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동화

▩작은 물

개마두리 2011. 12. 9. 20:42

 

 

*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채 살고 싶은 모든 분에게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 옮긴이

 

------------------------------------------------------------------------------------------------

 

높은 뫼 바윗골에는 철이 바뀌면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흰구름이 자주 와서 맴돌았고, 바람이 골골이 찾아들어 티끌을 쓸어갔다. 밤에는 별빛이 소록소록 재였고, 아침에는 해 뜬 뒤에까지도 안개가 자욱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번개가 쳤다. 천둥이 울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번갯불이 두 번 세 번 스쳐간 뒤였다. 첩첩이 쌓인 바위틈이 바늘귀만큼 열리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한 점 푸름이 비어져 나왔다.

 

물방울이었다.

 

물방울은 먼동 터오면서 하나 둘 모여 작은 물줄기를 이루었다. 골안개 밑으로 흐르면서 산삼 뿌리를 스쳤다. 사향노루가 딛고 간 발자국을 닦았다.

 

오랜 세월동안 비와 바람에 파여진 돌확이 나타났다. 작은 물은 그곳에서 숨을 돌렸다.

 

바로 건너편에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골짜기에는 한 떼의 물이 모여있었다. 작은 물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물이었다.

 

큰 물이 말을 걸어왔다.

 

“넌 왜 그렇게 작은 길을 가니?”

 

“왜? 이 길이 어때서?”

 

“그 길은 작아서 험한 고생만 하게 돼.”

 

작은 물이 물었다.

 

“네가 가는 길은 편해서 좋니?”

 

“그럼. 계속 넓어지니까. 그렇게 가다보면 강에도 이르고, 바다에도 이를 거 아냐.”

 

“그게 너의 살아가는 뜻이니?”

 

“나한텐 뜻 같은 건 없어. 그냥 많은 친구들이 가는 데로 따라갈 뿐이야. 그러다가 한 세상 마치는 거지, 뭐.”

 

작은 물이 말하였다.

 

“나한테는 작지만 소중한 뜻이 있어. 이 길이 작고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끝가는 데까지 가볼테야.”

 

작은 물은 길을 떠났다.

 

길은 가파른 돌벼랑으로 이어졌다. 숨이 차고 발이 아팠다. 그러나 쉬어갈 만한 틈이 없었다. 그치지 않고 흘러가야만 했다. … 그러나 작은 물의 몸만큼은 큰 물과 견줄 수 없을 만큼 맑았다. 먼지 하나 끼지 않았고, 이끼 한 올 슬지 않았다.

 

작은 물 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작은 물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래는 작은 소(沼)였다. 소에서 나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큰 물과 합쳐지는 넓은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숲속으로 간신히 열린 좁은 길이었다.

 

큰 물은 아래편 여울에서 손짓을 했다.

 

“고생하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길로 갔다가 다시 이쪽 길로 돌아올 수 있어?”

 

“그렇게는 되지 못해. 한번 합치면 그만이야.”

 

작은 물은 말하였다.

 

“그럼 나는 나의 좁은 길을 가겠어. 내 몸이 하난데 왜 두 길을 넘보겠어?”

 

좁은 길로 들어선 작은 물은 한참동안 숲속으로 흘렀다. 전나무들이 뒤덮인 산모퉁이에 이르면서 힘이 다했음을 느꼈다. 몇 구비를 지나면서 드디어 움푹 패어진 바닥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이제 나는 풀잎 하나를 밀어낼 힘까지도 모두 써버렸어. 비록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의 길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왔어.”

 

작은 물은 눈을 감았다.

 

이튿날, 눈을 떠본 작은 물은 깜짝 놀랐다. 나무와 풀꽃들이 작은 물을 빙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흰 구름이 가슴 위에서 맴돌고 있었고 눈 맑은 노루가 목을 축이고 있었다. 작은 물은 바위종다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

 

― 고(故) 정채봉 선생의 책『멀리가는 향기』(「생각하는 동화」①권)에서

 

------------------------------------------------------------------------------------------------

 

▶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낱말들

 

*철 : 계절

 

*골골이 : 골 ; 골샅샅 - 이[-삳싸치].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재이다 : 재;다(쟁이다. 여러 개를 차곡차곡 포개어 쌓다)의 타동사형. 여러 번 포개지고 쌓이다.

 

*바늘귀 : 실을 꿸 수 있도록 바늘 머리에 뚫어 놓은 구멍.

 

*골안개 : 새벽에 골짜기나 들 같은 곳에 뽀얗게 끼는 안개.

 

*돌확 : 돌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확(:절구처럼 생긴 물건). 이 글에서는 돌에서 오목하게 파여진 부분을 말한다.

 

*소(沼) : 땅바닥이 움푹 꺼지고 물이 깊은 곳. 늪.

 

*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

 

*바위종다리 : 새 이름.

 

'현대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사꾼과 왕  (0) 2015.08.02
▷◁낙타 떼  (0) 2015.08.02
▷◁부끄러움  (0) 2015.08.02
▩현대인  (0) 2012.01.13
▩노예  (0) 201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