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사자와 토끼

개마두리 2012. 3. 31. 15:41

 

먹을 것이 많고 쾌적한 계곡에 여러 짐승들이 살았는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사납고 덩치 큰 사자가 그것이었다. 놈이 날마다 산에서 내려와 노리고 있다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사냥한 짐승을 머리에서 꼬리까지 먹어치우는 바람에 계곡은 말 그대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이윽고 짐승들이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온종일 토론한 끝에, 한 가지 제안을 사자에게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이 사자에게 제안했다.

 

“저희들이 날마다 신선한 먹이를 잡수시도록 진상해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사자가 물었다.

 

“무슨 꿍꿍이속이냐?”

 

“꿍꿍이속이라니요? 그런 것 없습니다. 다만 저희가 날마다 먹이를 대어드릴 터이니 산에서 내려와 우리를 사냥하시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쓸데없이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고 대왕님은 늘 배불리 드실 수 있고 게다가 사냥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너희들이 약속을 지키기만 한다면야,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날마다 틀림없이 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대왕님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사자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 같구나. 지금 이 체제에서는 나처럼 위대한 사자도 자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얼마쯤 수고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든.”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 값도 치르지 않고 신(神)을 의존하여 목숨을 이어간다는 신성한 법도 있잖습니까?”

 

사자가 한참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음, 좋다. 그렇게 하자. 하지만 날마다 약속대로 기름지고 맛있는 먹이를 내게 바쳐야 한다.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전보다 사정이 더 고약해질 것이다.”

 

그래서 짐승들은 날마다 제비를 뽑았다. 제비를 뽑은 짐승은 다른 짐승들이 안심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을 사자에게 희생 제물로 내주어야 했다.

 

하루는 토끼가 뽑혔다.

 

그런데 토끼는 사자 있는 데로 가는 대신 자기 굴에 남아서 울어댔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노릇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짐승들이 겁에 질려 달려왔다.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거냐?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제도니 지켜야 해. 어서 일어나 사자한테로 가라고! 빨리!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토끼가 말했다.

 

“여러분, 내게 생각이 있어요. 그 생각대로 된다면 나도 죽지 않고 살 뿐 아니라 여러분과 여러분 자식들도 모두 사자 밥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겁에 질린 짐승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넌 토끼야. 영리한 척하는 나귀처럼 굴지 말라고! 어서 가. 안 그러면, 사자가 우리 모두를 다시 사냥할 테니까.”

 

토끼가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내 생각대로 될 거요.”

 

짐승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어디, 그 계획이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아니야. 그럴 것 없어. 어서 저 녀석을 사자 굴로 쫓아 버리자.”

 

그러나 떠들던 짐승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느새 토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토끼는 사자 굴에 이르러 사자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었다.

 

“왜 이렇게 먹이가 안 오는 거야? 놈들이 나를 속인 게 틀림없어.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를 속이다니! 어디,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조금 더 듣고 있던 토끼가 징징 울며 사자 앞으로 기어갔다.

 

사자가 토끼를 보고 말했다.

 

“아하, 너냐? 어쩌자고 감히 백수의 왕인 나를 기다리게 한단 말이냐? 게다가, 기다린 밥이 겨우 주먹만한 토끼 한 마리라고?”

 

토끼가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제가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내가 너 따위 하찮은 짐승의 변명이나 들어줄 멍청이인줄 알았느냐? 그리고 너같이 한 주먹도 되지 않을 말라깽이를 먹고 온종일 견디라고?”

 

토끼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아,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제가 길을 떠날 때에는 저와 제 아우 둘이었어요. 토끼 한 마리로 대왕님 배를 채워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렇다면 그 한 마리가 지금 어디 있느냐?”

 

“그런데, 그만 다른 사자에게 하나를 잃었답니다.”

 

“다른 사자라니? 그런 놈이 있단 말이냐?”

 

“글세, 그걸 제가 대왕님께 여쭙고 싶은 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대왕님이 잘 아실 테니까요.”

 

“난 그런 놈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분명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다고요? 그가 갑자기 달려들어 우리 둘을 사로잡았지요. 제가 그에게, 우리는 이 숲을 다스리는 사자 대왕님의 종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그렇지. 말은 바로 했다. 그러니까 그자가 뭐라고 하더냐?”

 

“아아, 용서하십시오. 그가 웃더군요.”

 

“뭐라?”

 

“그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 사자 대왕 좋아한다! 어떤 늙어빠진 사자 한 마리가 있겠지. 더는 그놈 말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라. 자, 우선 너를 아침 요기로 삼고 네 아우는 점심에 먹어야겠다.’”

 

그러자 사자는 화가 나서 꼭지가 돌 지경이 되었다. 토끼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그에게 사정을 했습지요. 제발 나를 아침 식사로 먹기 전에 한 번만 사자 대왕님을 뵙게 해달라고. 사자 대왕님께 당신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리게 해달라고. 그러자 그가 ‘좋다. 가서 대왕인지 뭔지를 만나보아라. 하지만 네가 돌아올 때까지 네 아우를 인질로 잡아둬야겠다.’ 제가 그러겠다고 하고서 여기 이렇게 혼자 온 것입니다.”

 

사자가 정수리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으르렁거렸다.

 

“내 이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테다! 그자가 어디 있느냐? 당장 나를 그에게로 안내하여라.”

 

그리하여 토끼가 앞장서고, 몇 달 동안 먹기만 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 살이 뒤룩뒤룩 찐 사자가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은 커다란 웅덩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때 갑자기 토끼가 뒷걸음질을 쳤다.

 

“왜 그러느냐? 어째서 뒷걸음질을 치는 거야?”

 

토끼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바로 저기예요. 그가 저기 있습니다. 그를 다시 본다는 생각만 해도 겁이 나서 죽겠어요.”

 

“너희들의 대왕인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무엇을 겁낸단 말이냐? 나를 믿고 잠시만 기다려라. 네가 말하는 그 다른 사자는 오늘이 제삿날이다.”

 

“제발 그렇게만 해주십시오. 우리가 저리로 내려갈 때 대왕님께서 제 곁에 계셔주신다면 안심이 되겠습니다.”

 

토끼와 사자가 함께 웅덩이로 내려갔다.

 

그러자 바로 거기 물속에 다른 사자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보십시오, 저기, 저 사자만 아니었으면 저와 함께 대왕님의 아침밥이 되었을 제 아우도 저기 있네요.”

 

사자가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아래에서도 다른 사자가 똑같이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렸다. 사자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저쪽 사자도 그렇게 했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사자 몸이 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그의 끝장이었다.

 

숨어있던 짐승들이 뛰쳐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원수 사자로부터 자기들을 구해준 토끼를 칭송하였다.

 

― 루미의 우화

 

― 출처 :『루미의 우화 모음집』(루미 지음, 아서 숄리 엮음, 이현주 옮김, 아침이슬 펴냄, 서기 2010년. 원제『마드나위』)

 

* 루미 : 중세 이란의 시인이자 수피(Sufi). 서기 1207년에 태어나 서기 127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은 이슬람 신비주의와 시 문학은 물론 중세 문학과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오늘날 ‘신비주의의『성서』’나 ‘페르시아어로 된『꾸란』’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유네스코는 서기 2007년을 ‘세계 루미의 해’로 지정하였고(그가 태어난 지 800년이 되는 해다), 그의 작품은 이슬람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영역본(英譯本. 영어로 옮긴 책)을 가지고 있다(유럽과 미국에서 그의 이름을 딴 재단이 100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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