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배달민족사]/[중세사]중기 고리(高麗)가 5경(京)을 설치한 때

개마두리 2025. 2. 28. 20:21

중기 고리(高麗) : 서기 684년 전기 고리의 유민인 걸걸중상(대중상)이 세운 나라. 흔히 발해라고 불리나, 그것은 제 2 () 왕조가 중기 고리에 멋대로 붙인 이름이고, 그 이전에 쓰였던 이름인 도 무주(武周) 왕조가 중기 고리에 멋대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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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5

 

발해(중기 고리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5(五京. 다섯 서울 - 옮긴이)은 상경(上京), 중경(中京), 동경(東京), 남경(南京), 서경(西京)5개 경을 가리킨다.

 

(중략)

 

5경을 설치한 시기 문제

 

발해가 언제 5경을 설치했는가에 대해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견해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는 제10대 선왕 대인수(宣王 大仁秀) 시기에 5경이 설치되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발해가 51562주의 제도를 제정한 시간은 분명히 제11대왕 대이진(大彝震) 함화 3(咸和 三年, 833)으로부터 함화 5(835)에 이르는 사이라는 주장이다. 셋째는 제13대 왕 대현석(大玄錫) 시기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이다. 넷째는 제3대 문왕 대흠무(文王 大欽茂) 시기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이다. 다섯째는 제6대 강왕 대숭린(康王 大嵩璘) 시기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상의 몇 가지 설 가운데, 5경은 제3대 문왕 대흠무 후기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 있다.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에서 처음으로 5경제(五京制. 한 나라에 다섯 개의 서울을 두는 제도 옮긴이)를 실시한 것은 당나라(더 정확히는, 무주[武周] 왕조가 망한 뒤 다시 세워진 제2 당 왕조 옮긴이)이다. (서기 옮긴이) 618년에 건립되어 (서기 690년 무주[武周]를 세운 무조[武照 : 시호 측천무후’]에게 한 번 망했다가, 서기 705년 무조가 죽고 무주가 망함으로써 다시 세워졌고 옮긴이) (서기 옮긴이) 907년 망할 때까지 290(실제로는 275옮긴이) 동안의 존속 기간 내내 당나라의 수도는 줄곧 장안(長安. 오늘날의 서안[西安]- 옮긴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고조 이연(高祖 李淵)으로부터 제10 대 현종 이융기(玄宗 李隆基)까지의 115년 동안은 5경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현종 보력원년(寶歷元年. 742)에 당나라 조정은 동도 낙양(東都 洛陽[동쪽의 도성인 낙양 옮긴이])과 북도 태원(北都 太原[북쪽의 도성인 태원 옮긴이])을 경(. 서울 옮긴이)으로 삼았다.

 

이때 서울(여기서는 수도’/‘도읍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옮긴이) 장안은 서경西京.[서쪽 서울 옮긴이](경조부라고도 불렀다)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당나라(2 당 왕조 옮긴이)에 지방행정기구로서 3경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그 후(그 뒤 옮긴이) 11대 숙종 이형 지덕 2(肅宗 李亨 至德 二年. 757) 12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은 촉군(蜀郡. 오늘날의 사천[四川] 분지 옮긴이)(성도)을 남경(南京[남쪽 서울 옮긴이]), 봉상(鳳翔)을 서경(서쪽 서울 옮긴이)으로 하고 그때까지 서경(西京)이었던 장안을 새로이 중경(中京)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기존의 동경과 북경까지 합해 5경을 설치한 5경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구당서 지리지 권1봉상부(鳳翔府)를 서경으로 하니 성도(成都. 사천분지와 사천성의 중심지인 도시 옮긴이), 경조(京兆 : 서울/수도. 여기서는 장안성을 일컫는 말이다 옮긴이), 하남(河南), 태원(太原)과 더불어 5경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 220에는 장안은 낙양, 봉상, 촉군, 태원 등의 가운데 위치해(자리하고 옮긴이) 있으므로 중경이라고 하였다.”라고(하고 옮긴이) 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5경제이다.

 

(2 당 왕조는 옮긴이) 그 후 16년이 지난 제12대 대종 이예 보응 원년(代宗 李預 寶應 元年, 762)에는 경조부(京兆府. 원래 부[]관청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도시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를 상도(上都), 하남부(河南府)를 동도(東都), 봉상부를 서도(西都), 강릉부(江陵府)를 남도(南都), 태원부를 북도(北都)로 정하였다. 남도(남경)의 위치가 (성도성에서 강릉부로 옮긴이) 변하긴 했지만 5, 5(五都) 제도의 건립과 완전히 부합되는(들어맞는 옮긴이) 내용이다.

 

발해 5경제의 건립과 실시는 (이러한 옮긴이) 당나라 5경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인 독자 여러분은 나라를 세운 뒤 무주 왕조와 제2 당 왕조와 여러 번 싸웠고, 전기 고리를 무너뜨린 제1 당 왕조와 무주 왕조에 반감을 품은 대[]씨들이 적국인 제2 당 왕조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을 불쾌하게 여길 수 있으나 또는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독립전쟁이나 독립투쟁을 이끈 사람들[또는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세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적국의 문물이나 제도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고, 그것이 자기 나라나 자기 겨레에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예로 유목 기마민족인 힉소스인에게 짓밟혔던 고대 케메트[‘이집트의 첫 이름이자 옛 이름] 사람들은 그 힉소스인에게서 말 다루는 법과 전차 다루는 법을 배워서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전쟁을 일으킨 뒤 힉소스인을 몰아냈고, 로마인들은 이웃이자 적국인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의 우편 제도를 들여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중세 폴스카[영어 이름 폴란드’] 사람들은 몽골군에게 짓밟히고 오스만 튀르크인과 여러 번 싸운 뒤 그들에게서 말 타는 기술과 굽은 도[]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막강한 기마군단을 만들어냈다.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의 침략과 점령과 지배를 겪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도 서양으로부터 독립할 때는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두었고, 서양식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경제를 바탕으로 나라를 꾸려나갔으며, 서양의 정치체제인 공화국을 자신들의 정치체제로 삼았다.

 

대씨들을 비롯한 중기 고리의 지배층들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무주 왕조와 제1/2 당 왕조에 대한 반감 내지는 우월감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 나라들의 법과 제도 가운데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했고, 그래서 자신의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은 자존심이나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버리고 가져다 쓴 게 아닌지.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 중기 고리 정부가 제2 당 왕조의 5경제를 가져다 쓴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옮긴이)

 

문왕 대흠무는 즉위한 지 5년 만에 수도를 구국(舊國. 여기서 []’나라가 아니라 성곽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원래 이라는 한자[동방문자]사방을 담으로 두른 성곽’/‘성곽 하나를 차지한 작은 나라[도시국가]’라는 뜻을 지닌 글자였다. , 나는 중기 고리의 가독부들이 중기 고리의 도읍으로 삼은 성[이자 도시]의 이름이 과연 옛 성이라는 뜻을 지닌 구국이었는지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뜻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성이나 예전부터 있었던 성이 한 두 개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구국에 중기 고리 사람들만이 알던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무주나 제2 당 왕조의 사관들이나 오대[五代]의 사관들이 그것을 쓰지 않고 빼 버린 게 아닌지 의심한다 옮긴이)에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옮겼고, 755년에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또 다른 이름은 홀한성[忽汗城]’ - 옮긴이)로 이주하였으며, 785년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이주하여 9년간 다스리다가 동경용원부에서 사망하였다. 이듬해(서기 786옮긴이) 발해는 수도를 동경(‘동경용원부를 줄인 말 옮긴이)에서 상경(‘상경용천부를 줄인 말 옮긴이)으로 옮겼다.

 

그 뒤 발해는 926년 거란(키타이/키탄 옮긴이)의 침입(침략 옮긴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온 나라 옮긴이)을 통치하였다(다스렸다 옮긴이). 당나라에서 3(三京)을 설치한 742년은 발해 문왕 대흥(大興) 6년에 해당하고, 5경제를 완전히 정비해 실시한 757년은 발해 문왕 대흥 21년에 해당한다. 742년은 발해 문왕이 수도를 중경으로 옮기던 해이고, 757년은 문왕이 수도를 상경에 옮겨 통치하던 때이다.

 

757년부터 문왕은 29년간(스물아홉해 동안 옮긴이) 상경에서 전국을 통치하다가 785년에 수도를 동경으로 옮겨 9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므로 문왕 대흠무는 당나라에서 5경제가 완전히 설치된 후 37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발해의 5경제는 문왕 후기에 당나라의 5경제를 본받아 설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조영은 진국(震國)을 세운 후(사실은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대중상’]진국을 세웠으며, ‘진국조차도 바른 이름이 아니다. 바른 이름은 고리[高麗]’, 그러니까 중기 고리: 옮긴이) 무력으로 정권을 수호하고 영토를 확대하여 (그가 다스린 지역이 옮긴이) 사방 2,000리에 달했다. 그러나 아직 경()을 설치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719년에 고왕 대조영(高王 大祚榮)이 세상을 떠나자 무왕 대무예(武王 大武藝)가 뒤를 이어 (중기 고리의 가독부/대왕에 옮긴이) 즉위하였다.

 

무왕은 고왕의 무치정책(武治政策. 창칼, 그러니까 무력으로 다스리는 정책 옮긴이)[ 고왕의 아버지인 걸걸중상도 무치정책을 밀고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 자신이 전기 고리의 군인 출신이었고, 다른 나라[1 당 왕조/무주 왕조]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일단 한 번 망한 나라[고리]를 다시 세워야 했으며, 창칼로 나라를 세우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랬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옮긴이 ]을 계승하여 무력으로 주변 부족들(실제로는 전기 고리의 유민들이 살던 지역들과 전기 고리의 주변에 살던 민족들의 땅 옮긴이)을 통일하고 영토를 확대하여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흑수말갈(黑水靺鞨. 주션[한자로는 여진女眞’]족의 조상인 고아시아인 옮긴이)의 남하세력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혔던 것과 대문예(大門藝) 사건을 계기로 당나라(2 당 왕조 옮긴이)와 전쟁을 벌였던 것도 모두 대무예 시기이다.

 

무왕 시기에는 영토를 크게 넓히니 동북의 여러 부족들이 두려워 (무왕과 중기 고리에 옮긴이) 복속하였다.”고 할 정도로 세가 넓어졌지만, 수도는 아직 구국에 있었고 5경을 설치할 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738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이어 (새 대왕/가독부에 옮긴이) 즉위하자 정황이 달라졌다. 문왕은 (무주/2 당 왕조가 진국공으로 불렀던 걸걸중상[‘대중상’]옮긴이) 고왕과 무왕이 실시해 오던 무치정책을 버리고 새로이 문치정책(文治政策. 학문과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 옮긴이)을 실시하였다(문왕이 이렇게 방향 전환을 한 까닭은, 무력과 전쟁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순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고, 3대에 걸친 전쟁과 압박 정책과 무력행사가 나라를 한계로 몰고 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옮긴이).

 

그는 (‘진국공옮긴이) 고왕과 무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계속 무력을 강화하여 강역을 넓히는 동시에, 당시의 절박한 사회적 요구에 응해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진행하여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정권 기구를 정비했다.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인 호상래왕(互相來往. 한국식으로는 상호 왕래’. 그러니까 서로 오고 갊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을 강화하고 선진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본국의 실제 정황에 결부시켜 자국의 경제와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국력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당나라는 대종 보응 원년(대흥 26, 762)에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로 승인하고 대흠무를 국왕으로 봉하였다(2 당 왕조가 중기 고리를 독립국가이자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정한 해가 서기 762년이라는 뜻이지, 그 해에 중기 고리가 세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중기 고리는 대흥 26보응 원년 보다 일흔여덟 해 전에 세워졌고, 이미 임금을 네 명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다 : 옮긴이).

 

당나라가 발해국에 대해 국왕의 책봉을 내린 것(오늘날로 치면 국제연합[UN]이 한국의 정권이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 옮긴이)은 대흠무부터이다. 이는 대흠무 시기에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정권 기구가 정비되어 더욱 공고해졌으며 경제와 문화가 발전해서 당나라에서도 마침내 발해의 존재와 작용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왕은 사신과 생도(生徒 : 학생 옮긴이)를 자주 당나라에 파견하여(보내어 옮긴이) 당나라의 선진생산기술과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고 각종 제도를 모방하여 본국의 정황에 결부시켜 실시하였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정체성의 포기종속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중기 고리는 천자국만 쓸 수 있는 연호를 스스로 만들어서 썼고, 천자국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시호 만들기도 꺼리지 않고 했으며, 그 궁궐도 제2 당 왕조의 그것보다 더 칸이 많고 넓게 만들 정도로 당 왕조를 깎아내렸고, 자기 나라의 임금을 황상[皇上]”이라고 불렀고, 이론상 왕이나 황제보다 더 높은 사람인 공손씨 헌원[‘오제(五帝)’ 가운데 하나인 황제(黃帝)’]을 일컫는 명칭인 기하[基下]’로 자신들의 임금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쏘기나 구들이나 온돌처럼 전기 고리 때부터 내려오던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타이[Thai] 왕국이나 아프가니스탄 왕국이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자신들의 주권이나 정체성은 유지하되, 법이나 제도나 행정이나 군사나 정치체제나 군사나 산업이나 공업은 서양의 그것을 열심히, 부지런히베끼고 배운 사실과 비슷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옮긴이).

 

예컨대 대흠무는 즉위한 후 2년이 되는 해에 사신을 당나라 서울 장안에 파견하여 당례(唐禮) , 삼국지(三國志.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 말 명 초의 사람인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 가 아니라, 서기 3세기에 서진[西晉]의 역사가인 진수가 쓴 정사이자 역사책이다 옮긴이) , 진서(晉書. 서진/동진 왕조를 다룬 역사책 옮긴이) , 36국춘추(三十六國春秋) 등을 필사해 오도록 하였다(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세워진 근대 일본 정부가 서양 고전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정책을 펼친 것과 비슷하다 옮긴이).

 

발해 초기에 설치된 정치기구와 관직은 문왕 초기까지 변함없이 실시되었으나, 문왕 중기 이후에 이르면 큰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어, 문왕 대흥 3(739) 일본에 파견한 발해사절단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알기몽(已閼弃蒙)’의 관직은 수령(首領)’이었다. 그 후 문왕 대흥 55년까지 28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발해 사절단 구성원 가운데 수령 관직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대신 행목저주자사, 병서소정개국공, 현토주자사압귀관, 자수대부(紫綏大夫), 정당성좌윤 개국남, 청수대부(靑綏大夫),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 개국남 등의 관직이 보인다. 자사는 주()의 장관이고, 좌윤(左允)은 정당성(正堂省) 산하의 관직이며, 사빈소령(司賓少令)7(七寺) 중에 있는 사빈사의 부직이고, 자수대부는 당나라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해당되며, 청수대부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해당되고, 헌가대부는 조의대부(朝議大夫)에 맞먹는다(‘자수대부청수대부같은 중기 고리에만 있었던 벼슬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2 당 왕조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인 문왕의 정책은 남의 문화를 무작정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것을 재창조하고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바꾸어서 받아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옮긴이). 이상의 관직은 신당서 발해전에 기재된 내용과 일치한다.

 

이는 발해의 중앙정치기구가 대흠무 때에 이르러 상당히 완벽하게 정비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중앙정치기구가 완벽하게 정비된 것으로 보아 지방행정기구로서의 경, , , 현 제도 또한 같은 시기에 비교적 완벽하게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략)

 

이로 보아 문왕 통치기에 발해의 강역이 더욱 넓어지고 정권은 공고해졌으며 경제, 문화가 발전하고 국력이 강화되어 5경제를 실시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 발해전에 “(중기 고리의 옮긴이) 지역은 51562주가 있었다.”고 기재하였다. 발해국지장편 (옮긴이) 저자 김육불(金毓黻)’ 선생의 말에 의하면(따르면 옮긴이) 신당서 에 서술된 발해의 지리, 풍속, 관제 등의 문제들은 장건장(張建章)’이 쓴 발해국기(渤海國記) 의 내용을 인용했다고 한다.

 

장건장은 806년에 태어나 86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833년 당나라 유주부에서 파견되어 발해를 방문했다가 835년에 유주(幽州)로 돌아갔다. 833년부터 835년까지의 2년은 발해 제11대 왕(가독부/대왕 옮긴이) 대이진(大彝震)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장건장은 대이진 성화 3~5(833 ~ 835)의 발해의 사회적 정황을 보고 유주로 돌아가 발해국기 를 서술하였다. 발해의 지역은 51562주가 있었다.’는 그의 서술은 대이진 시기에 경, , 주 등 지방 행정 기구가 완전히 정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5경이 이때 설치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이진 이전 세대에 분명히 5경을 설치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천보 말년(天寶 末年. 755)에 상경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은 구국(舊國)에서 300리로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었다. 정원 때(785 ~ 804)에는 동남쪽인 동경으로 천도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탐(賈耽)’[원문에는 <>’으로 나오나, ‘<>’이 정확하다 옮긴이]이 쓴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에는 현주는 천보년간 왕이 도읍했던 곳이다. 정북(正北. 바로 북쪽 옮긴이)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신당서 에는 상경, 동경으로 천도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고금군국지 에는 도읍, 왕성 등으로 지칭하여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 신당서 를 정리한 사람들인 옮긴이 ) 송나라(북송 왕조 옮긴이) 때의 학자 구양수(歐陽修)’ 등은 당시 기준으로 100여년 전의 발해 행정기구를 알고 있는 사실에 의해 서술하다 보니 상경, 동경으로 천도했다고 표현한 것이고, 가탐은 대흠무가 상경으로 천도한 사실에 의거해 썼기 때문에 현주는 왕이 도읍한 곳이며 그곳에서 정북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王城)[홀한성/상경용천부 옮긴이]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신라 정청군(井泉郡)에서 책성부(柵城府)까지 이르는 데는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만약 가탐이 옛 문서에서 옮긴이) 발해 제3 대 문왕이 785년 동경용원부로 이주한 사실까지 보고 썼다면 책성부라고 하지 않고 동경용원부 혹은 용원부라고 서술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가탐은 당나라 재상이자 지리학자로 736년에 태어나 805년에 죽었다, 736년은 발해 무왕 17, 805년은 발해 강왕 11년에 해당된다.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는 738년에 왕위에 올라 56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794년에 사망하였다. 가탐의 생애(옮긴이) 가운데서 어린 시기와 연로한(늙은 옮긴이) 시기를 제한다면(뺀다면 옮긴이) 주로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와 같은 시대에 생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중기 고리의 문왕과 옮긴이) 동시대를 살아가며 도리기(道里記) 를 썼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도리기 신당서 보다 실용가치가 더 크다고 하겠다.

 

중경은 오늘날의 화룡현 서고성(和龍縣 西古城),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黑龍江省 寧安縣 渤海鎭), 동경은 훈춘시 팔련성(琿春市 八連城)에 해당한다. 문왕이 중경, 상경,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위 문헌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문왕 후기에 서경(西京)과 남경(南京)을 포함한 5경이 발해 경내(境內. 일정한 지역의 안. 여기서는 영토 안 옮긴이)에 설치되었으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까닭 옮긴이)로 발해는 제3대 문왕 대흠무 후기에 5경제를 실시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중기 고리가 왜 제2 당 왕조의 5경제를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추측이 옳다면 그것은 중기 고리의 땅이 넓고 컸기 때문이다 - 중기 고리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했던 제2 당 왕조의 역사서도 중기 고리가 “5천 리나 되는 땅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했다 -.

 

나라의 땅이 넓고 크다는 것은 그것을 다스리거나, 통제하거나,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것은 중기 고리도 마찬가지였고, 중기 고리는 이 때문에 오늘날로 치면 원래의 수도는 따로 두고 세종시 같은 행정 수도들을 만들어서 요충지에 둔 뒤, 그것들로 넓은 땅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제도인 5경제에 주목한 건 아닌지.

 

내가 갈터[‘학교’]의 국사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후기신라도 전기 고리와 남부여의 멸망으로 그리고 신/당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얻은, 삼국시대에 비해 넓고 큰 새 영토들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수도가 하나만 있던 기존의 체제로는 이를 다스리기가 어려워 지방에 작은 서울소경[小京]’들을 만들고 이것들을 지방 곳곳에 두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중기 고리는 후기신라보다 2천리는 더 넓었으므로, 후기신라보다 그런 문제가 더 심각했을 것이며, 따라서 후기신라가 5소경을 두었듯이 온 나라에 다섯 서울’ - [] -을 둠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제2 당 왕조의 5경제도 중기 고리나 후기신라와 마찬가지로 너무 넓고 큰 땅에 한 쪽으로 치우친 수도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간주한다 : 옮긴이)

 

어떤 이들은 요사 지리지 권212대 대이진 때에 이르러 궁궐을 세울 계획을 작성하였으며, 경내에 51562주가 있어 해동성국으로 되었다.”라고(하고 옮긴이) 기재된 내용에 의거하여(내용을 바탕으로 옮긴이) 대이진 시기에 5경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궁궐을 세울 계획을 작성하였다.’는 내용에 주목했기 때문인데, 이 말은 발해가 처음으로 상경성(上京城)을 세울 계획을 작성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상경성의 궁궐을 증설할 계획을 작성하였다는 뜻이다.(이는 서기 475년 백제 문주왕의 웅진” “궁궐 수리가 그 해가 되어서야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 되었다는 뜻인 게 아니라, 서울을 도읍으로 삼았던 한성백제가 옛 도읍을 포기하고 서기 1세기부터 삼한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다른 이름은 곰나루’]으로 천도해서 그곳의 건물들을 수리/증축했다는 뜻인 것과 같다 옮긴이)

 

상경성 내의(안의 옮긴이) 궁궐은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가 중경에 있는 기간에 이미 상경으로 옮길 준비를 마쳐 궁궐과 성을 쌓고 755년에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그 뒤 옮긴이) 대흠무를 상경성을 수도로 정하고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785년에는 동경(東京)으로 이주하여 9년간 통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듬해(794) 발해 대씨 통치 집단(중기 고리의 가독부와 왕족들 옮긴이)은 수도를 다시 상경으로 옮겨 926년 거란의 침략에 의해 망할 때까지 133년간 통치를 유지하였다.

 

755년부터 785년까지의 상경성의 규모와 짜임새는 대략 중경 혹은 동경의 규모와 짜임새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중경과 동경은 내성(內城. 이중으로 쌓은 성 가운데, 안쪽의 성 옮긴이)과 외성(外城. 성 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 옮긴이) 두 개 성으로 구성되고 규모와 짜임새로 비슷하다. 그러므로 중경과 동경을 도읍으로 정하고 통치한 중간 시기의 도읍 자리도 그 전후 도읍 자리인 중경 및 동경과 유사하였을(비슷하였을 옮긴이) 것이다. 때문에 상경성에 대한 증설은 794년 후일 것이다. 경내에 5경이 있었다.’는 말 역시 대이진 시기에 처음으로 5경을 설치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이때 이미 완벽한 지방 행정 정치기구로서의 51562주가 있었다는 뜻이다.

 

방학봉, 발해의 강역과 지리 , 54 ~ 62

 

― 『 발해의 강역과 지리 ( ‘방학봉지음, ‘정토출판펴냄, 서기 2012)에서

 

방학봉 :

 

서기 1930년 간도(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연변대학 역사학부 재학 중이던 서기 1949, 정혜공주묘 발굴현장에서 발굴팀의 일원으로 직접 참가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발해사 연구에 뜻을 세웠다.

 

서기 1952년부터 서기 1998년까지 연변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일했으며, 발해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동북3성 조선족 사학회 부이사장과 한국 고구려연구회 학술자문위원도 맡았으며, 은퇴한 뒤에는 발해사 연구 및 저술에 매진하고 있다(서기 2012년 현재).

 

쓴 책으로는 발해사 연구 , 동북 민족 관계사 , 발해 문화 연구 , 발해 건축 연구 , 발해 성곽 , 발해 주요 교통로 연구 , 발해의 문화 (1)/(2), 발해와 일본의 교류사에 대한 연구 , 발해의 강역과 지리 가 있다.

 

 

단기 4358년 음력 21일에, ‘중기 고리(高麗)에 대해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나아가 모든 나라가 중기 고리를 한국과 조선 공화국(평양)의 갈마로 인정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