더 정확히는 전기 고리옮긴이)를 온 힘을 쏟아 침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때마다 수양제(이름은 양광’ - 옮긴이)/당태종(이세민, 李世民)/당고종(이름은 이치’ - 옮긴이)은 수도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장에 나와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가 친히(몸소 옮긴이)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에서 볼 때 대단히 드문 일로, 유목민들인 호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청의 황제들도 몸소 군사를 이끌고 다른 나라와 싸웠다 옮긴이).

 

(그리고 옮긴이) 당태종은 중국식 군주(임금 옮긴이) 칭호인 천자(天子)’라고만 불리는 것보다 유목민의 군주를 가리키는 칸(可汗[가한 옮긴이])을 덧붙인 천가한(天可汗. “하늘의 칸또는 천자이자 칸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옮긴이)’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당고종이 자기 아버지인 당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라든지, 현종(이름은 이융기’ - 옮긴이)이 자기 아들의 비였던 양옥환(양귀비)을 귀비로 맞은 것 등은 중국적(한족적 옮긴이)인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있을 수 없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몽골족을 비롯한 북아시아의 유목민 사회에서는 남성이 자신을 낳은 친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첩이나 후처,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의붓어머니인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이 합법이었다 옮긴이).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당나라 때에 나왔다는 것도(그리고 그가 무주[武周] 왕조를 세운 사실도 옮긴이) 여권을 존중하는 유목민의 전통이 당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가장 비중국적인 것이다. 이는 유목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서아시아/중앙아시아 옮긴이)과 동아시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제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어서 마치 세계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도 그 중의(그 가운데 옮긴이) 하나였을 것이다. 종교도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옮긴이)의 마니 교, 유럽(사실은 서아시아/중앙아시아 옮긴이)의 네스토리우스 교(정식 명칭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 한자 이름은 경교[景敎]’또는 대진 경교’ - 옮긴이) (그리고 이슬람교 옮긴이) 등이 아무런 규제 없이 수입되었다. 이도 유목민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 현상이었다.

 

(이런 당 왕조의 국제성은 또 다른 유목민족의 제국인 몽골제국의 국제성과도 닮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옮긴이)

 

― 『 상식 밖의 세계사 (‘안효상지음, ‘()새길펴냄, 서기 1993) 에서

 

단기 4358년 음력 24일에, “이제 이른바 “516과 남북조시대의 북조 왕조들과 수/당 왕조는 중화 왕조로 여기지 말아야 하며, 그들의 갈마는 뵈족이나 몽골이나 튀르크의 갈마로 여겨야 한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따져도 수나라 이전의 나라들[516~ 북조 왕조들]은 제하의 갈마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